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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최초의 크브챠 건설, 나의 국방의무,
키부츠의 운영과 삶의 방식, 가족구성 등
우리들의 촌락은 갈릴리 계곡의 초입, 갈릴리 호수로부터 요르단 강이 흘러나가는 곳 가까이에 있다. 촌락의 왼쪽 편에는 갈릴리 산에서 뻗어나온 구릉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그 반대편에는 시리아와 트랜드 요르단의의 산등성이들이 연이어 뻗어가고 있으며, 촌락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머리에 흰 눈을 이은 헤르몬 산의 산정이 보인다.
한겨울, 농원은 온통 녹색 빛깔로 뒤덮혀 있다가, 드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자라난 밀이나 보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온 들판을 누런 황금색 빛깔로 바꾸어 놓고, 곧이어 봄이 되면 야생의 시클라멘트나 양귀비, 수레국화 말고도 수많은 들꽃이 제각각 제모습을 자랑한다.
촌락의 이름으로 우리들이 명명한 데가니아는 수레국화라는 뜻이다. 이름을 붙이기 전, 우리들은 촌락의 이름을 짓고자 여러모로 궁리해 보았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 우무 유니라고 할까, 요르단이라고 할까 ? 죠르다니아는 어떨까 ? 궁리궁리 끝에 데가니아에 만개해 있는 수레국화를 연상하여 데가니아라고 명명했다.
데가니아 - “ 수레국화 ”
오늘날 언덕 위에 새로 난 도로를 따라 천천히 갈릴리 계곡으로 내려가다 보면 여러분은 잔잔한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의 강줄기, 울창한 나무숲과 잘 가꾸어진 정원, 농장이나 양어장들로 가득히 들어차 있는 요르단 골짜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골짜기 구석 구석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를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모습의 아름다움에 젖어, 여러분의 마음까지도 차분하게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무 유니에 도착했을 당시, 이곳에는 길도 없었고, 숲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불에 그슬린 듯한 누우런 색깔의 풀과 약간의 관목들 뿐이었다.
우리들이 도착한 계절은 여름이었다. 해면 200미터 아래에 있는 갈릴리 계곡은 뜨겁기만 했다. 평지에서는 모기떼가 웽웽대며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다녔고, 양쪽 산맥 사이에 끼어있는 우무 유니 지대는 보기만 해도 답답하여, 그저 숨이 콱콱 막힐 것만 같은 형국이었다.
이 평범한 골짜기는 마치 불에 달구어진 판자때기나 양철판처럼, 뜨거운 열선이 메마른 대지 위를 내려덮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갈색으로 마냥 타오르고 있었다. 졸졸거리며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었지만, 일단 우기 때만 되면 대지 위로 철철거리며 강물이 넘쳐 흐르다가도, 홍수가 빠져나가고 나면, 대지 위에는 웅덩이와 진흙탕 흙이 즐비하게 너질러진다. 우리들은 진흙탕 구덩이에 둘러싸인 채 여러 달 동안은 외부와 차단된 채 지내야 했다. 신고있는 구두는 온통 진흙으로 뒤엉켰고, 마차도 옴싹달싹하지도 못했다. 웅덩이에서는 슬금슬금 열병도 기어 나왔다.
우리들의 주변은 온통 물로 가득했지만, 막상 농장이나 가정생활에 필요한 물을 얻으려면 먼곳에서 나무통으로 지어날라야 했다. 물을 나르기 위해 우리들은 노새를 이용했다. 노새의 양 옆에다 두 개의 양철통을 달고, 마차에는 나무로 된 물통을 실었다. 그 후 아랍인이 사용하던 수차를 얻게 된 휘로는 노새의 힘을 빌려 수차를 돌렸지만, 훨씬 뒤에는 증기엔진의 힘으로 수차를 돌렸다.
지금은 상황이 백 팔십 도로 다르다. 전기의 힘으로 퍼올린 물은 수도관을 통해 이곳 저곳으로 배송되는데, 이건 43년이나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말라리아는 전멸되어 갔다. 우리들은 물을 말리우기 위해 유카리 나무를 심었다. 유카리 나무는 농지를 배수하는 데에도 한몫 했다. 뒤에 루텐베르그의 운하 배수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 이 운하는 물의 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운하로 물을 끌어들여 관개하는 데에도 쓰고, 토지를 말리우는 데에도 이용한다. 또 지금은 모기가 서식할 만한 곳에는 디디티를 살포하는 「 말라리아 퇴치법 」을 채택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우리들의 토지개발방식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해외에서도 많은 과학자들이 몰려 들었다. 유대아 기관은 우리들의 개발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기계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우리는 해마다 이렇게 질문받았다.
『 이만한 토지로 먹여살리는 사람은 몇이나 되나요 ? 』
그때마다 일정한 크기의 땅으로 부양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났지만, 전문가들은 한 듀남에 평균 몇 사람이 붙어 있는가를 산출해내어, 팔레스타인의 경제력은 여차여차 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걸 보고 우리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때때로 누가 나에게 이 토지로 몇 사람이나 먹여 살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조건이 바뀜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현재 촌락 데가니아 알레프와 데가니아 베트에는 줄잡아 1천여 명이 살고 있다. 앞으로는 몇 사람이나 더 정착할 수 있게 될런지 모른다. 공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토지의 관개와 경작의 밀도에 따라 정착 가능자의 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911년 우리들의 숫자는 남자 열과 여자 둘을 포함하여 열 두 명이었다. 열 두 사람으로 구성한 것은 여섯 명의 남자는 경작, 두 사람은 파수, 한 사람은 회계, 또 다른 한 사람은 대기, 두 사람의 여성은 가사에 종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들은 아람 촌락인 우무 유니에서 살기로 작정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정착한 그룹의 몇몇 사람은 그때까지도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크브챠 방식으로는 생활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모두가 모여 함께 식사를 할 나무로 된 식당을 지었고, 아랍 촌민들로부터 진흙으로 지은 집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작은 통나무집도 사들였다.
어느날 밤, 모진 바람으로 통나무집 한 채가 넘어가자, 부서진 통나무 조각들은 인근 사마크 촌락까지 날아갔다. 자기들의 작은 집이 바람에 날려가는 모자처럼 훌쩍 날라가 버리는 통에, 그곳에는 댕그러니 벌거숭이 집터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냥 웃고만 서 있었다. 이를 본 아랍 촌민들은 웅리들이 무언가에게 홀려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곳 촌민의 우두머리격인 페르시아인 지주는 페르시아에 거주하면서 자기 소유의 땅 일부를 유대아 국민재단에 매각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랍 사람들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경작하면서, 쥐꼬리만한 임금과 더불어 그들이 재배한 작물의 일부분을 댓가로 받고 있었다. 유대아 사람이 매입한 토지에서 살던 아랍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그 땅을 떠났다. 그밖의 사람들은 우리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아랍 사람들은 처음부터 우리드이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우리 유대아 사람이 직접 땅을 갈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막상 우리들 스스로가 밭도 갈고, 씨도 뿌리고, 거두어 들인 작물도 스스로 탈곡하는 걸 보게 되자, 그들은 우리들을 존경도 하고 부러워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아랍인 촌민이 요르단 강에 띄울 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어서, 때때로 우리들은 그 배를 빌려썼다.
겨울이 되면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걸어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지만, 부득이 하여 키네레트나 티베리아스로 짐을 보내야 할 때에는 그 짐을 노새가 끄는 마차에 실어 강까지 운반한 후 배에 옮겨 실었다. 마차로부터 마구를 떼어낸 노새는 강을 등지고 배를 끌었다. 때로는 노새의 실수로 짐을 실은 배가 사람을 태운 채 강물 한 가운데로 빨려 들어간 적도 있었다. 밤이 되면 촌민들은 배를 뭍으로 끌어 올렸다. 트란스 요르단에서 오는 유목민 도둑들이 습격해 올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름철에는 도둑들이 얕은 여울목을 이용하여 행동했다. 우리들의 농장은 얕은 여울목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경비를 엄중하게 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보초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 우리들은 순번을 정해 낮일에 이어 밤 보초를 섰다. 어둠에 묻힌 채 라이플 총을 들고 서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별안간 탄환 한 발이 피융거리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은 참말로 인생의 묘미를 더해주는 찰라간의 순간들이었다.
데가니아에서의 한해
허다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데가니아에서의 일 년은 참으로 훌륭했다. 우리들은 기쁨으로 이를 축하했다. 우리들이 완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끊임없이 계속됐지만, 우리들은 몸으로 할 수 없으면 정신력으로 메워 나갔다.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한 적도 많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린 적도 있었고, 황열병 환자도 발생했다. 우리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기후였다.
지나치리 만큼 기후가 뜨거워, 모두가 늘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아이들 만큼은 계곡에서 자라게 할 수가 없겠어. 촌락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할거야. 』
그래서 우리들은 언덕 위에다 집을 지어놓고, 일은 계곡으로 내려가서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단지 곡물을 수확하는 데에 머물렀다. 우리들이 경작하는 데 사용하는 농구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농구말고는 여섯 마리의 노새와 두 마리이 말이 전부였다. 기후가 나쁜 탓으로 말이 제대로 일을 못하였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말은 승마용으로 사용했다. 대부분의 촌락에서는 여행용으로 서너 필 정도의 말이 있었다. 노새는 무슨 일이든지 해냈다. 물을 나르거나, 가래를 끌거나 하는 등. 지금은 트랙터로 땅을 갈지만, 우리는 오랜 동안 노새를 이용해서 땅을 경작했다. 괭이나 가래나 종자같은 것들은 모두 유대아 기관인 팔레스타인 사무국에서 공급해 왔다. 사무국과 우리들 사이에 계약이 체결됐다. 사무국은〮 농지를 확보 ․ 관리하고, 우리들은 땅을 경작한 댓가로 순이익의 50%를 사무국에 지불하고 나서, 나머지는 우리들의 몫으로 했으며, 이에 더하여 임금쪼로 매월 한 사람당 50 프랑을 받았다. 회계를 맡은 조셉 붓셀은 단일계정을 만들어, 벌어들인 것 모두를 같은 재정에 집어 넣었다.
우리들은 정기적으로 우리의 일을 루핀 박사에게 보고했다. 그는 훌륭한 동지였다. 그는 절대로 우리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그에게 우리들이 행한 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를 보고했고, 그도 우리의 일이 예정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는 자기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루핀 박사는 훌륭한 남자였다. 그는 코안경을 낀 땅달막한 체구의 대머리였는데, 그와 면식이 없는 사람들은 그를 멋 없고 얼간이 같은 남자라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숫자와 통계로 꽉 들어찬, 자이오니스트 연맹에 보내는 그의 보고서야말로 그에게는 마치 토지에 관해 쓴 일종의 서정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상이 없고, 오로지 자길ㄹ 위해서만 일하고 사회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꽃이 피지 않는 식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무엇이 다르랴 ! 』
그는 원래 독일 태생의 실업가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유대아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열심히 생각했는데, 근대의 경제사회에서 언젠가는 반 유대아주의가 발생할 것을 예견했고, 이에 따라 유대아 민족은 대지에다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이 뚜렷했다.
팔레스타인에 온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토지를 개척하는 데에 기울이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하고도 훌륭한 데가니아의 협력자였다. 틈이 나는대로 그는 데가니아의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는 데가니아의 농장이나 멤버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문제이더라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모습을 달리하여가는 갈릴리 호수나 산들을 바라보다가, 나무숲에 멈추어 서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눈을 감거들랑 당신들의 손으로 나를 이곳에다 묻어주게나. 』
통신업무는 모두 죠셉 붓셀이 도맡아 했다. 그는 헤데라 시절부터 우리들의 관리자였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스무 살이 갓 넘었는데, 키가 훤칠하고 몸이 호리호리한 남자로서, 잡초처럼 강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이주해 온 그는 고향에 있을 때에는 유대아교의 랍비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공부했지만, 언제나 가슴 속은 팔레스타인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처음 그는 이민센터가 있는 겔손에 머물다가 이주해 왔다. 그는 키네레트로 온 맨 첫번째 그룹에 끼어 있었다.
소년시절, 그의 몸은 대단히 약골이어서 그 누구도 그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는 우리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일꾼이었다. 그는 동료들이 잠자고 있는 한밤중에도 조그마한 석유등을 끼고 앉아 계산도 하고, 편지도 쓰고, 아울러 모든 작업상태와 그에 따른 물품의 관리상태 그리고 이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기록으로 정리해 두었다.
크브챠의 남자들은 처음부터 즐겁게 일했다. 그러나 여성들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여성이 단 두 사람밖에 없었던 것은 여성이란 오로지 요리와 세탁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사람의 동료들은 날이 채 새기도 전에 노새와 괭이를 들고 나가 해가 지고 어두어져서도 일을 계속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작업이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토질이 기름져 가고 있는지의 여부, 얼마 안가서는 넓혀져 가고 있는 초지의 상태 등에 관하여 제가끔 보고도 하고, 상의도 하면서, 몇 시간이고 자리에 붙어 앉아 있었다.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까닭에, 이야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여성들도 말자리에 끼어들며 남자들을 부러워 했다. 여성들의 일은 남자들과 전혀 달랐으며, 일하는 환경도 까다롭기 그지 없었다. 요리용 스토브나 석유곤로도 없었고, 전기도 없었다. 여성들은 땅에다 나란히 늘어놓은 두 개의 돌무더기 주위에서, 불꽃도 가리지 못한 채 요리했다. 눈 안으로는 매캐한 연기가 거침없이 파고 들었고, 어떤 때는 연기로 음식물이 그슬린 채로 반 밖에 익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여성들은 잡일이나 바느질 일에도 종사해야 했다. 사바스 날이 되면 여성들은 자신들이 깨끗이 세탁해 놓은 옷들을 입고 있는 우리들을 보기는 했어도, 남자들의 작업활동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어느날 여성들은 우리가 일하는 곳으로 와서 말했다.
『 우리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 』
『 우리들이 팔레스타인에 온 것은 자연과 더불어 일하고, 자연과 함께 살려는 단 하나의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지금 어때요 ? 남자들은 일에 신바람이 나고, 하는 일도 잘 되어가고 있지만, 우리 여자들의 상태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고향땅 조그마한 마을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못해요. 이렇게 된 데 대해서 남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당신네들은 이처럼 불행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거예요 ? 』
우리들은 그들의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생활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밖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는 집에 남아 요리를 하지 않았던가 ?
우리들은 이렇게 응수했다.
『 이런 방법 말고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있겠어요 ? 여자가 괭이질을 하고, 남자가 부엌일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릴 보고 무어라고 할까요 ?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들이 조롱당해야만 속이 풀리시겠어요 ? 』
그렇지만 여성들에게 우리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여성들은 예전과는 달리 자신들도 우유나 겨란을 만들고, 야채를 재배해야 하며,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 많은 여성들이 정착하러 이곳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요구는 우리들이 풀어내기 어려운 문제로서, 딱 불거지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종래에는 여성들이 이겼다. 이에 따라 우리들의 이해력도 한걸음 더 깊어졌고, 생각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지금에 와서는 여성들도 농사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트랙타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전쟁마져 치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여성들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이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는 다각경영을 채용한 뒤에도 끊임없이 발생했다. 새로운 농업분야가 개척될 때마다 그것에 적합한 남자는 누구여야 할까 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면 의례히 여성은 가사일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곤 하였다.
현재 데가니아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다. 농장일에서 여성이 책임있는 분야를 인수받아 책임지고 일하는 게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촌락에서는 지금까지도 툭하면 이 문제가 터진다.
다각경영을 채택
다각경영에 대한 토론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데가니아 촌락에서도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다각경영을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다각경영을 어떻게 도입하여 어떻게 실시하는 게 좋을런지에 대한 결론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다각경영에 대한 최초의 결론은 낙농사업이었다. 결론이 내려지자 우리들은 곧바로 실천에 옮겨 아랍인 촌락으로부터 소 한 마리를 사들였다. 얼마 안가 소 한 마리를 더 샀다. 이 소들은 골란 산에서 왔기 때문에, 한 마리는 리쇼나 ( 최초의 것 ) 라고 부르고, 다른 한 마리는 르쇼카라고 이름지었다.
소가 도착할 날이 되자 모두의 마음은 흥분으로 들떴다. 소를 촌락으로 옮겨올 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소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이러한 소동에 놀란 탓인지 소는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소를 부릴 줄 아는 요령을 몰랐다.
아랍 농민들은 소를 목장에 가두어 기르지 않고 초지에 놓아 길렀고, 여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 착유량이 아주 적었다. 우리들은 착유량을 늘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임시로 지은 축사에다 소를 몰아넣고 사료를 듬뿍 주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도 오히려 소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신경을 더 썼다. 그렇지만 소는 급격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충격을 받았는지, 우유를 짜려고만 하면 누어버린다든가 우유통을 엎지르거나 걷어차려고 들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우리들은 곧 알맞은 낙농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소를 들여놓을 즈음, 미리암은 러시아에 계신 아버지를 보러 간 관계로 데가니아에는 없었다. 미리암이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미리암은 우연히 젖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젊은이와 마주쳤다. 젊은이들은 일찍이 독일에서 젖소 기르기를 익혔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자기에게도 우유를 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몇번이고 졸라댔다. 하지만 그들은 여자가 우유를 짠다는 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딱잘라 말하면서, 미리암을 나무라기만 했다.
『 저렇게 덩치가 큰 짐승 곁으로 다가가겠단 말이예요 ? 밀도 안되는 소리이니 꿈에도 그런 생각일랑은 하지 마세요 ! 』
그러자 그녀는 그 지방의 아랍인 셰이크의 안주인에게 간청하여 젖짜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 며칠 동안은 밤마다 아랍인 촌락으로 빠져 나갔다. 어느날 아침, 한 젊은이가 졸린 눈을 비벼대면서 축사에 당도해 보니, 축사 한켠에 미리암이 웃으면서 서 있고, 그녀의 곁에 있는 우유통에는 우유가 하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닭장에서도 일했다. 그녀는 결국 일생을 낙농일을 하며 보내게 되었다.
미리암은 낙농방법을 배우러 한번은 네델란드로, 한번은 미국으로 갔다.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그녀만큼 소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뛰어난 지식과 육감을 가진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녀는 우유를 짜기 위하여 오밤중에 일어나는 걸 한번도 게을리한 적이없었다 ( 오밤중에 착유하는 것은 우리들의 습관이다 ). 지금 그녀는 예슨 네 살로서, 젊은 때 보다는 작업량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교대로 이 일에 임하고 있다.
우무 유니에서 일 년 가량 지낸 후 우리들은 영구적인 집을 지을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나는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러시아를 여행해야만 했다. 바로 스물 한 살이 되기 직전이었는데, 스물 한 살이 되면 병역에 봉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비합법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체재하고 있는 러시아 국적의 러시아 신민이었다.
러시아의 “ 신민 ” 으로 병역에
앞에서 나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아 사람들이 얼마나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물론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에는 러시아인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대아인 거주 허가구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러시아인들과 사귈만한 여유와 동기가 없었다.
유대아인 가운데에는 러시아 신민으로서의 애국심을 지닌 열렬한 애국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러시아 사람뿐만 아니라 결국은 우리들의 생활도 나아질 날이 꼭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설사 러시아가 조국이라고 하더라도 러시아는 유대아인과는 별개의 나라였으며, 특히 일찌기 키셰네프에서 유대아인의 학살운동을 겪어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내딴에는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어느 곳도 팔레스타인만큼 정이 든 곳은 없었으며, 데가니아만큼 마음에 꼭 맞는 곳도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러시아의 병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눈꼽만치도 없었다. 병졸로서 징병되는 건 러시아 사람들조차 혐오했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마을을 떠날 때마다, 마을은 비탄에 젖어들었고, 마을사람들은 울었다. 그러나 재산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돈을 써서라도 기를 쓰고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했다. 유대아인에게는 사정이 더 절박했다. 유대아 사람들이 법률로서 장교가 되는 게 금지되고 있는 것도 이 이유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내가 부모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부모가 벌금을 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금액은 5백 루불.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이었으며, 나의 부모의 처지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병역기간은 5년. 그 기간동안 내가 과연 데가니아와 떨어져 지낼 수가 있을까 ?
그러나 병역을 빠져 나가는 길도 없는 게 아니었다. 스물 한 살에 병역에 응하고 나서, 현역으로 석 달만 근무하면, 그때부터 병사의 부모는 자식의 병역에 대한 법률적 연대책임에서 완전히 해받되었다. 따라서 3개월이 지난 뒤에 병사에서 도망치면, 도망하는 사람은 탈주범이 되겠지만, 부모에게는 벌금을 낼 책임이 면제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병역에 동원되기로 결정하고, 선선히 러시아로 돌아갔다.
나의 어머니는 군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나의 가슴이 다른 사람보다 납작하고 홀쭉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한 체격조건을 가진 죠셉을 군대가 받아들일 리가 있겠느냐며 거듭 되묻기도 했다. 더구나 나는 내분비선에 이상이 있는 체질로써, 어릴 때만 해도 힘든 일에서는 항상 열외로 빠져나갔으며, 키셰네프에서 살 때만 해도 한번도 운동경기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열사의 땅 팔레스타인 대지 위에서 생활할 만큼 단련된 몸. 지금껏 동료들과도 한치도 뒤지지 않고 미친듯이 일해왔기 때문에, 의사의 신체검사 결과, 내 몸이 완벽한 건강체라는 사실이 들어나게 되자, 모친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 나는 훌륭한 병사였다 ”
나는 훌륭한 병사였다. 나는 군대생활이 싫지 않았으며, 어떤 점에서는 데가니아보다 나았다. 러시아에서의 겨울, 나에게는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 전혀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침 다섯 시만 되면 일어나지 않았던가 ? 반찬도 변변치 못했지만, 나에게는 식사도 맛이 났고, 훈련을 받는 것도 식욕을 돋구어주는 구실을 할 따름이었다.
나를 가장 불쾌하게 한 것은 나의 전우들이 혹독한 훈련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어대거나, 불평불만만 해대는 일이었다. 더더구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유대아인일 경우에는 이를 아주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넉달째 접어들던 어느날,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을 틈타 병영을 빠져 나왔고, 곧이어 몇몇 사람의 도움으로 때마침 팔레스타인으로 항해하고 있던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로써 나는 러시아에서의 군대생활을 끝냈다.
다만 나를 굳게 신뢰해 주고, 내가 누구한테나 신망받을 수 있는 큰 인물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몇몇 러시아 장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된 점을 떠오르면, 지금도 마냥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스라엘의 신이시여, 이 죄를 용서하시라. 젊음이란 순수성으로, 이스라엘의 신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이러한 죄를 저질렀나니.....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나는 두번 다시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제 1 차 대전이 끝난 후, 내가 러시아에 들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 그렇지만 나는 부모님도 얼마간의 위로는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짦으나마 군생활을 하는 동안, 미리암이 자기의 아버지를 방문하고 난 후, 나의 가족도 만나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나의 가족들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리암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잘 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모두가 기뻐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미리암은 생각지도 못했던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그녀가 러시아의 고향땅에 도착했을 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다시는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가려고 생각하지 말거라 ! 』
그래도 그녀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로 굳게 다짐하였지만, 수중에는 단돈 한푼도 가진 게 없는 데다가, 여권마져 없었다. 부친의 도움 없이는 어느것 하나 손에 넣을 힘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도망가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오뎃사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오뎃사에서 과거에 팔레스타인에 가본 적이 있는 유대아인을 만났다. 그 유대아인은 그녀가 다른 한 사람의 유대아인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도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소개받은 유대아인의 패스포드에 유대아인의 열두 살 먹은떨로 등재되어 출국하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그처럼 키가 큰 사람이 열두 살짜리 딸로 둔갑할 수 있었다니 ! 지금도 나는 이러한 일이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들은 봄철에 팔레스탕니에서 만나 함께 데가니아로 돌아왔다. 한창 촌락 건축이 진행되려던 참이었다.
영구적인 촌락을 건설하고자
우리들은 한동안 촌락의 건물을 어느 곳에다 지을지 몰라 한참 망설였다. 처음에는 갈릴리 호수에서도 가깝고 또한 요르단 강과 티베리아스와 사마크 사이를 오고가는 공공도로나 철도역과도 가까운 곳에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될 때의 단점은 요르단 강가의 습지대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농장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에 가서는 티베리아스로 부터는 약 6 마일, 사마크로 부터는 약 2 마일 지점이 되는 곳으로써, 요르단 강의 원줄기 가까운 곳에다 영구주택을 짓기로 작정했다.
건설계획은 엉성하기가 짝이 없었다. 촌락의 건축은 우선 가족 뿐만 아니라, 농장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물을 저장할 수 있을 만한 급수탑과 식당을 나란히 짓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어 식당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숙소용 바라크를 세워 나갔다.
우리들은 소우리나 닭우리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두 개의 우리는 건설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부터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우리들과 침실은 아무래도 식당과는 너무나 가까웠다. 저수팁만 해도 우리들은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큼만 충당하면 된다고 보았는데, 지금은 설령 가족만을 위해서도 턱없이 부족하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마을을 농장과 농업용 건물만 있는, 갈릴리의 다른 곡물농장과 비슷하기만 하면 된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는 아무도 정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우리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늘을 드리우고, 마을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정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우리들은 팔레스타인에 적합한 수종이 뭔지를 몰랐고, 마음 속으로만 어릴 때 보았던 러시아의 마을을 떠올려볼 따름이었다. 러시아의 마을은 철마다 벚꽃나무, 복숭아나무, 매화나무, 사과나무, 향나무로, 계절에 따라 녹 ․ 백 ․ 청 ․ 황 ․ 적색으로 바뀌어가지 않았던가 ?
우리들은 과일나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무를 심음에 있어서도 시장의 수요를 생각했지, 나무가 촌락을 아름답게 한다는 대해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우리는 과수를 재배하는 방법도 몰랐다. 우리들은 커다랗게 판 구덩이에 물을 채우고 나서는, 물 한가운데에 들어가 나무를 심었다. 개중에는 썩어버린 것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나무가 우람하게 잘 자란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뒤에 가서는 촌락 어귀에서부터 후추나무 묘목을 줄지어 나란히 심었다. 뒤에는 프랑승에서 식림에 관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에게 모든 식수를 일임했다. 그는 노송나무 상록과에 속하는 사이플러스 교목을 가로수로 심었다. 이것은 흔히 프랑스 화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커다란 나무와 같은 종류였다. 이 나무는 지금 굉장히 크게 자랐다. 나무 밑은 마치 교회당의 안뜰처럼 시원하고 아늑하다. 이 나무는 언제 봐도 멋지고 훌륭하다.
곧 이어 하야 탄피로프가 꽃을 가꾸기로 작심했다.
봄마다 팔레스타인에는 야생의 꽃이 피어난다.
어느날 그녀가 운을 땠다.
『 우리들은 왜 우리들 스스로의 꽃을 심지 않는건가요 ? 』
우리들은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니하고 생각했다. 이처럼 빔핍하게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꽃을 떠올리거나 돌보아줄 여유가 있단 말인가 ? 그렇지만 그녀는 고집을 꺽지 않고, 평일에는 저녁나절, 쉬는 날에는 틈을 내어 꽃을 심고 또 일일이 돌봤다. 꽃을 가꾸어 본 경험이 없던 그녀는 혼자서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우리들은 웃었고, 그녀는 울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꽃 가꾸는 방법을 깨우쳤다. 어느날 우리들은 나무숲과 나란히 하여, 그 사이 사이에 꽃이 피어나는 걸 보았다. 드디어 그녀에게는 꽃이 꽂혀 있는 꽃병을 식당의 테이블 위에다 가지런히 늘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꽃을 보고나서야 비로서 우리들은 그녀가 말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멋들어진 정원을 갖고 있다. 갈릴리 호수 방면에서 촌락 안으로 걸어들어오며 보면, 양쪽으로 사이플러스 교목들이 마치 정자목이라도 되는 듯이 그늘을 드리우며, 촌락입구에서 급수탑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늘어서 있다.
가로의 왼쪽편은 정원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곳에는 키작은 은색의 후추나무 가지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주변에서는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 다닌다. 한 가운데에는 백합꽃으로 둘러싸인 연못이 있다.
우측편에는 제 1 차 대전이 끝난 뒤에 가꾸어 놓은 정원이 있다. 숲의 수령은 어리지만, 그곳에는 붉은 열대성 관목과 꽃들로 가득차 있다. 호수를 향해 널찍하게 퍼져있는 잔디밭 위에는 전쟁을 치르다가 스러져간 젊은이들의 이름이 색여진 기념비가 누어있다.
이곳 저곳에 알맞게 흩어져 있는 가옥들의 한쪽 부분은 나무숲에 가리워 보이지 않고, 집 주변에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꽃이다. 분홍색, 심홍색, 주황색 등 각양각색의 꽃들은 금방이라도 황금빛을 뿜어내며 터져 오르는 것만 같다. 공기가 건조하고 뜨거운 봄날, 태양이 서서히 서산 아래로 가라앉을 무렵,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 보면, 수많은 색깔로 군락을 이룬 꽃무리들이 짙은 녹색의 사이플러스 교목과 절묘하게 조화되어, 사방에서 타오르는 것 같다. 가지각색의 꽃들이 곳곳에서 저마다의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제는 화단이 없는 크브챠란 꿈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으리라.
우리들이 새로 만든 데가니아로 이사한 첫해, 첫번째 수확을 끝내고 나서, 미리암과 나는 결혼을 선포했다. 이것은 데가니아 촌락 최초의 결혼식으로서 갈릴리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의 식당으로 몰려 들었다. 그중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온 터어키 사람이랑 아랍 사람들도 섞이어 있었다. 이틀 거리인 쟈파에서도 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갈릴리에서는 이제껏 이처럼 훌륭한 결혼식이 없었다. 이보다 일년인가 이년 전, 우리들이 우무 유니에서 생활하던 무렵,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 자숙규정 」을 두어, 향후 5년 동안은 일체 결혼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 이처럼 지독한 기후 속에서, 더구나 유목민들의 위협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 수가 있겠단 말인가 ? 』
그렇지만 러시아 태생의 한 소녀가 온지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렇게 제안했던 젊은이는 그만 그 소녀와 사랑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후 얼마 안가 데가니아에서는 두번째 결혼식이 치루어졌다. 이 부부의 세번째 아들이 바로 모셰 다얀으로서 당금 이스라엘 육군의 총사령관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당초부터 우리들은 농작업을 할 때마다 고난과 맞부딪쳐야 했고, 또한 수도 없이 실수도 저질렀다. 우리들에게는 토지를 이해하는 데에만 해도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현재 우리는 제대로 된 방법으로만 재배한다면, 갈릴리 계곡에서는 우리가 육성할 수 없는 작물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제일 잘 되는 것이 바나나다.
갈릴리의 감귤은 쥬디아의 감귤보다는 좋지 않지만, 그레이프 퓨릇은 일등상품이다. 점포에서 그레이프 퓨륫을 살 때, 상품에 「 죠르단 」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우리들의 촌락에서 나온 것으로 알면 된다. 질 좋은 사과나 올리브를 재배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는 좋은 품종을 고라야 하고, 관개도 알맞게 해주어야 한다. 이 땅에서는 그밖에도 많은 과일나무를 재배할 수 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야채에 손을 댈 때에도 나무를 심을 때와 똑같은 곤경에 직면했다.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심어야 좋을런지를 몰랐다. 또한 야채를 재배하는 데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갖가지 농장일 가운데에서도 야채를 재배한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분야로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들은 야채를 재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리들도 역시 자급자족용으로서라도 야채를 가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내어다 판다는 일은 꿈도 못꿀 일이었다.
우리들이 손대기 시작한 것은 토마토였다 한 젊은이가 페타 티크바에서 토마토 종자를 봤다고 했다. 그 청년과 다른 한 남자가 포도원에서 사용해 본 적이 있던 굴진기를 이용하여 커다랗게 고랑을 팠지만, 토마토는 전혀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이 토지에 적합한 품종을 발견하는 데에는 세 차례나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물론 당시에는 상담에 응해줄 농업시험장도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낙농기술은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고, 돈벌이의 약 4분의 1도 낙농에서 나오지만, 처음 우리는 두 마리의 젖소가 내는 빈약한 우유량을 가지고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두 마리의 소만으로는 무슨 짓으로도 착유량이 불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도 붙지 않았다. 좌우간 운이 나쁜 소였다.
뒤에 가서 우리는 베이루트에서 시리아산 젖소를 사들였다. 그 소는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 주었다. 이에 우리는 곧 대규모의 낙농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유는 그 소가 필요 이상의 우유를 생산해 냈지만, 우리들은 생산해낸 우유를 소화해낼 방법이 없었고, 갈릴리 지방의 수요도 많지 않았다.
당시 데가니아 주변에는 그럴만큼 마을이 많지 않았으며, 낙농한 우유를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느리지만 우유 배급망이 서서히 확장되어나가자, 우리들은 뛸듯이 기뻤다. 사육과 낙농의 덕택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식료품을 얻었고, 동시에 수입도 챙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느해인가 갑자기 전염병이 갈릴리 계곡을 휩쓸고 지나갔다. 데가니아의 소도 이때 거의 다 죽었다. 두렵고도 고난에 찬 시대였지만, 이러한 일은 한번으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애쓴 보람으로 가축의 일부를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뒷날에 가서는 이와같은 경험을 살려, 더욱 많은 우유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되었다.
제 1 차 대전 후 우리들이 정말로 훌륭한 네델란드산 소를 수입하게 되자, 지방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 소의 품종도 눈에 띄게 개량되어 갔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부락 특유의 대가니아종 소를 150 마리나 기르고 있고, 농지의 65%도 사료를 재배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옛날 우리들은 르슈카에게서 100 갤론의 우유를 짜기만 해도 그런대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지방이 높은 우유를 1,000 갤런이나 생산해 내는 젖소를 사육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르슈카나 이소나가 살고 있던, 쓰러져 갈 듯한 작은 우리 대신, 최신의 기계와 설비를 갖춘, 반들거리는 착유장이 있다. 중앙 협동조합 「 트누바 」에서는 우리 부락에도 지점을 설치하여, 아침마다 데가니아의 우유가 「 트누바 」의 운송차에 실려, 갈릴리에 있는 온 마을로 운반되어 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 그 가운데에서 미리암의 노력에 힘입은 것은 얼마나 될까 ? 이것은 말로 하지 않더라도 한 권의 책 내용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똑같은 방법으로 양계작업도 개량되어 갔다. 우리들의 일은 1년 동안에 40 개의 조그마한 갈색의 달걀을 낳는 바짝 마른 키작은 닭으로부터 시작했다. 뒤이어 백색의 레그혼이 수입되었고, 지금은 어느 촌락에서나 레그혼을 기르고 있다. 백색의 레그혼은 덩치가 커다란 닭으로서, 1 년 동안에 160 개 이상의 달걀을 생산해낸다. 지금 우리는 1천 5백 마리의 백색 레그혼을 기르고 있고, 지난 해만 해도 「 트누바 」에다 11만 개 이상의 달걀을 판매했고, 1만 5천 개 이상을 자가소비하는 데 사용했으면, 2만 7천 개 이상을 부화시켰다. 결국 실제로는 잘만 하면 1년 동안에 15만 개 이상의 달걀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
우리들은 거듭하여 곡물에 대한 경험도 쌓아 나갔다. 우리들은 오랜 동안 불모지의 상태대로 방치되어 있는 토지를 찾아내었는데, 특히 요르단 강가에 인접해 있는 계곡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유별났다. 그 일대의 우기는 극히 짧았을 뿐만 아니라, 이슬이 내리질 않아 여름에는 곡물을 기를 수가 없었다. 토지를 한층 더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윤작양식과 다각농법을 생각해 내어야 했다.
제 1 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우리들은 우리들이 세운 목표에 근접해 갔지만, 당신의 갈릴리는 피난민으로 들어차 있는 데다가, 팔레스타인은 해외시장과도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빵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또다시 곡물만을 재배하는 농법으로 되돌아가게 되자, 대전이 끝날 즈음이 되자, 그토록 기름지고 비옥하던 토지는 그 풍요로움을 잃고, 원래대로의 비옥한 땅으로 되돌아가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작물이나 가축으로 힘들고 곤혹스러운 문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속에도 해결해 나아가야 할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중 앞에 문제는 다각경영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해 나갔다.
“ 그룹 속에 그룹 없다 ”
우무 유니에 있는 동안 우리들 열 두 사람은 하나의 크브챠를 이루어 생활해 나갔지만, 우리들 보다 앞서 와서 우무 유니에 그대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우리 크브챠의 멤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당을 운영하는 제반 비용에 대해서는 우리들과 동등하게 분담하여 돈을 냈지만, 회계를 처리하는 방법은 별도로 했다. 그러다가 새로 지은 촌락으로 옮겨 살게 되자, 그들 역시 크브챠에 합류했다. 그렇게 되자 우리들은 이해관계가 똑같은 단 하나의 가족으로써, 전체가 크브야 생활의 모든 부분에 참가했다.
문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농사로서 곡물만을 취급하는 동안만은 계절마다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숫자가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밭을 갈아부치거나 종자를 뿌리는 겨울 일은 열 두 명이면 충분했지만, 여름철 수확이라든가, 수시로 발생하는 김매기와 같은 단기간의 작업에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물론 처름부터 고용노동자를 사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임금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 밑에서 일했고, 일이 끝나면 되돌아 갔다. 그러나 그들은 과일이나 야채를 거두어 들여야 할 계절이 오면, 그대로 마을에 머무를 소도 있었다. 왜냐하면 계절이 바뀜에 따라 한가지 작물작업으로부터 다른 한가지 작물작업으로 전환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멤버도 불어나고 일꺼리도 늘어났다. 데가니아로 파송되어 오거나, 잠깐이라도 촌락을 둘러보고 싶어 온다거나, 훈련을 받으러 오거나, 어떻게 왔던 간에 크브챠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 데가니아에 눌러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불어나게 되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크브챠를 창설하는 데 참여했음과 더불어, 공통의 이상을 갖고 있던 초기의 사람들과 그 후에 잇달아 참여한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단층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 문제도 해결되었다. 지금 마을에는 그룹 속에 그룹이 없다. 즈렇지만 지금도 새로 온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의 마을 역사에 대하여 일종의 경외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이들 역시 새로운 개척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는다.
한동안은 이 문제로 인하여 촌락의 질서가 두드러지게 문란해져 갔다. 이 사람들은 올래 전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려 들지를 아니하고, 온갖 생활관행을 모두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자기들오 공사장에서 일해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 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자, 촌락을 옮겨 다녔다.
촌락과 촌락 사이에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에게는 영구히 한곳에 머물러 살고자 하는 관념도 없었고, 전 생애에 걸친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책임감도 없었다. 크브챠가 생기기 이전부터 살아온 고참 정착민들이나 도회지 사람들고 크브챠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크브챠는 개척자 촌락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사람들은 『 크브챠에 정착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는 현상이야말로 곧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는 반증이 아니냐고 떠벌려댔다.
게다가 애당초 크브챠의 창시자들조차도 이 생각에 근거를 제공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으로 온 「 하루침 」의 멤버들조차도 자신들이 개척자요 길 안내자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디.
이들이 생각하는 개척자들이란 금방 바람에 날라가 버릴 것만 같은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죽음의 위협이 끊임없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제격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는 한군데 붙박혀 있는 촌락이야말로 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 코가 꿰인 동네 」에 다름이 없었다.
애초부터 손에 일이 익숙치 않는 데다가, 곳곳마다 고난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판인지라, 그들은 자기 자신이 크브챠 안에서 게으르고, 안이하게 살고 있음을 자책하고, 문득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겠다는 욕구가 치솟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곤 했다. 우리들의 그룹 내부에서도 데가니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또 다른 새로운 개척지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이에 반대했다.
죠셉 붓셀이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말했다.
『 무턱대고 전투의 최전선에 나서는 것만이 영웅적인 건 아니다. 집에 기초를 다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처마 위에 마지막 기와 한 조각이 올려질 때까지 끈질기고 굳세게 버티는 것에 비하여, 용감하게 돌격대에 끼어들어, 돌격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훨씬 더 쉬울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
그들의 감정은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성품에서 나오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경박함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 대부분은 결혼마져 하려들지를 않았다. 그들은 결혼을 함으로써 생겨난 그들의 자녀들이 가족을 그룹으로부터 떼어내게 되면, 그룹생활의 강점이 약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진득한 동지애로서 다져진 고리가 느슨해지리라는 걸 두려워 했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온 나라에다 가족을 남겨두고 왔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한다거나 새롭게 뿌리를 내리는 걸 두려워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들은 자녀를 키움으로 해서, 크브챠의 생활양식도 새로운 세계로 넓혀져 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그때까지의 경험세계를 훨씬 더 값지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새로 생긴 책임감으로 인하여 크브챠의 멤버를 크브챠의 울타리 안에 더욱 확실하고 단단하게 묶어 세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최초의 아기 “ 기데온 ”
나와 미리암의 첫 아이인 기데온은 키부츠 역사상 최초의 아들이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다투어 아기의 주위를 돌며 소란만 피울 줄 알았지, 정작 아기를 어떻게 다루는 게 좋을런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갖난 아기를 보살펴야 할런지를 모르기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는 미리암이 조언을 청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다른 여성들은 오히려 미리암보다도 못했다. 미리암은 스스로 자기가 해야 할 방법을 짜냈다.
아기가 태어난 후 그녀가 병들어 위독한 지경에 빠지자, 아기도 덩달아 입원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병이 나아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종전과 하나도 다름이 없이 일에 파묻혀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로 가든지 간에 아기를 데리고 다녔다.
야채밭에서 일하든, 요리장에서 일하든, 계사에서 일하든, 줄곳 아기를 데리고 다녔다. 소우리에서 일할 때는 소가 짚 위에 놓아둔 아기를 핥아주기도 했다.
데가니아의 촌락 사람들은 갖난아기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있었다. 촌락의 사람들은 머지않아 아기가 한줌의 먼지덩이로 변하여 버릴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며, 아기가 울면 덩달아 아기를 따라 울기도 했다.
간곡한 마음으로 미리암이 이들을 말렸다.
『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는 아주 튼튼하답니다. 곡 그칠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단 말이예요. 』
그래도 촌락 사람들은 안심이 안되어, 미리암은 온종일 아기만 돌봐주어야 한다고 했다. 회합이 있을 때에도 미리암은 그녀 곁에 미리암을 두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아기를 안아보고 싶어하는 바람에, 아기는 테이블 둘레를 돌아가며, 무릎과 무릎으로 옮겨다녔다.
사람들은 아기가 잠자고 있는 오밤중에도 찾아와 아기를 안아보려고 했다. 촌락에 아기가 태어나자 촌락 전체가 흥분에 들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 이런 곳에서도 아기가 자랄 수 있을까 ? 아기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 』
그렇지만 기데온은 씩씩하고 튼튼하게 커갔다. 지금 기데온은 훤칠하고 늠름한 미남자가 되어, 자신도 어엿한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온 여성과 결혼하여 텔 아비브에 살면서, 노동자를 모집하여 네게브로 보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미리암은 촌락의 사람들이 아기에 대하여 법썩대는 것에 대하여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브챠 사람들 모두가 아기를 좋아하는 걸 기꺼워 하면서, 아기가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일하는 한편, 아기를 보살피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때때로 그녀는 한밤중에 일어나 갖난아기의 옷가지를 빨아야 했기 때문에, 밤에도 눈을 붙이는 치레를 할 뿐, 항상 자기 스스로를 죽여가며 살아야 했다.
촌락에서 또 다른 아기가 때어났을 때, 미리암은 아기 엄마끼리 돌아가며 두 아이를 보살펴 주자고 제안했지만, 그 아이의 엄마는 자기 자식은 자기 스스로 돌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가 겹치기 일로 인한 과로로 기진맥진할 지경이 되어 갔다.
기데온이 만 두 살이 안되어, 이번엔 딸이 태어났다. 그때는 바로 소에게 역병이 들던 때였다.
『 소를 다루는 내 자신의 방법이 그릇된 게 아닐까 ? 』
『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소에 관한 지식이 모자란 게 아닐까 ? 』
그러한 생각이 들자 그녀는 소 목장이 있는 밴 셰멘에 가서 훈련을 받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찔해 했다.
『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데다가, 그중 하나는 아직 난 지 몇 주일도 되지 않은 터에, 어떻게 어머니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 』
그렇지만 그녀는 두 아이 모두를 데리고 밴 셰멘에 갔으며, 그녀가 돌아올 무렵에는 소에 관해 아주 많고 새로운 사실을 알고 오게 됨으로써, 우리들에게도 퍽이나 유이갛게 쓰였다. 그녀는 오자마자 촌락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였는데, 두 아이 모두 건강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런 일을 계속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여성들 모두가 미리암만큼 건강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리암 자신의 건강도 언제까지나 그러한 일에 베겨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얼마 안되어 촌락에는 아이가 넷이나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언가 손을 쓰지 않으면 아니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것은 어렵고도 까다로운 문제였다. 여성들이 한편으로는 일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 반대로 여성들은 자기 가족만을 보살피고, 그밖에는 아무일도 아니해도 좋단 말인가 ? 그렇지만 여성들은 크브챠의 작업이나 생활 속에서 그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방기하려 들지를 않았다.
한 사람이 도맡아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
처음에는 이것이 기막히게만 여겨졌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있을까 ? 어떤 사람은 촌락에서 보모를 고용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하여 죠셉 붓셀이 말했다.
『 아이는 부모님들이 낳았기 때문에 그 부모의 아이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마을 전체가 져야 마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아 아이들은 「 크브챠의 아들 」인 것이죠. 여성들은 결혼을 하든, 독신으로 지내든, 모두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만 된다면 어머니들은 그밖에 다른 일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때 아이들에게 드는 교육비용은 촌락 전체가 부담해야 할 것이구요. 』
“ 아이들의 집 ” 제도
그리하여 우리들은 전문가적인 보모를 고용하지 고용하지 않는 대신, 여성 한 사람을 뽑아 전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도록 했다. 어머니가 하루 내내 일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그 날에 뽑힌 여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 채의 집에다 아이들을 모았다.
이러한 방법이 거듭하여 발전하여 가게 되자, 뒤에 가서는 다른 모든 크브챠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아이들만의 전용침실을 두어, 아이를 그곳에서 잠자게 했다. 그렇지만 데가니아에서 만큼은 부모들이 지내는 곳에서 아이들이 자도록 되어 있다. 데가니아의 건물을 다른 촌락과 색다르게 설계한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데가니아에서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방 외에도 조그마한 방 한 두 개를 더 갖고 있다. 극히 최근에 이르러, 열 두 살 이상의 아이들용 숙소를 지었다. 두리들의 아이들은 그곳에서 지내고 있지만, 훈련받기 위하여 데가니아에 온 부모들의 아이들 역시 그곳에서 테가니아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일종의 기숙사 학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제도가 착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 아이들의 집 」의 여성들 역시 훈련을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으며, 어머니들이 실제로 밖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만은 부모와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어머니는 육아를 위한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촌락 일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이 어느 여성에게나 맞는 건 아니다. 한 여성이 그녀의 제일 첫 번째 아이를 「 아이들의 집 」에 맡기고, 다른 여성이 그 아이를 보살피도록 하는 일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크브챠에 대한 여성들의 감정을 결정적으로 시험하여 볼 수 있는 절호의 챤스이다.
물론 어머니가 항상 집에 붙어 있음으로 해서, 협동의 정도가 훨씬 낮은 촌락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지만, 대다수의 크브챠나 키부츠에서는 「 아이들의 집 」을 더욱 힘차게 추진켜 가고 있다.
즉 아이들은 밤마다 아이집의 집에서 자고, 일터에서 돌아온 부모는 저녁식사 때가 될 때까지, 그리고 일요일은 온나절을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대체로 이와같은 제도를 채욯한 촌락들에서는 유대아인이 방랑하던 시절에 겪은 수많은 유대아인 가족들의 숨가쁜 긴장감으로부터 해방딘 반작용으로 이 제도를 만들어냈을 터이지만, 사실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지나치리만큼 불필요한 극단적 조치라고 생각된다.
적지않은 데가니아의 사람들은 우리들과 아이들이 저녁이든 방중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아주 흐뭇해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와같은 방법은 아이들의 정서를 더욱 풍부하게 할 따름이지, 크브챠의 생활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어 온 바, 오늘날에 와서는 외부의 사람들도 우리들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다시 눈여겨 보고 있다고 해도 될만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의 가족생활의 유대감은 굉장히 강력하다. 아이들이 장성해서 결혼하여 자신들의 아이를 갖게 되더라고, 그들은 자주 부모가 사는 집으로 모인다. 저녁 늦게나 혹은 사바스 날이 되면 미리암이 자녀들이나 사위,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는 날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물을 끓이는 주전자의 물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엣날 우리가 어렸을 때에 경험했던 것 마냥, 유쾌하면서도 쇠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온통 찾잔을 집어삼킨다.
기데온은 자식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정통적인 개척자였다. 그가 커가자 촌락에는 그를 입학시켜줄 만한 유치원도 없었고, 학교도 없어서, 그를 대단위 키부츠인 예메크의 아인 하로드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보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게 되자,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기계에 대해서는 흥미도 많고, 남다른 재능도 지닌 소년이었다. 그에게 하이파에 있는 기술전문학교로 갈 길이 없을까 ? 당초에는 미리암이나 아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회가 열리자 집회에서는 그를 기술전문학교에 넣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내었다. 신중하게 쌍방의 의견이 검토되었다. 기데온에게는 면학을 위한 기회를 주어야 하면, 그 가운데에서도 기술 전문학교가 가장 낫지 않을까 ? 이런 의견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학교교육만이 공부가 아니다. 기데온은 시골 촌락의 자식이다. 그가 하이파에 가게 되면, 근 곧 도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기데온은 그대로 촌락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때마침 데가니아 촌락에는 새로 사들인 기게가 있어서, 당장 그에게 새로 사들인 기계를 맡길 수가 있었다. 우리들 가운데에서도 과거에 기술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서, 기데온의 훈련을 도맡아 지도할 수 있었다.
미리암과 나는 이 결정에 대하여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집회가 끝나고 나자 우리는 밖으로 나와 커다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것은 대단히 뜻깊은 회합이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기데온에 대한 관심이 깊은 데다가, 기데온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가족문제에 관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뜻을 토로하는 곳이 이곳 말고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나는 이처럼 자문자답해 보았다.
우리들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다고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키부츠는 우리들의 자식들을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하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아 나왔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사이에 모순이 없고, 그것들은 결국은 같은 것이다. 나는 이와같은 일이 언제나 그리고 똑같은 형태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암이나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곱 명의 아이들과 열 한 명의 손자가 있으며, 더불어 테가니아에는 온갖 적령기의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다. 제 2세 가운데 쉰 다섯 명은 크브챠의 완벽한 정식 멤버들이고, 백 명 이상이 멤버 자격이 있는 열 여덟 살 이하의 사람들이다.
데가니아의 생활이나 기후로 인하여 혹시 아이들에게 병치레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아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팔팔하다. 소택지는 건조해지고, 기후는 바뀌어 갔다. 뜨거울 때는 한없이 뜨겁지만, 아이들은 더위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여름 한철 대지가 불같이 타오를 때로 맨발로 뛰어다닌다. 그들은 이 땅에서 태어났고, 또한 자랐다. 그들은 별로 기후를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