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들은 한 교양 강의는 '독화살을 맞은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치료를 받는 삼국지의 한 장면'을 예화로 바둑 이야기를 한다. 바둑을 두는 관우의 팔을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고 독이 스민 뼈를 칼끝으로 박박 긁어낸 후 약을 바르고 다시 꿰맸다는 얘기다. 물론, 아무런 마취제도 쓰지 않았고, 몸을 묶지 않았음에도 천신 같은 관우의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이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몸서리 치는 일이니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 부르는 이 소설은 『삼국지연의』이니 15세기에 나관중이 쓴 것이다. 이는 중국의 정사『삼국지』를 모태로 소설화한 것이라 사실적 바탕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은 역시 소설이다. 더욱이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만든 신화가 만연하고, 종교가 민중에 대한 절대적인 통치수단이던ㅡ하긴 회교국가에서는 지금도 여전하다ㅡ 시대의 얘기니 각색과 과장이 없지 않으리라. 관우란 사람이 신의와 충의 그리고 무술이 남다른 천신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의원 화타가 당대 제1의 명의라고 말하려 함이겠지만, 한편은 바둑이 그를 몰입케 함으로써 극심한 통증이 따르는 치료를 의연하게 견딜 수 있었다는 바둑찬양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읽고 알았지만, 바둑을 전혀 모르는 그저 관우의 태도에 감동하여 세상의 모든 남자 같이 관우를 흠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때까지 나는 바둑을 전혀 몰랐었다. 바둑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이런 것은 형이 없는 내게는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련만, 아버지는 마작만 좋아하실 뿐 바둑 장기에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운동이나 잡기에 능하지 못한 나의 맹한 성품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바둑을 배울 기회는 스스로 찾아왔다.
"너 바둑 둘 줄 아냐?"
"전혀 모르는데? 만져 본 적도 없어"
"바둑은 참 좋은 거야. 내가 가르쳐 줄까?"
그때는 취업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때인지라, 무료하기도 하니 서울서 내려 온 친구의 제안이 반가웠다. 그는 다음 날 노란색 접이식 바둑판과 바둑알 두 통을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한참을 지나서야 뻥이란 걸 알았지만, 그는 중학생 때부터 배웠고 이미 6급 이상이라며 자랑이 대단했었다. 6급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도 모르면서 난 이미 훌륭한 실력을 갖춘 친구가 마냥 부러웠다. 이후 그로부터 몇 주일간 열심히 배웠다. 돌을 손으로 잡는 방법부터 규칙이며 아생연후살타 같은 격언을 포함해서 여러 요령도 배웠다. 그 친구는 어디서 배웠는지 바둑 두는 사람들의 예의는 물론, 바둑으로 얻는 교훈도 가르쳐 주었다. 우리나라에 조남철9단이란 분이 있다는 것도 그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본시 둔재인지 아니면 그의 지도법이 신통치 않았던지, 전혀 진도가 나가질 않아 결국 두어 주일 만에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우연히 친척 형으로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는데, 역시 별 진전이 없어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러니 내가 바둑에 재능이 없음이 틀림없나 보다. 하긴 잡기에 능하지 못한 것은 이것만도 아니다. 그 흔한 화투나 포커도 그렇다. 내 돈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친구들이 놀리기도 한다. 남의 돈을 따는 것은 언감생심 당치도 않은 일이니 얇은 주머니를 보전하려면 차라리 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체력은 물론 재치가 절대로 필요한 놀이나 운동 또한 그렇다. 하다못해 어린 날의 운동회에서도 남보다 잘한 기억은 별로 없다. 지천명을 넘어 시도한 일이지만, 골프조차도 제법 많은 돈을 내고 배우다 젊은 선생한테 꾸지람만 자꾸 들으니 흥미를 잃고 말았다. 젊은 시절에는 탁구며 테니스를 배우려고 열심히 따라다닌 적도 있지만 이 역시 성과가 없긴 마찬가지다.
잡기가 아닌 것에 능한 경우가 아주 조금은 있지만, 이마저도 뚜렷하지 못하니 사실 난 참 한심할 정도로 잘하는 게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나름대로 공부시키고 혼인시키고도 집칸이나 남았고, 때때로 글줄이나 쓰니 좋기는 하다만 스스로 송구한 마음도 종종 든다.
어쨌든지 한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십 몇 급 완전초보 수준이며 인터넷 바둑조차 두지 않는 내가 바둑 티브이를 즐겨보고 있음은 아이러니하다. 골프장 한 번 못 가본 골프 문외한이건만, 골프 티브이나 당구게임 중계방송의 애청자임과도 비슷하다. 이것은 아마 그들의 탁월한 실력을 감히 따를 수는 없지만, 무한히 동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참에 바둑 얘기나 한번 해 볼까. ‘한국 바둑의 아버지’라 하는 조남철 9단. 프로기사 제도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는 등 한국 바둑의 튼튼한 기초를 세운 분이다. 그분의 경기장면은 사진 외에는 본 적이 없다. 티브이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관심 때문이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어설픈 한국인 조치훈 9단의 대국 모습은 가끔 보았다. 본격적인 애청자가 된 것은 대국 때마다 재떨이에 꽁초를 가득 쌓아 놓던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부터다.
조훈현 9단은 얼핏 깊이 생각하지 않고 중얼중얼하며 시원시원하게 두는 듯하지만, 사실 제갈공명, 을지문덕, 양만춘 그리고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지략가라는 것을 해설을 통해 깨닫는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이란 바둑 교훈도 그때 들어보았다. 바둑이 장기나 체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작게는 위기오득(圍棋五得)의 정신수양을 함이요, 넓게는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지략경기임도 깨닫는다.
그런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던 조훈현9단은 바둑천재요, 제자인 이창호9단을 당하지 못하고 권좌에서 쓸쓸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반안반구(半眼半口)에 돌부처라 했던가. 좀체 표정 변화가 없는 이창호9단이 주름잡는 바둑 세계를 즐겨 보았지만, 영웅이 영원할 수 없듯이 어느덧 그도 혜성 같이 나타난 여리고 쉰 목소리의 섬마을 소년 이세돌9단에게 왕좌를 내주더니, 이젠 우승은 고사하고 주요 대회의 대진표에서 이름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어김없는 화무십일홍이다. 기존 챔피언들의 판단력과 전략구사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신예 기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니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편 한·중·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저변이 없음을 아쉬워하지만, 인구가 수십 배에 이르는 종주국 중국과 대등한 실력을 갖춘 한국바둑의 대견함과 이제 십 몇 세의 어린 기사들의 활발한 활동에 찬사를 보내며 더욱 티브이 앞으로 다가간다.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세계무대를 석권하다시피 한 것같이 기특하기 짝이 없고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다만 이상한 것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렇게 오래 바둑티브이를 즐겨 본 나는 여전히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니 아쉽기 짝이 없다.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막상 실전에서는 전혀 엉뚱한 짓을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눈으로만 두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지가 제법 오래다. 이건 골프방송을 늘 보지만 골프채 하나 잡기 싫음과 일반이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경기력 향상보다는 인문학적 가르침에만 귀가 번쩍하니 나는 본시부터 하수를 벗어나진 못할 모양이다.
(2017.5.26.)
첫댓글 다 잘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든 재미를 느껴야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재미가 흥미를 흥미가 결과를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비우신 마음 건강으로 채우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정답입니다.^^
고맙습니다.
평안한 연말연시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도 바둑을 접한 것은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초보입니다. 그게 참 어렵기는 어려운가봅니다.
선생님도 저와 비슷하시군요.^^
프로기사 그중에도 어린 기사들의 대전을 보고 있노라면 경탄스럽습니다.
평안한 연말연시가 되시길 비랍니다.
바둑 이야기 하시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어른들 한테서 배워지만 나중엔 두지 않아 잘 모르게 되었답니다.
선생님도 잘 두시지 않는군요.^^
잡기에 능하지 못한 저에게는 퍽 어렵더군요.^^
평안한 연말연시 맞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바둑은 아예 근처도 안 갔느니 잘 모르고 글쓰기는 좀 되었는데 아무리 시집을 읽어도
초보 수준을 벗어 나질 못하니 이대로 끝날것 같아 걱정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 안 되신다면 할수 없지요. 어쩌겠습니까.
젊은 날 훈련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행전 선생님 같이 탁월한 재능을 타고나시던지요 ^^
저는 이도저도 아니니 그냥 살렵니다.
평안한 연말연시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