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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관동별곡』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출전: 김슬옹(2002). 정철의 ‘관동별곡’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문학한글 15․16집, 2002, 한글학회
1. 머리말
관동별곡은 정철이 17세기에 지은 옛 고전으로서의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삶, 아니 학생들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열린 텍스트이다. 최근 7차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살아남아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철의 관동별곡에 대해서 두 가지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별 느낌없이 머리로만 전문을 암기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오래 전에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관동별곡에 관련된 곳을 거의 가보지 않고 5년간이나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그런 부끄러움이 극에 달했던 1993년 어느 날 홀로 정철의 체취를 찾아 길을 떠나 그 기록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참으로 서글픈 것은 학생들이 관동별곡을 읽거나 배우는 태도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바뀐 것이 있다면 전문을 암기하는 풍토만 바뀌었을 뿐이다. 최근 어느 학생의 고백을 들어 보자.
대개의 경우 관동별곡을 처음 접했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이었을 것이다. 관동별곡 수업시간에는 거의 중세 국어 어휘들을 외우고, 또 그 해석을 외우고, 또 어떤 구절에 대한 해석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등학교 수업의 폐단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우선, 학생들은 관동별곡이 기본적으로 기행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답사하고 나서 쓴 것인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관동별곡 부분의 교과서 진도를 나간 후에도 정철이 답사한 곳이 대체 우리나라 어디쯤인지는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이 불러주는 내용을 메모하는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 교육의 폐해라고 하겠다. 두 번째 폐해로는, 전체적인 내용이 전혀 파악이 안된다는 점이다. 수업시간에는 부분부분 파고들기만 했지 전체적인 흐름은 거의 살펴보지 않은 까닭이다. 관동별곡을 처음 접할 때에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했던 고등학생들은 관동별곡 하면 ‘끔찍한 고문(古文)=고문(拷問)’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관동별곡이 가지는 진짜 의미는 파악할 생각조차 안하게 된다. - 대학 1년, 엄지섭
고문(古文)이 고문(拷問)이 되었다는 고백이 섬짓하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이 학생의 문제설정 속에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이 담겨 있다. 입시 위주의 병폐라는 지적 외에 이 학생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기행문다운 글맛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인 감상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체적인 흐름을 거의 살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구 해석에 급급해 전체적인 맥락이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학생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관동별곡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가늠해주고 있다. 기행문으로서의 기본 성격에 충실하면서 도대체 정철이 이런 기행문은 왜 썼으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지면 된다.
2. 관동별곡을 제대로 읽기 위한 주요 전략
정철의 관동별곡은 이 세상에 소개된 뒤로 지금까지 변함없는 베스트셀러식 고전이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늘 교과서의 한 부분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그렇고 근대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즐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득신(1604-1684)이 백곡집(栢谷集)에 실은 ‘관동별곡에 대한 소감(關東別曲序)’라는 글(조면희 옮김:1997)에 의하면 신분계층에 관계없이 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계집종이나 기생들은 유행가처럼 불렀고 양반들은 그런 소리를 즐겼다고 한다. 조우인의 ‘속관동별곡’에서 보듯 재생산 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가 대개 그러하듯이 보편적/일반적 읽기가 주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위험성을 이미 안고 있다. 이래서는 진정한 고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이 글의 맥락을 따져보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첫째는 관동별곡을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관동별곡이 그 당시 주체적 문화의식을 반영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을 오늘날의 민족주의로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평가는 그 당시 뛰어난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김만중이 관동별곡이 한문류의 작품보다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 쓴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그런 식의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제대로 된 맥락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의 의미체계를 그대로 적용하는 읽기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이를테면 ‘강호’를 지금의 관점에서 ‘자연’으로 해석한 뒤 오늘날의 자연의 의미로 읽는 경우가 그렇다.(뒤에서 해설)
셋째는 옛글 자구풀이 위주의 독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기행문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주의 관점이다. 그 당시 맥락에 의해 텍스트를 제대로 읽고 또 지금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재구성해야 한다. 정철은 뛰어난 문학가이자 당대의 정치 거물이다. 작품을 그의 삶이나 정치 행적에 꿰어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이런 글을 썼는가, 어떤 정서를 자아내는가 등등을 음미하자는 것이다.
그 다음은 분단과 통일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관동별곡의 여행지가 분단에 의해 갈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기행문이라면 땅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가 여행한 곳은 우리는 왜 반밖에 볼 수 없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면 지금 기행문을 배우는 의미는 적을 것이다. 기행 형식을 통하여 의미읽기를 시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기행문 초안 자체는 1993년 가을에 3박 4일로 답사한 뒤 쓴 것이다. 3절 내용의 4분의 1정도를 <<함께여는 국어교육>> 28호(1996,여름) 호에 실었었다. 이 글은 그 글에다 평론 부분을 대폭 보강해 쓴 것이지만 시점은 1993년 당시이다.
3. 관동별곡 제대로 읽기 - 기행 형식을 통하여
하늘을 떠받드는 듯한 진부령을 넘을 때서야 겨우 마음을 추수려 내가 실로 오랜만에, 그것도 5년간 벼르고 벼르던 여행 길에 올랐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해발 800미터의 그 험한 산길을 바라보며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첫머리를 떠올려 보았다.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 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다.(자연을 사랑하는 병이 깊어 전라도 창평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더니, 800리나 되는 강원도 관동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 소임을 맡기시니, 아! 임금의 은혜야 갈수록 그지없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으레 전문을 외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훈민정음의 서문,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문, 그리고 관동별곡. 훈민정음 서문이야 짧고 외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손치더라도 나머지 둘은 전문을 외울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 그래도 아무 군말없이 눈꼽만치의 회의도 없이 외었으니 왠지 씁쓰레한 웃음이 떠오른다. 생경한 한자어에 조사만 낼름 붙여 놓은 일본 문체를 외우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었는지, 관동팔경에 대한 사진조차 구경하지 않고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나마 기미독립선언문보다 관동별곡을 더 무난하게 외울 수 있었는데 이는 가사의 4음보 3·4·3(4)·4조의 가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기미독립선언문에 비해 관동별곡은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토박이말 문체라는 것이 옛말임에도 좀더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당시 사대부의 핵심 세력이었던 사람의 문체로서는 파격적인 문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대부였던 김만중은 한문으로 아래와 같은 호평을 했다.
구마라즙(鳩摩羅什)이 말하기를 인도(天竺)에서는 모두 글을 좋아해서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을 중국말로 번역해 놓으면 그 뜻은 알 수 있으나 그 말의 아름다움은 잃어버린다고 하니 그건 마땅히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에 가락이 붙으면 노래가 되는데 겨레마다 말이 비록 다르지마는 제 나름대로 뜻을 주고 받는 말이 되기만 한다면 그 말에다가 가락을 붙여 노래를 만들어 충분히 하늘, 땅을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중국만 그리 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 나라의(양반사대부들의) 시문(詩文)은 제 나라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워서 쓰니 가령 완전히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낸 것일 뿐이다. 그보다는 마을의 나무꾼이나 아낙네들이 흥얼거리면서 서로 주고 받는 것이 비록 더럽다 하지마는 그 참다움과 거짓됨으로 따지면 진실로 글하는 선비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하물며 이 세 노래(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는 하늘이 마련해 낸 자연스러움이 있고 야만인의 더러움이 없으니 예로부터 다 쳐서도 우리나라에 참된 문헌은 오직 이 세마디 뿐이다. - 서포만필에서(한문 원문 생략)
지배 계층에 의한 관동별곡과 같은 문체는 일부 문인들의 시가 문학에서만 나타났고 그 또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대신 그러한 문체는 주로 여성들과 피지배계층에 의해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흐름으로 보면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문과 같은 문체는 퇴보한 셈이다. 한문 위주의 문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문체도 발전인지 모르나 시가문학 문체에 견주면 엄연한 퇴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 침략 세력은 조선 지배를 위해 한국의 문체를 일본의 문체와 비슷하게 만들려는 전략이 성공한 것이고 기미독립선언문 문체와 같은 문체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관동팔경과 같은 사대부의 우리말스러운 글쓰기를 민족주의와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다. 민족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 당시 사대부들의 세계관은 존화주의 즉 소중화주의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배타적인 이민족이 아니라 본받고 따라야 할 대상이었다. 한문조차도 중국의 옛문체를 모방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나마 조선 후기로 오면서 박지원 같은 이가 양반전, 호질과 같은 우리식 한문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철이 위와 같은 문체를 부려쓴 것은 민족의식에서라기보다 문학적 또는 문화적 욕구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만중의 평을 존중하지만 관동별곡의 전체 평가까지 김만중 평에 의존하는 일반적 경향은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끝에 5년간 고등학생들을 가르쳤으면서도 이제서야 현지 답사를 하러 가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머리로만 배워 머리로만 가르친 것에 대한 회한이 머리를 무겁게 했다.
‘듁림’은 좁게는 대숲, 넓게는 자연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전라남도 담양군의 창평면을 가리킨다. 중국 위나라 말엽, 진나라 초에 일곱 선비가 대숲에 모여 깨끗하고 고상한 이야기(청담)을 즐기며 살았다고 하여 ‘죽림칠현’이라 하였는데 이를 연상하여 쓴 것이다. 결국 자연을 사랑하여 죽림칠현처럼 한가이 지냈다고 한 것인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면의 정치 풍파다. 정철은 선조 11년(1578년) 진도 군수인 이수의 뇌물 사건으로 옥사가 벌어지자 이수를 두둔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어 창평에 3년간 머무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있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별곡’과 시조 ‘훈민가’를 지었다. 관동별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정치적 배경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이 작품이 정치인으로의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뭇 사람들의 평가가 양극단을 치닫고 있는 점도 이 작품을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해 준다. 그에 대한 평가를 김학채(1992:6-7)에서 재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쁜 평
1) 정철은 성질이 괴팍하고 말이 망녕되며 가볍고 얇으며, 조롱을 즐기고 원망과 허물을 자초했다.(선조실록)
2) 정철을 보매 겉으로는 청백하다고 명성에 기댔으나 실제 마음은 탐음하며 방탕하며 일생을 그르쳤다. (안중묵의 소)
3) 뱀 같은 성질로서 도깨비 같은 꾀를 품고서 독기를 심어 사람과 사물을 해치기를 일삼는다.(을축록 갑년 11월 양사합초)
4) 간신 정철은 이리 같은 바탕으로서 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선량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는지라 청백한 의논이 그를 용납해 주지 않자 항상 불평을 품고 있다. (라 덕명의 소)
5) 정철은 옛날 간신풍이 있다. (퇴계 송강별곡집)
좋은 평
1) 정송강은 젊어서부터 청정함으로써 이름이 높았으니 율곡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김시양)
2) 공은 천성이 소통하고 준결하며 강개정직하다.(김집)
3) 정철의 사람됨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청백하고 절개가 곧았다.(이귀의 상소문)
4) 충효청백함이 행동에 나타나고 의를 좋아하고 이를 멀리하며 절조가 굳다. (신흠의 송강집 서)
5) 정철은 때로 술잔을 들고 반취에 이르면 입으론 읊고 손으로 쓰는데, 장시며 단가가 올섞여 연신 이루어진다. 부드러운 말씨가 도란도란 끊임없고 피차의 거리가 사라져서 친숙해지고 부지불식 중에 무릎이 앞으로 나아 갔도다. 내 일찍이 많은 인물을 보았지만 공과 같은 품격과 운치를 본 적이 없었다. (신흠의 송강집서)
지금 그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있다고 해서 작품의 맥락적 의미를 그리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주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은 정치적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내용을 삶의 맥락에 꿰어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내용 맥락을 삶의 맥락 속에서 제대로 새겨 보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전원 예찬 또는 ‘귀거래(강호에 돌아가자)’로 상징되는 자연사랑 정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진원(1994)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러한 사대부들의 태도에는 조선 시대의 경제적인 측면인 토지 제도와 정치적인 측면인 붕당 정치, 철학적인 측면에서의 성리학이 깔려 있다. 이를테면 성리학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곧 토지 제도 측면에서 볼 때, 관직에서 물러나면 토지를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는 토지 사유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땅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 근거가 확고하게 마련된 것이므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하더라도 여유있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귀향은 적극적인 구현 대상이 아니라 당쟁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사대부들의 진정한 목적은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런 자연사랑은 주로 관념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연군지정(戀君之情). 사대부는 조선 초기에는 권력을 지향하는 훈구파와 정통 성리학자임을 내세우는 사림파로 갈렸으나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내세우며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자리매김이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안빈낙도’는 소박하나마 자연을 즐기는 도라는 것이니 이는 권력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을 합리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1). 여전히 권력 지향을 내포하면서 근본적인 ‘연군지정’이데올로기가 결합되는 것이다. 물론 자연에 대한 사대부들의 느낌을 국토사랑으로 볼 수도 있다.
“<관동별곡>은 작자가 양반인 것만큼 유흥적 기분의 흔적이 있기는 하나 이 시기 가사문학에서 조국산천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민족적 긍지감을 보여준 의의있는 작품이며, 그후 가사문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 <관동별곡>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갔을 때 쓴 것으로서 명승지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 금강산의 절경을 펼쳐 보이면서 조국산천에 대한 사랑과 민족적인 긍지감을 격정에 넘쳐 노래하였다.” 한국민중문학사 - 열사람(연변, 1988)
‘민족적 긍지감’으로 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김만중 평론 비판에서 논의했다. 여기서는 아래와 같은 반론을 더 주목하자는 것이다.
완상적 태도로 국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민중의 생활근거로서의 국토미의 예찬이나 자연관은 차이가 있다. 이조 사대부들의 시가에 등장하는 자연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대부적 의식 속에 관념화되고 규범화된 자연을 완상조로 읊고 있음이 드러난다. -문학교육연구회(1987), 207쪽
사실 사대부들이 공부만 하고 이런 여행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일에만 매달렸던 하층민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당시 사대부들이 여행이나 등산을 어찌 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을 보면 그런 점을 더 잘 알 수 있다. 정철이 금강산 구경을 끝내고 동해 쪽으로 빠지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山산中듕을 양 보랴, 東동海로 가쟈라. 藍남輿여緩완步보야 山산映영樓누의 올나니, 玲녕瓏농碧벽溪계와 數수聲셩啼뎨鳥됴 離니別별을 怨원 , 旌졍旗긔를 티니 五오色이 넘노 , 鼓고角각을 섯부니 海雲운이 다 것 .(내금강 산중의 경치만 매양 보겠는가? 이제는 동해로 가자꾸나. 가마를 타고 천천히 걸어서 산영루에 오르니, 눈부시게 반짝이는 시냇물과 여러 소리로 우짖는 산새는 나와의 이별을 원망하는 듯하고[감정이입], 깃발을 휘날리며 오색 기폭이 넘나드는 듯하며, 북과 나팔을 섞어 부니(풍악을 울리니) 바닷구름이 다 걷히는 듯하다. )
여기서 ‘남여완보’는 가마 타고 천천히 갔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약용의 시가 제격이다.
사람들 아는 것은 가마타는 즐거움뿐 人知坐輿樂
가마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 不識肩輿苦
사대부가 형성되는 고려시대 후기에도 ‘관동별곡’과 비슷한 류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안축(1287-1348)의 관동별곡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 첫머리를 보자.
海千重 山萬壘 關東別境
碧油幢 紅蓮幕 兵馬營主
玉帶傾盖 黑삭紅旗 鳴沙路
爲 巡察景 幾何如
朔方民物 慕義趨風
爲 王化中興景 幾何如
바다 겹겹 산 첩첩인 관동 절경에서
푸른 휘장 붉은 장막에 둘러싸인 병자영주(안축)가
옥대 매고 일산(양산) 받고, 검은 창 붉은 깃발 앞세우며 모래사장으로,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좇네.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안축이 강원도 순무사로 있다가 돌아올 때 관동의 경치를 읊은 노래이다. 조동일(1992:187)에서는 윗글은 “화려한 행차를 꾸며 관동지방을 순찰하는 것은 경치를 구경하자는 거동이 아니고,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린 북방 백성들이 생업을 보살피고, 의로운 풍속을 일으키게 해서 왕의 덕화가 거기까지 미쳐 중흥하게 하는 임무 수행”이라고 해석했다.
시골에 묻혀 있다 관직에 나아가게 된 정철의 기분은 다음 구절, 즉 본격적인 유람지인 금강산까지의 시원스런 여정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延연秋추門문 드리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라보며, 下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 셧다. 平평丘구驛역 을 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昭쇼陽양江강 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髮발도 하도 할샤. 東동州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니, 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峰봉이 마면 뵈리로다. 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 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다, 몰다.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시고. 級급長댱孺유 風풍彩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경복궁 서문인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님께 하직을 하고 물러나니, 임금의 신표(임명장)가 앞에 있구나.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원주)은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구나.
결국 정철은 양주, 여주, 원주를 거쳐 철원, 회양으로 해서 금강산 유람으로 들어간다. 통일이 되어 그대로 돌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진부령을 넘어 간성에 도착했다. 남한에 있는 관동팔경 가운데 맨 위쪽에 있는 ‘청간정’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사실 송강이 가본 관동별곡의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있다. 그가 유람한 곳은 크게 금강산과 동해(관동팔경)로 나눌 수 있는데 금강산과 관동팔경 두 군데가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관동’이란 말은 경기도의 동쪽이란 이름으로서 강원도 전체를 이르기도 하고, 대관령 동쪽 땅 곧 동해안 지대를 말하기도 한다. 결국 그가 본 여섯 가운데 두 군데인 통천의 ‘총석정(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고성의 ‘삼일포(강원도 고성군 삼일포리)’가 북한에 있고 나머지는 남한에 있다. 강원도 간성의 ‘청간정(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등과 현재는 경상북도에 들어 있는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등이 우리가 갈 수 있는 남한 지역이다.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를 넣기도 하는데 이 지역도 북한에 있다. 이중환은 1750년경에 지은 택리지(擇里地)에서 “흡곡 시중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청초호,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들기도 했다. 이중 ‘청간정’은 관동별곡에서 그 지명만 언급이 되고 ‘월송정’은 정철이 가보지 않았는지 관동별곡에 나오지 않는다.
간성에서 다시 시내 버스를 타고 청간리에 도착하니 무수한 갈매기떼가 나를 반겼다. 마침 월요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거의 없어 새들의 노랫소리와 대나무 소나무 숲의 평화로움이 적막을 더해 주고 있었다. 청간정(淸澗亭)은 조선 중종 15년(1520)에 고쳐 세웠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조차도 1844년에 불타버렸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1928년에 다시 지은 것을 1981년에 해체 복원한 것이다.
누정에 오르니 쾌청한 날씨, 유유로이 백사장을 수놓은 갈매기, 푸르디 푸르게 부서지는 파도와 물결이 온 몸을 시원히 적셔 온다. 그래서 ‘맑은 물’이라는 ‘청간(淸澗)’이라 했던가. 그런데 ’청간정‘이라는 현판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53년에 썼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 저 푸르디 푸른 바닷물을 사랑했기에 아니면 그 의미를 알고 현판을 썼을진대 어찌하여 그 만분의 1도 못 미치는 정치를 했던가. 문득 임시정부 수반으로서의 이승만을 칼날같이 반대했던 단재(신채호)가 생각났다. 단재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면 이승만은 오늘날 부정과 부패의 근본 뿌리라는 치욕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텐데 하는 괜한 역사의 가정이 꼬리를 물었고 현판을 우두커니 바라 보노라니 푸른파도와 샛소리가 연신 귓전을 넘나든다. 이런 저런 생각에 가사의 음수율 ‘삼사/사사조’와 음보율 4음보를 흉내 내서 시 한 수 지어 보았다.
푸르른 물결 따라 청간정에 올랐더니
옛 현판 어디 가고 새 현판이 걸려있네.
모아졌다 부서지는 파도의 무상함을
흰머리 독재자는 어찌 못 배웠던가
관동별곡에는 북한 지역에 있는 삼일포를 묘사하면서 신라 화랑 네명(사선)과 함께 명칭만 언급했다.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 자가니, 丹단書셔 宛완然연되 四스仙션은 어듸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 가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郎낭湖호 거긔나 가 잇가. 淸쳥澗간亭뎡 萬만景경臺 몃 고 안돗던고.(고성은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찿아 가니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니, 이 글을 쓴 사선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믈렀던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가?
북한에 있는 삼일포가 몹시 궁금한 구절이다. 안축의 관동별곡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三日浦 四仙亭 奇觀異迹
彌勒堂 安祥渚 三十六峯
夜深深 波瀲瀲 松梢片月
爲 古溫貌 我隱伊西爲乎伊多
述郞徒矣 六字丹書
爲 萬古千秋 尙分明
仙遊潭 永郞湖 神淸洞裏
綠荷洲 靑瑤嶂 風烟十里
香冉冉 翠森森 琉璃水面
爲 泛舟景 幾何如
蓴羹로膾 銀絲雪縷
爲 羊酪 豈勿參爲里古
삼일포, 사선정의 전설 깃든 좋은 경치
미륵당, 안상저, 서른 여섯 봉우리
밤 깊고, 물결 잔잔, 소나무 끝 조각달
아, 고운 화랑들의 모습이 ‘나 여기 있소’ 하오이다
화랑 술랑도가 바위에 새긴 여섯 글자는
아, 오랜 세월에도 오히려 분명합니다
선유담, 영랑호, 신청동 안으로
푸른 연잎 자라는 모래톱, 푸르게 빛나는 묏부리, 십 리에 서린 안개
바람향내는 향긋, 눈부시게 파란 유리 물결에
아, 배 띄우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순채국과 농어회, 은실처럼 가늘고 눈같이 희게 써네
아, 양락(羊酪)이 맛지단들 이보다 더하리오
해변 옆의 무성한 갈대숲을 뒤로 하고 낙산사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속초로 가서 양양 가는 시내 버스를 타고 낙산에 도착하니 마침 수학 여행 온 여고생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산사를 뒤흔들고 있었다. 나도 옛 생각이 나 괜히 덩달아 즐거워 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시 고교 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되찾고자 하는 설레임이었지만 그러한 설레임은 이내 실망으로 가시고 말았다. 그저 두 줄로 행진하며 진열장을 무심히 바라보듯 지나가는 학생들이나 또 인솔교사들의 눈빛에서 어찌하여 낙산사가 세워졌고 그래서 어쨌다는 역사의 인과 법칙을 캐는 즐거움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정철의 관동별곡을 배웠거나 최소한 들어는 봤을 텐데도 그 누구도 그 글맛을 음미하는 학생이 없는 듯하였다. 또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김만중의 ‘구운몽’과 이광수의 ‘꿈’의 근원설화인 ‘조신 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단지,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해 분주히 오갈뿐. 그리고 “몇 반 미녀들 모여라. 못난이들은 모이지 말아라.”하는 인솔교사의 마이크 소리에, 산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해수관음상이 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실제 미녀가 아닌 학생들의 속은 또 얼마나 깊은 번뇌가 쌓일 것인가. 그 소리를 들은 해수관음상의 쓸쓸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조신 설화는 이러한 이야기다. 경주 세달사라는 절의 승려였던 조신은 강릉에 있는 어느 절의 장원을 돌보는 직책에 임명되어 낙산사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 군수 딸을 본 뒤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낙산사 관음상 앞에서 사랑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였으나 결국 다른 사람에게로 혼처가 정해지자 관음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다 잠이 들었다 한다. 뜻밖에 그 여인이 함께 살기 위해 왔다고 하여 조신은 뛸뜻이 기뻐하여 그 여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림을 했다. 사십 여년 깊은 정을 나누는 동안 오남매를 거느리게 되었으나 가난으로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10여년간 빌어먹다 개에게 물려 드러눕게 되었다. 그래서 부부는 아이를 나누어 데리고 각자 살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방을 정처없이 헤매며 슬퍼하다가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한바탕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소재한 배창호 감독의 ‘꿈’이라는 영화는 더욱 처절하게 사랑의 허망함을 영상으로 형상화했다. 처절한 사랑만큼 처절한 말로가 돋보이는 이야기. 다분히 불교적 세계관 설파를 위한 의도적 구성이 돋보인다. 허무하다고 어찌 그 처절한 사랑을 마다할 것인가. 그것이 속세이고 보통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다. 물론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진한 이야기일 수는 있다.
유적이 단지 유원지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5000년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금속 활자, 한글 등 세계적으로 우수한 유산은 적극적으로 발전 시키지 못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처참했던 경험은 경험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니, 산 전체를 두루 돌아 보는 내 마음이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낙산사는 통일 신라 때인 671년(문무왕 11)에 의상 대사가 세웠다고 하며 창건 설화가 원효에 관한 설화와 함께 삼국유사에 전한다.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의상은 동해 바닷가에 있는 어떤 굴 속에 관음보살이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낙산이라고 했다. 낙산이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머물러 있다는 인도 보타낙가산에서 따온 것이다.
의상은 7일 동안 목욕재계하고서 불법을 수호하는 실령들의 호위를 받으며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의상이 굴 안에 들어가 참배하자 갑자기 허공에서 수정 염주 한 벌이 떨어졌다. 의상은 염주를 받아 들고 감격에 겨워 한동안 서 있다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해 용왕이 나타나더니 여의주 한 알을 바쳐 왔다. 의상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소중히 모셔 놓고 다시 7일간을 재계한 뒤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의상이 배례하자 비로소 관음보살이 참모습을 드러냈다. 관음보살은 감동으로 몸을 떨고 서 있는 의상에게 일렀다.
“바로 이 자리 위의 산꼭대기에서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다. 그곳에 법당을 짓는 것이 좋으리라.”
의상이 계시를 받고 나와서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과연 대나무 한 쌍이 땅에서 솟아나 있었다. 그는 곧 그곳에 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셨다. 그러자 대나무는 도로 없어져 버렸다. 의상은 바로 그곳이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임을 깨닫고 절 이름을 낙산사라 했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낙산사 불전에 안치해 두고 떠났다. 그후 원효대사가 순례 차 낙산사를 찾아갔다. 가는 도중 남쪽 들녘에 이르렀을 때였다. 들판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래 자유분방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원효인지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벼를 좀 얻어 갑시다.”
하고 농담을 건넸다. 여인은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벼가 흉년이 들어 드릴 것이 없소.”
하고 역시 농담조로 대꾸했다. 원효는 무안해서 얼른 자리를 떴다. 얼마를 걸어 다리 밑 시냇가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대를 빨고 있었다. 원효는 다가가서 마실 물을 청했다. 그러자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래를 빨고 난 물울 떠주는 것이었다. 원효는 기겁을 해서 그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찾아 마셨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 오더니,
“스님은 그만 단념하고 가세요.”
하고는 후두둑 날아가 버렸다. 원효가 놀라서 둘러보니 그 소나무 아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는 ‘이상한 일도 다 있군.’ 하며 그곳을 떠나 낙산사로 갔다. 마침내 낙산사에 도착하여 관음상 앞에 나아가 배례를 드리려니까 바로 아까 소나무 아래 벗겨져 있던 신의 나머지 한 짝이 거기 있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앞서 만난 여인들이 다름아닌 관음보살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불렀다. 원효는 관음보살님이 계시다는 굴을 찾아가 참모습을 뵈려 했으나 갑작스레 풍랑이 일어 결국 들어가 보지 못하고 떠났다.
두 설화 속 주인공 이미지가 너무 대조적이다. 의상은 대단한 사람으로 원효는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설화는 말하고 있다. 의상은 관음을 친견하고 원효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유홍준(1993:260)에서의 지적대로 의상과 원효의 불교관의 차이와 그런 차이가 시대상과 결부되는 과정에서 의상의 신격화와 원효의 조롱거리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는 설화도 지배 계층 입장에서 설정되거나 채색되는 보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의상 대사의 영험함이 신통함을 잃었는지(?) 낙산사는 수난도 많았다. 1231년 몽고란 때 모두 불탔다 하며, 조선조 세조 때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다가 조선말에 절모습을 다시 되찾았다 6․25때 다시 모두 타버렸기 때문이다. 나라의 큰 전란 때마다 이와같은 피해를 입은 셈이다.
술 몇 잔으로 내 마음을 달랜 뒤 묵을 곳을 하나 잡았다. 새벽에 해돋이를 보기 위함이었다. 혹시 늦게 일어날까봐 따르릉 시계까지 맞추어 놓았지만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새벽 5시쯤에 자리를 박찼다. 해가 6시 15분에 뜬다는 것을 어제 알아 두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가눌길 없어 곧바로 여관을 나왔다. 매표소 직원을 얼떨결에 깨워 제일 먼저 의상대로 올라 갔다. 노송이 어우러진 벼랑 위에 우뚝 선 의상대! 그믐달이라 그런지 아직 새벽을 품은 어둠이 온 몸을 으시시 떨게 했다.
“ 梨니花화 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낙山산 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예 올라 안자, 日일出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니(배꽃은 벌써 지고 접동새가 슬피 울 때, 낙산 동쪽 둔덕으로 의상대에 올라 앉아 해돋이를 보려고 밤중쯤 일어나니)”
송강이 위와 같이 읊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있으니 산꼭대기 해수관음상은 위엄을 드러내고 새벽 일 나가는 고깃배의 통통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깰 무렵, 수녀 20여명이 모여 들었고 의상대는 금방 비좁아졌는데 그 중 어느 분이 그 앞에 떨어져 있는 홍련암에서 더 잘보인다 하니까 우르르 그 앞으로 몰려 갔다. 나도 얼떨결에 휩쓸려 갔는데 얼마 후 우리들의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 주려는 듯 어머니 나이 비슷한 보살님이 수녀님들을 향해 낙산사와 의상대, 홍련암 등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 서로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이 포근한 눈빛으로 마주 한 모습이 더욱 보기 좋았다.
의상 대사가 토굴에서 수도끝에 부처님으로부터 연꽃과 관음조 새 한 쌍을 받아 세웠다는 낙산사, 절에 관한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보살님의 말씀이 어찌나 따사로운지 훨씬 가슴에 와 닿았다. 부처님의 맑은 미소를 보는듯 하였고 귀를 쫑긋하고(?) 듣던 수녀님들의 앙증맞은 모습이 잘 어우러져 새벽 바다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때마침 숫놈의 목과 가슴 부분이 관음상을 닮았다는 관음조 몇 마리가 보살님 손끝 너머 바위 위에서 노닐고 있었다.
새도 새려니와 해돋이에 앞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새벽 어스름의 평화를 가르는 통통배 몇 척이었다. 우리에게는 이곳이 단지 관광지일지라도 저분들에게는 생업의 터전일진대 새벽 일을 떠나는 모습이 오히려 엄숙하게 다가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상징하듯 민족의 기상으로 삼아 온 동해, 그 장엄함도 묵묵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땀이 있을 때 진정 가능한 것이 아닐까.
통통배를 보며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6시가 넘었고 바다가 조금씩 붉어지는가 싶더니 말로만 듣던 시뻘건 불덩이가 바다 위로 떠 올랐다. 생명의 강렬한 원동력을 보는 듯하여 가슴 속에도 또 하나의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그 불덩이가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얄미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이내 사람들의 실망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10분쯤 지나니 나 홀로 바다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강이 해돋이 정경을 묘사하기를
祥상雲운이 집픠 동, 六뉵龍뇽이 바퇴 동, 바다 날 제 萬만國국이 일위더니, 天텬中듕의 티니 毫호髮발을 혜리로다.(상서로운 구름이 마구 피어나는 듯, 여섯 용이 바치는 듯, 바다를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일렁거리더니 하늘 가운데 치솟아 뜨니 작은 터럭도 헤아리겠구나.)
라고 하여 이를 음미하고 있으려니 아니나 다를까 얄미운 구름을 헤치고 해는 장엄히 떠 올랐다. 조급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웃는 듯 더욱 햇살이 빛나는 듯했다. 구름 속에 숨지 않았을 때의 아름다움보다는 덜 했겠지만 그렇다고 쉬이 자리를 뜨는 관광객들의 조급함이 현대 사람들의 그냥 마구 바쁜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여 씁쓰레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환히 비치나
눈부신 선조의 얼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뒤 줄임
김민기의 ‘내나라 내겨레’을 읋조리며 해돋이의 감동을 가슴에 품고 다시 낙산사 부근을 휑하니 돌았다. 아침은 빵으로 때우고 강릉 경포대로 향했다. 강릉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경포 호수 근처에 이르니 바다 같은 호수와 실제 바다가 양 옆으로 그 웅장함을 함께 하고 있었다.
“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 大대洋양이 거긔로다. 從둉容용댜 이 氣긔像샹 闊활遠원댜 뎌 境경界계, 이도곤 어듸 잇단 말고.(강문교 그 너머에 바로 큰 바다가 있구나. 조용하구나 이 호수의 기상! 넓고도 멀구나, 저 바다의 수평선! 이 바다와 호수보다 더 갖추어진 곳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송강이 이와 같이 읊은 운치를 알겠다.. 호수 근처로 가니 역시 한가로운 몇몇 강태공들만이 호수를 지키고 있었다. 송강이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텩튝을 므니 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려가니(석양 무렵 현산의 철쭉꽃을 잇달아 밟으면서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대골령(현지 발음, 대관령이 아님, 바닷가 반대쪽 산 이름) 쪽으로 내려 온 듯싶다. 그러나 나는 그 정반대로 온 셈이다.
경포대 자체는 1326년인 고려 충숙왕 때 만든 정자를 가리키지만 ‘경포’ 하면 보통 호수와 언저리를 다 싸잡아 가리킨다. 경포호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경포대다. 원래의 경포대는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창건되었으나 중종 3년(1508년 )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경포대는 1745년(영조 21) 강릉부사 조하망이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홍수로 사천면 진리 앞바다에 떠내려온 아름드리 나무로 새로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1873년(고종 10)에 강릉부사 이직현이 중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포대와는 달리 경포호 안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 방해정이다. 정철이 삼일포 묘사에서 언급했던 신라 사선이 놀다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이 곳은 조선 철종 10년(1859) 통천 군수를 지낸 이봉구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객사의 일부를 헐어다가 선교장의 부속 별장으로 지었다 한다. 정자이긴 하지만 온돌방과 마루방, 부엌 등을 ㄱ 자형으로 갖춰 살림집으로도 이용했다 한다. 옛날에는 집 앞까지 호수여서 출입할 때는 배를 이용했다 하며 대청 마루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놀았다 하니 짐작할 만하다.
호수가 넓기도 했지만 경포 8경(녹두일출, 죽도명월, 강문어화, 초당취연, 홍장야우, 증봉낙조, 환선취적, 한송모종, 경포월삼)이 있을 만큼 주위에 볼 것이 많아 자전거를 빌려 둘러 보았다. 지금도 지름으로 4킬로미터인데도 저리 넓은데 원래는 12킬로미터였다 하니 그 크기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우리는정철이 볼 당시 크기의 3분의 1 정도 크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송강이 호수를 아름다운 비단에 비유하여,
‘십리 빙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댱숑 울흔 소개 슬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 혜리로다.(십리나 됨직한 얼음같이 깨끗한 비단폭을 다리고 또 다려서 소나무가 울창한 속에 마냥 펼쳐 놓았으니 아!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비단폭 같은 물결은 잠잠하기도 잠잠하구나. 물 밑에 깔린 모래알을 낱낱이 셀 만큼 맑구나.)’
라고 노래한 뜻을 알만하였다. 더욱 운치를 더하는 것은 호수 한 쪽 물 가운데 정자가 있는 점이다. 송강처럼- “고쥬 람야 뎡 우 올나가니(한 척 배의 닻줄을 풀어 배를 저어 정자 위애 올라가니)”- 정자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점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정철도 적었지만 이 호수에는 고려 우왕 때의 홍장 고사가 전한다. 얘기인즉은 강원 감사 박신이 강릉 기생 홍장을 사랑했다는 것으로 임기가 다 되어 떠나려 할 때, 강릉 부사 조운흘이 짐짓 홍장이 죽었다고 하자, 박신이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에서 뱃놀이를 나갔다. 문득 그림같은 배 한 척이 앞에 나타나 그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박신이 “이는 정녕 선녀로다.”하고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홍장이어서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웃었다는 얘기가 서거정의 ‘동인시화’에 전한다. 봉건 시대 지배 계급 사내들의 전형적인 사랑놀이다.
그리고 이곳은 송강이 관동별곡에서 유일하게
江강陵능 大대都도護호 風풍俗쇽이 됴흘시고, 節졀孝효旌졍門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비屋옥可가封봉이 이제도 잇다 다.(강릉 대도호의 풍속이 좋을시고. 충신, 효자, 열녀를 기념한 문루가 고을마다 널려 있으니, 집집마다 벼슬을 봉할 만했었다는 요순 시절의 아름다운 풍속이 이제도 있다고 할 만하구나.)
라고 민심을 칭송한 곳이다. 강릉 민심은 늘 그랬나 보다. 안축의 관동별곡에도 그렇게 그리고 있다.
三韓禮義 千古風流 臨瀛古邑
鏡浦臺 寒松亭 明月淸風
海棠路 菡萏池春秋佳節
爲 遊賞景 何如爲尼伊古
燈明樓上 五更鍾後
爲 日出景 幾何如
삼한의 예의, 천고의 풍류 간직한 옛고을 강릉에는
경포대, 한송정에 달 밝고 바람 맑은데
해당화 길, 연꽃 핀 못에서 때 좋은 시절에
아, 노닐며 감상하는 모습 어떠합니까
누대에 불 밝히고 새벽이 지난 뒤에
아, 해돋이 모습 그 어떠합니까
아마도 그가 관리로 부임하기 전의 여행이라 민심도 아울러 살폈을 것이다. 정치를 잘 해 보겠다는 의지가 곳곳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 그런 점을 드러내 준다. 물론 실제로는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강릉 대도호라는 행정 명칭이 나오는데 오늘날의 강원도는 바로 1395년(태조 4년)에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영동․영서라는 말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강원도가 강릉부의 영동과 춘천부의 영서로 나뉘면서 생겼다.
경포에서 강릉으로 나와 삼척으로 가 찾은 죽서루. 송강의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관리로서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곳에 유일하게 죽서루를 읊은 부분과 함께 그 정신을 기리는 ‘송강 정철가사의 터’라는 가사비와 박물관이 함께 있어 운치를 더 할 수 있었다. 다만 박물관에는 ‘관동별곡’과 관련된 여러 자료가 충분히 전시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었다.
죽서루 아래의 강물이 많이 말라 “진쥬관 죽셔루 오십쳔 린 믈이 태산 그림재 동로 다마 가니, 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진주관 죽서루 아래의 오십천을 흐르는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니 한강의 남산 밑에 닿게 하고 싶구나.)”라고 송강이 노래한 맛을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돌에 자연스럽게 솟아 있는 누각에서 유명했던 기생인 죽죽선녀와 죽장사라는 절에 얽힌 전설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각을 세울 당시 동쪽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절과 죽죽선(竹竹仙)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고 있어, 그 서쪽에 지은 누대라는 뜻으로 ‘죽서루(竹西樓)’라 지었다는 것이다. 양반들의 풍류 문화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죽서루는 풍류의 누각인가 보다. 안축은 관동별곡에서 다음과 같이 흥겨워 하고 있다.
五十川 竹西樓 西村八景
翠雲樓 越松亭 十里靑松
吹玉篴 弄瑤琴 淸歌緩舞
爲 迎送佳賓景 何如
望사亭上 滄波萬里
爲 鷗伊鳥 반甲豆斜羅
오십천, 죽서루, 서촌 팔경
취운루, 월송정, 십 리의 푸른 솔
옥저 불고, 가야금 타며, 청아한 노래 부르고 우아한 춤 추며
아, 정다운 손님을 맞고 보내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망사정 위에서 창파 만리 보노라면
아, 갈매기도 반가워라
강은 십 리, 절벽은 천 층, 거울같이 맑은 물을 에워쌌네
풍암, 수혈 지나 비봉산에 올라서
좋은 술 기울이고 용빙봉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여름바람 쐬며
아, 더위를 피하는 이 모습 어떠합니까
중국의 주씨와 진씨가 더불어 무릉의 풍물 대대로 전하듯
아, 좋은 풍속을 자손 대대로 전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이 죽서루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하지 않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그 이전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태종 3년(1403)에 삼척 부사로 재임한 김효선이 중건한 뒤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 한다. 이렇게 여러 번 중건해서인지 이 누각은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지은 것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7칸으로 중축한 것이라면 5칸의 구조를 허물고 7칸으로 연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완연히 다른 점은 동시에 지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송강은 여행 끄트머리에, 이 독특한 누각 위에서 많은 갈등을 되새겼나 보다.
王왕程뎡이 有유限고 風풍景경이 못 슬믜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사 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살가, 仙션人인을 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관리로서의 여행길은 유한한데 풍경이 못내 좋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구나. 나그네 시름을 둘 곳이 없구나. 신선이 타는 뗏목을 띄어 내어 북두칠성과 견우성 별자리로 향해 볼까? 네 명의 화랑 신선을 찾으러 단혈이란 동굴에 머물러 볼까?)
다음으로는 관동팔경 가운데 맨 아래에 있는 경상북도 평해군에 있는 월송정으로 달렸다. 울진군의 망양정을 들렸다 가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먼저 월송정으로 갔다가 망양정에서 달맞이를 하기 위함이었다. 세 시간 가까이 길게 펼쳐진 동해 바다를 보며 ‘이쪽에 자리잡았던 신라가 왜 좀 더 웅혼한 기상을 키우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에 위협을 느껴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꼭 이민족을 끌어 들여 통일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분단 현실에 교차되어 다시 떠올랐다. 그 당시 백제, 고구려는 내적 모순이 깊어 있었으므로 당나라를 끌어들이지 않았어도 되었을 터인데 하는 부질없는 역사의 가정이 꼬리를 물었다. 하기사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민족주의가 근대화의 산물이므로 지금의 민족주의로 그 당시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역사를 생각하며 있노라니 어느새 월송리에 도착하였다. 버스 정류장 옆의 ‘월송(月松)’이란 표지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그래서 ‘월송정’의 유래가 달과 소나무와 관련되나 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월송정’에 도착해 보니 ‘월송정(越松亭)’이었다. 왜 ‘월’자의 어원이 ‘초월할 월’이 되는지 궁금해서 정자 위에 올라 소나무 밭과 그 너머의 동해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궁리를 거듭했다. 왜냐하면 안내판에는 그런 유래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놀러 온 예천 공항 직원들 덕택에 바닷물이 다다르는 기점에 관솔을 심은 것에 유래한다는, 그래서 ‘초월할 월’을 쓴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월송정 옆에 자리잡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런 것을 아냐고 물었더니 만난 학생들 모두 아는 학생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 놀러 와 있던 예천 공항 직원들의 따스한 환대로 술에 얼큰하게 취한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고 곧바로 송강이 마지막으로 노래한 망양정(望洋亭)을 찾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댁에 여장을 풀고 그 뒷산에 있는 망양정에 올랐다. 오르는 길목에 있는 안내판을 읽다가 나는 그만 크게 실망을 하고 말았다. 송강이 돌아 본 망양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철은 선조 때 온 것인데 철종때의 이희호가 임학영과 더불어 여기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현종산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정철의 운치를 느낄 수 없어서도 실망이지만 역시 결과 위주의 역사(?) 서술에 마음이 씁쓰레 했던 것이다. 무슨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옮겨왔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를 기록에 남겨 사람들의 오해가 없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이희호․임학영 두 사람이 정철의 관동별곡을 제대로 감상이나 했더라면 그런 무모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쨌거나 뒷산에 오르니 너른 동해 바다를 여유롭게 품에 안은 망양정의 정자가 나의 실망을 잠시나마 씻어 주었다. 숙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관동팔경을 그림으로 그려 오게 하여 본 뒤, 망양정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제일이라 하여 ‘관동 제 1루’라는 친필의 현판을 내렸다는 망양정. 숙종은 철종 훨씬 전이므로 송강이 본 망양정을 가리켰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아쉬움이 일었다. 해질 무렵이라 더욱 아득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철석이는 파도따라 송강의 노래를 읊조려 본다.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 말이, 바다 밧근 하이니 하늘 밧근 므서신고. 득 노 고래, 뉘라셔 놀내관, 블거니 거니 어즈러이 구디고.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리 , 五오月월 長댱天텬의 白雪셜은 므 일고. (하늘 끝을 못내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누가 놀라게 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고. 큰 물굽이를 꺾어 내어 온 세상에 흩뿌리는 듯하지, 오월의 넓은 하늘에 흰 눈이 내리는 것은 무슨 영문인고.)
곧 어둠에 잠기었지만 송강이 본 보름달은 간데 없고 그믐달이 지그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송강의 숨결좇아 망양정에 올랐더니
칠흑같은 어둠속에 실낱같은 달빛만이
옛 정자 비추일뿐 성난파도 간데없네.
현종산 기슭의 망양정이 어찌하여
이곳에 자리잡아 송강을 볼 길 없네.
차가운 산바람과 바닷바람 소리을 들으며 민박집 따뜻한 아랫목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웬 귀신들이 망양정으로 나를 잡아 끄는 바람에 소스라쳐 눈을 뜨니 밤 11시. 송강은 정자 위에서 잠이 들어 신선을 만나 보았는데 나는 민박집에서 귀신 꿈이라니. 아마도 원래 망양정이 있던 땅 귀신들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리라. 다음 해에는 꼭 그곳을 답사해 왜 옮겼는지를 밝히고 그곳 귀신들의 원혼을 위로하리라 생각하며 급히 밖으로 나왔다.
‘쏴와’하는 파도 소리가 귀신 소리로 자꾸 연상이 되어, 다시 산 꼭대기 망양정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해변 옆 구멍가게 앞에서 홀로 술 한잔 기울이며 바다를 바라보노라니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20대가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30대 노총각. 직업‧학문‧결혼,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린 것이 없었다. 참담한 마음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노라니 무수한 별과 더욱 세차게 넘나드는 파도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못 이룬 것이 많으면 그만큼 희망이 많다는 것이고 희망이 많은 것이 젊음 아닌가. 물리적인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후회없는 정열적인 나날을 일구면 그뿐인 것을. 내년에는 바다를 같이 바라볼 사람과 오리라. 허허 헛웃음을 웃고 나니 왜 정철이 산 지역의 관람에서는 임금사랑‧백성사랑‧나라걱정 등 공인으로서의 느낌을 갖고 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인간적 고뇌를 노래했는지를 이해할 만하였다.
울진에서 무정차로 달리는 고속버스로 진부령을 넘으며 통일전망대를 들르지 못한 아쉬움에 갖가지 상념이 꾸불꾸불 꾸억꾸억 솟아올랐다.
이 술 가져다가 四海예 고로 화, 億억萬만 蒼창生을 다 醉케 근 後후의, 그제야 고텨 맛나 잔 쟛고야. 말 디쟈 鶴학을 고 九구空공의 올나가니, 空공中듕 玉옥簫쇼 소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을 여 바다 구버보니, 기픠 모거니 인들 엇디 알리. 明명月월이 千천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 업다.(이 술 가져다가 온 누리 사람들과 고루 나누어, 모든 백성을 다 취하게 만든 후에 그제서야 다시 만나 또 한 잔 하자꾸려. 말을 끝내자 신선이 학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니 공중에서 나는 옥피리소리 어제던가 그제던가 오락가락 하누나. 나도 잠을 깨여 바다를 굽어 보니, 깊이를 모르니 끝인들 어찌 알겠는가. 밝은 달이 온 누리에 아니 비친 데가 없도다.)
위 구절은 관동별곡의 마지막 구절이다. 온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뒤 술 한 잔 하자고 신선에게 애원하면서 자신의 갈등을 풀었던 정철. 대단한 문학가이면서 거물 정치인이었던 정철. 그가 당쟁에서 서인의 거두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 정치에서, 실제 삶 속에서 그는 과연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것은 이 글에 나타난 백성 사랑 정신과 선정의 포부를 해석하는 실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볼 수 있을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총석정‧삼일포‧시중대. 그 날 그 때는 북한의 학생들과 남한의 학생들을 함께 데리고 그 여정을 쭉 돌며 관동별곡의 그 아름다운 모국어의 묘미를 산천과 더불어 새기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가 돌아본 지역을 모두 갈 수 없다는 현실에 분단의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그가 돌아본 지역을 온전히 답사하려는 기획을 통해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을 수 있다. 통일교육을 위해서는 막연한 민족동질성을 들먹거리는 것보다 이러한 산교육이 더 가치가 있고 효과가 있다. 또한 이러한 여행은 통일 교육을 위한 목적 외에 중요한 의미가 더 있다. 머릿속으로만 배웠던 지식을 현장으로 옮겨 음미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고 보니 북한의 학생들은 관동별곡을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모타 통일된 날에 다시 보리 팔경을.
4. 마무리
관광이 어떤 특정 지역을 보고 즐기는 것이라면 답사는 어떤 지역이든 그곳의 역사적 의미와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관광은 겉모습의 화려함에 치근덕거리는 반면 답사는 겉모습보다는 그 가치에 매달린다. 내가 답사를 통해 관동별곡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뜻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또한 답사를 단순히 역사 유적 혹은 자연관조로만 만끽할 게 아니다. 그곳들 속에 우리의 육신이 들어가고, 그곳들은 또한 우리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자연이든 유적이든 답사 대상의 풍경들은 역사적이면서도 문화적 풍경이다. 우리와 함께 뒤섞여 호흡하는 생태들의 결들이며 형상들이다. 그곳들은 ‘장소화된 개성적 삶’의 흔적들이 박혀 있으며 흐른다. 정철이 본 관동팔경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관동팔경은 자본주의 이미지와 사회주의 이미지가 지뢰밭으로 갈라쳐져 상이한 문화로 영토화되어 있는 오늘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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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얼마전 속초에서 해돋이를 보려했지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일이 더욱 부끄럽군요. 구름 속에 감춰진 해가 다시 떠오를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뜨고 마는 현대인들을 지적한 곳에서 제가 뜨끔했습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을 가슴 속에 새기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좋은 자료 감사히 내려받겠습니다.
잘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얼마전에 학생이랑 관동별곡 수업했는데, 선생님의 글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요. 다시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끄러워 마시옵고 관동팔경 같이 한 번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