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약속이라도 한 듯 전국의 나이트클럽에 일제히 울려퍼진 이 노래를 잊을 순 없으리라…. 90년대에 전성기를 이룬 댄스음악의 시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노래에 몸을 맡겨 수많은 멋쟁이들이 일명 토끼춤을 뽐내던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미와 붐붐'의 '인디언 인형처럼'은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미의 나이아가라 파마머리는 전국을 강타할 만큼 트렌디로 자리 잡아 그 열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했다.
1957년 동두천에서 태어난 나미(본명 김명옥). 미군부대 앞에서 아버지가 레코드숍을 운영했기에 꼬마 나미는 나이에 어울리는 동요보다 팝송을 곧잘 따라 불러 이미 그때부터 미군들에게 스타 대접을 받았던 터였다. 끼로 가득찬 나미는 당시 미군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미8군 부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일곱살이었다.
8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가수였던 나미의 이력은 어려서부터 여러 방면으로 화려했다.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에는 이미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서 어린 시절 이미자의 역할을 야무지게 소화해낸 아역배우로 은막에 데뷔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중학교 1학년 때는 윤복희의 자전적 영화 '미니 아가씨'에도 출연해 어린 윤복희 역할을 맡아 배우로서의 가능성도 인정을 받았던 그녀다.
톱가수들의 자전적 영화에만 출연해서일까? 다재다능한 끼에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던 그녀는 결국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71년,14살 소녀 나미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5인조 여성그룹 '해피돌즈'의 보컬로 활약했다. 이후 그녀는 미 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미군 위문공연단에 선발돼 월남에서 2년간 활동하면서 탄탄한 뮤지션으로 성장해 나갔다.
작고 여린 그녀의 꿈은 야무졌다. 국내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욕심이 차지 않았던 나미는 그후로 7년 동안 팝음악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인정받기 위해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었으니 얼마나 대견스러운 일인가.
1984년 나미의 4번째 앨범은 한국 댄스가요 시장에 기름을 붓는 결정적인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묘하게 혀를 굴리는 듯한 비음섞인 허스키 창법은 전국을 강타,히트를 불러일으켰고 남녀노소가 나미 흉내내기 열풍에 휩싸였다. 그후로도 나미는 댄스곡 '보이네',발라드곡 '슬픈인연'과 같은 주옥같은 명곡들을 통하여 가요팬들의 사랑을 받았고,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히트곡들은 노래방 애창곡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대를 불문하고 있다.
모전자전이라 했던가. 최근,나미의 아들 정철이 어머니의 노래 '슬픈인연'을 리메이크해 음반을 발표했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일품이라는 정철은 어머니의 미려한 음색은 아직도 여전하다고 말해 그녀의 컴백이 더욱 기다려진다.
/연예 칼럼니스트(ellong82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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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컴백이 기다려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