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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
여성 |
일반적으로 남성은 외부세계에 관심이 많아 사회적 지위, 권위와 법, 명예를 존중하고, 정치, 기업, 국가, 또는 학문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다시 말해 사고와 판단, 이념, 사상이나 철학 같은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좋아한다. 남성적인 것의 모상(模像)인 원형으로서의 ‘아버지’는 마치 바람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것, 창조적 기풍, 입김, 기(氣), 아트만, 혼이다. 인간과 법과 국가, 이성과 정신에 대한 관계를 결정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동적(動的)인 힘, 바람과 폭풍과 뇌성과 번개 같은 것이다. |
일반적으로 여성은 수용적이며 분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느낌으로써 세계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회와 국가보다는 가정이, 추상적인 이념이나 학설, 보편적인 진리보다는 구체적인 개인의 감정이 그녀에게는 중요하다. 여성의 의식은 극도로 ‘개인적’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여성적인 것의 모상, 원형으로서의 ‘어머니’는 산출력 있는 대지(大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기도 하나 또한 죽음을 포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무의식적인 것, 비합리적이며 영원한 것에 연계되어 있다. |
4)남성과 여성은 어릴 때부터 성향이 다를 수 있고, 자라면서 그 개인이 속하고 있는 가정, 사회 집단의 남녀관 -“남녀의 페르조나” -에 따라서 그 차이점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차이점은 남녀의 의식적 태도의 차이점이며, 무의식에는 또한 서로 다른 요소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누가 보아도 남자답다고 하는 남성이 집에 돌아오면 유약하고 잔소리가 많고 짜증을 부리며 소심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여자다운 여자가 아이들에게 야단치거나 느닷없이 흥분하여 남자 못지않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수가 있다. 또한 평소에는 ‘용기 있는 남자’가 위기에 처해 안절부절못하고 그답지 않게 불안해 할 때, 평소에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조용한 부인이 남성과 같은 용단과 담력과 이성으로 위기를 뚫고 나가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모두 가부장사회의 집단의식과 동일시한 남녀의 의식의 태도와는 다른 또 하나의 무의식적인 태도가 남녀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다).
5)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정의
아니마(무의식적 여성성) -Seele(心靈) |
아니무스(무의식적 남성성) -Geist(心魂) |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 즉 무의식적 여성성으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남성이 여성에 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 즉 무의식적 남성성으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 남성에 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
이때 말하는 남성적, 여성적이란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보편적, 원초적 특성을 말한다. 의식의 외적 인격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내적 인격의 특성을 갖추게 되고 이것이 전인격에 보충됨으로써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표현양상과 그 예
*원형으로서의 아니마, 아니무스는 그것이 투사되어 경험될 때 잘 인지될 수 있는 것이다.
예로 이성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그리고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 현자(賢者) 또는 영웅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일방적 또는 상호투사가 일어나고 있다. 남성은 그녀에게서 현실적인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여신상(女神像)을 보고 있는 것이며, 여성은 그에게서 신화에 나오는 영웅상, 성자(聖者)상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에 의해서 촉발되는 감정은 반드시 황홀한 신비감만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강렬한 혐오감, 공포감, 불쾌감 또는 외경의 마음일 수도 있다. 일상적인 부정적 감정보다는 더욱 강렬하고 강박적이고 마력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런 감정이 이성에게서 느껴져서 그 이성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감정관계를 갖게 될 때 거기에는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이 반드시 밖에 있는 어떤 인물에만 투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 시인은 자기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화폭이나 작품 속에 형상화한다. 반드시 사람으로서만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모를 새, 비둘기, 학 혹은 태양과 달 속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을 그려내어 그것이 그들 작품의 독특한 특질을 이루게 된다 |
아니마, 아니무스는 또한 이념에 투사되기도 하고 물질에 투사되기도 한다. 그 이념이 계몽사상이든, 공산주의든, 기독교 사상이든, 혹은 낭만주의든, 그것이 그의 아니마 또는 그녀의 아니무스 투사의 대상이 되면 그 이념들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열병환자처럼그들은 그 주의와 사상에 광신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
임금이나 민족도 아니마 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님’이라는 우리나라 말은 상당히 강한 종교적 신성성과 열정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정몽주의 ‘님 향한 일편단심(-片丹心)’,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아아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할 때의 ‘님’이나 그 밖의 여러 시와 노래에 반영된 ‘님’은 모두 그 말에 내포되는 개인적인 감정의 성질과 척도는 다르다 하더라도 단순한 애인의 의미를 넘어선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며 ‘심상’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성주님’, ‘장군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존재는 심리학적인 견지에서는 그 대상에 무한한 경외를 느끼고 있는 무녀나 대중의 아니무스 원형의 피투사체(被投射體)라고 할 수 있다. 무녀에게 있어 이 신들은 신성한 배우자이며 그들 말대로 ‘선생’이다. 그들과 신과의 관계는 정신 분석에서 말하는 부(父)에의 근친상간적인 욕망의 표현을 넘어서서 종교적인 ‘신성력’에의 강렬한 희구에 의해서 매개되어 있다. |
원형이란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마음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므로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도 거기에 적합한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 밖에 나타났을 때는 모든 사람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집단적으로 ‘심상’(心像)을 투사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럴 때 한 괴팍한 인물이 일약 어느 집단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는 현상이 생긴다. 히틀러가 독일 여성들의 지지를 받아 제3제국의 왕자로 군림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신흥 종교집단의 형성도 여성들의 아니무스 원형, 즉 영웅원형, 또는 구원자 원형의 집단적 투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인기가수에 대한 집단적인 열광’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그들의 마음을 열광케 하는 것이 그 마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순한 성적인 매력이나 호기심을 넘어서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초인과 영웅에 대한 열정과 회구인 것이다. |
2교시
물질은 곧 잘 아니마 원형의 투사를 받는다. 그것은 모체(母體)Matrix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알코올 - 우리는 술을 酒精이라 부른다 - 일 수도 있고 지극히 사사로운 물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은 아니마의 입김이 닿을 때 평범한 물질을 떠나 마력을 지닌 것으로 변하여 인간은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봉하게 된다. 신(神)을 모시던 그리스의 신전이 돈을 거래하는 근대의 은행건물의 주요한 양식이 되어 버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술에 대한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을 능가한다 |
정신병리현상이라고 생각되는 것 가운데도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현상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정신의학에서 애정망상(색정망상)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환자는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 속의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는 굽힐 수 없는 믿음을 갖는다. 자세히 관찰하면 그 남자는 그녀에게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여러가지 신비스러운 속성을 띤 초인적 존재이다. 환자에게 그는 위기에서 그녀를 구출하는 구원자이며 모든 악을 물리치는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리학적으로는 여기에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가 간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로서의 부모상 - 아니마 아니무스의 원형상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은 어린 시절이다. 네 살 이전의 어린이는 아직 연속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몽롱한 상태처럼 의식의 단절적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하며 이런 상태에서 인지하는 부모의 像은 현실적인 상이 아니라 풍부한 환상에 의해서 채색된 부모상이다. 이 환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심리적 현실로서 그 환상을 낳게 하는 마음 속의 모체를 전제로 하며 그것이 ‘신의 쌍(雙)’ 주제에 반영되는 부모원형인 것이다. 어린이가 지각하는 부모는 부모의 현실상(現實像)이 신성(神性)으로 덧입혀진 상이다. 부모의 상은 어린이에게 있어 근친상간적인 환상의 대상이기보다 더 강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융은 이것을 종교적 표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상은 사랑의 관념뿐 아니라 신의 관념에 연관된다. 이러한 부모에 대한 원형적 체험은 어린이가 성장하고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사라지고 어린이는 현실적인 부모상을 적지 않은 실망과 함께 원형적 부모상으로부터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형적 부모상은 그대로 무의식에 남아 있어 부모 아닌 다른 이성에 투사되거나 또한 투사될 준비 태세를 간직한 채 있게 된다(ex. 융은 자기 아들을 더 없는 정성으로 보살피며 어울리지 않을만큼 큰 기대를 걸다가 결국 노이로제환자로 만들어버린 한 어머니의 예 - 이 어머니는 무의식적인 도그마, “내 아들은 미래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여성들의 마음 속의 아니무스적 영웅원형이 아버지나 남편 또는 아들에게 투사되면 그녀의 행동이 그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조종된다 |
*모성콤플렉스와 입사식(Initiation, 성인식)의 의의
원시사회에서의 입사식은 어린이들의 부모와의 일체감을 지양하고 종족, 사회, 국가와의 새로운 형태의 일체감 - 하나의 새로운 神秘的 融和 - 을 지향하는 것이다. 남아에게 아버지는 외계의 위험에서 보호하는 존재이며 남성으로서의 페르조나의 표본이 되듯, 어머니는 그에게 어둠 속에서 그의 마음을 위협하는 여러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입사식에서 후보자는 어머니 아닌 다른 성인사(成A師)로부터 그 어둠의 세계 즉 저승의 모든 것에 관해서 배움으로써 어머니의 보호권에서 탈피한다.
cf. 모성콤플렉스의 병리적 측면
병리적 측면 - 입사식(入社式)과 같은 모성으로부터의 효과적인 극복 단계가 특별히 제도화되지 못한 동서의 이른바 ‘문명사회’의 현대인들은 모성상을 그대로 부인에게 전이한다. (ex. 남성은 결혼만 하면 어린애 같아지고 감상적이고 의존적이 아니면 폭군적이며 예민하거나 인색하여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게 되는데, 후자 즉 폭군적 변모는 바로 전자, 비굴한 수동성과 종이 한 장 차이며 모성에의 의존이라는 점에 다름이 없다)
*분석심리학에서 보는 결혼의 심리적 의의
여성은 남성에게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며 남성으로부터 생각하는 힘을 얻는다.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는 이러한 선상에서 상호 보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격의 성숙은 자기의 의식에 부족한 것을 상대방에게 구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찾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데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心同體)라고 한다면 이것은 끝없는 상호투사로 인한 고태척(古態的) 결합을 장려하는 말이며, 때로는 개체의 성숙을 저해하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 행복감과 신비적 융화로서의 결혼은 그것이 너무 인위적인 틀로서 강요되면 내부에서, 또는 밖에서 오는 작용에 의하여 파괴되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기는 사실상 개인의 개인으로서의 자각을 위해서는 귀중한 기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결혼을 성인의 조건으로 삼았고 신성시하였던 것 같다. 독신자에 대한 백안시와 동정, 불안감이 한국 사회처럼 강한 곳이 없는 것도 결혼을 신성시하고 이를 성인의 절대적 조건으로 믿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이러한 신비적 결혼관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대극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합일, 의식과 무의식, 남성과 그의 ‘아니마’, 여성적 의식과 ‘아니무스’의 합일을 전통적 결혼관에 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이성간의 결합관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흔히 말하듯이 일심동체가 아니고, 일심일체의 남성과 일심일체의 여성의 만남인 것이다. 결혼 생활의 문제점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상대 속에 아니마 원형과 아니무스 원형을 투사하며, 또 각기 그 원형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자 할 때 일어난다. 이 관계는 평화롭고 다정스러워 보일 수는 있으나 성숙에 필요한 갈등과 고통이 결여되어 있어 개인으로서의 성장이 저지될 가능성이 있다.
3.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미분화와 분화
“아니마나 아니무스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그것은 남성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경험의 총화이며 여성에서 남성에 대한 경험을 통튼 것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인간 정신 속에 전승된 여성적 요소, 전승된 남성적 요소이다. 이리하여 남성에서의 아니마는 ‘기분(mood)’, ‘정서(emotion)'으로 나타나고, 아니무스는 ‘생각’, ‘의견(opinion)’으로 나타난다.
1)남성의 아니마의 양상
아니마 원형이 지니고 있는 ‘기분’의 성질은 어둡고 밝은 여러 뉘앙스를 띠고 있어서 꼭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마는 의식화하기가 쉽지 않다(ex.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 남성의 꿈속에 황홀한 감동을 주는 이름 모를 여인, 어두운 베일에 싸인 귀신같은 노파, 때로는 청순한 소녀의 상, 그리스 신화의 소년 소녀의 원형상 등)
남성의 시선은 여러가지 외계의 일을 향하며 여러 여성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듯이 보인다. 가정은 하나의 지나가는 장소, 남성은 거기에 잠깐 머물렀다간 바깥 세계로 다시금 치달아간다. 그렇게 밖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의 마음속의 ‘아니마’는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상보성). 남성이 외계에 관심을 두면 둘수록 그의 아니마는 독선적 감정, 고집불통의 정열이라는 특징을 띠며 하나의 여성상에 집약한다.
2)여성의 아니무스의 양상
여성은 반대로 의식에 있어서의 사적인 감정적 태도와는 달리 무의식에서의 남성적 요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성격을 띤다. ‘그것은 마치 다수의 재판관, 아버지들의, 혹은 그 밖의 권위자들의 집회’처럼, 굽힐 수 없는 정당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전제들의 대백과사전, 말, 의견, 법칙, 평균진리, 판단, 이성들이다. 때로는 건전한 인간 이해의 형태로, 때로는 찌르는 듯한 편견의 모습으로, 혹은 “사람이란 누구나 그런 거야” 하는 식의 교육용으로 개작된 법의 모습으로 아니무스는 나타난다고 융은 말한다.
3교시
3)아니마와 아니무스 미분화
아니마가 의식되지 않아 미분화 상태에 있으면 그것은 원시적인 감정과 통하게 된다. 그것은 침착하고 이성적임을 자랑하는 남성으로 하여금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 순간 그는 그의 부정적 아니마에 사로잡힌 것(possessed)이다. 아니마가 통합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너무 강하게 배치되면 그는 무의식적인 자극에 쉴 새 없이 영향을 받아 여성화되어 요변스러운 남자,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명을 받게 된다. 때로는 분방한 추측, 질투, 의혹에 사로잡혀서 부인을 괴롭히는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남성이 바로 완전무결한 호남(好男)의 페르조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니무스가 미분화되면 그것은 ‘따지는 버릇’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미리부터 정해 놓고 시작하는 의논이므로 아무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의견’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논리정연한 판단이 아니고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한 궤변의 형태를 취한다. 이런 부정적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기의 미분화된 아니마의 분노에 사로잡혀서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아는 신’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파장을 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대개 “아니마는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이다.”
예를 들면 한국문화에 있어 부부간의 대화의 문제나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부부간의 말다툼이나 여러가지 집단모임이나 수업상의 토론에서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신의 미분화된 아니마로 인해 분노에 사로 잡혀서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하는 신'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다"고 궤변을 떨면서 그런 대화나 토론은 파장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opinion)이고, 미성숙한 남성의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기분(mood)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싸움하다가 미성숙한 남성은 화를 내고 밖에 나가고, 미성숙한 여성은 자신이 옳았고 그러기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미성숙한 부부가 지니게 되는 일반적인 형태로 융은 보았다. |
부정적인 아니마는 자신이나 타인을 깎아내리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보람도 없다”는 아니마의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암울한 기분은 자살을 유혹하기도 한다(ex. 로렐라이, 구미호, 중세의 마녀 등).
또한 부정적인 아니마의 다른 측면은 남성들로 하여금 지적(知的) 유희에 사로잡혀서 삶의 생기와 자발성을 무의미한 현학적 사고로 희생시키는 데 있다. 그것은 구혼자들에게 일련의 수수께끼에 답하도록 하고 답을 맞추지 못하면 반드시 죽도록 하는 민담의 여주인공과도 같다.
또한 미숙한 아니마는 원시적인 색정적(色情的) 환상 속에 나타난다(ex. 도색잡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분화
잘 분화된 아니마가 창조적 감홍을 불러일으키듯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남성들이 보지 못하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 그들의 추상적 사물에 의해서 흐려진 시야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4. 중년 이후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와 성찰의 중요성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는 개체의 통일된 인격의 실현, 즉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나 이 작업은 자아와 페르조나와의 구별, 그림자의 인식에 비해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心)Seele의 신화적 측면은 어린이에게서 체험이 되었다가 성장함에 따라 의식에서 분리되어 무의식적 기능으로 남아 있게 된다. ‘마음’(心)의 상실, 적어도 의식 표면에서의 상실이 일어난다. 중년 이전의 젊은 사람들은 ‘아니마’의 전적인 상실을 특별한 마음의 상처 없이 견디어 낼 수 있다. 남자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남자로서의 역할만을 완수해 가는 것으로 큰 문제를 일으킴이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중년 이후의 지속적인 아니마 상실은 그의 생동감올 점진적으로 희생시키게 된다. 그는 결국 조로(早老)하여 성격상의 경직, 단조, 완고, 부질없는 원칙의 나열에 사로잡히거나 반대로 체념, 피로, 게으름, 유치하고 의존적인 행동, 책임감 상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외적 인격으로 경화된 인간에 있어서도 무의식의 자율적인 대상기능이 일어나 내적 인격의 체험을 하도록 하여 이런 정신적인 노화(老化)를 방지한다.
1)아니마의 객관화
페르조나가 외부 세계와 자아를 연결하는 관계기능이라면, ‘마음’(心)Seele은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으로 눈을 돌리게 하며 그 깊은 층으로 인도하는 관계기능이다. 페르조나를 잃을 때 외부와의 관계를 상실하듯 마음(心)Seele를 잃으면 자아의 내면세계와의 관계가 정지된다. 자아의식은 한편으로는 심상으로부터 자아의 태도를 구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심상을 의식적으로 투사케 함으로써 그것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관찰하기 위하여 이를 ‘나’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융이 아니마의 인식을 위하여 우리에게 권하는 ‘아니마의 객관화’와 서로 통하는 말이다. 융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아니마’와의 사적인 대화를 통하여 마음속에 있는 ‘아니마 성향’의 배경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2)아니무스의 외향화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 성찰
아니무스의 인식에 있어서는 이것의 외향화를 경계하여야 한다. 아니무스 의견은 곧잘 바깥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대한 일가견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은 여성다움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 안에 속하는 것을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무스는 의식의 외부 세계로 향한 관계 기능이 아니고 무의식으로 향한 관계 기능이다. 아니무스는 착상기능으로서 안으로 향하여 무의식의 내용을 머리에 떠오르게끔 해야 한다. 아니무스와의 만남도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아니무스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배경을 통하여 그 유래(동기와 의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그녀는 원형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원형과 더불어 친숙해지고 동시에 그 영향에 맹목적으로 자기를 맡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자기실현의 가장 큰 난관을 통과하는 것이 된다.
참고자료 -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인식방법
첫댓글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글을 따라 이 카페에 가입하게 되기도 했구요. 다른 자료도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