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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진한 여행
-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와서
페루의 리마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리에스로 가려면 굳이 미국을 들러야 한다. 직항로가 없다고 한다. 화물도 마찬가지다.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거나 푼타아레나스를 지나 기 전에 미국의 무역항을 먼저 들른다. 사람이나 화물의 왕래가 충분치 않으므로 직항로가 아직 개설되지 않았겠지만 앞으로 개설될 가능성도 그리 높지 않다. 남미만이 아니라 중미도 같은 사정이다. 약탈이 주목적이었던 스페인이 떠난 후 중남미 대륙은 미국 산업의 자원 조달을 위한 지역으로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에스파놀, 다시 말해 스페인 언어권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나 도시는 거반 미국을 향해 있다.
이번 겨울에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왔다. 멕시코는 현재 미국과 장벽으로 막힌 국경을 마주하는 국가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쿠바는 미국이 자신의 바다로 생각하는 카리브의 한 가운데를 눈의 가시처럼 점한다. 두 국가는 모두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다. 1848년 전쟁 이후 국토의 절반을 미국에 내준 멕시코도 물론이고 1898년의 대 스페인 독립전쟁에 개입한 미국에게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1958년까지 주권을 빼앗긴 적 있는 쿠바도 감내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진통과 자존심의 상흔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도 미국에 의한 속박은 여전하다. 북중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 이후 민중의 삶이 더욱 피폐해진 멕시코나 미국의 무역봉쇄가 여전한 쿠바도 미국에 호의적일 수 없다. 그 현장을 다녀올 기회를 얻은 것이다.
경남대학교 부설 북한학대학원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오래 전에 기획한 이번 여행은 내게는 색달랐다. 이제까지 이러저러한 환경 관련 위원회의 일로 목적이 분명한 여행과 내용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고대와 근현대 유적지, 혁명 관련 지역과 관광지 답사, 그리고 생태공원과 유기농업 현장 방문이 가미된 이번 여행은 경직되지 않았다. 보고서 부담도 없다. 큰 마음먹고 계획한 이번 여행, 열흘 넘는 일정을 소화하는 경비는 녹록하지 않았을 텐데, 가난한 환경전문가라는 이유로 면제된 내 회비는 누군가가 부담했다. 북한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고교후배는 모 회계법인에 간부사원으로 근무한다. 그는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기획했다. 그의 권유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온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해야 한다.
선행학습은 유효한가. 학교 성적을 즉각 올리는 선행학습을 통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처방과 같다고 여기지만 이번 여행을 앞두고 선행학습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험에 미루어, 미국과 유럽에 의해 걸러진 상식일수록 굴절되곤 했다. 할리우드가 그린 중남미의 모습은 또 어떠했던가. 그 때문인지 우리 사회에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고, 오해가 많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오해와 편견이 생길지언정, 모처럼 기회를 얻은 여행에 앞서 상식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라틴아메리카에 관해 이제까지 읽은 책은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 비운의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그렸다고 회자되는 가브리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과 부조리를 통렬하게 꼬집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최근 번역 소개된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바야돌리드 논쟁》을 읽은 게 고작이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중남미 원주민의 지위와 그들에 대한 정복자 착취의 정당성을 놓고 스페인 바야돌리드의 성당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논쟁에 참여한 노회한 신학자 이름은 잊혔지만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한 바르톨롬메오 데 라스카사스 수사의 이름은 라틴아메리카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출발 2주 전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이성형 교수의 강의로 쿠바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했다. 서울 삼청동의 북한학대학원에서 만난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그들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소개한 문화기행문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를 펴낸 바 있다. 공부 모임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전공인 성공회대학교의 한홍구 교수, 국립창극단의 우지용 단원, 그리고 환경운동가 류창희 선생을 만났다. 이번 여행에 전문가로 참여한다. 그들이 여행의 관심사를 웅변하는 셈이다. 기대가 더욱 커졌다.
집에 돌아와 공부모임에서 추천된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와 천샤오추에의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역사》, 그리고 한스 마그누스와 엔첸스베르거가 엮은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를 주문해 피델 카스트로 부분을 읽고, 책장에 꽂아둔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다. 이어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말을 후아나 폰세 데 레온이 엮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손에 들었다. 벼락치기 선행학습 치고 좀 과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번 여행에서 만난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팔린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을 평가절하한다고 한다. 엉터리라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멕시코와 쿠바로 이어지는 하늘 길은 유난히 길다. 비행기에서 왕복 40시간 가까이 보내야 한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 민중사》1권과 2권을 기내용 가방에 넣었다. 이번 여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한데, 돌아와 며칠을 고생했다. 시차는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극복했는데 몹시 피곤했던 거다. 잠을 꾹 참고 책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시차 극복을 노린 건데, 그게 화근이었다. 600쪽이 넘는 《미국 민중사》 두 권은 물론, 《녹색평론》 최근호와 후배가 가지고 간 소설가 유재현의 쿠바 기행,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까지 눈을 부릅뜨며 독파하고, 돌아오자마자 밀린 원고와 회의에 쏘다녔더니 덜컥 몸살이 왔다. 입술도 여러 겹으로 터졌다. 무식한 시차극복 방식은 나이에 민감한 모양이다.
1월 16일. 올 겨울에서 가장 춥다는 날에 따뜻한 지방으로 떠난다. 젊고 날씬한 승무원이 두 시간 여 바쁜 한일노선. 그들은 음료와 기내식, 면세품까지 팔아야 한다. 두툼한 닭고기. 채식을 사전에 주문할 걸 그랬나. 인천공항의 검색을 불신하는지,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보안검사를 다시 거치고 멕시코에어라인으로 갈아탔다. 대한항공과 멕시코에어라인은 마일리지 협정이 돼 있단다. 마일리지가 꽤 늘겠다.
나리타에서 멕시코시티의 공항까지, 멕시코에어라인은 티후아나를 경유한다. 그 사이 두 차례의 기내식과 여타 서비스를 받고 우리보다 14시간 늦은 티후아나 공항에서 잠시 내렸다. 좁은 복도에 마련된 입국심사장은 줄이 금세 늘어진다. 설비가 낡아 시간이 걸린단다. 후텁지근해 조끼를 벗고, 같은 비행기의 동일한 좌석에 앉아 간단한 기내식을 또 받았다. 16일에 다시 먹는 점심이다. 미국 국경과 인접한 티후아나는 최근 집중 개발한 공업도시라던데, NAFTA 영향인가. 그런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본인이 대거 내렸다. 하늘에서 본 티후아나의 산에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던데, 그래도 관광지가 있나보다.
기내식을 연속 4번 먹으니 질린다. 오후 3시에 도착한 멕시코시티. 고원에 흰 눈이 보이는 멕시코시티는 우리보다 15시간이 늦다.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본 멕시코시티는 거리에 나무가 많고 녹지가 풍부하다. 고층빌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내린 공항2청사는 개장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지만 전혀 화려하지 않다. 은행 이외에 상점도 보이지 않고 바닥은 멕시코에 흔한 돌을 깔았다. 아직 여름옷을 꺼내지 못했는데 멕시코 시민들은 반팔 티셔츠부터 두툼한 점퍼까지 다양하게 입고 있다. 신청사에 익숙하지 않은 현지가이드가 헐레벌떡 찾아와 호텔로. 잠시 쉬고 한식당으로. 저녁 시간인데 현지인 손님이 없다. 서비스나 맛이나 시설이 그저 그렇다. 그나마 한식은 이번뿐이다.
여행의 첫날 밤. 어찌 데킬라 한잔 거를 수 있을 텐가. 우리는 거침없이 폭탄주를 제조했고, 3인조 가수의 라틴 음악이 유쾌한 호텔의 로비에서 칵테일이나 맥주 한잔으로 만족하지 못한 우리는 종업원을 당황케 했다. 그들은 데킬라를 병으로 주문 받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거다. 선인장을 발효한 멕시코의 데킬라는 레몬즙 묻은 손등에 뿌리는 소금을 안주 삼는다. 우리는 땅콩을 주문했다. 폭탄주에 소금은 아무래도 그렇다. 비용은 높지 않은 듯. 물론 우리 생각일 게다. 폭탄주 들이킨 잔을 머리 위에서 흔들어대고도 멀쩡한 우리를 보고 놀란 멕시코 인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긴 비행시간으로 지친 일행이 방으로 들어간 뒤, 호기심이 남은 3명이 호텔 밖으로 나갔다. 한 잔 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고 멕시코시티의 밤거리와 시민들의 모습도 볼 요량이었다. 한데 멕시코시티의 밤은 적막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치안 때문이란다. 경찰력이 삼엄한 관광지는 안전하지만 도시 밤거리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다음날 들었다.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멕시코시티의 밤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겨우 찾은 곳은 토틸라에 맥주를 파는 멕시코 전통 식당. 문을 닫으려다 우리를 받았다.
토틸라는 10센티미터 정도 직경의 얇은 옥수수 전분으로 갖은 고기와 채소를 넣어 싸먹는다. 멕시칸 소스도 넣는데, 멕시코 국기와 같은 3가지 색이다. 눈물 나게 매운 고추의 초록색, 양파의 하얀색, 토마토케첩의 붉은색 소스가 식탁마다 놓였다. 양해를 구한 시간이 지나 식당을 나왔다. 우리가 에스파뇰을 모르고 그들은 영어를 몰랐지만 의사는 통했다. 물어물어 찾아간 스타벅스 2층 커피숍에서 맥주를 더 마시고 호텔로 들어가 잠들었는데, 우리가 밤거리에서 손짓발짓하며 만난 멕시코인들, 참 친절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안전띠를 매고 청소하는 사람이 여기저기 보였다. 원주민들이다. 그들의 고단함이 보이는 듯했다.
다음 날, 17일. 엷은 구름이 높은 아침을 맞았다. 시내의 과달루페 성당과 그 유명한 테오티우아칸 유적지로 갈 예정이다. 멕시코시티는 고원 호수의 섬에서 기원한다. 1518년 멕시코 정벌에 나선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듬해 아즈텍 수도인 거대한 호수 가운데의 섬 테노치티틀란에 입성, 1521년에 함락시켰다. 수많은 아즈텍 유적을 부순 자리에 그들의 도시를 만들었고 호수를 매립하면서 확장한 것이다. 현재 천만 가까운 인구가 모인 해발 2200미터의 멕시코시티는 거대한 분지이고, 대기는 그 안에서 정체된다. 아침에 창을 여니 자동차 매연이 느껴진다. 초고층빌딩은 없는 건 지진 때문이라고 가이드는 이야기하는데, 매립지의 지반이 약한 이유도 무시할 수 없을지 모른다. 피사의 사탑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건축물은 눈에 띄게 기울었다.
멕시코도 지금 겨울이지만 우리의 초가을을 연상시킨다. 고원이라 기온 편차가 크지 않고 연중 17도를 유지한다는데, 요즘은 건조하고 시원한 편이란다. 간선도로를 지나면 드러나는 낡은 건물에 지저분한 낙서가 그려져 있다. 거리를 다니는 폭스바겐의 딱정벌레 택시는 아마 브라질에서 조립했을 텐데, 낡은 차가 더 많다. 미국산 대형 중고차가 많은데 한국 차는 거의 없다. 가이드는 한미FTA가 타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던데, 그렇다면 미국에는 왜 한국산 차가 많은가. 성의 문제겠지. 브라질 쿠리티바의 명물인 굴절버스가 도로 복판의 전용도로를 다닌다. 도로 가운데 환승시설이 있는 전용도로는 확장되고 있다. 4년 된 ‘MB(Metro Bus) 라인’으로 미국 자본이다. 정부 지원을 받아 가격은 저렴하다고 한다. 우리 마을버스보다 작은 버스와 우리 시내버스와 비슷한 버스도 다니는데, 요금이 우리 돈으로 250원 정도다. 아주 낡은 지하철 노선은 11개인데 요금은 300원에 불과하다. 멕시코시티 중앙로 지상으로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전철이 지나간다. 그 전철은 타이어로 움직인다. 택시도 저렴하다고 한다. 폭스바겐의 경우 기본요금이 500원이고 아무리 멀어도 우리 돈으로 만원이 넘지 않는다.
세계 3대 성당이라고 자부하는 과달루페 성당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다. 원주민 성모가 현현한 성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성당에는 전통 의상을 입은 원주민이 많다. 키 작고 땅땅한 체구의 원주민이 입은 알록달록한 옷은 사실 초기 정복자가 강요한 결과라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수탈된 대지》에서 주장한다. 성탄절에 수백만의 신자가 몰려드는 과달루페 성당에서 멕시코시티 시내를 조망하니 산이 뿌옇다. 먼지 때문이다. 평소 멕시코시티에 먼지가 많다고 한다. 원주민에게 가한 가톨릭의 압제를 500년 만에 사죄한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의 입상이 있는 과달루페 성당을 나와 시내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했다.
세계 100대 부자 중 20명이 사는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두드러진다. 세계 최고 갑부도 멕시코 인이다. 멕시코시티에는 부자 동네와 달동네가 철저히 분리돼 있다. 비행기에서 보이는 달동네는 시 외곽의 산에 다닥다닥 붙었다. 전기와 물이 없는 작은 집이 빼곡한 빈민가는 회색 상자를 쌓인 것 같다. 더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산기슭에 금선을 표시한 정부는 그들을 위한 국민임대주택을 교외에 대규모로 건설하고 있다. 70년 장기 집권한 제도혁명당에서 국민행동당으로 정권이 바뀐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2000만 호를 더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급수차로 식수를 해결하는 빈민은 일하러 날마다 시내로 나가야 한다. 그때 저렴한 대중교통이 크게 기여한다.
지금은 멕시코는 건기다.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최근 이변이 속출하기 시작했다고 가이드는 걱정한다. 온난화 탓일까. 옥수숫대를 쌓아올린 농토는 바싹 말랐고 주변에 데킬라의 원료인 선인장이 보였다. 과거 애니깽이라 칭했던 우리 선조가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용설란 농장에서 개보다 못한 노예노동으로 혹사당했다는데, 그 후예는 멕시코화 되어 눈에 띄지 않는다고 가이드는 귀띔한다. 선인장의 일종인 용설란은 비누와 밧줄의 원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테오티우아칸은 수 킬로미터 반경에 흩어진 피리미드 유적지로, 발굴된 유적은 10퍼센트에 불과하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다분히 임의적이다. 12세기에 멕시코 고원으로 접근한 아즈텍이 우연히 발견한 다음 그렇게 명명했을 따름이다. 2에서 3세기 경 출범해 7세기 경 융성했다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하는 문명, 불가사의하다. 당시 인구가 20만 이상이었을 거로 판단하는 현대 과학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사라졌다면 농기구와 같은 흔적이라도 남았을 텐데, 없다.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구멍뚫인 유골은 아즈텍의 흔적이라고 멕시코의 관련 학자들은 주장한다고 한다. 높이 60미터가 넘는 두개의 피라미드를 잇는 길을 ‘죽은 자의 길’로, 길 끝의 피라미드를 ‘달의 피라미드’로, 죽은 자의 길 중간의 피라미드를 ‘태양의 피라미드’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임의적이다. 후대가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어떻게 흙에 덮였을까. 바람이 날아오는 흙먼지는 아니다. 먼지라면 층이 남아야하는데 없다는 거다. 물러서는 사람들이 덮었을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데, 철과 바퀴를 모르던 1400년 전 사람이 20만 인구 규모의 유적을 한꺼번에 흙으로 묻었다는 걸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어찌되었든, 현재 멕시코를 관광국가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는 테오티우아칸은 잡상인을 죽은 자의 길에 넘치게 한다.
“잠깐만요!” 흑요석으로 만든 기념품을 가방이나 수건에 감춘 잡상인은 한국인이라는 걸 용케도 알아내곤 어눌한 한국말로 “가게보다 싸요, 하나 사요!” 하며 다가온다. 한두 명이 아니다. 집요하기 짝이 없다. 그들을 물리치고 해발 2500미터에 솟은 태양의 피라미드에 올랐다. 달의 피라미드는 폐쇄돼 있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한발 한발 옮기는데 고산증이 엄습한다. 어제 술 때문인가 했더니 다른 이도 그렇단다. 꼭대기는 하늘의 기운을 받으려는 관광객들의 포퍼먼스가 한창이다. 두 팔을 하늘로 뻗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명상에 잠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원한 바람을 쏘이는데, 아니! 고산증이 사라졌다. 내려갔더니 잡상인이 더 꼬여든다. 그들에게 한국인 알아내는 법을 묻고 싶다.
테오티우아칸 주변의 호텔에서 입에 맞는 점심을 먹었다. 팥죽이 있었던 건데 다른 식당은 어떨지. 주섬주섬 의상 챙기던 젊은 남녀 원주민 한 쌍이 북장단에 맞춰 한바탕 다이내믹한 춤을 춘다. 아즈텍 복장으로. 그들에게 1달러나 10페소를 내면 기념사진을 허용한다.
다시 멕시코시티로. 이번엔 멕시코 민주화의 비극이 서린 삼문화광장이다. 최근 발굴한 아즈텍 유적, 아즈텍을 부순 자리를 밟고 들어선 스페인 성당, 그리고 현대식 아파트가 공존하는 멕시코시티의 삼문화광장은 에스파뇰로 ‘틀라텔롤코’라고 한다. 거기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사연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독재정권의 탄압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을 행해 경찰이 발포, 300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낳은 현장이다. 비석은 그 기억을 위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주역이던 한홍구 교수의 카메라가 바쁘다.
멕시코가 자랑하는 국립인류학박물관으로 간다. 언제는 착취로 말살시키려 들더니 지금은 보전하는 모양새를 과시하는 현장이다. 멕시코에서 원주민의 처지는 지금도 그리 밝지 않다. 차별은 겉보기 사라졌지만 원주민들은 사회 하층을 구성한다. 고유의 문화도 이미 사라졌다. 시민이길 거부하는 원주민은 산악지대에 은둔해 정부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멕시코 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1964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현 수준으로도 최상이라는데, 근사하게 전시된 유물은 단지 박제되었을 따름이다. 훑어 지나치며 아즈텍과 마야문명을 디지털카메라에 담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 소칼로 광장으로. 소칼로는 광장이라는 뜻이다.
복잡한 광장에서 대통령궁과 대성당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아즈텍 문명을 부순 자리에 세운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은 1563년부터 100년 넘게 지었다는데, 얼마 전 성당 안에서 폭력 사건이 벌어져 지금은 경찰이 출입을 감시하고 있다. 주변 식당에서 입에 맞지 않는 저녁을 들고 호텔로 와 10시가 되기도 전에 대부분 곯아 떨어졌다.
18일. 멕시코 동편, 유카탄 반도의 칸쿤으로 날아가 마야문명의 유적지를 찾아가야 한다. 엷은 구름이 하늘 절반을 가렸다. 어제도 구름이 많았는데, 세계적 휴양지인 칸쿤은 무덥고 햇살이 강하다고 한다. 국내선은 멕시코시티 공항 1청사로 가야한다. 이번엔 멕시카나 항공이다. 라틴의 사람들은 좀 느긋해 보인다. 시간을 지키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지 싶다. 이번에도 연발했고 당연히 연착했지만 불평하는 승객은 보이지 않는다. 기내식으로 두툼한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먹고 공항에 내리니 상인과 택시 운전기사의 호객 경쟁이 벌어진다. 관광지답다.
8명의 한인이 거주하는 칸쿤에서 한인회장을 겸하는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30분 정도 들어가니 부서진 산호가 만든 비취색 해안이 눈부시다. 파란 하늘에 패러글라이더가 수를 놓고 거리엔 선글라스에 수영복을 입은 서양인들이 이어진다. 역시 세계적인 휴양지답다. 번듯한 호텔이 즐비한 지역에 도착했다. 이른바 ‘호텔 존’이다. 3년 전, 세계무역기구 각료회담의 농업관련 비준안에 항변하던 이경해 열사가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8년 만에 25만에서 85만으로 인구를 늘인 칸쿤은 목하 개발 붐이다. 덕분에 빚에 쪼들리던 시는 현재 부를 축적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가이드는 개발 청사진을 펼치며 한국의 투자를 희망하는데, 내용이라는 게 매립에 이은 리조트 건설이었다.
칸쿤은 2005년 10월의 허리케인 상흔이 남아 있다. 시속 230킬로미터의 허리케인 윌마는 3미터 높이의 너울성 파도로 수십 동에 달하는 굴지의 호텔을 덮쳤고 모래 지반을 잃은 호텔이 그만 무너진 것이다. 3년이 지난 요즘, 신축과 증개축된 호텔은 더욱 새로워졌지만 작년 8월도 허리케인 딘에 크게 놀랐다는데, 온난화가 심화되는 시대에 칸쿤의 앞날은 내내 찬란할 수 있을까. 해안이 개발되면 파도는 완충되지 않는다. 높아지는 너울성 파고는 파괴력을 더할 것이다. 나중에 해안을 살펴보았다. 파도로 쓸려간 흔적이 역력하다. 쓸려나간 모래야 장비로 퍼부으면 다시 쌓이지만, 커져가는 파고는 막지 못할 텐데, 휘황찬란한 휴양지는 지구온난화를 오늘도 부추긴다.
개축한 호텔에 짐을 풀고 칸쿤 시내로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서 퇴근하는 마야 원주민 노동자들을 보았다. 누추한 그들은 활짝 웃고 있다. 그들의 희생이 없다면 칸쿤의 번영은 보장되지 않으리라. 저녁 후 호텔 존에 마련된 상가를 들렀다. 기념품을 구입하고 하드록 카페에 입장하려고. 공연은 10시. 9시에 들어간 우리는 데킬라 폭탄주를 돌렸고 종업원은 어리둥절해 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슬쩍 빠져나와 잠을 청했다. 내일은 해변을 두고 마야 유적지를 방문하는 날이다.
19일. 새벽부터 억수같은 비가 퍼부었다. 교과서에서 본 열대성 스콜이다. 덕분에 일출을 포기해야 했지만 군함조의 날갯짓과 먹이에 자맥질하는 펠리컨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마야 유적지는 고속도로로 3시간을 달려야 한다. 미국자본이 건설한 고속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유카탄반도의 숲은 키가 낮다. 어제 하드록카페 종업원이 구급차 불러야 하는지 물었다며 너스레를 떤 가이드는 석회질 토양 때문이란다. 원주민의 허름한 마을이 보이는데, 우리는 그 중 규모가 큰 마을을 잠시 들릴 예정이다.
우리가 찾아가는 ‘치첸잇사’ 유적지는 2007년 인터넷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다. 투표자가 많아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마야 유적은 멕시코 전역에 산재돼 있다. 하나하나의 유적지는 서로 교류하고 때로는 정복하는 국가 단위였다고 보면 된다. 치첸잇사는 ‘물이 있다’는 뜻이다. 치첸잇사로 가는 길에 멕시코화 된 마야 원주민의 마을, ‘바야돌릿’에서 잠시 내렸다. 공원에는 아름드리 벤저민이 그늘을 드리우고 그 주변에 장이 섰다. 원주민과 관광객이 뒤섞인 장터에서 주민들은 자신의 전통 의상과 그물침대(해먹), 그리고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마야 원주민들의 키가 작고 목이 유난히 짧은 건 어려서부터 해먹에서 자는 까닭으로 가이드는 이야기한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자라는 벤저민은 키가 작지만 여기는 아니다. 아열대지방이라 그런가, 거대한 교목이다. 그 뿐이 아니다. 우리 아파트의 베란다에 흔한 고무나무도 아름드리다. 바야돌릿의 공원 한가운데 물동이를 든 여신이 장식된 분수가 있는데 분수 가장자리에 개구리도 장식되어 있다. 개구리는 주변에 물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마야에서 물은 생존을 의미했으니, 개구리가 상서로운 동물로 통하는 건 당연하겠다. 그러고 보니 개구리 기념품이 많았다. 마야인들은 우산을 펼치지 않는다고 한다. 비는 축복이므로 기꺼이 맞는다는 거다. 치첸잇사로 가는 일반 도로의 가로수는 야자와 아보카도를 주렁주렁 달았다.
점심을 위해 들린 뷔페식 식당에는 서양 단체 관광객이 가득하다. 고운 춤을 공연한 예쁜 원주민 소녀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일행은 치첸잇사로. 치첸잇사도 피라미드 유적이 중심이다. 흙 속에 파묻힌 1000년 전 유적을 케네디 재단의 지원으로 발굴, 멕시코에 큰 관광수입을 올려주었다. 치첸잇사는 이중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피라미드 안에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는 건데, 마주보고 박수를 치면 피라미드 내에서 울림이 나온다. 그걸 뱀 울음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가이드의 해설은 국적불문인가. 과연 단체 관광객들마다 그 자리에서 박수를 쳤고, 박수 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울림은 어김없이 반복됐다. 작은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펄쩍펄쩍 뛰는 심장을 받던 제단이 보이고 제단을 바라보는 자리에 마야 축구장이 있다. 그 축구장에서 심장을 제공했다고 한다. 4에서 5미터 높이의 양편 돌담에 세로로 돌출된 도넛 모영의 골대는 지름이 1미터가 못되는데 엉덩이와 넓적다리로 고무공을 차서 넣었다. 가이드는 이긴 팀 주장의 심장을, 안내 책자는 진 팀 주장의 심장을 떼어냈다고 주장한다.
귀금속으로 단장한 여성을 빠뜨린 ‘희생의 샘’을 보고 칸쿤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비가 내리더니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칸쿤 시내의 중국 식당에서 입에 맞는 저녁을 먹고 호텔로. 어두워진 해변을 맨발로 잠시 거닌 후 맥주를 가볍게 걸친 일행은 잠자리로 스며들었다. 내일은 쿠바로 가야 한다.
20일. 날씨가 흐리다. 덕분에 피부는 아직 멀쩡하다. 100여 좌석의 멕시카나 항공은 12시 20분 출발 예정이었지만 역시 연발했고 이륙 한 시간 만에 하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닿았다. 기내 점심은 없었다. 시계 바늘을 한 시간 더 돌리고 들어간 쿠바는 여권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 입출국 시, 종이 한 장으로 해결한다. 미국 눈치를 보는 비수교국이라 그럴까. 아담한 공항을 빠져나와 김일성대학교에서 공부한 흑인 가이드를 만났다. 이름은 알도 카마쵸. 그는 북한식으로 ‘좋지 않다’는 표현을 “옳지 않다”라고 말한다. 약간의 억양 이외에 일상 대화에 아무 문제가 없는 그의 안내로 정부 기관이 모인 아바나 시내의 혁명광장부터 찾았다.
혁명광장은 쿠바 관광의 첫 관문일까. 아바나를 찾는 외국인은 혁명광장부터 둘러보는 것 같다. 혁명 당시 아바나에 처음 입성한 피델 카스트로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그림이 관광객들을 반긴다. 노란색 높은 빌딩은 국방성이고 체 게바라 얼굴을 철골 부조 형식으로 붙인 건물은 내무성이다. 그 앞 광장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을 연초마다 들을 수 있다는데 지금 피델은 와병중이다. 광장을 내려다보는 높이 139미터의 혁명 기념탑은 바티스타 정권이 만든 것으로 그 앞에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호세 마르티가 근사하게 조각돼 있다. 광장에는 여러 관광버스가 섰고, 주로 백인인 관광객들이 여러 배경으로 삼삼오오 기념촬영에 열중이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헤밍웨이가 1년 동안 머물렀다는 구시가지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 지은 지 90년이 가까워온다. 호텔로 가는 도중에 오래된 자동차와 다양한 대중교통 시설물을 구경할 수 있다. 1959년 혁명 이전에 소유했던 승용차는 개인 소유가 유효하므로 당시 자동차를 고치고 고쳐 사용한단다. 그래서 거리는 온통 50년대 미국 자동차 전시장 같다. 거대하고 매연이 많은. 대중교통이 다양하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노란색 택시는 뒷자리에 두 명이 탈 수 있다. 문은 없는 지붕은 차양인 셈이다. 보통 버스도 보이지만 트레일러를 개조한 크고 묵직한 버스도 보인다. 마차도 다닌다. 시간당 1인 5전환페소를 받는 4인용이다. 자전거를 개조해 뒷좌석에 손님을 태우는 인력거 비슷한 수단도 보인다.
혁명 이전부터 워낙 유명한 관광지였던 쿠바. 소련이 사라진 이후 미국의 봉쇄조치로 외화가 부족했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쿠바는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두 가지 화폐를 통용한다. 미국 달러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전환페소와 쿠바 인민들이 사용하는 일반페소. 국영상점에서 사용하는 일반페소는 전환페소의 25분의1의 가치를 가진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는 전환페소를 사용해야 한다. 달러나 유로의 사용은 불허된다. 관광객은 호텔이나 은행에서 환전해야 하는데, 미국 달러는 환전 시 10퍼센트 수수료를 뗀다. 한데 호텔마다 수수료가 달랐다. 우리가 첫날 머문 호텔은 아무래도 바가지를 씌운 것 같다.
혁명 이후 쿠바에 미국인의 물결은 상당히 줄었을 것이다. 지금 쿠바에는 유럽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고 과거의 동유럽권 단체 관광객도 눈에 자주 띈다. 아시아로는 단연 한국 관광객이 많아 구시가지를 둘러보면 한 팀 이상을 볼 정도다. 일본 관광객보다 많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현지인 가이드들은 한국 관광객을 안내하느라 하루도 쉬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우리 여행도 알도 카마쵸의 일정에 맞춰야 했다.
미국의 흔적이 탈색된 쿠바에서 체 게바라는 중요한 관광 아이콘이 되었다. 체 게바라 관련 기념품이 없는 데가 없다. 헤밍웨이도 주요 아이콘이다.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르는 관광객이 적지 않은 까닭일 텐데,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 그 출발선인 모양이다. 한때 화려했을 호텔이 지금은 낡았고 좁다. 헤밍웨이가 머물 시절 사용하던 엘리베이터를 아직도 쓰고 있는데 좁고 불편하다. 그래도 손님으로 북적이는 호텔은 막 당도한 투숙객에게 칵테일을 한잔씩 내놓았다. 헤밍웨이가 즐겼던 술이 아닐지.
2005년 7월 개관한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의 조용수 초대 관장이 우리를 찾아왔다. 6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환담하면서 그는 본의 아니게 대사관 역할을 떠맡게 된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여권 잃으면 겪는 불편함을 이야기한 뒤, 한국과 쿠바 사이의 무역 상황과 어려움을 토로한다. 1년 반 겪은 경험담을 토대로, 쿠바 인민은 경쟁력과 창의력이 없고 책임감이 부족하단다. 오랜 사회주의가 가져온 피로감일까. 미국의 무역 봉쇄 이후 주택과 물자가 크게 부족하고 교육수준에 비해 가난하다면서, 미국도 ‘이익 대표부’를 두어 무역에 열심인데 우리는 아직도 외교관계를 북구하지 않는다며 아쉬워한다. 어려운 가운데 현대와 삼성, 엘지와 같은 대기업이 자동차와 가전제품, 그리고 에너지 산업을 중심으로 물고를 트고 있다며 가능성을 전하는 조용수 관장은 자본주의 경험이 있는 쿠바에서 인민은 미국식 생활을 열망한다며 포스트 피텔 카스트로를 은근히 기대한다.
아바나 구시가지에는 경찰이 많다. 허가 없는 상행위나 범죄를 단속하는 까닭에 안전하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전환페소로 고급 수입품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에 접근하는 쿠바인이 많다는데, 그런 수입은 세금으로 환수할 수 없을 것이다. 호텔에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쿠바인은 출입할 수 없다. 외화 획득을 위한 고육책은 이해하겠으나 쿠바 인민의 자존심을 긁는 건 아닐지. 로비에 마련된 바에서 12시 넘게 이어진 조용수 관장의 이야기는 기업을 지원하는 우리 정부의 관점이다. 쿠바 인민에게 물으면 다른 대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고집 센 피델 카스트로는 아직도 9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는다던데.
21일, 오늘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를 거쳐 세계적 휴양지 바라데로로 갈 예정이다. 명성에 비해 누추한 호텔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관광버스는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아바나 항으로 이어지는 말레콘 해변의 도로는 인민들의 자유공간이다. 데이트하고 산책하며 낮잠 청하는 시민들이 낚시꾼과 어우러진다. 말레콘 해변에 미국의 이익 대표부가 있고 그 앞에 미국의 테러로 목숨을 잃은 쿠바인의 영정과 조기가 걸려있다. 스페인 제국이 500년 전에 축조한 말레콘 해협 건너편의 ‘앨 모르’ 요새는 이젠 유물이다. 바다 밑의 터널로 말레콘 해협을 건너 앨 모르 요새를 오른 편으로 보면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다니는 차가 드물다. 외국인에게 1전환페소, 쿠바인에게 1일반페소를 받지만 1리터에 1페소 하는 기름값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왕복 6차선에서 8차선 정도의 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차선이 없고, 어떤 구간은 중앙차선마저 없다. 그래도 이어지는 좌우의 풍경은 쿠바의 현황을 잘 보여준다.
버스 정거장의 인파는 쿠바 인민의 인구구성을 웅변한다. 메스티소가 가장 많은 멕시코와 달리 쿠바에는 물라토가 많다.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피부색을 가진다. 물론 피부색에 따르는 차별은 없다. 직업선택이나 수입의 차이도 없다. 하지만 인종 구성비가 유지되는 걸 보면 같은 피부색끼리 결혼하려는 경향은 남아 있을 것이다. 도시 변두리의 군부대에서 병사들이 제식훈련을 한다. 그런데 군기는 높아 보이지 않는다. 30분 정도 지나 버스는 농촌지역으로 접어들고, 좌우에 사탕수수와과 바나나 밭이 이어진다. 협동농장과 목장도 가끔 나타난다. 사탕 정제공장에 오가는 트럭이 분주한데 마차도 고속도로에 나왔다. 지나치는 구릉에 대왕야자나무가 늘씬하다. 쿠바의 전봇대는 대왕야자나무를 쓴다. 땅은 기름져 보인다. 천만 정도의 인구를 먹이는데 부족함이 없으리라.
한 시간 쯤 지나 들린 고속도로 휴게소는 국영이다. 각종 체 게바라 기념품이 눈에 띄는 곳을 차지했다. 쿠바인의 자유연예와 이른 결혼에 대한 가이드의 유쾌한 이야기, 사탕수수와 바나나 농장에 관해 우울했던 과거와 현재를 들으며 달리길 두 시간, 차는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관에 도착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광장에서 체 게바라 동상과 혁명군 부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임하는데, 이런! 오늘은 기념관이 쉬는 날이란다. 현지 여행사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식당으로 직행할 수밖에. 기념관에 체 게바라 유품과 사진, 그리고 1967년 10월 살해되어 암매장된 그의 유해가 무려 30년 만에 볼리비아에서 운구돼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체 게바라 광장 뒤편의 식당에는 네덜란드 단체 관광객이 앉아 있다. 모처럼 입에 맞는 음식에 만족해하는데, 일단의 악단이 노래와 곁들여 쿠바 음악을 서너 곡 연주한다. 연주를 마치고 CD 한 장에 10페소로 판매하는데, CD가 조악하다. 컴퓨터로 구워 라벨을 입힌 것 같다. 경찰 몰래 관광객에 다가와 자질구레한 사탕 따위를 내미는 노인을 뒤로, 관광버스는 바라데로로 방향을 틀었다.
다리만 건너면 바라데로. 바라데로를 눈앞에 둔 작은 도시 카데나스는 70년대 우리 중소 도시의 변두리를 보는 듯하다. 정돈되었어도 쇠락했다. 거리의 시민들을 낮에도 빈둥거린다. 일자리가 부족한 모양이다. 카데나스에는 송유관이 지나간다. 바라데로에서 아바나로 가는 길에 원유 시추시설이 보이고 태안 해변에서 맡았던 냄새가 맡아지던데, 그 원유 베네수엘라로 보낸다고 한다. 쿠바는 아직 석유를 자립하지 못한다. 매장량이 더 있을 텐데 기술과 자본이 부족해 채굴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이드는 중국 자본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쿠바 산 원유는 베네수엘라에서 정제돼 다시 쿠바로 저렴한 가격으로 돌아오고 대신 쿠바는 의사를 파견한단다.
바라데로로 들어가는 길에서 보는 해변에 맹그로브 숲이 울창하다. 요트 계류장도 보인다. 혁명 전 바라데로는 마피아가 장악해 미국인과 돈 많은 쿠바인을 상대로 매춘과 도박을 일삼던 해변이었다. 지금은 순전히 외국 관광객으로 외화를 번다. 카데나스는 바라데로에서 일하는 쿠바인의 거처인데, 쿠바인들이 바라데로에서 숙박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를 호텔까지 안내한 알도 카마쵸도 버스와 함께 되돌아갔다.
캐나다와 유럽 자본의 근사한 호텔이 늘어선 바라데로는 서양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시아인이 더러 보이는데, 한국인이 가장 많고 중국인이 그 다음이라고 가이드는 귀띔한다. 일본인은 그리 보이지 않는단다. 스페인 자본이 세운 호텔에서 내일까지 유효한 자유이용권을 팔찌처럼 맸다. 술을 포함된 음식과 음료를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배가 부르면 참을 수밖에 없는 법. 넓은 식당에 많은 음식이 우리 입에 맞지 않고 음료수도 그렇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서양 젊은 연인들로 넘치는 카페에는 애정행각이 한창이다. 그들을 피해 살사춤과 노래가 흥미로운 홀을 잠시 들렸다 방으로 올라갔다. 떠들썩한 해변도 별 흥미가 없으므로.
22일. 오늘은 오후 아바나로 돌아가기까지 자유시간이다. 느긋한 오전에 잠시 해변을 거닐었다. 하늘에 구름으로 덮였으니 피부는 오늘도 안녕하리라. 해변은 서양인으로 분주하다. 벤치에 기대 책을 읽다 한 잠 청하는 이, 야자수 잎 파라솔 아래 모여 이야기 나누는 이,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에 들어가 몸을 축이는 이가 더러 있다면 대부분은 해변을 그냥 걷는다. 큰돈을 들여 찾아온 해변, 서양인들은 그저 바닷가에서 쉰다. 그야말로 휴식이다.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모래와 작별하고 호텔방에서 다시 늘어지게 잤다. 점심은 해변의 식당에서 해결하는데, 어제 살사음악을 연주하던 악단이 노래와 반주에 열중하곤 CD를 내놓는다. 라틴 특유의 음악, 들을수록 정겹다.
아바나로 돌아가는 해변은 한가롭다. 대서양의 파도가 거센데 허리케인 영향은 크지 않다고 한다. 이렇다 할 건물이나 마을도 주변이 없기 때문일 테지. 해변에 모래가 없다. 강한 파도가 모래를 남기지 않으리라. 우리에게 애니깽으로 알려진 에네깽 농장과 쿠바 원유를 선적하는 마탄사스 항을 지나 깊은 계곡을 연결하는 교각에서 잠시 멈췄다. 쿠바에서 가장 높은 다리라는데, 계곡의 경관이 수려하다. 대왕야자나무가 자생하는 계곡에 독수리들이 나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도 체 게바라를 판다.
호텔을 바꿨다. 편의적인 곳인데, 비용도 더 저렴하지 싶다. 아바나로 돌아와 구시가지르르걸었다. 구시가지는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문화유산이다. 그 거리를 걷는데, 한국인 단체가 말을 건다. 전교조 선생들로 한홍구 교수와 류창희 선생을 알아본 것이다. 어떤 쿠바인이 우리에게 보고 묻는다. 치노? 야폰? 치노는 중국인, 야폰은 일본인이다. 얼굴에 수십 개의 피어싱을 꽂은 중년의 남자가 기념촬영을 미끼로 1전환페소를 받는 대성당과 400년 된 식당과 헤밍웨이가 단골이던 선술집을 걸었다. 최근 스페인이 오랜 건물의 리모델링을 지원한다던데, 여기저기 수선하는 건물이 보행을 불편하게 한다. 다양한 갈색 돌가루를 붙여 역사 인물을 그린 건물 벽이 인상적이었다.
3명의 악단이 연주하는 식당에서 CD 한 장을 5전환페소에 구입하고 호텔로. 바로 나시오날 호텔로 가야 한다. 1인당 25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부에나비스타 쇼셜클럽’의 공연을 보기로 했다. 1주일에 한 차례 공연하는데 그날이 오늘이다. 영화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연주를 보려고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수많은 서양 관광객들이 운집했다. 50에서 60대로 보이는 연주자 십여 명의 노래와 반주, 그리고 이따금 펼치는 춤은 세련되고 훌륭했는데, 초창기 연주자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식당에서 들은 음악도 연주했는데, ‘관타라메라’는 언제나 듣는 이를 흥겹게 한다. 내일은 날이 갠다고 한다.
23일. 오늘은 바쁜 날이다. 잠깐이지만 환경도 주제로 끼는 날이다. 과연 하늘은 쾌청하다. 아침 먹고 방으로 오르는데 호텔 종업원이 은근히 접근한다. 시가를 사라는 거다. 오늘 시가 가게로 갈 텐데, 거기보다 값이 싼지, 질이 어떤지 알 수 없어 마다했다. 전환페소를 모으려는 몸짓이 애처롭다. 8시 조금 넘어 생태공원부터 향했다. 생태공원으로 접어드는 길에 링컨 흉상이 보인다. 노예 해방의 상징인물이라 그랬나. 링컨은 단지 표를 위해 노예해방을 역설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공동묘지 이름이 하필 콜럼버스란다. 동물원도 있는데 원숭이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원도 제국주의의 표상이라는 걸 반영한 걸까.
20분 만에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인구 220만 아바나 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메트로폴리탄 생태공원으로, 공원을 가르는 알멘다레스 강은 말레콘 해협으로 이어진다. 과거 해안에서 산으로 이어졌던 공업지대는 악취가 진동했는데 그곳에 나무를 심어 생태적으로 복원했다고 안내자는 설명한다. 210만 평에 달하는 생태공원은 특별한 시설물이 없이 자연 그대로 복원되고 있었는데, 나뭇가지에서 커튼처럼 바닥까지 늘어진 덩굴식물이 햇빛을 받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무를 위해 제거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 식물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보전한다고 공원의 담당자는 이야기한다. 높은 나무 위에서 날개를 펴고 깃털을 말리던 독수리가 이방인의 카메라에 응해주었다. 1940년에 개설돼 1995년부터 본격 복원한 생태공원은 40명의 직원으로 관리된다. 배정된 시간 내에 생태공원에 설명을 모두 들을 수 없는 일. 일행 중 생태공원에 관심이 많은 이는 드물다. 시간이 부족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공원 담당자는 한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희망하는데, 약속을 할 수 없어 또한 아쉬웠다. 여기를 찾을 기회가 있을까. 우리는 생태공원의 극히 일부만 보았다. 나머지는 어떤 모습일까. 아쉬움을 접고 시민들이 운영하는 유기농산물 시장으로 갔다.
수십 명의 농부가 가격표를 붙이고 자신이 가꾼 과일과 채소를 소박하게 판매하는 유기농산물 교환시장은 시민들로 북적인다. 얼리지 않은 돼지고기도 보인다. 한 평도 안 되는 매장의 농부들은 뿌듯한 얼굴이다. 이제 혁명기념관으로. 인디오 학살부터 혁명 승리의 환희까지 사진과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공간이다. 한홍구 교수의 관심사가 진작되는 순간이 연속된다. 현재 쿠바에 원주민은 남아 있지 않다. 모두 학살되었다. 타이노 원주민은 상륙한 백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건만 노예보다 더한 착취와 재미삼은 살육으로 멸종된 것이다. 당시 원주민의 무기도 전시돼 있다.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일 따름이다. 그보다 긴 칼 앞에 무참히 도륙된 원주민들은 백인이 퍼뜨린 질병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혁명기념관은 피델 카스트로의 장정과 무용담, 바티스타 정권 당시의 악랄했던 사회상을 보여주었고, 마지막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아버지 조지 부시를 조롱한다.
혁명기념관 밖에 최초의 혁명 전사들이 탔던 자그마한 보트 그란마와 총탄 흔적이 남은 차량 몇 대가 전시돼 있다. 이제 시가 상점으로. 앨 모르 요새 뒤편에 자리잡은 시가 상점으로 갔다. 각양각종의 시가와 쿠바 커피와 쿠바의 명주, 럼을 파는 곳이다. 럼은 저녁 무렵 들릴 아바나 최대의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면 될 테고, 일단 커피와 시가를 몇 개를 신용카드로 구입했다. 이어 유기협동농장으로 갔다. 거기에서 농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상에 올라오는 점심도 먹을 참이다.
아파트 근처 쓰레기장에서 아무 기술도 상식도 없는 서너 명의 시민이 1997년부터 시작된 협동농장의 이름은 알라마르. 지금은 3만 6천 평의 넓이에 120명의 조합원이 25가지 채소와 300여 품종의 과일과 화훼를 재배한다. 땅은 국가가 제공하고 생산에 종사하는 조합원은 급료를 받는다고 한다. 우선 밥부터 먹었다. 농장 조합원들은 밥에 팥죽을 부어 간단히 해결하던데, 우리 상은 휘어질 지경이다. 싱싱하기 그지없는 유기농산물 식단은 하나같이 새롭고 이채로우며 맛이 기막히다. 온갖 채소, 밥, 팥죽, 양파, 당근, 바나나, 오렌지, 파타야, 토마토, 그리고 돼지고기까지. 허용할 수 있는 한 배불리 먹고 일어나면서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남긴 음식이 농부들 보기에 미안한 노릇인데, 두고 가는 마음이 참 아쉽다. 언제 다시 저 음식들과 마주할꼬. 조합원의 투표로 선출된 총지배인의 안내로 농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기름진 농토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건강해 보인다. 가축분뇨를 이용한 퇴비 생산 현장을 보았다. 전혀 냄새가 없다. 인분은 왜 사용치 않을까. 협동농장에 배정된 시간도 짧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기 짝이 없다. 궁금한 점이 많지만 서둘러 나가야 했다. 쿠바가 자랑하는 의과대학을 방문할 순서가 기다린다.
아바나 시 외곽 해군기지를 개조한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시골 병원에 근무할 다국적 의사를 배양하는 곳이다. 경제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제안으로 쿠바가 역할을 맡았다. 1998년 지독한 허리케인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대도시 이외 인민들의 고통을 감싸안을 의사가 필요하다는 걸 통감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를 맞은 의과대학 관계자는 방문하는 한국인이 많았다며 인사를 한다. 국가의 완전한 지원으로 운영되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30개국의 가난한 젊은이가 만 명 가까이 모였다. 500명의 교수와 1000명의 직원이 해마다 1500명 정도를 선발한다. 그 중 미국인 학생도 있다고 한다. 6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자국의 시골로 배치되는데 현재까지 5000명 이상의 의사를 배출했다. 자국이나 쿠바에서 전문의 과정을 더 공부할 수도 있다.
질문이 이어졌다. 조용수 관장의 주장이기도 한데, 베네수엘라에 2만 명의 의사가 파견돼 발생한 쿠바의 의료 공백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현상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쿠바에 남은 의사로 충분하다는 거다. 나는 질문과 대답에서 이데올로기를 느꼈다. 의사의 부족과 그로 인한 인민의 불만은 통계나 의견을 수렴해 얻은 실체가 아니다. 조용수 관장 주변 쿠바인의 생각일 가능성이 짙다. 무역과 관련된 일을 하는 쿠바인이라면 생활에 여유가 있고 도시인일 터. 그는 시골의 의료사정에 민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질문을 받은 의과대학 담당자도 쿠바의 의료 수요를 제시하지 않았다. 의료 공백에 푸념하는 이는 아마 전환페소를 쥔 부자일 것이다. 그들은 인민에 비해 많은 세금을 낼 테고 자신이 낸 세금이 제 나라로 돌아갈 외국인에게 들어간다는 데에 불만을 터뜨렸을 것이다. 쿠바 정부와 대학 측은 그들의 불만을 확 무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미국의 무역봉쇄 조치로 의약품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자체 개발하거나 자연 의약품을 연구해 극복한다는 담당자는 관심을 보여준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일정 역시 갈증을 느낄 정도로 짧았다. 이제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를 만나러 가야 한다.
복잡한 아바나 구시가지 골목을 요리조리 걸어 찾아간 곳은 체 게바라 연구센터. 차별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사상이 아직 유효하다고 믿고 1990년에 시작한 연구센터다. 센터장은 체 게바라의 두 번째 부인의 첫딸로, 중년에 접어든 그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첫 부인과 그 부인이 낳은 딸은 사망했으며 자신은 쿠바인이라고 말하는 알레이다는 현직 소아과 의사다. 알레이다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 의존하는 사회를 꿈꾸며 센터를 운영하는 듯하다. 체 게바라의 사상보다 아이콘이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자본주의 상업성에 대처하기 어려움을 실토하고 출판으로 체 게바라의 사상을 전파하려 노력한다면서 몇 권의 책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궁극적 평화를 위해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알레이다는 사회의 기초가 되는 보건과 교육과 경제가 건강하기 위해 사회에 환원하는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어려서 헤어진 아버지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사상을 배웠고, 연구하면서 벅찬 감동을 받는다며 아버지에 대한 무한 존경과 자부심을 표출한다. 이어 “아버지는 자식의 가슴 속에 언제나 살아 있다”고 알레이다는 덧붙였다. 일행 중 한국의 군사 독재정권과 싸웠던 투사가 있다는 점을 알려준 우리는 감사 인사 나누고, 기념촬영 후 헤어졌다. 아바나 최대 쇼핑센터를 구경할 시간이다.
‘카를로스 플라자’라는 이름의 쇼핑센터는 우리 기준으로 규모가 작다. 우리 백화점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환페소만 받는 까닭에 대부분의 쿠바인에게 문턱이 높을 텐데 찾은 손님이 적지 않다. 상품은 수입품이 대부분으로, 유명상표의 신발과 의류가 근사하게 진열돼 있고 한국 가전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옛 모델인데 값은 우리보다 오히려 높다. 지하 식품매장에서 쿠바의 럼주, ‘아바나 클럽’ 7년산 두병을 구입했다. 11.5전환페소로 우리 돈으로 만 원이 조금 넘을 정도다. 오래될수록 갈색이 진하고 맛이 깊어진다.
악단이 없는 식당에서 저녁을 조용히 먹고 호텔로 돌아가 남은 술 조금 마신 후 잠을 청했다. 오늘이 쿠바 마지막 밤이다. 바쁘게 돌아다닌 오늘은 일정마다 아쉬움을 남겼다. 알도 카마쵸에게 인사동에서 구입한 선물과 사용하지 않은 일회용반창고와 약품들, 필기도구를 선물해야겠다. 물자가 부족한 쿠바에 남은 물건을 전해주는 것도 인민에게 요긴하다고 멕시코 칸쿤에서 만난 가이드가 귀띔하기도 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
1월 24일, 쾌청한 날씨다. 일정은 조금 남았다. 우리도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그 전에 혁명광장을 다시 갔다. 혁명기념탑에 오르려고. 전망대에서 보는 아바나는 푸르다. 나무와 숲이 많다. 전망대 아래로 독수리가 날아다닐 정도다. 내려가려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기다리다 지쳐 어두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520까지 셌는데 588계단이란다. 남은 시간이 부족해졌다. 다음 목적지로 서둘러 가야 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권총 자살하기 전, 1939년부터 21년 동안 헤밍웨이가 거주한 곳으로.
입장료는 4전환페소인데 사진 촬영을 위한 권리가 5전환페소다. 슬로베니아 관광객은 모두 촬영권 스티커를 가슴에 붙였지만 우리는 단 3명. 그래도 과감히 사진을 찍는다. 관리인들은 우리를 애써 못 본 체하느라 힘겨워한다. 나는 스티커를 붙였다. 고색창연한 목조건물은 방문하는 자식이 사용했고 흰색 시멘트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데, 그 건물을 헤밍웨이가 사용하던 모습으로 단장해 놓았다. 주변의 나무가 울창하고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소설이 절로 써질 것 같다. 방마다 사슴 머리가 서너 마리 이상 장식돼 있다. 낚시를 좋아했다는 걸 아는데, 사냥도 그랬나. 헤밍웨이와 살던 4마리 개의 묘지와 풀장 옆에 요트가 묶여 있는데, 그보다 우거진 나무 사이의 벌새가 흥미로웠다. 헤밍웨이 기념관의 기념품점에도 체 게바라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점심은 코지말 해변이다. 헤밍웨이가 단골로 찾던 식당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던가. 파란색 얼음이 들어간 칵테일과 마늘빵에 이어 따뜻한 카레덮밥이 나왔다. 여행 마지막 날 모처럼 입에 딱 맞는 밥을 만났다. 해변으로 걸었다. 카리브의 따사로운 햇살이 부셔지는 해변에 낡은 부두가 방치돼 있는데 고즈넉하다. 우리를 보고 초로의 거리 악단이 연주에 나섰다. 웃으며 지나치려니 카리브의 눈부신 햇살에 조응하는 5살 안젤라가 방긋 웃는다. 우리가 쥐어준 사탕에 “그라시아스!” 연발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추억으로 장식될 듯하다.
오후 두시. 우리 중소도시의 버스터미널과 같이 아담한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 면세점에서 목각을 샀다. 50전환페소. 쿠바 흑인 여성의 정렬적인 나신인데 표정이 살아있다. 화가로 보이는 판매원이 안목이 높다고 너스레를 떤다. “I think so!” 쿠바 세관에서 가끔 가방에 손이 타는 사고가 발생한다며 공항에서 가방을 비닐에 둘러쌀 것을 여행사는 권한다. 5전환페소다. 호세 마르티 공항에서 다시 멕시코시티 공항 1청사로, 1청사에서 셔틀 전철을 타고 2청사로 가 인천공항으로 짐을 보내려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다. 한참을 기다리니 결항이란다. 몇 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거기도 공항 증축 직후였다. 시스템이 아직 불안한가. 항공사에서 지정하는 호텔에 들러 잠시 눈을 붙였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25일이다. 예정에 없는 하루를 멕시코에서 더 보내고 새벽 5시에 항공사에서 제공한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오만가지 언어가 쏟아진다. 이른 시간이라 공항 면세점은 굳게 닫혀있다. 20분 연발하는 에어로멕시코를 타고 티후아나로. 같은 비행기로 한참을 날아 날자 변경선을 지났고, 1월 26일 오후 3시에 일본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그 동안 두툼한 책을 다 읽었더니 머리와 눈이 뻐근했다. 우리말이 살가워진 대한항공으로 인천공항에 착륙한 시간은 오후 6시 20분. 일행과 헤어져 집에 도착하니 10시 40분이다. 밀린 원고들을 써야할 시간이 기다린다.
2월 중순에 유럽을 가기로 돼 있던 일정이 내년으로 연기되었다. 쉴 시간이 생긴 것이다. 찰스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겨우 구입해 읽었다. 교보문고에 남은 한권을 샀다. 1960년 쿠바의 처지에서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 독파했다. 사놓고 차일피일 미루던 책이다. 책장에서 기다리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 1, 2, 3권을 꺼내 읽을 순서다. 복습인 셈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배다른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에게 정권을 넘겼다고 뉴스는 전한다. 피델 사후의 쿠바 앞날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우선 외교관계라도 복원하면 좋겠다. 모두 10박11일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주마간산이었다. 210만 평의 생태공원 중 우리가 들어간 면적은 몇 평일까. 우리는 멕시코와 쿠바를 어느 정도나 이해하게 된 걸까. 어렵게 기회를 얻은 여행. 무엇이라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눈에 불을 켰다. 문화와 역사, 사람과 환경을 두루 살피려 노력했어도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다시 찾아갈 기회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