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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결함 있는 정통
창세기 26:17,18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 우물에 넣은 잡동사니로 인해 지금의 교회의 상태가 되었고, 그 기독교회의 상태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무서운 배도의 상태에 빠졌다.
부흥을 위한 기도의 선결조건: 블레셋이 메운 잡동사니 걷어내기.
제거해야 될 잡동사니: 어떤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진리들을 부인하거나 의심함.
1.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크게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서 부흥이 일어났던 적이 없습니다. 이 교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우리 자신의 선행이나, 도덕성이나,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한 모든 생각에 종식을 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절망감을 가졌던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선이라는 것이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들의 모든 의가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긍휼과 은총을 하나님께 갈망합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 교리를 붙잡으면 사람들은 언제나 즉각 구원을 받을 가능성을 아주 잘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이 모든 부흥을 특징짓는 사실이었습니다. ··· 순전히 호기심으로 나왔던 사람들이 갑자가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고 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새사람이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견지하지 못하면 그러한 즉각적인 역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그러한 즉각적인 결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아직도 행위를 의뢰하고, 구원의 전체 문제가 우리가 행한 것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일들이 대단히 많습니다-마치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2. 중생의 교리
“이 교리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며, 사람이 새로운 본성을 받기까지는 어떠한 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 성령께서 그 인격의 깊숙한 곳에 역사하시어 새 생명의 원리를 넣어 절대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있게 합니다. ··· 부흥의 시기나 재각성의 시기에 있어서 그 교리는 언제나 나타났습니다.”
3. 결함 있는 정통
1) 정통
“저는 이제 정통적인 사람들이면서도, 어떤 국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우리는 누구나 다 정통이라고 주자한 개인들과 교회들이 생명이 없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러한 복음적인 교회에 강림하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결함이 있는 것들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여로분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면 ‘정도를 벗어난 정통’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항목에 들어 있는 제일 되고 가장 우선적인 문제거리는 인격 자신과 더불어 옳은 관계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 제가 지금 지적하는 잘못은 교리, 인격에 관한 참된 교리를 인격이 서야 할 자리에 세우는 무서운 위험입니다. ···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교리에서만 머물고, 어떤 정의를 하는 데서만 머물고, 교리의 목적은 그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다만 그 인격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그 인격과 교제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
2) 교리 자체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다루는 것
“그것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참된 관점이 부족하고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는 교리를 나타내는 데도 부족한 것입니다. 교리의 국면에 있어서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잘 일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사단은 언제나 살아 있고 영적으로 깨우침을 받고 있으며, 교리에 관해서 올바른 사람들 앞에 그러한 시험을 놓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예언의 문제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마르고 소용없이 된 경우가 있음을 단언합니다. 사실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온 시간을 들여 다 예언에만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린 체험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침례(세례)를 진실로 높이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그들은 침례(세례)의 양식을 최고의 지위로 높입니다.”
“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오직 하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전체 교리를 온통 방언의 문제에 달려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 만일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제외시켜 버립니다.”
“또 감독정치만이 절대적인 진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장로교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무서운 시대에 교회 정치, 봉사의 양태, 그러한 다른 문제들에 온통 관심을 쏟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성령을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속한 문제를 우선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 속한 것으로 높여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사람들을 만날 때 처음으로 얘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한 교리에 대한 생각만 가지고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고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교회 역사, 부흥의 역사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다른 균형 감각을 떠나서 어떤 한 가지에 사로잡혀 획일화되어버리면 성령은 언제나 소멸되며, 그 역사는 언제나 방해를 받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3) 교회에 대한 결함 있는 교리
“저는 정통적이고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특별한 고통거리가 그것이 아닌가하는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성도들을 모으는 것보다 어떠한 큰 운동을 벌입니다. ··· 우리는 다 그저 뒤섞여 모이고 집회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것들이 매우 크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우리는 더 이상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일을 위해서는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 만일 여러분이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흔히 지역교회의 차원에서 보다는 큰 집회와 운동의 차원에서 교회가 크게 불어날 때 부흥의 빈도가 약화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 그러나 만일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면 거리에 있는 사람이나 그 친구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그 교회에서 어떤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그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나타냈던 것과 같은 반응을 나타냅니다. ··· 실로 거리에 있는 사람이 조직화된 대중집회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지에 문제가 야기됩니다. ···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단위는 언제나 교회였습니다. 역사와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1859년 울스터(Ulster)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성도들이 함께 모였던 작은 모임에서부터 그 부흥이 출발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 우리는 소위 중성적인 중간 위치의 대중집회 개념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단위는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곳, 그 백성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모인 곳에 오십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한 두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내가 거기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2,3천명은 모여야 한다.’”
4) 실제적인 영역: 종교적인 일과 관련하여 오락의 요소가 증가함
“사람들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어떤 집회의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읽어보면서 갈수록 느끼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다채로운 행사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목하다시피 광고에 눈을 돌려보면 심지어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 주최’ 또는 ‘어디 어디 후원’, ‘어느 어느 특집’, ‘거기에 나오는 인물은···.’ 우리는 이러한 용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오락의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영화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서 역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그러한 유의 일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회스럽게도 제가 오늘날 찬송을 부르는 데 주어진 위치도 그러하다고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 노래 부르는 것이 보다 더 많은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 우리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저 행복한 분위기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 지금은 노래부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요, 전도할 때요, 죄를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악과 모든 어리석은 불법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선포할 때입니다. ···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 교활한 시험을 조심해야 합니다. ··· 제가 어느 종교적인 회합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 실로폰 솔로, 오르간 솔로, 사람들의 합창, 이러한 일로 40분간이나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짧고 성경을 읽는 것은 거의 없었고, 메시지를 위해서는 짧은 시간이 할애되어 있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부흥이 일어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즐기고 노래할 때입니까? 지금이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쓸 때가 아닙니까? 고뇌어린 영혼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5) 복음전도와 교회생활
“오늘날 복음전도가 주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회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교회사를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부흥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순서는 이러했습니다. 어떤 일이 교회 안에 있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런 다음에 그 결과로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강력한 복음전도 운동이 교회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다음에 밖으로 확산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교회는 전혀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에너지와 돈과 열심을 복음전도에만 쏟고 있습니다. 교회가 여전히 그러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결국 교회는 더 나빠지게 된 것입니다. ··· 역사를 읽어보시면 교회, 지역적인 단위, 하나님의 성도들의 모임이 언제나 시작의 장소라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강력한 복음전도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다만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할 때뿐입니다. 그것이 부흥 역사의 이야기입니다.”
6) 영
“여러분과 제가 교리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바르고 정통적이면서도 영에 있어서는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릇된 영의 표준들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교만함, 삶의 교만입니다. 거만하고 자기의 출생을 자랑하고 자기의 신분을 자랑하는 일에 큰 강조점을 두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 그러나 그것은 이생의 자랑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지식의 자랑도 동등하게 나쁩니다. ··· 총명의 교만.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분명하고 명료하다.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두 방면에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가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매우 자주 자랑합니다. ···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면서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총명을 떠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쁩니다. 교만은 어느 형태를 띠든지 혐오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법하는 것입니다.”
“비평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경쟁심을 버려야 합니다. 경쟁심은 정말 치명적으로 나쁜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가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라도 경쟁심이 작용하여 사람들이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수가 되지 않는 교리들에 대하여 분쟁하기 시작할 때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 다니엘 로울랜드와 하웰 해리스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그 논쟁은 1751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기간은 부흥시기 중 메마르고 영적 은혜가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번 그들은 합해졌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다시 임하셨습니다. 경쟁심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고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위대하고 심오한 진지함을 가진 것보다 부흥의 시기를 특징짓는 것이 없습니다. ··· 저 성자다운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이 단디에 있는 그의 강단에 올라갈 때 입을 열기 전부터 사람들은 흐느끼고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엄숙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습니다. 그는 가볍게 강단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하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한두 마디의 농담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참 무서울 정도의 진지성이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믿는다면, 복음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째서 우리가 사소한 것을 가지고 노닥거리거나 경박하게 말하거나 농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정통적일 수 있으면서도 우리 삶에서 불이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죄를 범하여 계속해서 알고 있는 죄를 범해 나간다면 우리의 정통이라는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보다 우리의 소원을 우리 앞에 놓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모든 교리와 모든 이해에 있어서 정통적이고 바르다 할지라도 부흥을 기대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부흥이 올 때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심오하고 깊은 각성을 가진다는 것을 틀림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 그런데 부흥이 임하자 그들은 지옥에 떨어진 느낌을 가지고 무서워하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어느 형태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죄는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임하는 것을 막는 주요한 장애물들 중에 하나입니다.” ***
첫댓글 주님,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들, 주님의 몸된 교회들... 다시 깨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많은 교리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외적인 활동이 있지만 정작 교회는 썩어지고 있습니다. 황폐하며 피폐해져만 갑니다. 심지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마저 알지 못하는 무지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저 긍휼과 자비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만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지금입니다. 오 주님, 너무나 많은 인내하심만을 요구하는 지금의 저희들을 깨워주실 분은 그래도 주님 뿐이시오니 안타까운 그 마음 이제 저희에게 부으사 저희가 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주님 바라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