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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29 제자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1975년에 발표한 <임신한 남자> 이후, 30년만에 이은집 쌤의 문학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지난 2004년 한국소설 11월호에 발표해서 화제와 좋은 평을 받은 본격문학 단편소설을 올립니다!
이동주 제자! 그간 그대가 야한 것을 밝혀 올린 <어야꽁>과 비교해보고, 호프 한잔 사라잉! 카드는 내가 찍을껭! - 이은집 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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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코리안나이트(2)
-붉은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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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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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집
충남 청양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71년 창작집 <머리가 없는 사람>
으로 문단 데뷔. 그후 <학창보고서>
<학창의 괴짜들과 꾸러기들> <눈물
한 방울> <옛날 선생님과 요즘 학생
님들> <하이틴 낙서첩>등 22권의 저
서를 발간함. 그외 방송작가와 작사가
로도 폭넓게 활동함.
작가의 말
요즘 세상이 너무나 시끄러운 것 같다. 어디 세상뿐이랴?! 내가 총무를 맡고 있는 초중고동창회 같은 작은 단체에도 갈등과 미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현실상황에서 출발했다. 말하자면 지금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나름대로 <미래사 가상규명>으로 바꿔놓고 보니, 20여년만에 처음 쓰는 작품인데도 단숨에 끝을 맺을 수 있었다. 다음에는 이 작품과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한번 소설을 써보고 싶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의 8번출구를 나와서 세종홀 사잇길을 끼고 광화문 네거리에 다다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웬일이야?>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몇 년전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 옆에 그와 비슷한 또 하나의 동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나는 어린 시절에 동네 어른들이 얘기하던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좀더 가까이 두 동상의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아니! 뭐라구...?>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새로 생긴 동상 주인공의 높다란 받침대에 <영웅 원균 장군>이란 여섯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마치 누군가 예고없이 고무망치로 나의 뒷통수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런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내 곁을 스쳐가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저 말씀좀 하나 묻겠습니다!”
“뭐요?”
60 중반쯤 되어 보이는 신사는 조금은 귀찮다는 투로, 아니 갈 길이 바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점차 높아지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 새로 생긴 동상이 <영웅 원균 장군>이 맞습니까?”
“뭐요?!”
신사는 아까보다 한층 높은 목소리로 나에게 대꾸해왔다.
“...아니! 알면서 그건 왜 물으시오?”
“어떻게 <성웅 이순신 장군> 옆에 저런 동상을...?”
이윽고 내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자, 신사가 오히려 더욱 기가 막히다는 투로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서 온 사람이오? 외국에서 살다 온 해외교포라도 다 알만할텐데...! 바로 과거사 진상규명의 결과 새롭게 밝혀진 역사의 복원으로, 우리가 자랑스럽게 새로 세운 동상이지 않습니까?”
“예? 그...그래요? 가만...! 언젠가 친일 무슨 법안 얘기는 들었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서 아득하게 흐트러진 기억의 실마리를 풀어보려 애썼지만,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자 신사가 웃음을 띠며 설명했다.
“바로 그거죠! 그런데 일제시대의 친일파 행적을 파헤치다 보니까, 그 뿌리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서, 결국은 임진왜란때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종래 우리에게 알려져 온 원균 장군에 대한 평가는 잘못된 것이었음이 밝혀졌고, 그래서 진실된 역사바로잡기와 화해의 차원에서 얼마전 여기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원균 장군의 동상도 세우게 되어 얼마나 화제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걸 묻는 댁은 뉘시오? 실례가 되는 질문이오만, 그 동안 어디 큰집에라도 가서 몇 년 살다 나왔나요? 하하!”
이윽고 신사는 껄껄 웃으며 나를 뒤로 하고 사라졌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두 동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완연하게 노란 색으로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 앞에 의좋게 서 있는 <성웅 이순신 장군>과 <영웅 원균 장군>은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하하하! 이제야 우리 두 사람은 구원을 씻고, 그 옛날 젊은 시절의 죽마고우로 돌아오게 되었노라!”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해서 나는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바로 조금전에 내가 말을 걸었던 신사였다.
“저... 가다가 생각하니 당신이 하도 이상스러워 다시 왔소!. 보아하니 그리는 안 보이는데 어찌 세상 물정에 그토록 깜깜이신가요? 혹시 해외교포라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실은 이 사람이 관광안내 자원봉사자랍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그 순간 외국여행을 다닐 때보다도 더욱 어리둥절한 상태에 빠졌으므로, 그 신사를 따르기로 했다.
“자! 그럼 더욱 재미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신사는 코리아나호텔을 지나 덕수궁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런데 또 하나 의아한 광경이 벌어졌다. 평소 이 시간처럼 러쉬아워에는 언제나 사람들과 차량의 물결로 붐비던 이곳의 차도와 인도가 한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잠깐! 그많던 인파와 교통체증은 왜 사라졌죠?”
“아! 그럴밖에요! 사람들은 거의 땅속으로 들어갔고요...!”
“옛? 사람들이 땅속으로 들어가다뇨?”
“하하! 여보슈! 내 얘긴 이제 시민들의 출퇴근은 거의가 지하철을 이용한다는 말씀이예요!”
“아참! 그렇군요? 그럼 그 많던 차량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허허! 참! 당신은 정말 어느 나라에 살다 오셨기에 이리도 깜깜절벽입니까? 재작년 유가파동에 자가용은 거의 중고차로 외국에 수출하지 않았습니까?”
“중고차로 수출을 했다구요?”
“예! 기름 1배럴에 100달러를 돌파하는 데야 어쩝니까? 그러니 너도 나도 차를 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된 거지요!”
“아하! 그럴 법도 하네요!”
“하지만 요즘 텔레비젼같은 방송매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의 행복지수는 훨씬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죠?”
“그야 자가용을 굴릴 때보다 지출은 줄어 들고, 출퇴근 시간은 훨씬 단축됐으니까요!”
“하기사 옛날에 서울의 교통지옥은 정말 끔찍하고 짜증이 났죠!”
나는 다시 신사에게 이런 대꾸를 하며, 그를 따라 걷다가 바로 시청앞 잔디광장에서 다시금 눈이 휘둥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또다시 상상못한 새로운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하하! 역시 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 여기가 서울 시청 앞이 맞습니까? 이건 도무지....!”
나는 아까 광화문에서 <영웅 원균 장군>의 동상을 보았을 때처럼 놀라서 신사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그래서 서울 시민들이 재밌다고 야단인 거겠죠! 우리들에겐 벌써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풍경입니까? 이 서울거리에서 마술사처럼 능란한 솜씨로 수신호를 하는 교통순경의 모습 말예요! 그래서 남북회담때 우리 매스컴에도 자주 나왔던 평양의 그 여자 교통순경을 파견 요청한거지요!”
과연 틀림없었다. 넓은 평양거리에 오가는 차량이라곤 가뭄에 콩나기인데도 마치 올림픽 체조선수처럼 절도있고도 재빠르게 수신호를 하던 바로 그 여자 교통순경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 교통체제에선...!”
나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현란한 수신호 솜씨에 압도된 때문일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추억의 교통순경>은 지금 서울의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요!”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긴 합니다만...!”
나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신사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처음엔 몇몇 신문들! 일테면 메이저 신문들에선 아우성을 치기도 했죠. 그러나 모든 건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통행금지 시절에 통금을 풀면 범죄가 난무할거라고 떠들어댔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시민생활이 훨씬 편리하고 오히려 안전해진 것과 마찬가지지요! 하하!”
“맞아요! 저 역시 그 시절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한번은 우리 큰아이가 한밤중에 곽란이 나서 금방 죽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통행금지 시절이니 어쩝니까? 새벽에 해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는데, 그야말로 지옥같은 밤이었지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사에게 또다시 맞장구를 쳐댔다. 그러자 신사도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듯 나에게 더욱 친절하게 말을 건네왔다.
“자! 그럼 이보다 더욱 새롭고 특별한 곳을 안내하지요. 따라 오세요!”
이윽고 나는 그 신사를 따라 남대문시장의 한 빌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30대 시절에 가본 후로 처음이었는데, 무슨 무슨 쇼핑몰이란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건물 안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는데, 그는 관광안내 가이드답게 잘도 나를 이끌고 다녔다. 이윽고 나는 한 건물에서 음식점으로만 가득찬 맨 꼭대기층으로 안내되었다. 순간 나는 정말로 너무나 새롭고 특별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음식점 간판의 글씨체와 색깔부터 아주 생소로웠는데, 순 한글로만 된 이름과 시골 읍내처럼 촌티나는 간판이었던 것이다. 그중에 나는 <묘향산 산채밥집>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러자 무슨 종교를 믿는 사람들처럼 흰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은 여종업원이 무뚝뚝하게 건네왔다.
“두 분입네까? 날래 들어오시라요!”
그러자 그 신사가 내 귀에 대고 재빠르게 속삭였다.
“여기가 바로 평양 먹거리집들이 있는 곳인데, 오픈한 지 얼마 안됐지만, 요즘 인기가 대단해요!”
“네? 근데 왜 손님이 파리날릴 지경입니까?”
“그건 아직 식사시간이 안 돼서지요. 또 손님을 오는대로 다 받질 않고 한정 인원수가 다 차면 그냥 음식점 문을 닫아 버려요. 문전성시로 바글대는 우리네 맛집과는 영 달라요. 그러니까 싼값에 조용히 식사하는 장소로는 최고지요. 하하!”
나는 정말로 이 <특별하고 새로운 곳>에 대하여 의문이 솟구쳤다. 언젠가 그 동안의 탈북자가 1만명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들이 힘을 모아 이런 이색적인 음식점들을 냈단 말인가? 더구나 이미 오래전에 탈북한 누군가 <모란각>이란 냉면집을 내어 인기를 끈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가 눈치챈듯 얼른 이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에, 우리 측이 건설한 개성공단에서 지금 수백억 달라의 수출이 이루어져, 남북이 경제적 숨통을 트는데 크게 기여하는 건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마찬가지로 이제 북측 사람들이 여기에 내려와서 이런 음식점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오?”
“하지만 나로서는 뭐가 뭔지 도통 이해가 안되는군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린 내 기억의 끝자락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때 신사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허! 난 이제는 꼴통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 꼴통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아! 한때 금방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종말론자들이 있었습니까?”
“그럼요! 아마 특히 노친네 중심으로 1,500명인가 대규모로 집단시위를 한 적도 있지요.”
“근데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나도 잘은 몰라요. 상당수는 이민을 가버리고, 아마 나머지는 다 죽었다지요? 허허허!”
“엑? 죽다니요?”
“원! 당신은 참 고지식하시오! 내 말뜻은 세상의 흐름에 밀려서 죽어 지낸다는 말이오!”
“예! 듣고 보니 알 것도 같습니다.”
이윽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자, 신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 국제정세가 어떻습니까? 서구는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이 서로 테러전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너무나 금시초문이어서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이라크 전쟁 후에 알카에다의 무차별적 인질극으로 미국이 곤경에 처했던 사실은 알고 있지만...!
“...따라서 지금 동북아 정세도 아주 엄청나게 변화되어 가고 있지요! 아마 머잖아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유럽의 <유로>처럼, 하나로 뭉쳐 <동북아 3국연합>이 탄생할 거라고, 이미 3국간에 물밑 조율이 진행중이라고도 합니다!”
<아아! 이거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어떻게 이런 상황들이 벌어진단 말인가?>
나는 그 신사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광화문 네거리 <성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 옆에 <영웅 원균 장군>의 동상도 세워진 마당에, 어떤 일인들 벌어지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정말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까 아주 굉장한 시사프로를 듣는 것 같기도 하군요.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동아 공영>을 내세워 식민정책을 썼는데, 이제는 그것이 <동북아 공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참으로 놀랍고도 새로운 국제질서의 전개가 아닐 수 없군요!”
“그렇고말고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그간의 고도성장에 따른 후유증이 최근 들어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뜻에서 <동북아 3국연합>의 발상은 하나의 구원책이 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지요!”
“예! 마치 지난 날 우리가 북측에 너무 퍼준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아까 말씀대로 지금 개성공단에서는 수백억 달러의 수출을 올린다니까...!”
그때 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대꾸가 튀어나오자, 그 신사는 크게 너털웃음을 웃고나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데 처음 만난 순간부터 궁금한 질문이오만, 당신은 해외동포도 아니면서 어찌 그리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른단 말이오?”
순간 그의 질문은 나의 뇌리에 불화살처럼 날아와 박혀 뇌관을 터뜨린 듯, 나의 상실되어 버린 기억의 문짝을 열어젖혔다.
“아! 예에! 이제야 모든 것이 물빠진 갯벌처럼, 제 망각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군요.”
그렇다! 몇 년전 나는 마누라 등쌀에 새로 분양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원래 농촌 태생인 나는 흙이 좋아서 단독주택을 고집해왔는데, 마누라의 소원은 끈질기게도 <아파트 타령>이었다. 그래도 젊어서는 이불속 싸움에 이겨서 그럭저럭 버텼으나, 60줄에 들어서자 별 도리가 없었다. 해서 나는 수십년을 살아온 수유리 도봉산자락 아래의 단독주택을 팔아치우고, 소위 부동산 투기지역으로 꼽히는 한 아파트단지로 왔는데, 과연 분양을 받아 이사오는 사이에 집값이 갑절로 뛰었고, 또 이사하여 겨우 일년을 지나자마자 1억이나 더 얹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오직 살고 있는 한 채뿐인 경우의 부동산은 아무리 값이 오른대도 빛좋은 개살구로서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아파트 재산세가 예년보다 세배로 뛰었다. 말하자면 현시가대로 집값에 비례해서 재산세가 매겨졌다는 것이다.
“아니! IMF보다 더 어려운 때에 이 무슨 날벼락이야?”
그 바람에 아파트 지역마다 난리가 났다. 물론 내가 사는 곳에도 매일 반상회가 열렸는데, 그러던 어느 날 마누라가 나에게 명령하듯이 부탁해왔던 것이다.
“드디어 우리 아파트도 들고 일어난대요! 내일 구청으로 데모를 간다니까 당신이 따라가 보구려! 난 내일 산행인 것 아시죠? 명색이 산악회장이니까 당신이 대신 나가 줘야지 어쩌우?”
아닌게 아니라 이미 명퇴한지 5년여가 넘는 나로서는 마누라의 부탁 아닌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알았어요! 내가 가리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 날 아파트 관리실로 모이라는 시간에 나갔다. 가보니까 거의가 부녀자들인데 몇몇 부녀회원을 빼고는 나처럼 60줄에 들어선 노인축들이었고, 심지어 허리가 바싹 꼬부라진 80대 할머니와 할아버지 마저 눈에 띄었다.
“네에! 이런 데모에는 어르신들이 앞장서셔야 더욱 효과가 있다구요! 아무리 경찰이라도 이런 어르신들한테야 설마 어쩌겠습니까?”
부녀회장을 비롯하여 주동하는 사람들은 신바람이 난듯이 <투쟁! 재산세 인하!>라고 쓰인 붉은 머리띠와 <재산세 대폭 올린 구청장은 물러가라!> <지금 당장 재산세 30% 인하하라!>는 등 몇 가지 구호를 내세운 어깨띠 그리고 피켓이 배부되자, 분위기는 차츰 술렁이면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로선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인지라 여간 쑥스럽지 않았지만, 기왕에 나온지라 그들처럼 붉은 머리띠와 어깨띠를 두르고 함께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선생님도 나오셨어요?”
이때 누군가 말을 걸어와 돌아보니, 바로 아파트 맞은편 집의 아주머니였다.
“예에! 집사람이 산에 가서 대신에...!”
나는 괜히 부끄러워서 우물쭈물 대답하고는 얼른 뒷줄로 빠졌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데모의 대열이 제법 갖추어지고 큰길로 나서자 여기저기서 용감스런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줄을 맞추세요! 차도로 들지 말고 인도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뿐 지나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자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야! 너만 바쁘냐? 우린 더 바쁘단 말이야!”
그리고 대열은 차도를 멋대로 침범하여 지나가던 차량의 행열을 멈추게 했다. 그런 무질서한 대열로 어느덧 우리들은 구청에 이르렀다. 한데 이미 누구의 보고를 받았는지 구청 정문앞에는 공익요원들이 줄지어 막아서고 있었다.
“비켜요! 우린 구청장을 만나러 온 주민들이란 말야!”
이때 앞장선 부녀회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집회 허가를 받은 장소는 저어기 공원이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게서 떠들어봐야 구청장 귀에 우리들 목소리가 들리기나 해?!”
“옳소! 당장 구청장보고 나오라고 해! 나와서 이렇게 터무니없이 재산세를 올린 이유를 대보란 말야!”
“더 길게 말할 것 없어요! 구청장은 책임지고 물러가라!”
순식간에 데모 현장은 이런 저런 아우성으로 악마구리 끓듯했다. 그때 뒷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 비슷한 소음이 들리더니, 한떼의 경찰이 우리들을 에워쌌다.
“이건 뭐야! 야! 경찰만 부르면 다냐?”
“그런다고 누가 무서울 줄 알아?”
“구청장은 비겁하게 숨어 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라!”
웬걸! 경찰이 나타나자 데모대의 사기는 더욱 충천해지고, 심지어 허리가 90도로 꼬부러진 80대의 할머니가 맨앞으로 나서서 울부짖듯이 외쳐댔다.
“이거봐! 내가 일본놈한테도 덤벼 봤구, 인공때 빨갱이 하고도 싸웠구, 4.19땐 이래봬두 청와대까지 달려 갔었어! 이 늙은이 예서 쓰러져 죽어야 정신 차릴거여?!”
그때 나는 아주 뜻밖의 경험을 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그토록 높아 보이던 관공서 담장이 발길만 들면 넘어 갈듯 낮게 보였고, 사실 구청장은 선거중에 우연히 알게 되어 몇번 인사까지 나눈 적이 있는데도, 지금 당장 이 자리에 나온다면 멱살을 잡아끌 것 같은 용기! 아니 분노 같은 것이 온몸을 휘감아 오는 것이었다.
“야! 구청장이 안 나오면 우리가 쳐들어간다!”
이윽고 누군가 이런 고함을 지르자, 갑자기 데모 대열은 우르르 구청 건물의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경찰들이 달려들었고, 현장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붙잡히고 끌려가고 발버둥치는 주민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안돼! 이래서는 안되는 거야!”
이때 나는 아파트 주민에게인지 경찰에게인지 암튼 이런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밀리다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슨 폭탄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아! 그리고 이제 생각하니, 나는 그후 몇 년인지를 병원에서 보냈던 모양이었다.
나의 이런 자초지종을 듣고 난 신사가 고개를 몇번이고 끄덕이고 나서 반주로 나온 들쭉술을 몇 잔이고 입안에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내 차례가 된듯 하오. 난 아주 특별한 분야의 중소기업 사업가였지요. 중소기업이라고 했지만 실은 세계 5위권! 국내에서는 톱랭크되는 생산직 회사였구요!”
“아니! 우리나라 중소기업중에 그런 기업체도 있습니까?”
나로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묻자, 그는 다시금 들쭉술을 잔에 따라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선생처럼 시골 출신입니다. 하기사 대한만국에서 출세 성공한 사람치고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 많겠지만요!”
“그래서 옛말에도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 그래서 고생도 많이 했지요. 야간고교에 다니면서 벌써 40여년전 일이 됩니다만, 그때 국내에 처음 생긴 철판인쇄소 공원으로 일했죠.”
“그런데 지금 그 분야의 세계 5위! 국내 톱의 기업체를 일구었단 말입니까?”
“예! 당시의 <하면 된다>는 신조에 따라 무던히 노력하고 땀흘렸죠! 그래서 제 스스로 기술을 익힌 다음에 창업을 했습니다. 판잣집 같은 공장에 비록 낡은 기계 한 대였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니까 사업 규모는 날로 커지더군요.”
“오늘날의 삼성이나 현대도 다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후 직원도 한두명에서 열명 스무명으로 늘어 났는데, 우리는 오늘의 노사관계가 아니라 한 식구였어요. 우리집 사람이 직원 빨래를 해주면서 시동생 빨래라고 여겼다는군요. 저 역시 한번도 사장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형제와 같이 생각했던 겁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신사는 다시 술잔을 집어들었다.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인듯 얼른 들쭉술병을 들어 그의 잔에 넘치도록 따랐다. 신사는 다시 술을 쭈욱 들이키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업이란 공룡과 같지요! 세월과 함께 주인도 모르게 엄청나게 커가거든요! 제가 사환이란 밑바닥부터 출발해서 맨주먹으로 창업을 했는데, 꼭 30년만에 그런 알짜배기 기업으로 키웠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다음 순간 신사는 울먹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술잔을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하니까 그토록 반기던 회사의 직원들이 쳐다도 안보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심히 넘어갔어요. 우리 회사 식구들은 어떤 형식에 얽매일만큼 남남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무척 컸겠군요?”
내가 얼른 묻자 신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뇨! 저는 끝까지 어떤 눈치도 채지 못했어요! 그들이 며칠 후 떼지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하기전까지는 정말로 직원들의 어떤 변화도 알지 못했던 겁니다!”
“대체 그들이 내건 구호는 뭡니까?”
나는 그제야 생각난 나의 구청에서의 데모 현장을 떠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냥 하던 말의 연장선상에서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보십시오! 낳아서 키워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고 나중에 재산까지 물려 줄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시위를 한다면 그 기분이...! 그런데 더욱 억장이 무너지는건 어떤 말과 조건으로도 타협이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아니! 노사분규란 결국 타협으로 끝을 맺는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래야죠! 하지만 우리 공장에는 다음날부터 상급 노총에서 지원군이 들이닥친 겁니다. 그들은 핵무기 같은 엄청난 이론을 앞세워 조여드는데, 저같은 기업가로선 도저히 게임이 안됐지요! 마치 우리나라 6.25때 유엔군처럼 저들을 지원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당합니까?”
“......!”
그 순간 나는 정말로 할말이 없었다. 나처럼 공직자로서 무사태평과 철밥통을 차고 스스로 명퇴를 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의 내 심정은 꼭 이라크에서 알카에다에게 당한 미국과 같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토록 한 식구였는데, 그들이 그럴 적에는 다 그만한 이유도 있었던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아파트의 재산세 문제로 구청에 몰려가 항의집회를 하던 추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나로서는 이 신사의 입장보다는 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더 관심이 갔던 것이다.
“예! 이론인즉 아주 정당하지요.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키운 기업은 사장의 공로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노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난 30년동안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은 공장 직원들이 땀흘려 일을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물론 그들이 일은 했지만 저로서는 그 어려운 기업체의 운영을 해왔는데, 상부에서 내려온 노총위원장은 이렇게 투쟁의 불길을 당겼지요! <이 공장의 사장이 지난날 노동자 여러분에게 월급을 주었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피땀으로 공장에 이익이 생겼고, 그래서 공장이 성장했으니까, 그 열매도 당연히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요!”
“글쎄요! 듣고보니 그 이론에도 일리가 있군요!“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그에게 적의가 느껴져서, 그 공장의 직원들 편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신사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뿜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예! 나 역시 그래서 창업 이래로 직원들의 후생복지와 보너스가 없던 시절에도 최고 1,200프로까지 보너스를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IMF가 터졌을 때에 공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지금처럼 보너스를 주다가는 곧 공장의 문을 닫게 된다고 하자, 그들은 기꺼이 공장을 살리자면서 월급까지 삭감하고 일했지요. 그런 그들이 이제는 사장인 나에게 그런 모욕을 가하다니...!”
“모욕이라니요?”
“글쎄 나를 악덕기업주로 몰아 심지어 나의 고향에까지 집단으로 내려가 고향마을에 세워진 나의 공덕비에 붉은 페인트칠을 하질 않나, 더욱이 고향 면사무소에 몰려가 악덕기업주 아무개의 비리를 폭로한다며 시위를 하질 않나, 가장 창피스럽던 일은 내가 고향 중학교총동창회의 회장을 지낸 바 있는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어린 후배들이 공부하는 중학교 교정에까지 몰려가 온갖 욕설이 쓰여진 피켓과 프래카드를 들고서 데모를 한 겁니다.”
“그래요? 그쯤이라면 정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이 갑니다만...!”
나 역시 이쯤에서는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허! 물론 이런 와중의 초기에는 내가 죽으려고까지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까 다 부질없는 일이더라구요. 더구나 우리 집사람의 말으 듣고보니...!”
“댁의 사모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글쎄, 오히려 잘 됐다는 겁니다. 60 중반이 넘도록 사업 때문에 그렇게 노심초사했는데, 이젠 아주 푹 쉬게 되지 않았느냐고요! 아닌게 아니라 나는 70까지만 현업에 종사하고, 그 이후에는 공장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길 생각이었지요. 왜냐하면 애초부터 자식에게도 나의 기업을 물려줄 수 없다고 선언했고, 자식 역시 기업은 자기 취향에 안맞는다고 무슨 인터넷 부문의 회사에 취직해서 독립해나갔지요. 딸도 모 방송국 PD가 되어 아빠의 사업같은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구요!”
“그런 사정을 공장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으니까요!”
“근본적으로 다르다뇨?”
“예! 그들은 피땀흘려 공장을 위해 일했다면, 나는 목숨바쳐 공장을 운영했거든요!”
그러면서 신사는 벌써 20여년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 어느 날 그토록 애써 키워온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금속인쇄 분야의 공장은 위험한 가연성 물질인 기름으로 불을 땠고, 페인트로 작업을 했는데 오죽이나 불길이 잘 번지겠는가? 공장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는데, 공장 일꾼들이나 직원들은 누구 하나 불을 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기사 펑펑 기름통이 폭발하는 마당에 누가 감히 불길속에 뛰어들겠는가? 그러나 그는 사장으로서 뻔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될 줄 알면서도 소화기를 들고 화마에 휩싸인 공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진화작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온통 불길에 휩싸인 공장은 사장의 소화기쯤은 장난감 취급을 했다. 결국 그의 온몸은 불길에 당겨져 삼켜져 갔다!
“안돼! 우리 공장을 이대로 태울 수는 없어! 뭣들 하는 거야! 불을 끄지 않고...?!”
그가 사력을 다해 외쳐댔지만 직원들은 누구 하나 달려들기는커녕 그야말로 <불구경>만 할 뿐이었다.
“음! 그런 재난을 겪으셨군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재기를 하셨습니까?”
나는 그제야 진심으로 그에게 동정을 보내며 한 마디 거들었다.
“에이! 여보슈! 그게 현실이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소? 그건 바로 한여름밤에 꾼 나의 꿈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꿈에서 깨어났을때 나는 아직도 현실감각을 찾지 못해 마누라를 두들겨 깨웠지요 그리고 외쳤어요! <여보! 우리 공장에 불났나봐! 나 당장 가봐야겠어!> 그러자 마누라가 피곤에 지쳐 대꾸했어요! <당신도 참! 우리 공장에 불났으면 숙직하는 직원들이 연락할 것 아녜요? 무슨 악몽을 꾸었는지 어서 잠이나 자세요! 요즘 중국쪽에까지 수출이 시작됐다면서...! 참! 내원!>”
하지만 신사 - 사장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공장에 화재가 나지 않았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는 팬티바람으로 집앞의 공원에 달려가 소리쳤다고 한다.
“와아! 우리 공장에 불이 안났다!”
이윽고 신사는 다시금 새로 들쭉술을 시켜서 한잔을 따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바로 이것이 기업가의 정신이지요! 그러니까 그때 내 기업체의 운영권까지 내놓으라고 연일 상부 노총의 지원까지 받는 노조가 아우성을 쳐댈때, 난 화재사건 이후 정말로 죽을 결심을 했답니다. 그런데 인간에겐 무의식의 행동이 있다지요? 바로 한강의 그 XX대교로 달려 간 겁니다. 한데 나의 운전기사가 말리기는커녕 이렇게 나를 부추겼어요! <한사장! 솔직이 나도 노조의 주장에 동조합니다!> <뭐라구?> <나도 한사장 밑에서 손발이 되어 20여년을 일했습니다. 한사장이 사업상 로비를 한다면서, 일류호텔 룸쌀롱에 들어가 놀고 있는 동안, 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지요! 아! 그 지루함을 한사장이 어찌 알겠소? 그러니 이참에 강물에 뛰어들어 속죄를 하는 것도 타당한 일이겠지요!> <아! 우욱!>”
그는 다리의 교각을 붙들고 이렇게 신음하면서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그는 분명히 강물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부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투신해 죽은 사람들이었는데, 같은 기업가로서 더러는 함께 기업인상을 받은 적도 있고, 설령 만나지 못했어도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아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한사장도 어서 이리 오세요! 그쯤이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이 그나마 남은 명예를 되살리는 길이 될 겝니다!”
이때 신사 - 사장은 정말로 난간 위로 올라가 뛰어내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소리쳐 말렸다.
<여봇! 한 가지만 버리면 해결돼요! 그까짓 돈! 언제 우리가 돈벌어서 우리 맘대로 다 썼나요? 기업을 키운다고 자꾸 빚을 지고...! 정말 우리 기업은 직원들 말대로 우리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은...!“
“그래서 투신자살을 포기하셨군요?”
이제는 나 역시 들쭉술을 잔에 가득 부어 입안에 쏟아 부으면서 말했다.
“예에! 우리 집사람 말에 따르면 돈에 집착하다 보면, 첫째는 돈 자체로 손해를 보고, 다음엔 명예를 잃고, 마지막 생명마저 잃게 된다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정확히 짚어낸 말씀이군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좀 많습니까?”
그 순간 나의 머리에는 그런 화를 입은 재계의 인사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절실하게 동감을 표했다.
“자! 나의 얘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만 일어납시다.”
이윽고 신사는 취한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내가 그를 부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죽마고우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남대문 시장을 나와서, 다시 시청 잔디광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데없이 그곳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면서 엄청난 인파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니! 북경올림픽도 다 끝났는데 웬 붉은악마 응원단 같은 환호성이 들릴까요?”
신사가 오히려 나에게 물어와서 우리 둘이는 함께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윽고 우리 두 사람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때, 한 젊은이가 가판신문을 주면서 외쳤다.
“자! 방금 나온 신문입니다!”
그런데 그 신문의 제호가 나로서는 아주 생소했다 가로쓰기 한글체로 <하나신문>이라고 쓰여졌던 것이다.
“근래 새로 창간된 무가지 종합신문이지요! 기존의 메이저 신문들은 다 없어졌으니까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요!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은 거지요! 우리 신문이 우국지사가 되어야 하는건, 2002월드컵때로서 시효가 끝났거든요. 그래서 생긴게 이 <하나신문>인데, 우선 이 신문은 종래의 일간지에 경제지와 스포츠지를 하나로 통합했어요! 그러니까 남녀노소 모든 독자를 하나로 묶은 거죠. 더구나 지면이 매일 100면이 넘는걸 무료로 나누어주니, 누가 기존의 신문을 보겠습니까? 특히 종래의 무가지에는 사설이나 논조가 없었는데, 이 <하나신문>은 찬반 양자의 입장에서 사설과 논조를 펼쳤으니까, 이것이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끈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당지에서는 용비어천가만 읊어대니까 의식있는 독자들에게 짜증만 주었지요! 반대로 야당지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의 사설과 논조만 펴니까 독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지요. 그러나 이 새로운 <하나신문>은 같은 사건과 주제에 대해서 찬반양론을 동시에 게재하니, 얼마나 공평무사합니까? 더욱이 이 신문은 각 지하철 입구는 물론 슈퍼마켓, 음식점, 아파트단지의 출입구에도 쫘악 깔아주고, <하나영남신문><하나호남신문><하나충청신문>식으로, 각 지역권으로도 현지 발간해서 전국보급망을 통해 무료로 나누어주니...! 하하하!”
내가 그의 설명을 듣는 동안에, 시청앞 잔디광장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에서는 <한중일(韓中日)> 3국 정상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펼쳐졌고, 그 잔디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에서는 천지를 진동하는듯한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들은 <경축! 동북아 3국연합 탄생!>을 마치 2002한일월드컵때 특이한 엇박자로 맞춰 외쳐댔듯이, 이번에도 신바람나게 함성과 박수를 섞어 부르짖었던 것이다. 나와 신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모두들 그때의 붉은 악마들처럼 붉은 티셔츠를 입고, 머리에는 붉은 띠를 둘렀는데, 거기에는 <경축! 동북아 3국연합 탄생!>이란 글자가 한자와 한글과 일본어로 쓰여져 있었다.
그 신사와 나는 서로 누가 이끈 것도 아닌데, 그 광장의 인파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만약 이런 곳에 끼지 않는다면 나는 또다시 몇년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그 신사도 마찬가지인지 처음 광화문 네거리에서 나를 만났을 때와는 정반대로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목청을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경축! 동북아 3국연합 탄생! 경축! 동북아 3국연합 탄생!”*
첫댓글 아니 어라비 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