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28
간밤에 인터넷의 바보 같은 녀석과 싸움을 해서 여행길이 찜찜했는데, 아니나 다르랴,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이군과 전쟁이 벌어졌다. 문제는 내 잘못이 아니라 비행기 안의 여승무원이 너무 예쁜 데 있었다.
"와, 참 예쁘다. 그지?"
"턱이 각 졌잖아요."
"난 각 진 여자가 좋더라."
이군이 나를 힐끗 보더니 또 한 마디 한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죠?"
"나이가 저쯤 들어야 대화가 되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먼 길 여행을 시작하면서 어째 조짐이 으스스 했다.
기내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군은 쥬스에 사탕을 이 만큼씩이나 가져온다. 이 여자는 사탕을 그렇게 좋아한다.
내가 항공회사 하나 만들고 싶어도 이렇게 사탕 많이 먹는 사람 때문에 포기했다. 미국 테러사건 후에 비행기 타기를 겁낸다던데 하늘나라가 고향인 이군은 전혀 그런 기색도 없다.
서울에 도착해서 큰 녀석 집에서 좀 쉬다가 16시, 영동대교 부근의 무슨 호텔에서 있은 친지의 둘째 딸 결혼식에 참석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결혼식, 신랑신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19시, 조선호텔 20층에 있는 중식당에서 큰 녀석 훈이의 장모 되실 분을 만났다. 50년을 훌쩍 넘으며 살아 온 내 눈으로 본 그 분은 한마디로 교양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장모보고 장가든다는 말은 이런 경우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여러 가지 요리를 먹고 식사를 주문할 때, 난 당연히(!) 짜장면을 주문했다. 중국음식에 짜장면이 없다고 하지만, 일식집이면 반드시 초밥을 먹어야하고 중식당이면 반드시 짜장면을 먹어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인당 식사비가 물경 7만원이나 한다고 하지만 짜장면을 먹어 본 결과 제주도 한림의 촌 동네에서 먹는 짜장면보다 영 못했다.
훈이네 집에 있는데 준이와 소영이가 왔다. 소영이는 아들만 일곱인 우리 집에, 또 딸도 없이 아들만 둘인 나의 가정에 옥황상제가 내려주신 며느리다. 시어머니인 이군이 선녀가 아니면 천사이니 며느리도 당연히 그에 버금가게 되어 있다. 준이 놈 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백발 노인처럼 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각 업체에서 상대하는 사람들이 대개 4,50대인데 25살 나이로는 말이 잘 먹히지 않기에 나이는 35살이라 하고, 나이 좀 들어 보이게 염색을 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으나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난 우리 아이들에게 담배 마약 도박을 금했다. 그 외에는 무얼 하든지 참견하지 않는다고 했다. 금년 3월에 우리식구가 된 소영이도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했다. 그래, 염색들 해라. 시어머니도 염색하는데 며느리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염색들 해. 나도 염색할까부다.
2001.10.29
아침을 먹고 느지감치 설악을 향해 출발했다. 사돈께선 당신이 타는 큰 차를 쓰라고 하시지만 우린 소영이의 아토스를 탔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풍류를 즐긴다며 양평-홍천-인제-미시령을 타는 코스를 택했다. 추수가 끝난 들판, 산을 돌아 흐르는 시냇물과 노랗고 붉은 단풍은 말 그대로 만추,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도중에 점심으로 막국수를 사 먹기도 했다.
친구녀석에게 "고래 발견"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즉시 생포하라"는 답이 왔다. 그래, 내 마음속의 고래부터나 잡아보기로 하자.
미시령을 넘어가면서 오랜만에 울산바위의 그 당당한 모습을 즐겼다. 몇 년 전엔 울산바위 꼭대기까지 오른 적도 있는데 난 울산바위의 안정된 그 모습을 좋아한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몇 컷을 촬영했다. 아래쪽의 단풍은 지금이 한창이었다. 미시령을 넘어 척산온천 부근의 숙소에 도착하니 16시 반.
나를 제외한 여자 둘 남자 하나가 지하의 매점에 가서 창란, 김치, 김, 맥주, 마른안주, 등등을 사 갖고 왔다. 그리고는 시장 구경 좀 하고 올테니 저녁식사 준비를 하란다. 별 수 없다. 갖고 온 쌀을 씻어 전기 밥솥에 안치고는 지하 700미터에서 뽑아 올린 온천수로 목욕을 했다.
TV를 보고 있는데 떠들썩하면서 나갔던 패가 들어온다. 게를 사왔다. 2만원에 네 마리를 샀다는데 들어보니 무게가 꽤 나간다. 냄비 두 개가 있지만 게가 들어가지 않아 냄비에다 밥을 비우고 밥솥에 게를 넣고 쪘다. 게는 물을 많이 넣고 삶으면 맛이 떨어진다. 그래서 주발로 하나 정도의 물만 넣고 김으로 쪄야 제 맛이 난다. 10분쯤 지난 뒤 익은 게를 꺼내서 다리를 떼면서 보니 다리는 물론 몸통까지 살이 꽉꽉 찼다. 신선도가 높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게살 맛이 기가 막힌다.
다리의 게살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는데, 다시 게 몸통의 살을 발라먹고, 또 뚜껑의 게장엔 밥을 넣어 비벼 먹기도 했다. 이렇게 맛있는 게를 먹어 본 건 20년도 넘었다.
내일의 일정을 의논하면서 맥주를 한 잔씩 했다.
2001.10.30
새벽 같이 일어나서는 모두들 지하의 대중탕으로 내려갔다. 난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는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오늘 아침은 생태 국이다. 어제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 생태를 꺼내서 네 토막을 잘라서 냄비에 넣고 대파를 썰어 넣고, 또 무를 얇게 썰어 넣고는 소금으로 간을 맞추었다.
난 평소, 회사에서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밥하고 반찬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밥 먹은 후엔 설거지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난 정말 손끝도 까딱하지 하지 않는다.
내가 끓인 생태 국과 밥을 모두들 입맛을 다셔가며 먹는다. 맛있고 말고지, 언 동태로 끓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뜸이 잘 들어 포스포슬한 밥은 간장만 있어도 먹을 수 있다.
설거지를 총알같이 해 치우고는 목우재를 넘어 소공원을 향했다. 늦으면 케이블카를 타기 힘들기 때문에 좀 서둔 폭이다. 11시 20분에 탈 수 있다는 37번 "쯩"을 받고는 소공원에서 신흥사까지 거닐면서 사진을 촬영했다. 되도록 가족사진을 많이 촬영했다. 소공원에선 번데기도 사 먹었다. 정말 번데기를 한 입에 털어 넣기는 불가능했다. 이상하게도 번데기 맛은 전국이 같은 것 같다. 난 번데기를 참 좋아한다. 맥주 안주로도 최고다.
소영이보고 번데기 먹는 내 모습을 한 장 찍으랬더니 눈이 둥그래 진다.
"임마! 내가 보고할 데가 있단 말이야!"
소공원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꽤 있었으나 이미 관광철이 지나서인지 한 산한 느낌 마저 있었다.
전 같으면 지금쯤 이미 마등령을 향하거나 금강굴에 가 있었겠지만 이번 여행은 애초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밤 잠 자지 않고 촬영지로 향하고 밥 굶어가며 사진 찍는 게 아니라 여유 있게 밥도 제대로 먹고 남들처럼 어슬렁대며 다니자고 한 터였다.
11시 반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갔다. 배낭이 커서 실을 수 없다는 걸 통 사정을 해서 실었다.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면 권금성엔 뭐 하러 가나.
권금성 - .
바람이 약간 있었으나 쾌청한 날씨가 "사진 찍기 좋은 날"이었다. 한참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한 아주머니가 하는 말에 우리는 모두 유쾌하게 웃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는 어디 갔어요? 왜 아저씨 혼자서 아들 딸 데려왔어요?"
며느리인 소영이를 딸로 본 건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이군까지 딸로 본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내가 이군이라면 오늘 저녁 술 한 잔 산다.
다시 소공원으로 내려와서는 식당에 들렀다. 회사의 쿠폰을 사용할 수 있는 식당인데 쿠폰을 주면 할인까지 해 주는 곳이다. 이 식당에 오면 늘 먹는 메뉴, 산채 비빔밥과 도토리묵을 이번에도 시켜 먹었다.
오후 2시, 화진포를 향했다. 고성을 지나 통일전망대 근처까지 올라가서는 우회전해서 호수를 끼고 가다가 바닷가 백사장 앞에서 내렸다.
한산하고 깨끗한 해변엔 몇 몇 사람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보기 좋은 크기의 하얀 파도가 밀려들었다. 몇 년 전엔 혼자 여길 왔었는데...
왜 파도가 치는지 아세요?
왜 바닷물이 푸른 지 아세요?
30여년 전에 어느 녀석한테서 받았던 질문이었다.
해변을 거닐면서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을 흥얼거렸다.
난 이 시스터즈가 부른 이 노래를 좋아한다.
황금물결 찰랑대는 정다운 바닷가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
꽃구름이 흘러가는 수평선 저 너머
푸른 꿈이 뭉게뭉게 가슴 적시면
조개껍질 주어 모아 마음을 수놓고
영원토록 변치 말자 맹세한 사랑 랄라라….
은물결이 반짝이는 그리운 화진포
모래 위에 새겨놓은 사랑의 언약
흰 돛단배 흘러가는 수평선 저 멀리
오색 꿈이 곱게곱게 물결 쳐오면
모래성을 쌓아놓고 손가락 걸며
영원토록 변치 말자 맹세한 사랑
주차장엔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엿장수 하나 가위를 절그럭 거리고 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엿 사먹는 사람은 더욱 없으니 심심했나보다. 다가가서 호박엿을 좀 달라고 했더니 대팻날을 엿 더미에 대고 가위로 툭툭 쳐서 떼어내고는 먹기 좋게 토막을 내서 준다.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이구 참 먼데서도 오셨다면서 엿을 더 떼어 준다. 이래야 한다. 관광객에겐 좀 더 친절하고 이렇게 엿도 더 떼어주고 그래야 한다. 관광지의 일부 상인들은 외지에서 온 사람에겐 바가지부터 씌우려고 덤벼드니 그런 장사가 얼마나 갈까.
화진포를 떠나 속초 시내의 영금정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이렇게 외식하면 난 밥하고 설거지하지 않아 좋다. 모듬회 하나를 시켰더니 값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준다. 출출한 속에 살살 녹는 싱싱한 생선회와 싸한 소주 한 잔 들어가니 청와대 살고 있는 사람이 불쌍해진다. 거기서 한 5년 살자고 평생을 죽기살기 하는 걸 보면 난 그 양반들 취미를 모르겠다. 소주 두 병이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이 풍진 세상, 아 아! 대한민국!!
2001.10.31
아침밥을 지었다. 밥통이 엄청 큰 데다 쌀 두 컵만 씻어 안치니 바닥에 겨우 깔릴 정도다. 이럴 때 물의 양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일에 난 선수다. 뜸 잘 들여 밥을 퍼 놓으니 모두들 감탄을 한다. 특히 이군은 존경스런 표정이다. 이군은 내게 시집온 지 27년이나 되는데 지금도 밥이 왔다갔다한다.
식사 후 미시령으로 차를 몰았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울산바위를 다시 촬영하려했으나 좋은 위치에는 차를 세울 데가 없어 안타까웠다. 경사 심한 커브길에 차를 세웠다가 무슨 사고가 날 지 몰라 한 참 올라가서 보니 영 제 맛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랴. 보고서용 사진을 촬영해야 했다.
미시령 꼭대기. 날씨는 좋은데도 바람이 찼다. 연료를 채우고 미시령을 넘었다. 용대리 부근 십이선녀탕 안내표식을 보고는 준이 녀석과 소영이가 한마디씩 한다.
"엄마, 엄마 목욕탕이 가까운데 목욕하고 가실래요?"
"어머님은 목욕탕이 열두 개씩이나 있어요?"
이군은 들은 척도 않는다. 아부하지 말란다.
한계령을 오르기 전에 몇 군데서 단풍잎을 촬영했다. 역광을 받은 단풍잎이 아주 고왔다.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 쌍화차도 마시고 삶은 옥수수도 사 먹었다. 옥수수를 내가 골랐는데 좀 부드러운 놈을 고르다보니 크기가 모두 작았다. 옥수수 장수, 한 개를 더 넣어준다. 참 내, 이래야 된다니까요. 내가 어제부터 말했잖아요.
한계령을 내려오면서도 몇 컷을 촬영했다. 오색지구는 이제야 단풍이 보기 좋았다.
이렇게 설악산 주변을 한 바퀴 돌아와서는 순두부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서비스라면서 내 오는 비지찌개가 순두부보다 더 맛있었다. 대구에 살 때 새벽이면 '두부나 비지나 사소!' 하는 소리를 가끔 들었었다. 비지는 두부 만들 때 금방 나온 것보다는 이렇게 살짝 띄우고, 여기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넣고 이렇게 끓여야 구수한 제 맛이 난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나만 놔두고는 우르르 다시 나간다. 게를 한 번 더 먹고 가야한단다. 밥은 조금만 하란다.
하지. 하라면 못할 줄 알아?
밥 안쳐 놓고 빨래를 한 후 낮잠을 좀 잤다. 에구 내 팔자야.
잠이 깨어 일어나 보니 나간 사람들은 오지도 않았는데 발코니에서 내다 본 장엄한 설악의 저녁 노을이 화려하다. 참 좋다.
큼직한 게를 여섯 마리나 사왔다.
(게가 얼마나 크냐고요? 거 왜 시골에 가면 곡식 널어놓는 멍석 있죠? 그 멍석과 거의 비슷한..., 뭐라구요? 거짓말하지 말라구요? 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소여물 쑤는 가마솥 있죠? 그 가마솥 뚜껑..., 뭐요? 그것도 크다구요? 젠 장,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네. 알았어요. 아주 정직하게 말해서 냄비 뚜껑 만 했어요. 이젠 냄비 뚜껑이라니까요.)
내가 게와 새우를 밥솥에 넣고 쪘다.
아 참, 이번엔 게만 사 온 게 아니라 이 만큼 씩 하게나 큰 새우도 이 마안큼이나 사왔다. 붉은 빛이 선명한 이 새우는 흔히 보는 대하와는 다른데, 알배기에다가 살도 통통하게 찼다.
우린 식탁 위에 새우와 게를 쌓아 놓고 먹기 시작했다. 어젠 우리 대통령이 생각났었는데 오늘은 요즘 고생하는 미국 대통령까지 생각났다. 부시가 어찌 이 맛을, 아니 이런 멋을 알랴! 아마 죽다 깨나도 모를 거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잠은커녕 눈만 말똥말똥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으나 잠을 이룰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병을 땄다.
언제 다시 여길 오게 될까. 다음엔 훈이 부부와 함께 올 수 있을까. 참, 훈이 녀석 장가부터 들어야지. 훈이 준이 초등학교 다닐 때 여기 데려오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결국 안주 하나 없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후에야 자리에 들었다.
2001.11.1
두어 시간 잤나 싶었다.
"기상!!"
06시 15, 숙소를 출발했다. 이번엔 영동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강릉까지 1시간, 대관령 정상까지 25분 정도 걸렸다. 지난 1972년 강릉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혼자서 하루 종일 걸어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 길을 불과 25분만에 올라간 것이다. 이제 금년 말쯤 대관령을 관통하는 터널길이 완공되면 한 겨울 차량들이 눈 때문에 대관령에 묶여 있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준이 놈도 서울 시내에서만 운전하다 고속도로에 나오니 간이 커지는지 시속 120km로 가속했다. 배기량 0.8리터의 아토스는 앵앵거리며 잘도 달린다.
엔진에서 꼭 가스터빈 소리가 났다. 도중에 유부국수로 요기를 했다. 국물 맛이 꼭 기차 타고 가다가 사 먹는 국수 맛 같았다.
10시 15분, 속초를 출발한 지 꼭 4시간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훈이 녀석 집에서 짐을 꾸리고는 사돈댁 내외분을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아들 딸보다 사위인 준이 녀석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라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준이 없는 동안 사돈 총각 혼자 고생을 많이 했나보다. 특수지의 사진인쇄가 생각처럼 간단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원래 오후 7시 비행기표를 샀으나 전화를 해보니 3시 출발하는 표도 있단다. 공항에 도착해서 여유있게 표를 바꿔 제주로 내려왔다. 내려오기 전에 이번 여행 중 촬영한 RVP 220 열 롤을 준이에게 주고는 내일 중에 충무로의 현상소에 맡기라고 일렀다.
2001.10.31
아침밥을 지었다. 밥통이 엄청 큰 데다 쌀 두 컵만 씻어 안치니 바닥에 겨우 깔릴 정도다. 이럴 때 물의 양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일에 난 선수다. 뜸 잘 들여 밥을 퍼 놓으니 모두들 감탄을 한다. 특히 이군은 존경스런 표정이다. 이군은 내게 시집온 지 27년이나 되는데 지금도 밥이 왔다갔다한다.
식사 후 미시령으로 차를 몰았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울산바위를 다시 촬영하려했으나 좋은 위치에는 차를 세울 데가 없어 안타까웠다. 경사 심한 커브길에 차를 세웠다가 무슨 사고가 날 지 몰라 한 참 올라가서 보니 영 제 맛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랴. 보고서용 사진을 촬영해야 했다.
미시령 꼭대기. 날씨는 좋은데도 바람이 찼다. 연료를 채우고 미시령을 넘었다. 용대리 부근 십이선녀탕 안내표식을 보고는 준이 녀석과 소영이가 한마디씩 한다.
"엄마, 엄마 목욕탕이 가까운데 목욕하고 가실래요?"
"어머님은 목욕탕이 열두 개씩이나 있어요?"
이군은 들은 척도 않는다. 아부하지 말란다.
한계령을 오르기 전에 몇 군데서 단풍잎을 촬영했다. 역광을 받은 단풍잎이 아주 고왔다.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 쌍화차도 마시고 삶은 옥수수도 사 먹었다. 옥수수를 내가 골랐는데 좀 부드러운 놈을 고르다보니 크기가 모두 작았다. 옥수수 장수, 한 개를 더 넣어준다. 참 내, 이래야 된다니까요. 내가 어제부터 말했잖아요.
한계령을 내려오면서도 몇 컷을 촬영했다. 오색지구는 이제야 단풍이 보기 좋았다.
이렇게 설악산 주변을 한 바퀴 돌아와서는 순두부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서비스라면서 내 오는 비지찌개가 순두부보다 더 맛있었다. 대구에 살 때 새벽이면 '두부나 비지나 사소!' 하는 소리를 가끔 들었었다. 비지는 두부 만들 때 금방 나온 것보다는 이렇게 살짝 띄우고, 여기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넣고 이렇게 끓여야 구수한 제 맛이 난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나만 놔두고는 우르르 다시 나간다. 게를 한 번 더 먹고 가야한단다. 밥은 조금만 하란다.
하지. 하라면 못할 줄 알아?
밥 안쳐 놓고 빨래를 한 후 낮잠을 좀 잤다. 에구 내 팔자야.
잠이 깨어 일어나 보니 나간 사람들은 오지도 않았는데 발코니에서 내다 본 장엄한 설악의 저녁 노을이 화려하다. 참 좋다.
큼직한 게를 여섯 마리나 사왔다.
(게가 얼마나 크냐고요? 거 왜 시골에 가면 곡식 널어놓는 멍석 있죠? 그 멍석과 거의 비슷한..., 뭐라구요? 거짓말하지 말라구요? 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소여물 쑤는 가마솥 있죠? 그 가마솥 뚜껑..., 뭐요? 그것도 크다구요? 젠 장,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네. 알았어요. 아주 정직하게 말해서 냄비 뚜껑 만 했어요. 이젠 냄비 뚜껑이라니까요.)
내가 게와 새우를 밥솥에 넣고 쪘다.
아 참, 이번엔 게만 사 온 게 아니라 이 만큼 씩 하게나 큰 새우도 이 마안큼이나 사왔다. 붉은 빛이 선명한 이 새우는 흔히 보는 대하와는 다른데, 알배기에다가 살도 통통하게 찼다.
우린 식탁 위에 새우와 게를 쌓아 놓고 먹기 시작했다. 어젠 우리 대통령이 생각났었는데 오늘은 요즘 고생하는 미국 대통령까지 생각났다. 부시가 어찌 이 맛을, 아니 이런 멋을 알랴! 아마 죽다 깨나도 모를 거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잠은커녕 눈만 말똥말똥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으나 잠을 이룰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병을 땄다.
언제 다시 여길 오게 될까. 다음엔 훈이 부부와 함께 올 수 있을까. 참, 훈이 녀석 장가부터 들어야지. 훈이 준이 초등학교 다닐 때 여기 데려오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결국 안주 하나 없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후에야 자리에 들었다.
2001.11.1
두어 시간 잤나 싶었다.
"기상!!"
06시 15, 숙소를 출발했다. 이번엔 영동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강릉까지 1시간, 대관령 정상까지 25분 정도 걸렸다. 지난 1972년 강릉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혼자서 하루 종일 걸어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 길을 불과 25분만에 올라간 것이다. 이제 금년 말쯤 대관령을 관통하는 터널길이 완공되면 한 겨울 차량들이 눈 때문에 대관령에 묶여 있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준이 놈도 서울 시내에서만 운전하다 고속도로에 나오니 간이 커지는지 시속 120km로 가속했다. 배기량 0.8리터의 아토스는 앵앵거리며 잘도 달린다.
엔진에서 꼭 가스터빈 소리가 났다. 도중에 유부국수로 요기를 했다. 국물 맛이 꼭 기차 타고 가다가 사 먹는 국수 맛 같았다.
10시 15분, 속초를 출발한 지 꼭 4시간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훈이 녀석 집에서 짐을 꾸리고는 사돈댁 내외분을 만나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아들 딸보다 사위인 준이 녀석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라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준이 없는 동안 사돈 총각 혼자 고생을 많이 했나보다. 특수지의 사진인쇄가 생각처럼 간단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원래 오후 7시 비행기표를 샀으나 전화를 해보니 3시 출발하는 표도 있단다. 공항에 도착해서 여유있게 표를 바꿔 제주로 내려왔다. 내려오기 전에 이번 여행 중 촬영한 RVP 220 열 롤을 준이에게 주고는 내일 중에 충무로의 현상소에 맡기라고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