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 판사공파 파조 이유헌 신득청
( ∼ 1392, 충숙왕 말년 ∼ 조선태조1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징수(澄叟), 호는 이유헌(理猷軒)이다. 문훤공 간재 신용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문정공 불훤재 신현이다. 시직재 신백청(矢直齋 申伯淸)의 아우이다.
천성이 영민하여 10세에 이미 문장에 통달했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령(掌令:종4품)이 되었을 때 순천군(順天君) 채홍철(蔡洪哲)을 논하는 상소를 올려 송(宋)나라의 제도와 의례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채홍철은 문과를 거쳐 출사, 충숙왕때 찬성사에까지 오른 현달한 유신(儒臣)이었으나 불교에 몹시 심취하여 자신의 저택에 선승(禪僧)을 거주하게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공민왕 10년(1361)에 전리참의(典理參議) 겸 대언(代言)으로 있을 때 중도(中道: 여기서는 불교를 지칭함)의 압력에 따라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이 파직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공민왕 11년(1362)에 사화를 입었고 이어 공민왕 14년(1365)에는 서적을 모두 압수당하고 유배되었다. 이처럼 큰 곤욕을 겪게 된 것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출산 도중 사망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노국공주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왕은 승려인 신돈에게 크게 기울어져 왕사(王師)로 삼았다. 권력을 장악한 신돈(辛旽)은 자신을 배척해 온 최영(崔瑩),이인복(李仁復)과 이구수(李龜壽)를 제거하고 불교 공격에 선봉에 나섰던 신득청의 책 상자를 일제히 수색하여 유학경전(儒學經典)과 신현 선생에 관계되는 모든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신현도 그의 고향 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둘러치고 출입을 막았으며 한동안 아들과 형제들과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 신현은 앞서 고승인 보조국사 보우를 비판했었다. 이미 불교계와 갈등을 빚었던 신현 일가는 신돈의 부상과 함께 호된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보우는 신돈을 사승(邪僧)으로 간주했지만 신현은 보우와 신돈을 싸잡아 배격할 정도로 철저한 반불교적인 입장을 취했다.
공민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중심을 되찾았다. 이듬해에 대사성 이색이 3년 상을 행할 것을 건의했으며 사부관(師傅錧)을 설치하여 신현을 왕의 사부로 초빙하도록 했다. 이와함께 그 아들인 신득청도 남대집현전(南臺集賢殿)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천거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불교와 유교 어느 세력에도 기울어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득청은 부친인 간재 신용희와 정몽주, 이색, 김혁, 이인복 및 형인 신백청과 더불어 강력히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였다. 또 산헌부로 하여금 대책을 세워 글을 올리도록 하고 김삼근과 이석등 제자들로 하여금 연달아 상소를 올려 신돈의 당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왕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공민왕 21년(1372)벼슬을 버리고 영해(寧海:경상북도 영덕군)로 낙향했다. 이에 왕은 신돈을 반역죄로 주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우를 국사로 삼았다. 공민왕은 다시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 균형을 취한 것이다. 철저한 반 불교주의자인 신득청은 이에 불만만을 품고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4년(1378)에 3번이나 부름에 불응할수 없어 이부상서에 취임하였으나 권력다툼에 염정을 느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봉정산(鳳停山)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신득청의 집 당호인 봉정재(鳳停齋)는 이색이 써준 글씨이다.
우왕14년(1388)에 왕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 혁명세력에 내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날조하여 ‘폐가입진(廢假入眞)’을 주장하였다. “거짓을 폐하고 진짜를 세우자”라는 슬로건 아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제20대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세우고 곧바로 이들 부자를 죽였다. 이에 신득청의 중부인 신치와 백형 신백청이 들고 일어나 왕통을 논하였다가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신득청의 집도 또한 무사하지 못할 즈음에 이색, 정몽주, 유번(柳藩)등 동료들의 구원으로 간신히 목숨만을 구하게 되었다.
드디어 공양왕 4년(1392) 7월에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비운에 통곡하다가 동해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시신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문인인 김삼근, 김계권(金継權) 부자와 이주(李周), 송극기(宋克己), 정양필(鄭良弼), 김정(金鼎), 김진양(金震陽) 등이 신득청의 의관을 거두어 초혼장(招魂葬)을 모셨다.
포은 정몽주가 일찍이 신득청의 인품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맑기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같고 淸如滾滾水
곧기가 낙낙장송과 같다. 直似落落松
그러나 곧아도 뽀쪽한 촉이 없고 直而無尖鏃
맑아도 심히 차갑지 않다. 淸而無激冷
정몽주는 이 시에 부연하여 “가히(인품이) 너그러우니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可以寬得保於世)”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거센 정치의 회오리는 온건한 정치 성향의 정몽주도 신득청도 비명에 가게 만들었다.
조부인 문정공 신현은 ‘동방의 공부자(孔夫子)’였고 부친인 간재 신용희는 선친의 학문과 뜻을 이어 받았으며 그 손자인 신득청은 망국을 당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순국함으로써 아름다운 자취를 꽃처럼 드러냈다.
신득청이 공민왕 20년(1371) 겨울에 지은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당시 불도(佛道)가 성하여 아첨하는 무리들이 충현들을 능멸하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처신을 바르게 하고 뜻을 행하라(致身行志:처신행지)”하라고 왕과 신하들에게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글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들은 순빈재(純斌齋) 신예(申藝), 전리령(典理令) 신자악(申自嶽), 해우거사(海隅居士) 신자성(申自誠)이 있다.
뒤에 두문동(杜門洞)서원에는 배향되었으나 두문동 72현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소재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두문동서원지,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