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363548571
조창호 중위(1930~2006)
1951년 포로로 잡혀 무려 43년만인 1994년 탈북해 복귀한 인물이다.
조창호 중위의 일생을 알아보자.
<임관 과정>
조창호 중위는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1936년 서울로 이주했다.
조부 조익순이 평양에서 병원을 운영했고, 1930년대 재산이 백만원이었다.
(당시 기와집 1채가 천원이었다. 엄청난 부잣집이다.)
연희대학교(現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 10월 자원입대했다.
(네 번째 줄에 있는 이름이 조창호 중위다.)
당시로썬 극소수 엘리트인 대학생이었기에 일반 사병이 아닌 갑종장교로 편성됐고, 포병간부후보생 13기로 교육받았다.
이후 1951년 4월 101포병대대 관측장교로 임관했다.
<북한 억류>
그러나 불과 1개월만에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의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혔던 전투가 한석산전투(5월 7일~10일)인지, 현리전투(5월 16일~22일)인지 매체마다 다르게 서술한다.
귀환 후 인터뷰에 따르면 통신병과 둘이서 관측 중인데 본대가 후퇴해서 고립됐고, 사흘간 산속을 헤매다 잡혔다고 한다.
이 묘사는 국군이 체계 없이 와해됐던 현리전투 당시 상황에 가깝다.
1952년 6월, 중공군 포로에서 조선인민군 의용군으로 인계됐지만, 탈출 계획이 발각돼 12년 6개월간 여러 수용소를 돌았다.
수용소를 나온 후에도 13년간 자강도 자성 구리광산에서 노역을 하다가 규폐증(폐에 먼지가 쌓이는 질환. 광부의 직업병) 진단을 받고 중강진으로 옮겨졌다.
<기적적으로 전달된 편지>
중강진에서는 북-중 국경을 오가는 조선족 상인 이 씨와 친해졌다.
그러던 1992년, 한중수교로 남한과 중국이 곧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조창호 중위는 1950년 당시 누나가 교사로 근무했던 성신여학교로 편지 전달을 부탁했다.
이 씨가 최대한 찾아봤는지, 1992년 기준으로 꽤 정확한 주소를 기입했다.
“남조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신여자대학 내 조창숙 선생 앞”
이 편지는 실제로 성신여대로 전달됐지만, 당시 성신여대 교직원과 학생 중 조창숙이란 이름이 없어 수취인 불명으로 버려졌다.
그런데 버려진 우편물들을 처리하던 성신여대 총무처 학생지도과 최성규 씨의 눈에 띄었다.
어차피 버릴 편지니까 별 생각 없이 뜯어본 최성규 씨는, 40여년간의 사연이 담긴 편지에 감동받아 조창숙 선생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최성규 씨는 오래된 성신여대 인사기록을 다 뒤져서, 성신여학교 시절 가정과 교사로 재직했던 ‘조창숙’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이후 열흘간 가정학회, 교육부 등을 수소문해 마침내 조창숙 선생의 주소를 알아냈다.
1950년 성신여학교 교사였던 조창숙 선생은, 이후 교수가 되어 건국대 가정학과장까지 지내고 이미 은퇴해 압구정에 거주하고 있었다.
(참고로 조창숙 교수의 아들이 現 포스코그룹 장인화 회장이다.)
<탈북 권유>
조창숙 교수는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편지를 보낸 조선족 이 씨를 만나고, 조창호 중위를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조창호 중위는 북한에서 얻은 자녀들을 걱정해 이 씨가 전해준 탈북 제안을 거절했다.
조창숙 교수가 이 씨를 통해 전해준 어머니(1982년 작고)의 사진도 어쩔 수 없이 불태웠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진 외엔 흑백 사진만 허용됐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창숙 교수가 컬러 사진을 보내줬기 때문)
그러나 1994년 조창호 중위가 중풍을 앓자, 오히려 자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그리던 남조선의 가족들을 만나세요.”라며 탈북을 설득했다고 한다.
정작 자녀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버릴 수 없어 북한에 남았고, “아버지가 탈북하신 게 아니라 돌아가셨다고 둘러댈테니 마음 편히 떠나세요.”라고 응원했다.
(당시는 고난의행군 직전으로, 탈북이 아직 그렇게 흔치 않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엄격하게 조사하지 않고 쉽게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장 조창호를 데려와>
결국 조창호 중위는 자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이 씨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남한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남한의 가족들은 조선일보 최우석 기자(조창호의 5촌 조카)의 주도로 구출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중수교 직후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급증하던 시기라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정부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한편 조창호 중위는 공해상에서 최우석 기자가 탄 한국 선박과 접선을 시도했으나, 기상 악화와 높은 파도로 실패하고 77시간을 표류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조창호 중위가 접선에 실패하고 표류 중이던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정부는 이 참사를 덮을만한 새로운 이슈가 필요했고, 마침 적당한 이슈가 서해상에 있었다.
이때부터 안기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10월 23일, 안기부의 협조 하에 수산청(現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선이 조창호 중위를 구출했다.
조창호 중위는 북에 남겨진 가족들을 걱정해 엠바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안기부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며 설득하고 공식 발표했다.
남한에서 이렇게 화제가 됐는데, 북한이 가족들을 가만히 둘 리가?
북에 남은 조창호 중위의 자녀들은 개마고원 오지인 낭림군으로 추방됐다.
다행히 수용소로 끌려가지는 않았고, 10여년 후 원래 살던 지역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이 챕터의 내용은 조선일보 최우석 기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합니다.
<예우>
물론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지만, 북한에서 26년이나 강제 노역을 당했지만 43년이나 전향하지 않고 버틴 조창호 중위의 귀환 소식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10월 23일, 구출된 조창호 중위는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10월 25일, 이병태 국방부 장관이 찾아왔고, 조창호 중위는 43년만에 귀환을 보고했다.
한편 육군은 전례 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조창호 소위는 실종 1개월 후인 1951년 9월 10일에 이미 전사 처리돼 중위로 추서된 후 현충원에 봉안된 인물인데, 43년만에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
결국, 전사 처리, 중위 추서, 현충원 봉안을 모두 취소하고, 조창호 소위를 정식으로 중위로 진급시킨 후 정식으로 전역시키기로 결정했다.
11월 25일, 조창호 소위는 중위 진급식을 가지고, 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새겨진 본인의 이름을 직접 지웠다.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국훈장 통일상을 받았다.
다음날인 11월 26일, 조창호 중위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성대한 전역식을 가졌다.
이로써 역대 최단기 중위 재임(만 1일)을 기록했다.
<말년>
북한은 줄곧 국군 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대해 ‘모두가 북한 체제에 감화돼 전향 후 잘 살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조창호 중위가 바로 살아있는 반례였다.
이후 조창호 중위는 북한 내 국군 포로와 납북자들의 실태를 폭로하는 인권 운동을 펼쳤고, 2005년 4월 미국 하원 청문회 증인으로도 출석했다.
2006년 11월 19일, 향년 76세로 영면하셨다.
장례는 역대 최초로 재향군인회 주관 향군장으로 진행됐으며 현충원에 안장됐다.
조창호 중위는 인생에서 첫번째은인은 성신여대로 편지를 보내준 조선족상인 두번째은인은 수소문해서 누나를 찾아준 성신여대 교직원이라고 언급하심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6~8만명 추정 그중 탈북에 성공한 인원은 80여명
현재 12분이 남한에 생존해계시고 2010년 이후로는 그나마 탈북하는 포로도 없다고함
첫댓글 안기부 뭐임 진짜…
편지 발견된 것 하며 그래도 너무 다 극적이다.. ㅠㅠ
나라를 위한답시고 아무리 북한 사람이어도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네
펨코 글 퍼온거지? ㄱㅆ 여시한테 뭐라하는게 아니고 제목이 넘 이상해ㅠ 근데 글 진짜 감동이다. 편지는 왜 버려ㅡㅡ 편지 찾아준 교직원도 진짜 좋은 분
뭔가 더 많이 보길위해서 꾸역꾸역 내용 제목에 넣다보닠ㅋㅋㅋㅋ
그냥 원글대로 수정해놨어~
@흥미돋는글 아앗 그렇구만 지적하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해 퍼와준 덕분에 글 정말 잘 봤어
북에남은 가족들 안타깝다....ㅠㅠㅠ 그놈의 이슈몰이 ..
잘봤어ㅠㅠ
전쟁으로 인한 슬픈 가족사이네 전쟁은 없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