색 바랜 물억새 열병을 받아
이월 끝자락으로 초순 입춘에 이어 중순에는 우수가 지났다. 두 절기를 보내면서 소한 대한보다 더한 한파가 한동안 지속되던 추위는 물러가는 듯하다. 어제는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상회해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삼월을 맞는 이번 주말엔 전국적으로 강수 현상이 있고 기온은 다시 내려간다는 예보를 접했다. 봄은 해마다 널뛰기 기온으로 출렁이면서 왔음은 경험칙이다.
목요일 아침은 창원역 앞으로 나가 2번 마을버스를 타고 근교 들녘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이용한 1번 마을버스와 가술까지는 운행 구간이 겹쳐 창밖 풍경은 눈에 익숙했다. 주남저수지를 지나면서 승객은 줄어 운전석 곁의 한 소년과 같이 가다가 내렸다. 기사 양반이 전하기로는 아까 초등학생은 부모가 직장을 나가고 혼자 마을버스로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는 기특한 아이라고 했다.
가술 거리를 지나면서 국도변에는 봄 방학에 든 초등학교가 보였다. 신학기를 맞으면 풋풋한 아이들의 화사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번 봄에도 내게 부여된 아동안전지킴이 역을 수행하기 위해 매일 오후 둘러봐야 할 구역이기도 했다. 차창 밖 거리 풍경을 눈여겨 확인하고 들길을 달려 북부리에서는 동부마을 언덕 팽나무가 보였다. 들녘 비닐하우스는 당근 싹이 파릇하게 자랐다.
나는 유등 종점에 내리고 기사는 운행 시각에 맞추려고 시동을 끄고 대기했다. 배수장으로 올라서니 수산에 흘러오는 강물이 유장하게 흘렀다. 강 건너편은 하남 명례로 오토캠핑장과 전주 이씨 낙주재가 보였다. 강둑 따라 걸으면서 승마장에서 가까운 묵정밭으로 내려가 봤다. 지난해 가을 무와 배추를 심은 이랑에 자란 냉이를 살피니 개체수가 현저히 줄었고 잎사귀는 야위었다.
강둑으로 되돌아와 둑 너머 둔치로 개설된 자전거 길을 따라 걸었다. 4대강 사업 때 강둑으로 자전거 길을 내면서 드넓은 둔치에도 자전거 길이 생겼다. 둔치 식생은 우열을 다투면서 생태계가 안정되어 간다. 4대강 사업 이후 초기는 달맞이꽃과 비수리가 무성하더니 근년에 와서 귀화식물 여러해살이 금계국이 우점종으로 늦은 봄과 초여름 꽃이 피면 온통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겨울을 건너온 둔치에서 가장 압도적인 식생은 물억새였다. 갈대는 강 언저리를 따라가며 붙어 자라고 물억새는 평원이 연상되는 둔치 전면을 덮다시피 무성했다. 초여름에 묵은 그루터기에서 시퍼런 잎이 돋아나 세대교체를 해서 가을까지 무성하다 은빛 이삭을 내밀었다. 겨울을 넘기면서 강바람에 물억새는 서로 몸을 비벼 점차 야위어 날씬해졌다. 색도 바래 갈색으로 바뀌었다.
색이 바랜 물억새의 열병을 받으며 걸으니 고라니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녀석이 사라진 검불에 몸을 숨겼던 장끼가 놀라 푸드덕 날았다. 거리가 제법 떨어진 구역에는 흰 말을 탄 사내가 끄덕끄덕 지나갔다. 승마장 주인이 조련을 나왔는지 레저로 승마를 즐기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저만치 거리를 둔 파크골프장은 동호인과 그들이 타고 온 차량이 그득했다.
술뫼 동산에서 흘러온 샛강을 지나자 화포천이 흘러온 곳은 거대한 배수장이 보였다. 모정에서 터널을 통과한 철길은 삼랑진으로 철교가 놓여 강심을 가로질러 건넜다.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뒷기미나루’가 아득했다. 둔치에서 강둑으로 올라 지나온 둔치를 되돌아보니 꽤 긴 동선이었다. 둑길을 걸으니 눈앞에는 배수장이 나타나고 신촌마을에서 들녘으로 들었다.
비닐하우스에는 딸기를 한창 따는 때였다. 다른 단지에는 토마토를 수확해 포장 중이었다. 지난번 지나칠 때 젊은 주인 아낙이 방울토마토를 한 줌 안겨주어 잘 먹었던 기억이 났다. 작업실에는 총각급 주인장이 토마토를 상자 포장 작업에 열중했다. 나는 손에 들 수 있을 만치 양을 샀더니 정품에 밀려난 하품은 그저 가져가십사고 해 한 봉지 채워 배낭에 넣어 한림정역으로 향했다. 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