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블라디 보스토크~모스크바 9288Km를 160시간 탑승 시베리아는 넓었다. 끝도 없었다. 며칠을 자고 일어나도 반복되는 눈 덮인 大平原(대평원)과 자작나무 숲…. 아! 시베리아의 웅장한 대자연에 할 말 을
잃었다. 2월10일부터 보름 동안 鐵(철)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 R)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東에서 西로 횡단했다. 횡단철도 시발점인 러시아 極東(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 기차가 6박7일을 쉬 지 않고 달려야 도달하는 엄청난 거리이다. 지구의 4분의 1을 횡단한 셈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취재는
작가 李文烈(이문열·53)씨 부부, 대외경제연구 원 세계지역연구센터 李昌在(이창재·49) 소장, 필자와 李起元(이기원) 朝鮮日報 사진부
기자 그리고 현지에서 합류한 한 막스(74) 선생이 팀을 이뤘 다. 취재팀은 극동을 시작으로 시베리아를 동서로 가르고, 우랄과 모스크바
등을 돌며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느낌을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일정을 짰 다. 대신 시베리아 횡단철도 한 구간도 빠짐없이 기차를 타고
完走(완주)하 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탑승시간만 해도 무려 160시간이
되었지만 그 시간들을 기차 안에서 보내기 로 결정한 것이다. 비행기나 자동차로 이동은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현지 일정과 계획은 모두
직접 짰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취재하기에는 보름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기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베리아 방문이 처음이라 러시아 특유의 정서를 맛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일단 비행편과 횡단열차 시간표를 기준으로 출발일을 확정했다. 호텔과 기 차표는 현지 여행사를
통해 구입했고,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서 전달받기로 했다. 취재팀은
서울발 대한항공기를 타고 2시간여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
는 것을 시작으로 시베리아 횡단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기내는 빈 좌석이 거의 없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있었던 때라 그랬는지 국내 사업가들과 러시아 비즈니스맨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 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풍의 도시이다. 도착한 날 기 온은 영하 25도. 그러나 워낙 단단히 옷을 입고 준비했기 때문에 추위를 느 끼지 못했다. 일행들에게 시베리아 추위는 살인적이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李文烈씨 부부는 전문 산악인의 도움을 받아 防水 등산화와 방풍·방한복 세트를 구입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前 도시 전체의 난방과 온수 공급이 중단됐다던
소식 을 전해 듣고 적잖이 걱정했지만 杞憂(기우)였다. 도시는 정상
가동됐다.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 김대식 상무는 일주일에 두 번
國籍機(국적기)인 대한항공이 도착하면 市 전체가 바빠진다고 말했다. 현지인 세르게이씨는 한국 비행기가 오면 블라디보스토크 경제가
들썩인다 며 한국인들을 태우려는 택시 운전사들도 한몫 챙기고, 호텔이 韓人(한인) 들로 채워진다고 말했다. 공항에는 가이드와 현지 韓人(고려인)들이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李文烈씨 등은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며 거리 양쪽에 펼쳐진 자작나 무 숲을 보고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베르살이라는 호텔에 여장을 푼 뒤 호텔 근처 카페에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李文烈씨는 러시아에 도착했는데 보드카를 마셔야 하 지 않겠느냐며 보드카를 주문했다. 李씨의 갑작스런 제안에 모두가 시베리 아 횡단 취재의 성공을 빌며 보드카로 건배했다. 약간 몸이 달아올랐지만 추위를 견디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블라디보스토 크 날씨는 추웠지만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생기가 넘쳤다. 일행은 극동과학기술대의 언덕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觀望(관망)했 다. 10년 전까지 외국인 출입이 금지됐던
블라디보스토크는 그 동안 느림보 식 발전을 해왔다. 일찌감치 외국인에게 개방됐던 나홋카에 비해 외국인들 의 발걸음도 한산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폐쇄도시였던 블라디보스토크는 개방과 더불어 극동의 시장과 경제 주도권 을 장악했다. 일본과 북한 등 나홋카에 공관을
두었던 국가들은 최근 블라 디보스토크로 영사관을 옮기려 하고 있다. 인구 80만의 블라디보스토크는 극동의 關門(관문)이자 극동함대사령부가 위 치한 곳이다. 러시아 軍의 위상이 격하된 데다 함대사령부 건물이 생각보다 웅장하지 않다고들 했지만 군항에는 아직도 수십
척의 군함들이 정박해 있 었고, 수병들의 들락거림도 많아 함대의 위용은 여전해 보였다. 그들의 능력과 자존심 역시 健在(건재)해 보였다. 함대사령부를 경계하는 수병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자 곧바로
『넬쟈(안 된다)』하며 달려들었다. 함대사령부 건물 왼쪽에는 잠수함이 놓여 있었다. 이 잠수함은 1차 세계대 전 당시 독일 군함 14척을
침몰시킨 가로 19m짜리 돌핀號였다. 1975년 박물 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에게도 인기지만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필수 관광 코스로 자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新韓村(신한촌)과 渤海 (발해) 유적지였다. 신한촌은
조선시대 극동으로 진출한 선조들이 최초로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고종 때인 1860년 초 러시아에 진출해 자 리잡은 韓人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6개 거리에 나눠 살며 韓人村을 형성, 대 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책으로 韓人들은 예외 없이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지금은 韓人村 흔적은 간 데 없고 스탈린 시대 때 지어진 아파트 숲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 한국 학자들을 주축으로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이 韓人들의 최초 정착지임 을 알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3시간 떨어진 우스리스크의 발해 유적지는 발해 시 대 대륙 진출의 터전이었음을 느끼게 했다. 시내의 본영과 市 외곽 라즈돌 로예 강변에 있는 城砦(성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덮여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단지 성채의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해 遺物(유물)들이 극동 시장에서 극비리에 賣買(매매)되는 등 발해 유적 지 발굴과 관리는 엉망으로 보였다. 취재중
대나무 모양의 긴 술잔 모양 발 해 유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람의 연락처도 받았다. 흥분 자아낸 대륙 열차의 등장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사흘째. 오전 일찍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을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앙광장과 극동과학기술대에서 시내 전망을 보고 곧바로 역으로 가
횡단열차를 타기로 했다.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이동하는 시간도 그렇고 사진을 찍는 데 시간이 소요됐다. 도시 전체를 표현하기 위
한 다양한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사진 기자는 도착 첫날 가져온 필름의 10 분의 1을 쓸 정도로 신경을 썼다. 블라디보스토크發(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출발시각이 오후 3시15분이었다 . 그러나 역장 인터뷰를 하기로 해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1891년
착공한 뒤 1896년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통과를 결정했 다.
1904년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1차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됐다. 중국을 통과하는 노선이 아닌 러시아 지역만을 통과하는 시베리 아 횡단 철도는 12년이 지난 1916년에 완공됐다. 아무르선으로 통하는 하바 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은 죄수들을 투입해 건설했다. 횡단 철도는 맨손 외 장비 동원을 전혀 하지 않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건설 했다. 아니 시베리아를 개척하는 데 마땅한 장비가 없었다. 맨손으로 길을 만들고 침목을 들어 날랐고, 그 위에 레일을 깔았다. 기차 출발 30분 전. 시베리아 횡단열차 로시야號는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 들은 탑승 전 철로에 정차해 있는 열차를 보며 웅장함을 느꼈다. 20輛(량) 의 客車(객차)에 기관실, 식당칸을 겸비한 대륙열차는 흥분을 자아냈다. 철 도 종착역 표시와 출발지 표시가 돼 있는
철로 옆 기념탑에서 횡단시작을 알리는 기념 촬영을 했다. 李文烈씨도 李昌在씨도 모두 흥분된 표정이었다 .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는 감회에 젖은 듯 열차를 응시하 는 시간도 길었다. 이제
우리는 시베리아로 간다. 기차에 탑승하기 전 여성 검표원(나중에 확
인한 이름은 스베틀라나 빅토로브나였다)은 표와 함께 여권 제시를
요구했 다. 여권을 검사하면서 이름이 맞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검표원은 횡단열차 탑승 후에도 줄곧 같이 생활해야 하는 차장이라 한번
밉보이면 줄곧 괴롭 힘을 당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엇보다 첫 인상을 좋게 해야 한다. 웃으면 서 그에게 호감을 사려 애쓴 것도 일행들의 안전과 편안한 취재를 위해서였 다. 그를 사로잡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을 테니까. 러시아 철도 취재는 위험성이 곳곳에 널려 있다. 경찰이 곳곳에서 보안·비 밀 시설을 이유로 사진찍는 것을 방해한다. 그들에게 트집잡히면 경찰서에 수시간 억류되는 것은 기본이다. 1999년 체첸 전쟁터로 가던 도중 실제로 그같은 경험을 했다. 취재팀은 룩스라는 2인용 침대칸에 탑승했다. 4인용·6인용 객차가 있지만 안전을 이유로 2인용을 선택했다. 2인용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탁자가 있다. 수건걸이와 짐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3평 정도의 공간 은 승객이 완벽하게 이용하도록 만들어졌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기차는 정시에 움직임을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생각보다 편했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안방과 같 은 편암함을 주었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본 풍경은 지루함보다는 즐거움이 었다. 「시베리아 여행은 겨울이 제맛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춥고 황량한 곳을 왜 겨울에 가야 맛이 난단 말인가」라고 반문 했었다. 그러나 이 의혹은 말끔하게 해소됐다. 역시
겨울이 제맛이었다. 눈 덮인 시 베리아의 평원, 타이가 삼림에 피어오른 눈꽃과 물안개, 열차에서 맞이한 日出(일출)과 日沒(일몰) 등은 실로 장관이었다. 모두 한데 어우러져 펼쳐 진 모습은 생생한 자연 다큐멘터리였다. 정말 겨울이 아니면 맛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은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평생 소원일 정도로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것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곳곳을 들러보는
일 정이란 부러움의 대상을 넘어선 것일 게다. 처음 흥분 속에 보았던
차창 밖 풍경은 눈보라, 자작나무, 호수 등으로 매일 지리하게 반복되었지만 드넓 은 벌판에서 불어오는 찬기운은 더없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茶 한 잔 더 팔려는 노력에서 변화 실감 열차에서 잘 사귀어두어야 할 사람은 3명이다. 객차장, 열차 총책임자, 그 리고 식당사람이다. 이들은 사귀어두면 반드시 도움을 받는다. 그것도 열차 타는 순간부터 내리는 순간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출발·도착시간이 아주
정확한 편이다. 60여 개의 역 을 통과하지만 停車驛(정차역) 도착은
거의 정확하다. 경유지 역에서는 20 ~30분 동안 정차 시각이 정해져
있다. 만약 지연될 경우 정차 시간을 줄여 서라도 최종 도착시간을 맞추는 식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도착시 간은 모두 모스크바
시간이 기준이다. 열차를 타는 순간 시계를 모스크바 시간으로 맞추는 것이 편리하다. 횡단열차는 안락한 편이다. 廣軌(광궤)인 데다 안정감이 있어 책을 보거나 비디오를 보아도 별 부담이 없다. 기차가 출발하면 차장은 가장 먼저 차표 再검사를 한다(차표는 도착지에서 돌려 준다). 그리고 침대 시트값을 30루 블(1달러 조금 넘는 액수. 1달러는 28루블임)을 받아간다. 잠시 후 베개 커 버와 침대시트 그리고
이불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는 일일이 객실을 돌아다 니면서 기차 안에 茶와 준비된 물품 등에 대해 소개한다. 茶 한 잔을 더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변화를 느꼈다. 요즘 이들은 茶나 음료를 많이 팔면
팔수록 혜택을 받는다고 했다. 기차는 한번 정차역 을 떠나면 기본이
3~4시간이었다. 장기간 열차를 타기 때문에 책을 읽는 시 간, 화장실
가는 시간, 식사시간을 미리 생각해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욕을
잃기 때문에 쉬 피로해진다. 기차 여행중 가장 중요 한 것이 화장실
이용이었다. 정차하기 10분 전에 차장은 화장실 문을 잠가 버린다. 그리고 출발 10분 후에야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정차 시간은 약 20분 정도, 이를 계산 잘못해 한번 화장실에 갈 기회를 놓치면 40~50분
정도를 꾹 참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행들은 모두가 이와 같은 경험을 한두 번이 아니라 기 차를 타는 동안 줄곧 반복했다. 기차가 정차할 때쯤이면 화장실 앞에 모여 소변을 참느라 난리를 피워야 했다. 이유는 기차의 움직임에 적응한 일행 들이 기차가
움직일 때 잠이 들고 기차가 정지하면 이상하리 만큼 예민하게 잠이
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자는 여성 차장에게 가끔씩 사정하며 비
밀리에 화장실을 이용하는 특권을 누렸다. 열차의 대소변은 철로로
쏟도록 돼 있다. 기차가 고속으로 갈 경우 밑으로 쏟아 분사시키지만
멈춰 있을 경우는 그대로 放流(방류)돼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停車時(정차시) 이용이 금지됐다. 기차에는 식당칸이 있다. 1등석 옆에 붙어
있어 승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토 록 했다. 식당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이용하는 사람은 외국인 들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쉽게 이용할 수 없으리 만큼 비쌌다. 1인당 5달러 정도하는 음식값은 그들에게 부담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러시아인 특유의 검소하고 경제적인 습성 때문이다. 횡단열차가 통과하는 역에서는 특산물에서 식료품까지 물건을 파는 사람들 이 즐비하다. 열차가 정차하면 열차 주변에 순간적으로 시장이 생긴다. 쌀 과 감자, 고기가 들어
있는 피로조크(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로케), 빵과 맥 주, 보드카, 물,
말린 생선, 꿀, 차 등 지역 특산물이 다 동원된다. 러시아 탑승객들은
기차가 정차하면 이들로부터 식사거리와 간식거리를 사 먹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다. 이는 횡단열차만의 妙味(묘미)이기도 하다. 기차를 탄
지 5시간 만에 저녁식사를 했다. 취재 방향에 대한 간단한 토론 을 마친 뒤 살랸카라는 돼지고기와 「쉬」라는 러시아 수프, 그리고 빵과
샐러드로 식사를 했다. 李文烈씨는 또다시 보드카를 제안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착부터 보드카를 맛나게 마셨던 그는 이미 보드카의 매력에 빠져든 것 같다. 그러나 적잖이 걱정됐다. 보드카가 좋다며 보드카를 마시는 사람들 중 취하지 않고 살아 나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또다시 시베리아 횡단 취재의 성공을 기원하며 보드카로 건배를 했다. 러시아식으로 한 사람이 건배를 제창할
경우, 문학적 어구를 등장시 켜 상당히 오랫동안 詩를 읊듯 몇 마디씩
하고 건배하는 식이었다. 일행들 은 닥터 지바고의 라라를 테마로, 안톤 체호프의 시베리아 마차횡단 얘기 등을 하며 두 시간 이상을 식당에서 보냈다. 기분이 적당히 좋아지자 객실 로 돌아왔다. 식당칸 절반은 물건으로 가득찼다. 아마도 손님이 없으니 화물을 배달하며 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물건 박스는 러시아어로 팔도 도시락
라면, 초코파이라고 적혀 있었다. 식당 종업원은 이르쿠츠크까지 배달할 것들이라고 말했다. 횡단열차에서의 첫날 밤, 모두가 피로했는지 일찍 잠이 들었다. 칠흑같이 어둠 속을 기차는 내달렸다. 모두 단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李文烈씨만 일 어나질 못했다. 그는 전날 한잔 또 한잔을 외치다 보드카의 魔手(마수)에 걸려 하루 동안을 보드카
신드롬으로 힘겹게 보내야 했다. 그는 부인이 물과 차를 수차례 마시게 하자 잠에서 깨어났다. 일행은 비라 라는 역에서 탑승 15시간 만에
처음으로 객실에서 나와 바깥공기를 마셨다 . 철로 주변을 산책했다.
그러나 영하 30도를 넘는 酷寒(혹한)과 살을 에는 바람에 5분을 채 견디지 못했다. 호흡을 하면 폐까지 찬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시베리아의 추위에 혼쭐 난 일행은 서둘러 객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얼굴을 씻고 컵라면과 장조림, 햇반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컵라면과 햇반은 아주 요긴했다) . 그리고 茶를 시켜 객실 한 곳에 모여 시베리아 개척사, 원주민 얘기, 볼 셰비키 혁명에 관한 불꽃튀는
대화를 나눴다. 한 막스 선생의 러시아사를 시작으로 자유시 事變(사변), 만주·원동에서의 독립군 얘기가 주를 이뤘다 . 한순간도 귀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막스 선생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역
주변의 抗日(항일) 운동과 러·日 전쟁 얘기 등 해박한 지식을 쏟아내
횡단열차의 재미를 배가시켰으며, 李昌在씨 의 소련 경제 얘기는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의 추락을 이해시켰다. 그는 계 획경제 하에서는
신발짝이 맞지 않아도 됐다며 한쪽발만 신을 수 있는 신발 을 만드는
웃지 못할 상황이 실제 벌어졌다고 했다. 하루 만에 벨로고르스크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대가 멀지 않은 곳이었다. 1960년대 中·러 갈등, 양국이 수정주의, 교조주의 논쟁으로 험악했던 분위기에서 양국은 국경에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美· 러 핵무기 사용 자제 움직임이 일던 가운데 1964년 중국이 核(핵)실험을
해 러시아를 더욱 자극시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중국이
1969년 3월 강이 얼어붙은 틈을 이용, 인민군 200여 명을 동원해 아무르강 가운데 러시아領(령) 다만스키섬을 기습한 사건은 양국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빠뜨 렸다. 러시아 국경 수비대의 포격을 받고 인민군은 퇴각했지만 러·中은 일 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이 사건은 베트남의 호치민 장례식에 참석한 兩國 頂上들에 의해 화해가 이뤄졌지만 양국 간 두고두고 앙금을 남긴 사건이 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한 번 정차하면 20~30분을 쉬었고, 그때마다 기관실을 교체하기도
했다. 그리고 3~6시간을 논스톱 운행한 뒤 정차를 반복했다. 기관사들은 보통 4시간을 운전한 뒤 교대했다. 열차는 시속 70~80㎞를 유지 했다. 횡단열차가 모스크바를 향해 운행하는 동안 철도 왼쪽에는
1㎞를 지 날 때마다 남은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부착돼 있어,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째 일행은 서서히 무료함을 느끼는 듯했다. 李昌在씨 는 기차 시간표와 도착역을 기록했고, 李文烈 부부는 책을 읽었다. 이럴 때 면 누군가가
반드시 『대화합시다』라고 제안했고, 모두 한 객실로 모여들 었다.
객실 한 곳의 침대 겸 의자에는 6명이 끼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커피와 차, 그리고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며 밤낮으로 대화했다. 낮 시간에 는 차와 커피, 저녁이면 알코올의 힘을 빌어 횡단열차의 무료함을 달랬다. 그렇지만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일행들의 대화는 끊이는 법이 없었다 . 러시아 혁명사, 시장경제로 전환한 러시아의 추락, 21세기 러시아를 주제 로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물론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가장 중요한 대화 주 제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대화가 끊이질 않는 다. 열차는 평생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특혜는 뜨거운 물이 제공된다는 점이다. 객차에 부착 된 대형 사모바르(찻주전자)에 항상 팔팔 끓는 물이 준비돼 있다. 이 물로 인스턴트 커피나 컵라면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햇반 등을 데워 식사 문제를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다. 개인컵과 1회용 식사용품을 준비해온 것 이 아주 유익했다. 특히 컵은 머리 감을 때 유용했다. 열차의 실내온도는 영상 20도를 오르내린다. 반팔 셔츠를 입어도 끄떡없을 정도이다. 뜨거운 물과
난방의 비결은 車掌(차장)의 부지런함이다. 차장은 석탄을 계속 태우며 물을 끓였다. 이 온기는 객실의 온도를 20도까지 유지 시켰다. 잠잘 때는 속옷만 입고 자도 충분할 정도로 난방이 완벽했다. 사모 바르와 객차에는 온도계가 부착돼 있어 온도를 보며 적당히 옷을 입으면
된 다. 눈으로 만든 시베리아式 냉커피 횡단열차를 탄 지 만 40시간이
지난 2월14일 아침 체르니셰프스키역에 도착 했다. 영하 42도였다.
러시아인들이 『홀로드나(춥다)』라는 말을 처음 했 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김이 마구 나왔다. 사진기자는 카메라 작동이 되는 지 걱정했다. 필름이 얼어 감기지 않고 바싹하고 끊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수동식 카메라가 작동은 하는 것 같았다. 디지털 카메라였다면 작
동이 이미 멈췄을 것이다. 필름을 갈아끼울 때는 객차로 들어가 작업을 했다. 바깥에서 필름을 도저히 갈아끼울 수가 없을 정도로 차가운
기온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하 42도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러 다니는 러시아 여인을 보고 일행들은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러시아인 취급을 받는다며
아이스크림을 사람수 만큼 사 돌렸다. 모두들 맛이 아주 그만이라고
했다. 한술 더 떠 鐵路邊(철로변) 눈을 한줌 들고 들어와 컵에 담아 녹인 뒤 커피 믹서를 타 냉커피를 만들어 먹었다. 이른바 시베리아式 냉커피였다. 처음 먹어본 맛이었지만 꿀맛이었다. 시베리아式 냉커피
맛을 누가 알리요. 이곳에서는 출발 때부터 줄곧 함께 타고 왔던 일본
관광팀과 얘기를 나눴다 . 대학생 4명, 교사 등 전국에서 합류한 14명이 10일 동안 횡단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본 가이드는 한국말을 하며 인사를 해왔다. 아무르 강을 지나 시베리아에 접근하며 오블루치예역을 지났다. 韓人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는 말에 러시아 횡단열차와 고려인(강제이주 후 고려인으 로 불림)들의 역사를 짚어보았다. 일본군이 극동을 점령했을 당시 1922년 오블루치예는 고려인 파르티잔 부대가 일본을 상대로 강력히 抗日운동을 했 던 곳이다. 韓人들은 러시아에서 抗日 활동을 위해 볼셰비키 군대와 협력했지만, 결론 적으로 볼셰비키 혁명과 抗日이라는 서로의 목적은 끝내 맞아떨어지지 않았 다. 고려인들의 역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비슷한 시점에 이뤄졌다. 韓人들은 1860년 극동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1895년 원동 대표로 최재경 씨와 정부 대표로 이범진씨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1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공산당 단체를 조직할 당시 韓人들은 동 방 소수
민족 대표로 참석했다. 독립투사 홍범도는 2년 후 레닌으로부터 권
총을 선물받기도 했다. 韓人들은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軍에 들어가
독일과의 전투에 참석했으며 , 1914년 고려인 최초 잠수함 부대원이
탄생하기도 했다. 고려인 청년들은 1920~1930년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극동을 벗어나 톰스크 등 시베리아 중앙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37년 강제 이주가 시작 되며, 이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내몰렸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탈린 사망 이후 고려인들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대도시로의 이주가 가속화 됐다. 현재는 45만명의 고려인들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다.
그들 은 발틱 3국에서 극동 시베리아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들은 사할린 韓人과 「큰 땅배기」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나뉜다.
사할린 사람들은 하 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등에 둥지를 튼 반면, 큰 땅배기들 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에 애착을 갖고 있다. 사흘밤을 잤을까.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어느 새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로 향하고 있었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간 것은 「凍土(동토)의 여정」이라는 예브게니 긴스부르크의 작품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 유형 지에서 20년을 보낸 그는 후르시초프 집권기인 1956년에 석방돼 책을 냈다. 유형지의 잔인한 생활상이 그대로 묘사돼 충격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 의 작품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모스크바 사브레메닉(현대) 극장에서 연극 으로 상연돼 다시 한번 러시아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다국적 열차가 지나는 국제 철도였다. 벨로고르스크역 에서 평양발
모스크바행 객차 1량이 부착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횡단열 차가
몇 량이 붙어 있나 하는 호기심에서 기관실에서 맨 끝 객차까지 걸어
가며 세어보던 중 뜻밖에 평양-모스크바라고 적힌 객차를 본 것이다.
영하 40도를 넘는 추위 속에 7분을 걸어가면서 발견한 기쁨이었다.
시베리 아 횡단열차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생각과 부산~서울~원산을
거쳐 횡단열차 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평양발 객차는
적잖은 흥분을 주었 다. 더구나 열흘에 한 번 있는 평양발 열차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부착돼 동시에 가는 경우는 웬만한 행운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평양발 열차는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합류 했다. 열차 총책임자는 평양을 출발, 핫산역을 거쳐 우수리스크로 왔다가 이곳에서 객차 1량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된다고 말했다. 경원선이 연결되면 이 길로 횡단열차와
연결될 것이다. 서둘러 일행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사진기자, 李文烈씨, 李昌在씨와 함께 북한 사 람들을 만나러 가자고 해 함께 나섰! 다. 평양발 객차는 폐쇄적이었다. 정차 하는 역마다 그리고
수차례 우리가 타고 있던 7번 객차에서 13칸을 건너 북 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발 객차로 가보았지만 문은 늘 잠겨 있었다. 金日成
배지를 달고 있는 북한 사람은 아예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러시아
차장은 『이곳은 잠겨 있다. 빨리 가라』고 말했다. 특히 몽골 횡단철도(TMR)와 중국 횡단철도(TCR)는 치타, 울란우데에서 시베 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된다. 울란우데를 지나며 몽골과 중국발 열차를 만나
는 행운을 잡았다. 중국 열차 승객들은 손을 흔들며 이름을 알려 주는
등 아주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틀 동안 북한 사람과의 접촉은 불가능했다. 정 차를 해도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으로 갔지만 유리 창 너머로도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출발지의 블라디보스토크 온도는 영하 25도였지만 시베리아로 갈수록 기온 은
점점 낮아졌다. 치타는 영하 32도, 체르니셰프스키는 42도였다. 이틀째 되던 날 기관실로 가 기관실 탑승을 부탁해 보았다. 기관사는 『驛長(역장 )의 허가 없는 탑승은 금지』라며 쌀쌀하게 대답했다. 흥정이
가능할 것으 로 생각했지만 통하질 않았다. 체르니셰프스키역에서 열차 총책임자인 알렉산드르 알렉세예비치(47)씨에게 정식으로 의사를
타진했다. 그는 역장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찬 바 람만 일으켰다.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깐깐한 인간상과 유사했다. 여간 까 탈스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계속 취재를 감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만 48시간이 지나자 처음 보았던 승객들, 승무원들과도 친분이 쌓였다. 옆 칸에는 치타 역에서 근무한다는 무추에프 보리스(37)씨가 타고
있었다. 그 는 노보시비르스크 醫大(의대) 출신이지만 3년 동안 의사로 일하다 6년 전 철도회사에 취직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의사
생활로는 생계가 곤란 해지자 역무원으로 轉業(전업)했다고 소개했다. 자신도 열차에서 청소하며 역무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치타역 과장이며, 월급 200달러를 받으며 비교 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기자의 부탁에도 사진을 찍기를 거부했던 차장 스베틀라나도 사흘이 되자 사진 찍는 것을 허락했다. 나흘째 아침은 울란우데에서 맞았다. 예정된 정차 시간은 30분이었지만 20 분으로 단축됐다.
정차시간은 예정과 달라질 수 있으니 가능하면 객차에서 멀리 가지
말아야 한다. 차장이 출발을 알리고 체크하지만 가끔은 열차를 놓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日出이 시작됐다. 그날 열차 횡단 중 가장 붉게 타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 었다. 시베리아 일출은 멀리서 지평선에서 동이 트자 반대편 바이칼호수 쪽 산맥이 붉은
광채를 띠었다. 마치 레이저 쇼를 연상케 했다. 빛은 大地 전체를 점차 붉게 물들인 채 서서히 떠올랐다. 시베리아의 일출 은 보통 7시30분을 전후로 시작됐다. 울란우데는 몽골인들이 많이 사는 곳 이다. 이곳에서는 갑자기 아시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마 주친 사람들을 보면 한국의 시골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시골 할머니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가는 모습과 유사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용 감자와 피로조크를 샀다. 李文烈씨 부인이 감자를 먹 고 싶다고 해 막스 선생은 삶은 감자를 몇 개 샀다. 아침 식사의 대화 메뉴 는
솔제니친의 귀향길이었다. 그가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시베리아
횡 단철도를 탔을 때 러시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본 러시아는 변해 있었다. 솔제니친은 소련의 해체가 정치인들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됐다며 정치인들을 맹비난했으며, 잃어버린 러시아, 러시아 국민들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했지 만 영향력이란 보잘
것 없었다. 솔제니친에게 러시아는 잃어버린 변질된 조 국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얼어붙은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식당 종업원은 바이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바이칼의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순간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처음 횡단열차를 타는 期待(기대)는 지난 사흘 동안 지루함으로 변했지만 바이칼은 다시금 일행들을
고무시켰다. 기차 타고 온 보람이 있었 다. 바이칼은 열차 창 밖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바이칼은 주변 타이가의 눈꽃과 야블로노이산맥과 호수 주변의 바위, 얼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 햇볕은 강렬했다. 호수는 파도결을 따라 파도모양으로 고스란히 얼어붙었 고, 호숫가 얼음조각은 에메랄드처럼 빛났다. 눈이 시릴 정도였다. 이곳에
서 처음으로 산을 보았고, 赤松(적송)의 무리들도 등장했다. 일행들은
객실에서도 바이칼의 신비를 보기 위해 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오전 8시부터 약 4시간을 줄곧 호수와 타이가로 된 절경을 보며
갈 수 있는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잠이 들었거나, 밤에 이곳을 지났다면 무 슨 얼마나 억울했을까? <img src="http://www.koplas.net/news/0106/4.jpeg" border="0"> 열차는 서서히 이르쿠츠크 역으로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정 확히 75시간 만이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평양발 객차로 내달렸다. 이곳 에서 정차시간은 20분. 이제 열차가 떠나면 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든 만나보려 했다. 문을 계속 두드리자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창쪽으로 다가 왔다. 『몇 명이 타고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二重(이중)으로 된 차창 으로 말이
잘 안 들렸는지 그들은 귀를 갖다 댔다. 몇 명이 왔느냐고 묻자 10명이라고 손가락을 펴보였다. 며칠 걸렸냐고 묻자, 답답했는지 이들은
내복 차림으로 객실 밖으로 나왔다. 『아니, 춥지 않아요?』라고 하자 『아 니, 안에는 더워요』라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들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기에 『여행중이다』고 했다. 『金正日 국방위원 장과 金大中 대통령이 4월에 頂上회담한다는데 알고 있어요』라고 묻자, 전
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에 볼 일이 있어 모스크바로 갔다가 10일 후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로 담배도 나눠 피우고 여유 롭게 대화했다. 『왜 한번도 밖으로 안 나오세요?』라고 묻자 『나갈 일이 없지요』라고 답했다. 그들이 『우리는 (일행들이) 처음 몽골 사람인 줄 알고 아는 척도 안했지』라고 말하자 크게 웃었다. 북한에 가족이 있는 李文烈씨는 뭔가 묻고 싶은 것도 많아 보였지만 시간이 없었다. 기차가 출발
하자 그들은 『모스크바에 오면 술이나 한잔 하자구』하며 악수를 하고 헤 어졌다. 경원선이 복구되면 그들과 보드카를 마시며 함께 보낼
날이 오겠지 라고 누군가 말했다. 얼지않는 앙가라 강 ‘시베리아의
파리 ’로 불리는 이르쿠츠크 시내 전경.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동서를 잇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요충지이다.천혜의 호수 바이칼의 유일한 지류인 ‘시베리아의 세느강
’앙가라는 도시를 좌우로 가르며 도시에 생명을 불러넣고 있다.앙가라강 상류 5 ㎞는 유속이 빨라 영하 30도가 넘어도 얼지 않는다./이르쿠츠크 상공 헬기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마자 마르크스 거리로 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필요 성을 최초로 주장한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백작의 기념비에 들렀다. 그리 고 바이칼호수로 직행했다. 시내에서
70㎞ 떨어진 바이칼은 신이 준 선물이 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바이칼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다.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특히 아름
답다고 말했다. 바이칼湖로 가는 도로는 적송과 자작나무 숲이 우거져 하늘 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곳곳에는 정부 관리들의 별장이 있었고, 대통령 관 저도 있었다. 이곳에서 옐친 대통령은 독일 콜 수상과
유례없는 사우나 회담을 해 이르쿠 츠크를 홍보했다. 같은 장소에서
오는 5월 러·일 頂上회담이 열린다고 했 다. 바이칼 호수는 얼어붙었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秘境(비경)이었다. 겹겹 이 쌓인 산과 마을들도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놀라운 것은 바이칼에서 브럇츠크
등으로 가는 뱃길이 겨울에는 자동차길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자동차들은 호수 위를 시속 40㎞가 넘는 속도로 내달 렸다. 바이칼 호수는
겨울이면 도로 표지판이 설치될 정도로 陸上路(육상로 )의 기능을 한다. 브럇츠크에 친척을 두고 있는 주민 포포프 이바노비치(4 0)씨는
겨울이 되면 친척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며 호수가 얼어도 유익하
다고 말했다. 바이칼의 명물은 오믈이라는 생선이다. 바이칼 청어로
불리는 이 물고기를 훈제해 맥주와 먹을 경우 전혀 취하질 않는다. 일행은 현지에서 오믈과 맥 주로 허기를 달랬다. 러시아에서 모처럼 먹는 별미였다. 李文烈씨와 李昌在씨는 바이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李文烈씨 부인은 모처럼 바이칼의 강렬한 아름다움에 도취한 것처럼 보였다. 때마침 일몰시 간이라 일행은 해지는 장관을 덤으로 보았다. 바이칼湖의 日沒은 아름답기 로 유명했다. 붉은 해가 호수 전체를 붉게 채색하는 모습과 저녁 노을의 기 막힌 조화를 목격했다. 바이칼湖에서 일행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저녁 식사 약속, 인터뷰
등이 줄지어 있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걸음 을 돌렸다. 李文烈씨 부부에게는 『가을에 한번 다시 와 아쉬움을 달래세요 』라고 말했다. 이르쿠츠크 역장과의 인터뷰는 갑자기 성사됐다. 역장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主기능은 物流輸送(물류수송)이며, 여객 수송은
赤字(적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수송량이 증가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활기를 띠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東시베리아 철도, 노보시비르스크 를 중심으로 西시베리아 철도로 분리된다.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우랄 서쪽으로는 우랄 철도국이 철로를 관리한다. 이르쿠츠크는 철도 운행 100주년 기념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는 모 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 구간이 150년, 이르쿠츠크와 주변 구간 운행이 100년이 되는 해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소련시절에 비해 물동량이 크게 줄었다. 각
철도국측 은 「밤(BAM)」 철도로 불리는 바이칼 아무르간 산업 철도를 연장시키고 있 다. 구리, 철광석 탄광을 찾아 철로를 연장 건설하며 적자 보전을 위해 몸 부림치고 있다. 철도국 직원들은 자원이 있고
경제성이 있으면 철도 건설을 주저하지 않는 다고 말했다. 그들은 현재 러시아 산업화와 가공산업이 증가하며 철도 물동 량이 증가하고
있다며 한반도의 철도 연결 문제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 다. 러시아 정부 역시 철도 유지가 적자지만 묵묵히 지원해왔다. 당장 적자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철도 기능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철도의 기능이 악화되면 주변 실업자가 양산돼 엄청난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지원을 우선시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헬기 취재에 나섰다. 막스
선생과 러시아 내무 국에 근무하는 고려인은 『위험하다』며 헬기 취재를 만류했지만, 사진기자 와 나는 『겨울 시베리아와 횡단열차 취재를 위해 꼭 필요하다』며 헬기 취 재를 강행했다. 다행히 항공사 아에로플로트社는 MI-8 기종을 제시하며 의 사를 타진했다. MI-8기종은 중대형으로 러시아 軍수송기로 주로 이용된다. 그런데 공항의 한
관리가 카메라를 보더니 사진취재는 경찰 허가를 받아야 만 한다고
말했다. 군사·보안 시설이 많은 이르쿠츠크에서 항공 촬영은 금 지돼 있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어디서 허가증을 만들어
온단 말인가? 나는 사진 촬영을 못할 경우 헬기 탑승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 헬기 탑승료가 꽤 비쌌기 때문에 헬기를 타지
않을 경우, 수익을 챙기지 못할 것은 뻔한 것이었다. 아에로플로트社
직원도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항공사 고위층을 연결해 경찰과
수차례 통화를 하더니 『OK』하며 전 화를 끊었다. 안전에 무관심한
헬機 조종사들 막스 선생은 일주일 전에도 공군 장군들이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며 헬기 탑승을 계속 말렸다. 시간상 취재를 나눠해야
했기에 모두가 헬기를 탈 수 는 없었다. 막스 선생과 李文烈씨 일행은
데카브리스크 유적지와 문학 박물 관으로 갔고, 李昌在씨는 경제인을
만나러 갔고, 나는 사진기자와 둘이서만 헬기 탑승장으로 이동했다.
30㎝이상 눈에 쌓인 공항 한쪽에서 헬기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조종 경력 20년 블라디미르 베즈노소프(48), 빅토르 코제뱌킨(50), 로만 보 로구신(32)이 조종을 맡았다. 기내를 보니 안전문제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 조종사는 계약만 이행할 뿐이라는 식이었다. 안전 벨트에 대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문을 열고 사진을 찍으려면
로프를 매달고 찍으라는 말만 했다.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홍수현장에서도, 강원도 삼척의 산불 취재를 하 며 헬기 취재를 수십 번 해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공포감은 몇 배 더했다. 다행히 조종사들의 경력을 보니 안전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헬기는 세 차례의 이륙에 실패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이륙에 어 려움을 겪었다. 프로펠러가 굉음을 낼 때마다 눈보라가 일었다. 네 번째
시 도 끝에 헬기는 100m 상공으로 치솟았다. 이르쿠츠크 상공에서는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상에서 볼 수 없었 던 겨울 시베리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산림지대에 숨어 있는 러시아정 교 수도원,
시베리아 상공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는 가스·정유 공장, 열병 합 발전소 등이 나타났다. 축구장은 빙상경기장으로 변해 있었고, 아이스하 키 경기를 하고 있었다. 헬기 취재의 압권은 약 70㎞로 운행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추적하며 공 중에서 마음대로 요리하며 취재할
때였다. 헬기는 시속 140㎞로 비행할 수 있었지만 속도를 줄여 약 2시간 동안을 선회했다. 바이칼에서 흘러나오는 유일한 강 앙가라의
상류의 약 5㎞는 얼지 않았다. 유속이 빠른 탓에 얼지 않아서 철새들의 낙원처럼 보였다. 수천만 마리의 철새들이 무리지어 움직 이는 장관을 연출했다. 機長(기장)은 바이칼을 보여 주고 싶어했지만 시간 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앙가라 강을 저공 비행한 뒤 착륙했다. 헬기 취재를 마치자마자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헬기 도착이 20분쯤 늦어지자 李文烈씨와 막스 선생은 혹시나(?) 하면서 우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르쿠츠크-모스크바 구간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호 역시 짝수날만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코샤크들이 건설한 도시
이르쿠츠크를 떠나면서 그 들이 최근 이곳에 몰려와 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샤크는 러시아 帝政時代(제정시대)와 운명을 같이했다. 돈江 정착에 성공, 토지를 소유하 고 군대를 조직화해 황제의
신망을 받았던 코샤크는 18세기 투르크와 싸움 에서 승리하며 기개를 떨쳤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면서 다수는 러시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일 부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혁명 이후 코샤크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스타브 로폴, 오렌부르크, 이르쿠츠크, 연해주 등에도 코샤크의 후손들은 옛 영화 를 되찾기 위해 결속하고 있지만 러시아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군사조직의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한때 맹위를 떨친 백군 장군 콜차크를 애도하며 레닌 동상
을 찾아가 돌을 던지고 페인트 세례를 퍼부은 것은 다소 이해가 가는
대목 이다.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18시간 만에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다. 이곳은 고르바초프의 한반도 선언으로 우리와 인연을 맺은
곳이다. 러시아 정치사 중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이곳을 방문, 한반도 현실을 고려한 정책을 해야 한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한국이 러시아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은 소련공산당 중앙 위 정책국이 한국과의 관계 수립을 검토하는 계기가 됐고, 1988년 서울 올 림픽 참가로 이어졌다.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지나며 레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00년
슈센스코에로 유배 당한 레닌은 유배지까지 따라온 혁명동 지 후르프스카야와 결혼했다. 그는 3년 동안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 등 3 0여
편의 논문을 썼다. 이 驛을 그냥 통과하기 아쉬웠지만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횡단열차 는 노보시비르스크로 향했다. 인구 100만의
과학도시로 가는 동안 폭풍우가 몰아쳤다. 차창은 완전히 성에로 가득찼다. 한기가 객실로 스며들었다. 눈 앞이 보이질 않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며 주의할 것은 반드시 객차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 이다. 문을 닫지않으면 바로 혼쭐이 난다. 객실내 온기를 순식간에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에 꼭 문을 닫아야 한다. 횡단열차는 또 흡연자를 슬프게 한 다. 객차와 객차 사이의 아주 춥고 소음이 심한 곳이 흡연장소다. 횡단하는 동안 아예 담배를 끊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李文烈씨는 愛煙家(애연가)였다. 그 역시 추위에
떨며 담배를 피울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때문에 식당에서 식사하는 동안 담배를 피우는 것에 아 주 만족해 했다. 식당칸은 유일하게
흡연이 허락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마린스키역에 정차하자 일행들은 시베리아 눈보라를 체험하러 철길로 나갔 다. 앞을 분간 못할 정도로 눈보라가 쳤다. 입김이 볼에 달라붙어 얼어버렸 다. 차장은 날씨가
추워지자 무척 바빠졌다. 손도끼를 들고 바퀴 주위의 얼 음을 쇠망치로 치며 깨부쉈다. 열차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막스 선생은
요구르트와 우유를 샀지만 상한 우유를 샀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
런 경우가 많지 않지만(이런 물건을 팔면 차장에게 박살난다) 가끔은
이렇 게 봉! 변을 당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驛 노보시비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역에 도착하자 熊膽(웅담)을 파는 청년이 다가왔다. 안주머 니에서 웅담을 꺼내 직접 잡은 곰에서 채취한 것이라며 100달러를 달라고 말했다. 관심을 보이지 않자 70달러까지 내려 불렀다. 李文烈씨 부인에게 권했지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베이징발 열차와
다시 遭遇(조우)했다. 중국 열차원 니예 유안(50)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와는 두 번째 만남이다. 이전 역에서 잠시 얼굴을 마 주했고,
약 20분 동안 얘기를 나눴다. 노보시비르스크역은 횡단열차가 지나
는 정차역 중 가장 아름다웠다. 초록색의 페인트로 단장한 역사, 대리석으 로 된 바닥은 한눈에 제정시대 때 건설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압권은 굴뚝(연기) 없는 연구소로 불리는 아카뎀고로독이 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미국 방문 후 미국의 과학기술의 발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학기술에서 미국을 따라 잡아야겠다는
野心(야심)을 보였다 . 당시 소련 과학아카데미 바브렌체프 박사를 시베리아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 노보시비르스크 과학센터의 테스크
포스 팀장을 맡기며 全權을 주었 다. 그는 젊은 과학자를 중심으로 과학 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2~3년 동안 물리 수학 화학의 人材(인재)들을 풀 가동했다. 연구소 50여 개 연구소와 400여 개 보조연구소가 줄줄이 들어섰고 아파트들도 속 속 건설됐다. 이곳은 특수한 지위를 받았고 특혜를 받았다. 모스크바로부터 물자 지원이 끊임 없이 이뤄졌다. 월급도 많았다. 아카뎀고로독은 이렇게 탄생했다. 핵 물리연구소 등 인재들은 핵무기 개발 등에 엄청난 기여를 해 러시아가 미국
에 匹敵(필적)하는 핵무기 기술을 갖게 했다. 세계적인 영화 거장 미하일로프는 「1년의 9일」이라는 영화를 통해 아카뎀 고로독을 일반에 알렸다. 9일 동안 물리 핵무기연구소 학자들이 핵무기를 만드는
과정과 방사능 누출 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생존 배우 알렉세이 파탈로프(73)가 주연을 맡았다. 아카뎀고로독은 페레스트로이카로 과학자들의 위상이 격하됐지만 최근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가 투자에 나서면서 제2의 황금기를 노리고 있다. 정 부는 막대한 예산을
과학 분야에 책정하며 과학자들을 달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학자들의 해외 이탈과 혼돈으로 마피아의 손길이 뻗어 있 어 쉽지는 않다. 마피아들은 아카뎀고로독의 건물을 인수, 부동산 임대업을
하며 과학도시를 점하려 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전력공급원인 오비江
수력발전소를 찾아갔다. 우랄에서 불어오 는 바람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현지인은 『우랄이 화났다』고 표현했다. 다시 횡단열차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한복판에는
러시아의 정중앙을 표시하는 곳이 있어 들렀다. 이곳에는 니콜라이
성인을 기념하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이곳을 들르다 보 니 열차시간에 쫓겼다. 다시 시베리야크號를 타고 다시 예카테린부르크로 향했다. 탑승 전 기차시간이 촉박해 서둘렀더니 온몸이 땀에 젖었다. 마침
취재팀이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시베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러시아 頂上으로는 유례없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옴 스크 등 시베리아의 세 도시를 방문했다. 한국 방문에 앞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직접 踏査(답사)할 정도로 그는 경원선과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연계 에 관심이 많았다. 예카테린부르크行 열차에서는 우크라이나 류보프 고향으로 가는 표요트르 사마폴(51) 외과 의사를 만났다. 40일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가족들은 경비가 많이 들어 함께 나서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1년에 한 번 고향에
가지만 가족이 갈 경우 2000달러나 든다며 가급적 혼자 간다고 말 했다. 시베리야크號는 기차 음식의 맛도 청결도 다른 횡단열차인 로시야號 나 바이칼號보다 나았다. 그리고 객실에 화분이 놓여 있는 등 승객들의 정 서를 포근하게 했다. 노보시비르스크를 떠날 때 영상 1도의 기온이었지만, 옴스크역을 지날 때는 영하 20도로 바뀌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으로 나갔다 숨도 못 쉬고 객 실로 되돌아왔다. 춥다고 했더니 차장 안나 알렉세예브나(47)는 고개를 흔 들며 『무슨 소리냐. 영하 20도가 추위냐. 영하 40도는 넘어야 춥지』라며 웃어댄다.
갑자기 횡단열차의 안락감은 무너졌다. 요동을 쳤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불안했다. 차장에게 물었더니 철도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노면 이 고르지 않은 현상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모스크바 도착 전 마지막 취재지인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하며 바빠졌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제3의 경제도시이다. 도시 경제의 82%를 군수산업 이 담당하지만 최근 러시아內에서 가장 효율적인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군수도시 건설로
도시의 소비재·서비스 분야가 취 약하지만 막강한 자원을 바탕으로
점진적 개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옐친 이 권력을 형성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예카테린부르크 공산당 서기장 을 거쳐 1990년대 초
소위 우랄파를 포진시키며 러시아 권력을 휘어잡았다. 도시는 300년
전 鐵이 발견되며 형성됐지만 비철금속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 으로
도시 기능은 더욱 강화됐다. 이곳에는 멘델레예프 원소주기율표에 나
오는 광물들이 모두 분포하고 있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하다. 1992년
중국을 필두로 미국, 영국 등 각국이 영사관을 개설할 정도로 유럽 과
아시아를 잇는 거점도시로 ! 인정받고 있다. 2만7000명의 재학생을
두고 있는 우랄大를 비롯, 30여 개의 대학들이 몰려 있는 인재 양성의
요람이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빅토르 코크샤로프(40) 대외경제국장을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해운으로 컨테이너 하나를 유럽으로 수송할 경우 1200달러가 들 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6분의1 비용밖에 들지 않는다』며 경 제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곳에는
1995년 전후로 남대문 시장 물건들이 시장 을 장악, 예카테린부르크
시장이 남대문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産 상품 이 인기였다고 했다. 그러나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 이후 급격히 쇠퇴했 으며, 600여 명의 조선족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남대문 상품 대신, 값싼 중 국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시베리아를 끝내고 유럽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1837년 신 작로가 통과하는
우랄산맥의 가장 높은 413m지점에 지리학자 타티셰프가 유 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증명하는 경계비를 설치했다. 경계비를 중심으로 유
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李文烈씨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점에서 한 발은 아시아를 다른 한 발은 유럽에 걸쳐서며 두 대륙에 섰다고 농담했다.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중 체감온도가 가장 낮은
곳이었다. 우랄 산맥에서 불 어오는 바람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강렬했다. 사진기자는 손이 다 얼었고, 나도 이곳에서 손등에 동상을 입었다. 우랄 경계비로 가는 길목에는 스탈린에 희생당한 자들을 기리는
慰靈塔(위 령탑)이 있었다. 메모리얼 콤플렉스였다. 1980년부터 시작된 모스크바-예카 테린부르크 間 고속도로 건설공사 도중 유골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 199 6년 이곳에서 위령탑이 세워졌다. 눈이 1m
이상 쌓여 있었지만 꽃을 들고 참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군수공장을 민영화하면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민영화의 기치를 올리면 외국인 투자가들이 금세 몰려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투자가 없었다. 그들은 군수공업을 기반으로 농기구를 생산하며 倒産(도산 )을 면했다. 이곳 군수공장에서는 우주선 발사용 로켓과
탱크, 장거리포 등 생산되지 않는 무기가 없을 정도이다. 군수산업과
민간산업을 동시에 발전 시키려는 입장은 확고했다.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관리는 최근 인도와 중동에서 탱크 주문이 시작되어 도시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며 공장 가동이 80%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코크샤로프 국장은 또 『무디스가 투자 안정지역 판정을 한 것을 계기로 코
카콜라가 6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7개 합작사가 등록을 하는 등
활발한 해외투자를 유치하고 있다』며 『이재춘 러시아대사가 경제인들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한국과의 관계증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예카테린부르크 과학자들은 한국의 기업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삼성이 현지 연구소와 합작으로 다이아몬드를 이용, 비디오헤드를 개발한 예를 들었다. 대우맨들은 현지에서 쌓은 경험과
인맥으로 벤처기업을 차리는 등 또 다른 비즈니스를 벌이며 새 삶을
꾸리고 있었다. 4년 동안 예카테린부르크 대우 지사에 근무했던 권봉엽(43)씨는 대우가 몰락하자 현지에서 自立을 시도하 고 있었다. 그는
대우가 뿌린 씨를 반드시 거둬야 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우맨들의
홀로서기는 예카테린부르크, 모스크바에서 계속됐다. 이세트강을 중심으로 칼로리브크네흐타 거리는 LG거리로 불렸다. 이곳에는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이 혁명군에 의해 몰살당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기념하는 대형 성당이 건축 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토볼스크 얼라나예프스카 탄광 갱도에 생매장된 니 콜라이 2세의 누이 엘리자베타 표도로바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작은 성당도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지난 100년의 러시아 역사가 反轉 또 反轉되는 혼란을 느 끼게 했다. 제정시대 데카브리트 유배지로, 러시아혁명 때는 마지막 황제가 유배돼
처형된 곳이고, 스탈린이 만든 수많은 혁명 기념탑이 건재하고, 스 탈린을 증오하는 스탈린 희생자의 위령탑이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성인으로 추대돼 상트 페테르부르크 성당에 안치된 것 등 누가 봐도 변화무쌍한 러시아 역사의 1세기를 반추하기
더할 데 없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눈을 흩날려버리는 파좀카라는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 바람이 불어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우랄산맥이 보였다. 예카테 린부르크를 출발한 열차는 마치
알프스를 달리는 것 같다. 우랄산맥을 넘으 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종착지를 향해 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럽으로 간다. 며칠째 보는
차창 밖 풍경은 오랜만에 산악지형을 달리는 느낌을 주 었다. 李文烈씨는 열차 밖 풍경에 싫증이 난 듯 『또 타이가네』라며 웃었 다. 李昌在씨는 『이제 1013㎞만 가면 모스크바에 도착합니다』라고 말했다. 철로 주변이 45도 각도의 경사진 山을 지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분위기가 전혀 달라보였다. 터널을 몇 차례 지났다. 우랄산맥의 타이가는 검푸른 모 습이었다. 그 산자락에 동물들의 흔적은 없었지만 곧
호랑이라도 한 마리 나타날 듯한 분위기였다. 타이가를 이룬 잣나무
수십 그루가 도미노처럼 줄줄이 뿌리째 뽑혀 있다. 턱 밑에 자란 수염
철길 주위의 타이가는 마치 팔기 위해 만들어 놓은 듯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펼쳐졌다. 열차길 바로 옆 산 속에는 누군가 스키를 타고
간 흔적들 이 자주 보였다. 25년째 열차 승무원으로 일한다는 유보프
세르게예브나(4 6)는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절경이라고 말했다. 드루지니노역 도착 전에는 아치형의 아름다운 다리가 보였다. 시베리아
철 도를 타고선 우랄산맥이 높다는 것을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우랄산맥의 가 장 높은 봉우리는 나로드나야山으로 1894m에 불과하다. 더구나 철로는 우랄 산맥의 가장 낮은 곳(주로 400m)으로 부설돼 있어
산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기차가 정차역까지 3시간 30분을 가는 동안 석탄과 석유 수송 차량은 동서 로 분주히 다녔다. 횡단철도가 러시아 경제의 大動脈(대동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대규모 유전지대가 쉴 새 없이 나타났다. 눈보라는 몇 시간 이 지나도 그칠 줄 몰랐다. 야나울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최후의 만찬을 했다. 李昌在씨가 샴페인을 터뜨려 시베리아 횡단을 축하했다. 모스크바 도착
4시간을 앞둔 새벽 5시. 마지막 정차역인 베코프카역에 도착 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크리스탈 유리와 장식품을 든 상인 50여 명이 영하 30도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로 몰려들었다. 너무 추워 나갈 엄두도 못 냈지만 그들은 승객들을 찾아 차창으로
다가와 물건을 들이밀었다. 모스크바 도착 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정차역의 모습 이었다! . 날이 밝자 여기저기서 핸드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文明의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모스크바 도착이 다 와가는 모양이다. 차창 밖을 보니 블 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며 보았던 풍경이 거짓말 보태지 않고 똑같이 재현됐다. 1980년 유명한 영화감독 미할코프는 시베리아의 생활사를 중심으로 한 3편 의 시리즈 영화 「시베리아다」를 제작했다. 시베리아 개척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체를 조명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인도 몰랐던 시베리아를 새롭게 이해시켰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도 끝이 났다. 턱밑에 자란 수염도 제법 길었다. 시베리 아 횡단을 하려거든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라는 어느 러시아인의 충고를 따랐다. 시베리아 횡단여행은
사람들과 정들게 했고, 자연을 이해하게 했 다. 그리고 많은 것을 알게 했다. 무엇보다 정신을 맑게 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관광 가이드 논스톱 횡단보다는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기차표 및 호텔 예약=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은 여행을 좋아하는 모든 사 람들의 소망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은 러시아는 물론 러시아의 사회 ·문화·역사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다. 미국·독일·일본 관광객 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지만, 체코와
폴란드 등 東유럽국가의 관광객들도 자 주 찾는 여행이다. 국내서는
프라이드, 세명 등 일부 여행사들이 횡단열차를 연계한 상품을 내 놓고 있지만, 완벽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 여행 전문사 인 프라이드社는 블라디보스토크의 「AP비즈니스」라는 여행사와 제휴, 횡 단 프로그램을 알차게 운영하고 있다. AP비즈니스는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 텔 김대식 고문이 대표를 맡고 있어 신뢰할 만하다. 블라디보스토크 비행편은 대한항공과 블라디보스토크 항공이
매주 네 차례 운행하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기차표와 호텔예약만 하면 3분 의 2 이상 준비를 끝낸 것과 다름없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논스톱 횡단은 6박7일이 걸려 부담스럽다. 하루 나
이틀은 기차를 타고 가고, 철도가 지나는 도시에서 내려 휴식과 관광을 하며 일정을 계속하는 것이 좋다. 철도는 극동과 시베리아, 유럽에
걸쳐 있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 사흘 동안 각 도시에 머물며 여행을
하면 금상첨 화다. 시발점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는 횡단열차 로시야號가 짝수날 오후 3시15분 (현지시각)에 출발한다. 하지만 횡단철도가 지나는 도시 간을 운행하는 기 차들이 있어 다른 열차를 타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 프스크, 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 등을 운행한다. 종착역인 모스크바 방 면으로 갈수록 시베리아 각 도시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따로 있어 이용하는 데 여유가 있다. 그러나 열차의 종류에 따라 서비스와 청결도는 달라진다. 로시야,
바이칼,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야크, 우랄호를 이용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이면 아무 편이나 문제가 없겠지만
품격 높은 여행을 하고 싶다면 열차의 1등칸, 즉 2인용 객실을 사용하면 그만이다. 요금은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 간이 200달러, 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 간이 100달러 정도. 3평 정도의 공간이지만 아주 편리하다. 2인용 객실은 화장 실이 2개 있어 이용에도 불편이
없다. 4인용, 6인용, 다인용이 있지만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과 같은
객실을 사용하기란 불편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을 한다면 4인용과
6인용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지갑과 소지품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기차표는 겨울에는 여유가 있지만 봄이 지나고 여름철이 오면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일정에 앞서 열차표 확보가 우선이다. 호텔은 대개 하 루 50~100달러 미만이지만 최근 신축 호텔이 들어선 이르쿠츠크나 예카테린 부르크 등의 고급호텔은 200달러 이상하는 곳도 있다. 배낭여행을 할 경우는 1박에 20~30달러 정도하는
허름한 호텔에서 자는 것 이 좋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현대호텔(001-7-4232-52-3140)에 투숙하면 된다. 언어에 어려움이 있다면
고려인협회를 통해 현지 안내와 호텔예약을 하고 사례비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협회는 각 도시마다 지부가 형성돼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뿐 아니라 러 시아 여행은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평생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반대의 추억이 될 것이다. ▲가볼
만한 도시=횡단열차를 타고 가며 들를 만한 도시들은 블라디보스토
크, 하바로프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 크, 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등이며 여행 성격에 맞게 방문지를 선택하면 된다. 도시마다 특색이 있다. 역사와 문화 순수 관광 등에 따라 방문지를 선택하면 된다. 예를 들어 韓人들의 실태를 알고 싶다면 고려인협회와 접촉 하면 된다. ▲먹어볼 만한 것=횡단열차가 정차하는 역은 어디든 순간적으로 市場(시장 )이 형성된다. 없는 것이
없고 먹을 만한 것도 꽤 있다. 잘만 이용하면 식 당 갈 일이 없어진다.
단, 동전과 10루블짜리 등 잔돈을 준비하는 것을 잊 어서는 안 된다.
잔돈이 없어 먹고 싶은 것을 못 살 때도 있다. 보드카와 맥주는 기본이다. 보드카는 「젤카」, 맥주는 「발티카」를 사먹으면 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와 피로조크(고로케), 시베리아 특산물인 꿀과 레
모닉이라는 줄기를 사 茶(차)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운치 있다. 바이칼 호수 인근 역에 가면 「오믈」(바이칼 청어)이라는 훈제 생선 맛을 보아야 한다. 겨울에 횡단할 때는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요구 르트도 먹을 만하다. 횡단열차 식당칸에서는 다양한
러시아 음식을 먹어보자. 「샤실릭」으로 불리는 러시아 소고기 꼬치구이, 「샬란카」로 불리는 러시 아식 돈가스, 닭고기 요리 등이 있다. 한 번씩 맛본 뒤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으면 된다. 검은 빵은
거의 의무적으로 따라오지만 빵이 싫으면 취 소하면 된다. 양배추와
양파를 넣어만든 「보르쉬」, 「쉬」 등 러시아 수 프들도 권할 만하다. 그러나 식당 음식은 다소 비싼 편이다. ▲준비물=장기간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준비물만 챙겨가면 생 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비누, 샴푸, 면도기, 세면도구는 기본. 타월은 준다.
뜨거운 물은 항상 준비돼 있어 1회용 차나 커피를 가져가면 편리하다. 슬리퍼와 반팔 티셔츠, 트레이닝복, 컵도 필수품(특히 컵은 뜨 거운 물을 부어도 잡기 괜찮은 보온 컵이 좋다). 컵은 머리를 감는 데 유용 하다. 세면대용 고무마개도 있으면 도움된다. 컵라면과 햇반, 참치·장조림·깻잎 캔 등은 아주 유용하다. 햇반을 데울 수 있는 중간 크기의 플라스틱 용기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젓가락 과 1회용
화장지도 가져가면 도움이 된다. 그리고 털모자가 필요하다. 털모 자는 눈 많은 시베리아에서 절대적이며, 防寒(방한)은 물론 지붕 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