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때 간첩단 사건의 주범이었지?
어제 이른 아침이었다. <과거사 진실화해위>의 서조사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때 그 양식 주방방 아직 못 찾았지요?“
”예, 이리저리 찾으면서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선생님 혹시, 2016년 6월 순창도서관에서 만난 안기부 취조관의 친구를 알 수 있을까요?“
”찾아보겠습니다.“
그때 강연을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촬영한 뒤 순창지역의 회원, 서신일, 산골바람 등과
담소를 나눌 때, 나에게 다가왔던 그 사람,
책이 발간된 뒤 산골바람 김향선씨가 ‘찾아보면 찾을 수 있겠다’는 얘기가 생각나 연락을 취했고,
행사를 담당했던 징교철 선생에게 그 때 그 사진을 구해달라고 연락했는데,
한 시간도 안 되어 연락이 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전화했더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전소설 <지옥에서 보낸 7일> 북토크에 왔던 전주지방법원 오재성 원장이
2022년 12월 9일까지 과거사위원회에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민주화나 간첩단 사건)을
접수받으니 신청하라고 자꾸 권해서 내가 왜, 간첩사건의 주모자로 끌려갔는지, 자초지종이나 알겠다고
올린 사건이 이제야 실마리가 풀리는구나,
“신정일 선생님 젊은 시절에 중정(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셨던 적이 있지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이 사람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예? 그런데, 어떻게 저를 아세요?”
“그때 선생님을 취조했던 취조관 중의 한 사람이 제 친구였습니다.”
“그래요?”
내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사라졌던 그 기억들이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듯 떠오르며 여러 명의 취조관들의 얼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맨 처음 찾아왔고, 내 뒤를 8개월 동안이나 추적했다던 그 사람?’
‘아니면 나를 고문했던 사람 중에 네 사람 중의 한 사람?’
‘아니면 나를 취조하고 커피도 주면서 문학의 동향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자술서를 썼던 그 사람?’
내가 기억의 실타래를 안간힘을 다해 풀어가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친구는 성격이 여렸지요. 그래서 가끔 선생님 얘기를 나누곤 했지요. 이름이 특이하잖아요. 북한에 있는 정일이, 남한의 정일이.”
아하, 그제야 생각이 났다. 나에게 가장 친절했고, 커피도 주면서 문학의 동향을 이야기했던 그 사람?
마지막 자술서를 쓰고서, “힘들었지요, 이곳에 왔던 것을 ‘영광의 한시절’이라고 여길 날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던, 그 사람이 이분의 친구였구나. 그는 나에게 물었었다
“왜? 김일성이 아들인 김정일과 같이 정일이란 예명을 쓰고 있소?”
나는 그 이름을 열여섯에 스스로 지어서 쓰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이름이 수상쩍다고 여러 번 묻고 또 물었었다.
이름 때문에 겪은 고초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시인의 글을 보자.
“민주화 열기가 한창일 때, 그리고 신정일이 ’황토현문화연구회‘를 만들어 문화행사를 전국적으로 확산해서 ‘여름시인학교’를 열어 그 이름을 떨칠 때였다.
안기부에서 직원이 두 사람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런, 저런 말을 묻던 중에 신정일의 이름이 가명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정일’이라는 이름을 강조했다. 아하, 그때 서야 북쪽의 그 누구를 생각했다.”
그렇다. 어렵고도 쉬운 내 이름, 내 나이 열여섯에 궁여지책으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새롭게 살기 위해 지은 이름 신정일(辛正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성씨인 신라면 신(辛) 씨, 쓰고도 매운 성씨에, 바를 정(正)자, 한 일(一) 자라는 이름이 오늘, 이런 만남을 미리 예정 지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곳 안기부에서 우연처럼 필연처럼 만났던 그들은 그들의 직업을 대체로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안기부나 국정원 다닌다고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 열차를 기다리던 대전역 광장에서 서너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
“옛날 이 일대에 창녀들이 많았지, 시내버스에 차장들도 있었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하고 있네.”
“그런데 그 많던 창녀나, 시내버스 차장들은 어디서 뭐하고 살아갈까? 그런 일을 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으니.”
“이 사람아. 설령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을 만나서 물어봐라,
내가 ‘창녀’ 했다고, ‘시내버스 차장’ 했다고 말하는 여자 봤나?
예로부터 밝히기 싫거나 부끄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 또는 떳떳하지 않고, 부정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대체로 그들의 직업이나 과거를 밝히지 않는다.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志向한다>는 슬로건을 내 걸고 불철주야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직업을 죽는 날까지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아주 특수한 일이다.
내가 그때 안기부에서 풀려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이름 없는 촌부나 범부로 살았으면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1990년대 초부터 방송이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나를 기억해내곤 사람들에게 나와의 인연을 애기하다가 보니 오늘 같은 우연한 만남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분 건강하세요?”
“예 건강합니다.”
“어디 사세요?”
“아, 내가 그것 까지 말해줄 수는 없고요, 가까운 데에서 잘 살고 있어요,"
“내가 부질없는 것을 물었구나.”
내가 그곳에 있을 때 그곳이 어딘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몰랐다.
훗날, 어느 날 그곳을 가던 길에 누군가가 그곳을 얘기했고, 그때야 생각이 났다.
“여기가 어디지?”
“그곳이 맞았던가?”
안기부, 그렇다. 나는 그 순간, 오래전, 그러니까 1981년 늦여름인 8월 말, 그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조금 전 일처럼 떠올랐고, 그때 그 시절이 한순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린왕자>의 작가인 생텍쥐페리가 언젠가 “나는 내 시대를 증오한다.”고 말한 것처럼 내가 겪었던 그 시절이,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그때 그 기억이 그 순간 느닷없이 싸늘한 바람이 스치고 다가오듯 내 영혼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보들레르가 <우울>이라는 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그랬다. 추억도 아닌 추억, 절망도 아닌 절망, 그런 날들을 살았었는데 어떻게 그 시절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지?
<지옥에서 보낸 7일) 본문 중에서
밤새 옛 기억들이 떠올라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지금, 지금 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왜 지나간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만큼 그 사건이 내 인생을 좌우했기 때문인가?
밀려오는 생각을 떨구고 고창으로 가는 짐이나 싸자,
2023녀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