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해마다 사순 시기의 재계로 파스카 성사를 준비하게 하시니
저희가 그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와 아첨을 구분하는 법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총 사망자가 200여명에 이릅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 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와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있었습니다.
이 화재는 카페에서 사용하던 프로판가스 통에서 누출된 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화재 발생 당시 호텔 내부에서는 안전 규정을 위반하여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쿨러 등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재 발생 직후 호텔 내부로 연기와 불길이 빠르게 번져, 숙박 고객들은 탈출이 어렵게 되었고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의 문제는 불 자체라기보다는 부실 공사 등으로 속이려 하는 자들의 아첨과 아부에 속아 넘어간 호텔 책임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접대에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감사이지 아첨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도 예배가 아닌 아첨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아첨이었고 세리의 기도는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훨씬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는 듯 합니다.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는 것에 감사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기도도 주님 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무언가 되는 존재처럼 여기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기도도 있습니다. 나를 죽여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찬미가 진정한 감사요 예배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정형돈 씨에게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진짜 잘 들어야 돼요. 길어! 마흔에 고혈압으로 크게 한 번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3년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거든요? 그 중간 중간에 쓸개, 자궁, 맹장을 떼 냅니다. 이거 잘 생각을 하셔야 해요. 50대부터는 당뇨, 고혈압으로 고생하시고 60대에는 심근 경색으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60 중반부터는 인공 관절이라든지 관절쪽으로 수술을 많이 하시고. 70대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십니다. 이것을 다 견디실 수 있으시다면 ... 또 ... 저를 낳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예배요 찬양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 아니면 구원은 물론이요,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 뱀 같은 자아를 당신 피로 죽여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렇게 나의 압제로부터 나를 이기시고 구해주신 분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모세로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당신 피 흘리심으로 구해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께 도움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주님을 예배합시다.
https://youtu.be/ngEIFLW8ZjQ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신념은 실천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지 말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주얼 D. 테일러).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