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소풍가던 기분이 그랬었다.
이처럼 설레고 흥분된 기분을 모처럼만에 느껴본다. 집에서 공항까지의 거리는 승용차로 10분이면 족히 도착할 거리이지만 11시 반의 약속시간이 아직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침 10시부터 부산을 떨기 시작한다. 옆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집사람 눈에 틀림없이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련만 태연히 짐 꾸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가족을 남겨두고 그것도 추석 명절에 홀로 외지로 여행을 떠나자니 가족들에게 여간 미안스러운게 아니다.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1시 30분...
외환은행 앞에서 만나기로 한 회원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알고보니 그곳은 외환은행이 아닌 조흥은행 환전창구였다. 할 수 없이 안내원에게 위치를 물어보니 반대편에 외환은행 환전창구가 별도로 있다는 것이다. 2년전 일본 출장차 출국 때에도 2층 외환은행이 아닌 3층 외환은행 앞에서 30여분을 나홀로 기다렸던 실수를 거듭한 셈이었다.
안반대기가 외환은행 앞에서 환전하기 위해 줄서 있는 모습이 보이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오랜만에 호랑이님 만나뵙고 인사드리고, 남상원씨,이인숙씨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잠시 후 데이콤의 황과장 일행이 도착하자 호랑이님이 여권을 회수하여 출국 수속을 밟는다. 붙임성 좋은 한경이와 미선(얌시오리)의 난펑이어우 상철이가 짐들을 케리어에 실어나르고 모두들 탑승구가 있는 3층으로 올라설 무렵 무장경찰과 함께 미첼이 환송차 이곳에 나타났다. 커피솝에서 차를 한잔 마신후 출발시간이 되어 두사람과 헤어지고 탑승 수속을 밟아 북방항공 22번 A석(창측)에 몸을 실었다.
14:00경, 비행기가 이륙하자 서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중국민항기는 서쪽을 향해 유유히 유영을 한다. 옆자리에 앉은 수빈이와 황과장의 외동딸 지혜는 처음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동안 사귀어온 친구처럼 줄곧 즐거운 이야기에 정신이 없고, 창밖엔 온통 햇빛에 반사된 뭉게구름 세상이라...
구름위를 날으는 기분이 실로 이러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요, 금방이라도 천상의 선녀들이 하얀드레스를 바쳐 입고 옥쟁반에 천도를 가득담아 내앞에 나타날것만 같은....실로 장관이어라....
기내식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구름사이로 바다가 보이는가 싶더니 듬성듬성 섬들이 나타나고 바다와 구분되는 뚜렷한 실선 너머로 육지가 나타난다. 바로 중국땅이 처음으로 내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흥분은 더욱 고조되고 내 눈은 완전히 창밖에 고정되어 버렸다. 바다와 연결된 도시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만일 저도시가 톈진이라면 저강은 해하가 틀림없을 것이렸다. 비행기가 북경에 가까와지면서 발밑의 농촌풍경이 더욱 선명이 나타난다. 상공에서 내려다 보이는 농촌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경지 정리가 잘 된 네모 반듯반듯한 들녘으로 이는 내가 상상해 왔던 중국 농촌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도착한 시간은 중국시간으로 15:00시,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4박5일을 책임질 우리의 가이드 이영화씨와 동화여행사 직원(男)이 마중나와 있었다. 호랑이님은 동화여행사 한국측 책임자이니 이들과는 이미 교분이 있었던 터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아리산님과 더불어 네사람은 유창한 중국어를 서로 교환하고 중간중간 몇마디를 제외하곤 무슨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마작을 즐기고 있는 한무리의 주차장 풍경을 관심있게 바라보며 우리일행은 버스에 짐과 몸을 싣는다.
현대라는 영문으로 쓰인 입간판을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 호랑이님으로부터 오늘(22일)은 천안문 광장 주위에 건국 50주년 행사 예행연습관계로 4시 30분 이후 모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빨리 움직여야 된다는 얘기다. 우리 숙소가 천안문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제일급도로인 지창(機場)고속도로를 달린다. 양옆으로 삼성과 대우라는 낯익은 간판들도 보이고 원요천을 지나오니 낡은 아파트들도 눈에 띄인다.
시내에 들어서자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평소 같으면 도로에 차량들이 꽉 차 있을 법도 하련만 통금시간이 가까와 지면서 차량들이 줄어든 덕분에 제법 빠르게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웬걸..... 차량 통금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길에서 우회전으로의 진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할 수 없이 호텔까지 20여분을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를 싣고온 기사 아저씨는 불법 장소에 하차하였다는 이유로 공안원에게 딱지를 떼이고....
호텔까지 가는 동안 북경역을 지나면서 난생 처음으로 인력거를 보게되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주의에 지갑이 든 호주머니를 손으로 단단히 부여잡고 엉성한 걸음걸이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차도에는 어느덧 기념행사장으로 향하는 학생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고 알록달록 색색이 차려입은 남녀 학생들의 밝은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호텔에 도착하여 기념행사 때문에 호텔손님이 줄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조국의 이익은 모든것에 우선한다'는 종업원의 말에야 비로서 내가 난생 처음 사회주의 국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지득하게 된다.
도착하자 마자 방을 배정받았다. 나는 샤오짜오(한경)와 함께 1018호 열쇠를 받았다. 티엔님은 남상원씨와 룸메이트가되고 소연이와 소현(신디)이, 이인숙씨와수빈(러브젝키)이, 현주(여인의향기)와 현정이, 금주(안반댁)와 미애(살찐하루), 준희(베레베레)와 방글이가 각각 한조가 되어 룸메이트가 되었다. 여장을 풀고 예정에 없던 호텔내 3층 중식당에서 저녁을 마치고 산책겸 1층에 내려오니 사람마저 바깥 출입을 통제한다. 호텔내에서 한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게 되니 모두들 아쉬움과 함께 1023호 티엔님 방에서 맥주파티를 열게 되었다. 맥주 한병이 2원이였던가? 우리돈으로 300원 정도니 황과장이 선뜻 만원을 내놓으므로서 맥주를 실컷 마실 수 있었다.
10시경 방으로 돌아와 언뜻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갑자기 폭죽소리가 천지를 진동 시킨다. 창밖을 보니 북경시내 야경만 눈에 들어올뿐 하늘의 폭죽이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방 반대편에서 불꽃놀이기 있었다고 한다. 이것역시 50주년 기념행사 예행연습 장면이었으리라. 처음으로 맞이한 북경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고층건물마다 오색불빛으로 수놓인 야경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시 잠을 청하여 한참을 잔 듯한 기분에 눈을 떳으나 시간은 아직도 새벽1시에 불과하다. 옆에서 한경이는 곤히 잠들어 있다. 다시 잠을 청하였으나 더이상 잠이 올것 같지 않다.
그럭저럭 잠을 자는둥 마는둥 4시가 지나면서 통금이 해제되었지 밖에서 차량소리가 들려오고 호텔뒤에 있는 후통(골목)에서 사람들의 왕래 소리가 들려온다. 침실이 위치한 호텔 바로 밑의 후통의 집들은 완전히 우리나라 60년대 판자집을 연상시킨다. 직접 내려가보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으나 어쩐지 중국의 어두운 면을 보는거 같아 그만 두기로 하였다. 이렇게 북경의 첫밤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9/23(목) 둘째날(1)...
새벽 6시에 모닝콜이 울리고, 곤히 잠든 샤오짜오를 흔들어 깨운다. 우리가 투숙한 '亞視金郞大酒店'은 별이 네개나 달린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이다. 비록 서울의 일류호텔 종업원들처럼 반듯 반듯한 친절미는 못하지만 시설면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호텔이다. 조식 배식은 7시에 시작되므로 거리 산책 겸 세면을 마치고 6시 30분경 호텔문을 나선다.
거리에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사진과 TV로만 보았던 전선을 이용해 운행하는 두칸짜리 電線버스를 첨으로 보게된다. 레일 없는 일반도로에 바퀴로 달리는 전차를 보게되니 신기하기만 하다. 길거리에 신문을 팔고있는 여인이 보인다. 신문 한장을 사보고 싶었으나 츄리닝 차림으로 나오는 바람에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 다시 호텔로 돌아 오는데 황과장 일행이 어느새 길건너 東單公園 산책을 다녀오는 모습이 보인다.
도로 건너편에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내일아침에는 나도 한번 들러보리라. 그곳에서 기체조, 우슈하는 노인들의 풍경을 보고 싶었기때문이다. 3층 식당에서 간단히 조식을 마치고 8시부터 본격적인 여행 일정에 들어간다. 오늘은 북경 외곽유적지를 관광하는 날이다. 오전에는 13릉을 오후에는 만리장성과 용경협을 관광키로...
북경시내를 빠져나가는 곳곳에 수많은 차량과 자전거 통행인들로 북적거린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생각보담 상당히 교통이 무질서하다는 점이다. 사람과 자전거, 자전거와 차량, 차량과 사람들이 한데 엉키어 위험스런 장면들을 여러번 목격하면서 팔달령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13릉 가는 중간에 옥공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중국은 옥공예가 발전했다는 점은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지만 이처럼 세련되고 웅장한 공예품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용을 비롯한 여러가지 모양을 옥세공하여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도대체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일까를 다시한번 생각케한다. 옥공예 모습을 직접 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시품을 구경하면서 많은 것을 사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았으나 쇼핑하는데 만족키로 하였다. 이곳은 많은 외국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특히 추석연휴를 맞아 관광차 이곳에 들른 한국인들이 특히 많았다.
이곳에서는 중국어를 몰라도 쇼핑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조선족 처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곳곳에 한국어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고, 1시간여를 이곳에 머문 뒤 20여분을 달려 13릉에 도착하였다.
평창현 천수산에 있는 13릉은 역대 명나라 16명의 황제중 13명의 황제가 묻혀 있는 곳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전형적인 명당 자리에...
16명의 황제중 시조인 '태조'는 명나라 발흥지 남경에 묻혀있고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2대황제 '혜제'와 형 '영종'에게 쫒겨난 '경종(6대?)'을 제외한 모든 명나라 황제가 이곳에 묻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13릉중 48년을 제위했던 '신종'의 '정릉'만 발굴되고 나머지 릉은 미발굴 상태라고 한다. 정릉은 지하 27미터에 위치해 있는데, 지하궁전을 건설하면서 하루에 2,3만여명의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당시 8백만원이라는 2년 국가예산에 해당되는 국고를 탕진하면서 자신이 사후에도 계속 중원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지하궁전을 만들었다고 하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궁전에는 실물과 똑같은 황제와 황후의 의자가 만들어져 있고 뒤편에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 있다. 지금은 시신이 문화대혁명때 훼손당하여 형식적인 목제 무덤만이 그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문화혁명 당시 황제의 시신에 손을댄 사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다. 황제는 죽어서도 범인의 접근을 금지하나 보다.
지하궁전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후 정릉을 배경으로 이곳 저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양옆에 이지방 명과인 복숭아를 팔기 위한 상인들의 외침소리가 귀를 울리지만 아리산님의 엄명에 따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팔달령을 향해 차에 오른다. 팔당령으로 향하는 도중 도로에서 큼지막한 복숭아 20여개를 사고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칠보석 공예품점 안에 있는 중식당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중식을 마친후 복숭아 하나씩 맛본 후 칠보석 쇼핑에 나섰다.
이곳 칠보공장에는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가녀린 손끝으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데 한편으로 가엾어 보이기도 한다. 자기보다 어린 소녀들의 손놀림을 보고 가없은 마음에 방글이가 잠시 슬픔에 빠진다. 이곳 쇼핑점도 역시 많은 조선족 남녀가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쇼핑도중 한 중국인 종업원이 어느나라 사람인지를 내게 물어온다.
시선을 내 눈에 고정시키면서....
그러나 선물은 조선족 여자가 지키고 있는 윈도우에서 사게되고, 그사이 어느새 안반댁은 중국인 처자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주소를 주고 받는다.(아니 어느새 안반댁 중국어 실력이 저렇게 늘었나?)
쇼핑을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은 일행은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용경협을 먼저 관광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다소 지체되면서 거리상 멀리 떨어진 용경협부터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용경협을 가기 위해서는 팔달령을 지나가야 한다.
팔달령을 지나면서 말로만 들어왔던 천하제일문 거용관을 지나게 된다.
그 옛날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을까? 북쪽의 흉노족, 돌궐족이 중원을 침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 거용관을 지나쳐야 했기에 예로부터 이곳은 천하제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天下第一門' 현판이 뚜렷한 거용관을 지나 비교적 잘 발달된 '팔달령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려 팔달령을 넘어서니 작은 지방도로가 나온다. 가끔씩 지나다니는 차량 사이로 나귀 달구지도 보인다. 북경에 온 뒤로 지상의 거의 모든 교통수단을 다 본 듯 한 느낌이다. 북경시내에서의 자전거, 인력거, 택시, 버스, 전철에서부터 달구지에 이르기가지....
이곳 용경협도 행정구역상 북경시에 해당된다고 하니 가이드 말대로 북경은 족히 서울 면적의 27배가 될만 하였다.
용경협은 산속에 만들어진 자연호수다. 이곳을 관광단지로 만들어 놓은 중국인들의 돈벌이 수단이 대단하다. 우리일행을 실은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하자 마자 다마스같은 작은 자동차 두세대가 앞길을 막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오가고 인상 또한 험악하여 무슨 싸움이 있는줄 알았다. 알고보니 걸어서 10분 거리를 한차에 6명씩 해서 10원에 가자고 한다.
아리산님이 듣기에 웃기는 이야기지...
용경협 매표소까지 그냥 걸어간다. 밑에서부터 호수에 오르는 수직선 에스컬레이트를 설치하여 별도의 이용료를 받고 있다. 물론 걸어서 오르는 길도 있지만 상당히 돌아야 된다는 점을 감안 족히 150미터는 될법한 높이에 지그제그로 놓인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간다. 에스컬레이트 지붕에 용모양의 덮개를 만들었기에 우리는 용 대가리속으로 들어가 용꼬리로 나오게 된다. 과연 저위에 뭐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 정상에 도착하니 마치 사진속에서나 보았던 계림의 산봉우리들이 호수 양안에 즐비하게 솟아있다.
높은 산봉우리 협곡 사이(100여미터)로 구불구불 자연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유람선을 타기전 몇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일행 21명은 배에 오른다. 유람선안에는 족히 40여명은 될법한 우리를 포함한 한국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황과장이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추석에 제사들 안지내고 여기서 뭣들 하는감?
서서히 배가 움직이면서 山,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협곡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양안 바위에는 물고기 비늘같은 모양이 겹겹이 쌓인 여러개의 부채살 같은 작은 산들이 앞뒤로 근원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초립동이를 걸치고 배위에 홀로 앉아 긴 담뱃대를 벗삼아 낚시대만 기울인다면 영낙없는 한폭의 동양화라.
얼마를 지났을까 왼편 봉우리에서 오른편 봉우리로 외줄위를 자전거로 건너가는 미친놈(?) 하나가 우리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한다. 바로옆에는 번지점프시설이 눈에 들어오고 또 다른 줄에서는 다른놈이 외줄을 타고 협곡을 건너가면서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양안에는 불과 몇분 간격으로 수많은 유람선이 오가면서 건너편 유람선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 옆에 앉은 황과장은 우리일행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이 없고, 구불구불 용경협 호수를 족히 3,40분을 유람한 후 백화동굴을 지나 밑으로 내려온다.
주차장에 이르니 이곳에서 어느덧 2시간여를 소비한체 오후 4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일행은 만리장성에 오르기 다시 또 팔당령으로 향한다. 팔달령에 도착하니 시간이 늦은 탓일까 많은 사람들로 크게 붐빌줄 알았던 관광객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5시에 도착한 우리는 6시 30분까지 모이기로 하고 흩어져서 각자 만리장성을 오른다.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은 흔히 진시황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팔달령 만리장성은 북쪽 오랑캐를 대비하기 위해 명나라때 축성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에 이르기까지 외성의 길이만 만리(실제는 6,000여 키로)일 뿐이며 내성과 외성을 다 합칠경우 10만리가 넘는다 한다. 이곳 팔달령 만리장성도 외성이 아닌 내성이다. 장성에 오르니 과연 이것이 사람의 손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일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울 뿐이다. 적을 대비한 북쪽에는 깎아지를듯한 절벽과 함께 사이사이로 활과 포를 쏘면서 적군을 대비하기에 유리하도록 凹자형 성벽이 연이어 있고 남쪽 성벽엔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서 윗부분이 평탄하다.
2,3미터의 넓다란 통로를 그 옛날 수많은 병사들을 대신하여 지금은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둘, 셋, 혹은 여럿이서 무리를 지으면서 장성의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배경이 좋은 곳에서는 낙타를 준비해놓고 돈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우리가 갔을때는 낙타 변 냄새만 풍기고 낙타는 보이질 않았다. 대신 지금은 글월을 기억할 수 없는 1미터 높이의 비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한사람당 2원을 받는다. 황과장 가족이 몇 컷 사진을 찍고 6원을 낸다.
만리장성은 산등성의 형세를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오르막 내리막길의 경사가 심하다. 생각 같아서는 장성을 따라 한없이 한없이 걷고 싶은 욕망도 없지 않았으나 팔달령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하산하였다. 서쪽으로 뉘엿뉘엿 석양이 질무렵 우리 일행은 정확히 6시 30분 매표소 입구에 도착하였다. 기념품 몇가지를 사고자 했으나 만리장성에 오르기전에 분명히 열려있던 수많은 가게들이 어느새 철시하고 공중화장실마저 이용할 수 없다. 할 수없이 막 문을 닫고 가게를 정리하는 한 식당에 들어가서야 급한 용변을 볼 수 있었다. 만리장성의 야경 또한 아름다워 여름에는 많은사람들이 야경을 찾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 상인들은 일단 집에가서 식사를 마치고 야경 관광이 시작될 무렵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시내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만리장성에 얽힌 맹강녀에 관한 전설을 듣기도 하고 북경자금성을 향하고 있는 이자성의 동상을 보기도 하면서 북경요리를 먹기위해 전취덕으로 향했다.거리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수많은 차량들로 인해 쉽사리 진행이 되지 않는다. 가끔씩 거리거리에 한국어 간판이 눈에 보인다. 어제는 대로변 한국식당에서 들려오는 우리나라 뽕짝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관광 쇼핑점마다 조선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던 터라, 이제는 한국식당 간판이 눈에 띄어도 특별히 신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취덕에 들어서자 방마다 요리사 한두명이 큼지막한 식칼을 들고 오리를 요리하고 있다. 우리일행도 방 한켠에 자리를 잡고 연이어 중국음식이 나오는가 싶더니 두명의 요리사가 이동식 도마위에서 오리 몇마리를 작살내고 있다. 옆에서 얌시오리가 이모습을 지켜고보 있다. 베이징 카오야..... 정말 맛있다.
북경오리 먹는법도 오늘 첨으로 알게 된다.
손바닥만한 얇은 밀병위에 양념장을 찍어바른 오리고기 한점을 올려놓고 여기에 파 몇조각을 올려놓은 다음 둘둘 말아서 입속에 쏘옥 넣으면 맛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자리를 잘못 잡았나 보다. 황과장님과 함께 항상 노장층 자리만 앉아 있다가, 모처럼만에 꽃밭이 그리워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모두들 손과 입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베레베레, 살찐하루, 러브재키, 소연이와 소현이, 수빈이와 인숙이...
아리산님은 옆에서 먹는법 알려주랴, 음식이름 가르쳐 주랴 술잔 돌리랴 정신이 없고..
결국에는 오리 주둥아리 두쪽만 남기고 몸뚱아린 뼈 한조각 남기지 않고 모두 해치운다. 밥이 세바구니째 나오고 다른 음식도 거의 접시바닥만 남겨놓은체...
정말 잘들 먹는다. 내일 부텀 식사 자리 앉는데 상당히 고민을 해야될 모양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모두 타지에 나와서 잘먹고 잘자고 잘들 놀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식사시간에 이과두가 한두잔씩 돌려지니 붉구죽죽한 얼굴에 눈까플에 무게가 실리기시작한다. 한시간 남짓 식당에 머문뒤 다시 차에 올라 9시 30분경 호텔로 되돌아 왔다. 호텔 1층 로비에 모인 우리 일행을 향해 아리산님이 한마디 외친다.
"오늘저녁 광란의 밤을 맞이할 사람은 정확히 10시 10분까지 이자리로 모이라"
아! 북경에서의 광란의 밤,
'광란의 밤'이라...그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대충대충 샤워를 마치고 1층에 내려오니 가이드 이영화씨를 비롯하여 동화여행사 사장님이 연인과 더불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같이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모양이다. 샤오짜오는 혼자서 옛 북경의 직장 동료들과 한잔 하기위해 아예 식당에서 헤어졌고, 황과장 가족과 소연이와 소현이 등 몇몇을 제외한 모든 일행은 디스코텍으로 향했다. 차량 네대로 나눠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겉보기에도 광란의 밤이라 일컬을만큼 화려한 네온싸인과 굉음이 쏟아지는 환락가에 도착하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지역은 외교관 거주지역과 가까워서 많은 외국인과 더불어 중국의 젊은이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장소라 한다. 택시에서 내리니 몇몇의 젊은이들이 수십종의 담배가 진열된 007 가방을 열어제껴 들이내밀면서 팔아줄것을 요구한다. 주로 양담배가 많이 있는것으로 보아 과거 한국이 양담배의 유통을 제한하였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아직은 외국산 담배 구하기가 꽤나 어려운 모양이다.
우리가 들어가려는 디스코텍 'ROCK & RALL'이란 간판 옆에는 '무슨무슨 BAR'라는 간판이보이기도 하고 사우나 간판도 눈에 띈다. 입장료(30원?)를 내고, 상품권 추첨권을 손에 들고 2층으로 올라서니 200여평은 됨직한 넓은 광장에 밴드가 보이고 바로 앞 무대위에 수십(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 댄다. 2층은 물론 3층에도 손님들로 꽉들어찬 실내에 한두명 앉을 자리도 안보이는데, 17명의 일행이 앉을 자리가 있을리 없다.
어찌어찌하여 10여명이 앉을 만한 테이블을 찾아서 일부는 자리에 앉고 일부는 서있는데 알산님 왈
나를 비롯한 몇몇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이 알산님을 비롯한 몇명은 벌써 무대위로 올라갔다. 한참 술을 마시는데 무대위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깜짝놀라 나가보니 춤추던 사람을 태운 둥근 무대 테이블이 1층으로 서서히 내려가고 있다. 무대가 내려가고 있는 중에도 사람들은 몸을 가만 두지 않는다. 나도 소시절 서울에서 여러번 디스코텍에 가보긴 했어도 이처럼 무대가 땅으로 꺼지는 디스코텍은 처음본다.
밑을 내려다보니 알산님도 보이고 방글이도 보이고... 베레베레도 육중한 몸매를 흔들어대기에 정신이 없다. 알산님은 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흔들어대는 폼이 영락없이 끼가 있는 10대 후반의 모습이다. 한참을 흔들어 대던 무리들이 서서히 위로 올라오면서 무대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나도 한번 무리에 섞이고자 무대를 밟자마자 브루스곡으로 바뀌고 만다. 짝을 찾지 못한 나는 아쉬움을 남긴체 테이블로 돌아오는데 동화여행사 사장 커플과 오리커플이 안보이고 남상원씨가 안보인다.
'어! 남상원씨만 안보이네....그럼..혹시 중국여인과?'
나중에 안일이지만 무대 밖에 서서 다른사람 춤추는거 구경만 하고 있었다나?
옆을 보니 아리산님과 호랑이님이 멀뚱멀뚱 서있다. 내가 알산님과 호랑이님 손을 맞 잡아 무대로 몰아냈다.
앉을 자리가 없이 옆에 서있던 나도 좀이 쑤신다.
'가이드하고 함 춤을 춰봐?'
중국사람들은 원래 사교춤을 잘춘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던 터라 춤도 출줄 모르는 내가 괜시리 먼저 제의를 해서 무대에 나갔다가 이리돌리고 저리 돌려버리면 얼마나 쪽팔릴까를 생각하니 포기한 편이 훨씬 나을것만 같았다. 할수없이 수빈이 옆구리를 쿡 찌른다.
나도 춤을 못추고 수빈이도 못춘다. 어차피 못추는 사람끼리는 발만 밟지 않으면 되는거 아닌가. 어색한 표정으로 브루스를 한곡 땡기고 손을 놓았는데 이눔의 브루스 곡은 끝이 없다. 웬 가수 하나가 나와서 브루스곡을 부르는데 수빈이가 아는 곡인 모양이다. 머리를 연신 흔들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연거푸 대여섯 브루스곡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디스코곡이다. 정말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
알산님 고개를 흔들고, 하오런 양손으로 하늘을 향해 찌르고, 수빈이 허리를 뒤틀고, 방글이 다리를 비꼬고, 베레베레 온몸을 굴리고.....광란의 밤이....
이곳에선 내국인과 외국인의 구분이 확연하다. 중국가수가 노래를 부를때 따라부르며 춤을 추는사람은 중국인이고 우리처럼 그저 몸만 흔들어대는 사람은 틀림없이 외국인이다. 디스코곡이 끝나자 조금은 우수꽝스러운 퀴즈쇼가 지나면서 드디어 상품 추첨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 번호는 '0017186'
사회자가 담첨자를 부른다
'링링야오치지어우.....'
에궁....
혹시나 이국에 와서 선물하나라도 건져 볼까하고 모두들 귀를 쫑긋세운다
하지만 이후로는 링링야오치로 시작되는 번호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우리 일행은 모두 꽝....
정확히 1시가 되어 모두들 밖으로 나와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방에 들어오니 샤오짜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호텔에서 모두들 굳나잇 인사를 나누고 대충 양치질만 한체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전화벨이 울리다.
'전대철씨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아, 네, 하오런님... 청운입니다.'
'아하, 지금 어디세요?'
'네, 지금 1층 로비에 있습니다'
이런... 지금 시각 두시가 가까와지는데....
그래도 어떡하나 반가운 사람을 만났는데.
온라인에서만 보았던 그 유명한 청운이를 이곳 북경에서 만났는데. 다시 또 옷을 주어입고 1층으로....
아래층에 내려가니 벌써 알산님과 티엔님이 청운이와 셋이서 앉아 있다. 조금 있으니 수빈이가 청운이를 만나러 반갑게 뛰쳐 내려오고 몇마디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정원초과로 인해 재키를 방으로 돌려 보낸후 남자 넷이서 택시를 타고 다시 한잔 걸치로 밖으로 나간다. 한참을 달려 차에서 내리니 조금전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어두컴컴한 거리에 몇대의 택시만이 오갈 뿐 몇몇 한적한 상가들만 눈에 띈다. 몇개의 상가를 기웃거리다 火鍋 전문점에 들어섰다.
우리는 어느 테이블에 앉게 되고 몇 테이블 건너에 두사람의 손님이 火鍋요리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청운이 능숙한 솜씨로 사천요리의 일종인 마라(麻 辛+束)요리를 주문한다.
이름하여 마라훠꿔 요리이다. 麻는 얼얼하다는 뜻이고 라(辛+束)는 맵다는 뜻이다. 훠꿔(火鍋)는 신선로라는 의미이고....
태극모양의 칸막이가 둥그런 신선로 중간을 두칸으로 나누고 한칸에는 마라향이 들어간 육수를 붓고 다른칸에는 마라향이 없는 덜 매운 육수를 부어 신선로를 끓인 다음 샤브샤브같은 얇은 소고기나 양고기 등 여러종류의 육류를 넣어 적당히 끓인후 건져내어 양념장을 발라먹는 요리이다.
여기서 샹차이를 처음으로 맛보게 된다. 티엔님과 알산님, 청운이는 샹차이를 잘도 먹는다. 내 입맛에 길들여 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될것 같다. 더구나 마라향이 첨가된 훠꿔 요리를 몇번 건져먹자 혀끝부터 서서히 마비 증세가 오는듯하더니 입안이 불타는 듯 하다. 티엔님도 나하고 같은 증상을 느끼게되고 나는 주로 마라향이 첨가되지 않은 쪽에서 건져낸 고기를 먹는다.
비록 입맛에 딱맞지는 않지만 이처럼 특이한 요리를 북경에서 맛보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우리의 먹는량이 상당한 것을 보고 청운은 여러가지 훠꿔요리를 추가시킨다. 우리는 10여가지의 훠꿔요리를 맥주와 함께 맛을 보고 북경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3시 20분경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신세진 것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숙소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샤오짜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샤오짜오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과 술한잔 기울이면서 광란의 밤을 지새는 모양이다.
9/24(금) 셋째날(1)
매일 아침 조식 시간은 7시다. 3층에 있는 양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때문에 새벽 6시만 되면 모닝콜이 울린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엊저녁 4시에 잠이든 관계로 피곤한 상태에서 모닝콜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어찌해서 눈을 뜨니 벌써 7시 20분이다.옆에서 샤오짜오라도 있었으면 둘중 하나는 일찍 일어났을 법도 하련만....
부랴부랴 일어나서 샤워하고 양치질하고 식당에 가보니 우리식구중 거의 대부분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난 상태다. 나하고 똑같이 늦게 잠이든 알산님하고 티엔님도 역시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고 있는 중이다. 어느새 샤오짜오는 나보다 먼저 식당에들어와서 식사를 하고 있다.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곧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어디서 잤는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빵 몇조각과 계란후라이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어제밤 3시 반까지 먹었던 훠꿔요리로 인해 아직도 포만감이 가득하여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던 리쯔도 몇개 집어먹고....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 8시 10분경에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기사가 바뀌어 있다. 우리 일행이 공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오던 첫날부터 유난히 기사아저씨와 가이드의 대화가 많더라 싶었는데 별로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알산님의 노기가 동한 것이다. 알산님이 가이드에게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여 기사아저씨를 바꿔버린 것이다.
(우리 모두 알산님의 성질을 건드리지 맙시다.)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는 천단을 향하고 있다. 어제의 북경외곽 명승지 관광에 이어 오늘은 북경 시내에 있는 궁원단묘(宮苑壇廟)를 관광키로 하는 날이다. 출근길의 북경거리는 여전히 많은 차량들, 자전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50줄은 됨직한 멋쟁이우리기사 아저씨가 능숙한 운전 솜씨로 복잡한 북경 시내 거리를 뚫고 지나 무사히 우리 일행을 천단까지 데려다 준다.
우리일행이 남문으로 들어서자 연이어 수많은 관광객이 뒤따라 들어온다. 오늘은 음력으로 8월 15일 추석이다. 지금쯤 한국에서는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이 어쩌고 저쩌고, 망우리로 향하는 성묘객 차량들이 늘어나면서.....어찌어찌하고....이러한 뉴스들로 상당히 부산하겠지만 이곳 북경의 한복판 천단공원에는 많은 한국 관광객이 붐비고 한국말로 소개하는 남녀 가이드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 관광객을 제외하고도 머리가 희고 노란 외국 관광객들이 굉장히 많다. 주로 노인층인걸로 보아 효도관광 아니면 황혼 관광인 듯 싶다.
빨간색과 노란색 꽃이 잘 어우러진 화단과 원구단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계단을 통해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던 원구단에 올랐다. 중앙에 원심석이 있는 지름이 2,30미터가 됨직한 둥그런 원형이다. 황제가 무릎을 꿇었을 만한 곳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곳 북경에는 천단을 제외하고도 북쪽에는 땅(地神)에 제사를 지내던 地壇이 있고 동쪽에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日壇이 있다 한다. 그중에서도 永定門안에 있는 이곳 천단의 제단이 가장 큰 규모인 듯 싶다. 明代부터 매년 동짓날 황제가 직접 제를 올리던 이곳.....
원구단 북쪽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이번에는 지름이 6,70미터는 됨직한 굉장히 큰 둥근 회음벽이 皇窮宇(황궁우)를 둘러싸고 있다. 황궁우는 황제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라 한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높이 2,3미터의 회음벽을 향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의 귀에 또렷이 들린다는 것이다. 가이드 말에 설마설마 하면서 아리산님을 비롯한 일부가 동편으로 가고 나머지는 서편에 서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말은 사실이었다.
마침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 이야기를 해보는데 마치 전선줄을 타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 약간 진동됨직 하면서 선명하게 들려온다. 모두들 난리가 났다. 이름을 부르고, 지혜는 엄마, 아빠를 부르고 우리도 신기한데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얼마나 신기할 것인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기가막힌 건축 설계에 의한 것이란다. 메아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는 느낌.... 여러분도 언젠가 한번 반드시 시험을 해 보시라.
황궁우를 나와 거대한 祈年殿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동문을 향해 걸어나왔다. 나오는 도중에 기념품도 사고 공원안에서 사교춤을 추고 있는 중년과 노인들의 모습을신기하듯 바라보며 동문 출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원명원으로 향했다.
천단공원과 원명원은 지리적으로 북경의 남쪽과 북쪽, 상당히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한참을 달려 원명원에 도착하여 가이드로부터 원명원에 대한 내력을 듣게 된다.이곳 북경에 오기전에 천단이나 자금성, 이화원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제 관광했던 용경협이나 이곳 원명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원명원은 청조말기서양식 건축양식에 의한 거대한 분수대 등을 지어놓고 황제가 신하나 궁녀등을 대동하고 나들이 했던 곳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 침략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청조가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흔적을 유적지화해 만들어 놓은 곳이라 한다. 아마 북경조약의 부산물인듯 싶다.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편에 눈에 익숙한 꽃나무가 눈에 띈다. 우리의 국화 무궁화 꽃이다. 상당히 많은 무궁화 꽃이 길오른편에 쭈욱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무궁화 꽃과는 약간 품종이 다르다. 나무나 줄기, 꽃의 색깔은 똑 같았으나 봉우리에 뭉쳐 있는 꽃모양이 가운데가 꽉 들어찬 국화꽃 모양이다.
무궁화 꽃길을 따라가다보니 지붕은 완전히 없어지고 서양식 기둥이 듬성 듬성 꽃혀있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기둥만 남아있는 아테네 신전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이건축물이 바로 분수대로서 분수대 앞에는 분수의 장관을 보기위해 황제가 앉았다는 의자도 보이고 옆에는 과거에 물저장 탱크였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리석 잔해도 눈에 띈다. 만일 이 건물들이 부서지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면 굉장한 규모였으리라 짐작된다. 이모든 것들은 원래 모두 서양인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졌으며 당시 외벽 담벼락에도 온통 서양식 건축물 그림을 그려놓았다 하니 청조말에 이르러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흔적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원명원 정원을 걷다보면 과거 이슬람 사원도 보이고 연못도 보인다. 모두 파괸된채로 남아있다. 중국은 이곳을 증축하거나 소멸시키지 않고 현 상태로 보존하고 있는걸로 보아 관광지로서의 목적보다는 역사 현장의 학습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원명원 중간쯤엔 자기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않기 위해 청조와 당시 서구 열강 사이에 맺었던 각종 불평등 조약을 새겨놓은 벽이 눈에 띈다.
(아쉽게도 이쯤해서 본인이 3전을 내고 화장실 다녀오는 바람에 안내양으로부터 조약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원명원의 白眉는 역시 迷路였다. 나는 영화를 그다지 많이 즐겨보았던 편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이곳 원명원을 무대로 한 영화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조금전에 지나친 분수대 잔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었고 이곳 迷路를 배경으로한 영화도 있었다 한다. 다행히 이곳은 다른 건축물에 비해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미로 한 가운데에 우뚝솟은 서양식 건축물의 정자가 보인다.
모습이 마치 지금은 없어진 서울 광화문의 옛 중앙청 둥그런 지붕을 옮겨 놓은 모습이다.
미로 입구에서부터 그곳 대리석 정자위에까지 가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구불구불한 미로를 뚫고 찾아 가야 한다. 미로를 따라 높이 1미터 남짓 한 돌담위로 지나치는 사람의 목과 얼굴부분만 보인다. 목적지를 향해 걷다보면 어느새 길이 막혀 있고 다시 되돌아 오고 또 다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옛날 이곳에 황제가 야경 나들이에 나서 높은 정자 위에 앉아 있으면 수많은 궁녀들이 연등을 들고 미로를 따라 황제가 있는 정자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제일 먼저황제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자!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상상을 해보자.
캄캄한 밤에 수많은 궁녀들이 연등을 들고 미로를 찾아 이리뛰고 저리뛰며 돌아다니는 모습....
미로를 달리다 길이 막혀 되돌아 가면서 당황하는 모습, 우왕좌왕 하는 모습, 황제에게 은총을 받기위해, 남보다도 한발자국이라도 먼저가기 위해, 다른 궁녀들을 밀어 제끼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게중에는 자기들끼리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서로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호호낄길 거리며 숨가쁘게 움직이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담장 밖에서는 수많은 신하들, 환관들이 재미있어 웃어제끼고 있을 터이고, 그모습을 보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박장대소하는 황제의 모습을....
만인지상, 일인지하 황제의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
이곳 원명원 마지막 부분에 넓다란 호수가 있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노를 저어가며 한바퀴 호수를 빙 돌아보았으면 좋으련만...
(호수 입구 매표소 앞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 보고 있는 검표요원인 듯한 젊은아낙이, 속옷이 다 들어나 보일 정도로 양다리를 벌리고 정돈하지 않은채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북경에 있으면서 이러한 여인들의 거침없는 모습을 두서너번 더 목격한다.)
뒤쳐져 따라다니는 바람에 이곳저곳 부서진 건축물 잔해들의 뜻을 설명듣지 못한채 우리가 걸어왔던 반대편 길을 따라 정문으로 다시 나왔다.
이화원을 향하는 길목에서 어느 관광쇼핑센터 내에 있는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매번 점심의 메뉴는 비슷하다. 두테이블에 나눠 앉은 우리에게 여느때처럼 여러가지중국음식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밥과 탕이 나온다. 대개 탕이 나오게 되면 더이상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식사전에 반드시 음료수가 나오는데 콜라나 맥주를 주문 받는다. 그것도 맥주잔으로 딱 한잔씩만 나온다. 여기에 알산님이 별도의 비용으로 이과두주 한두잔씩 돌리게 되고....
점심은 반드시 쇼핑센터 내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하는 걸로 보아 중국여행업계의 관행인가 보다. 식후 쇼핑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기도 하다.
이곳 쇼핑센타에서 여러가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많은 한국인 관광객과 더불어 조선족 점원들이 많이 보인다. 특별히 중국어를 몰라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쇼핑을 마친후 다시 또 버스를 타고 이화원으로 향했다. 원명원과 이화원은 위치상으로 거의 맞붙어 있는 셈이니 원명원에서부터 이화원까지 이동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는다.
이화원은 잘 아는것처럼 청조 말엽 서태후가 만들어놓은 명원이다. 서태후는 아마 중국역사상 唐代의 측천무후와 함께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황후로 손꼽힐 것이다. 이화원에 들어서자 서태후가 수렴청정했다는 仁壽殿이 나오고, 경극을 좋아한 서태후가 수시로 경극단을 불러 공연케하고 자기 스스로 출연도 했다는 일화가 있는 덕화원(?)을 가이드로부터 소개받는다. 서태후는 청조 10대 同治帝 穆宗(목종)의 모친으로 文宗이 죽자 당시 어린아이(3세?) 였던 황제를 대신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3년간 제위에 있던 자기의 아들 목종이 죽자 권좌에서 밀려날것을 두려워 한 서태후는 고민끝에 조카를 황제에 즉위케 한다. 이로써 서태후는 계속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드르게 되는데 이분이 바로 光緖帝(광서)이다.
(여기에서 가이드는 광서제가 선황인 문종과 서태후 여동생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이라 했는데 문종의 동생과 서태후 여동생 사이에 태어난 아이인 듯 함)
광서제는 황위에 오른 뒤 강유위등 유신파의 힘을 빌려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원세개의 변심으로 보복을 당하여 인수전 뒷편에 있는 이곳 이화원 玉瀾堂(혹시 宜藝館이던가?)에 갇히고 만다. 황제가 갇혀 지냈다던 곳은 입구를 제외하곤 밖으로 통하는 통로가 없이 사방으로 막혀 있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바깥일에 대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한다.
인수전 뒷편으로 거대한 곤명호가 눈에보이고 오른편으론 곤명호를 파낸 흙을 옮겨놓아 만들어진 만수산이 보인다. 가이드에 의하면 서태후는 장수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 壽자를 즐겨 썼다 한다. 仁壽殿, 萬壽山 등...
특이한 것은 현판마다 한문과 더불어 옆에 반드시 만주어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만주어를 보게 된것도 처음일 뿐 아니라 청조가 우리와 비슷한 북방민족이었음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된다.
내가 가이드에게 물었다. 혹시 만수산에 칡넝쿨이 많이 있느냐고...
잘 모르겠다 한다. 갑자기 이방원의 '하여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엉켜진들 어떠하리......'
곤명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옥란당, 의예관을 지나니 폭1미터 내외의 길다란 畵廊이 나타난다. 화랑은 長廊이라고도 하는데 지상으로부터 약 2미터 높이에 지붕을 얹힌 기둥 길을 따라 좌우로 걸쳐놓은 수천개의 서까래 위에 중국의 고전속에 나오는(수호지, 삼국지등) 옛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걸작품들이다.
가히 박물관 공원이라 일컬음만 하다.
화랑을 걸으면서 오고가는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도 만나면서 중간쯤에 이르러 예정에 없던 곤명호 유람선을 타게 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선착장에 있던 유람선을 보고 한번 타봤으면 하는 말이 나오자 마자 알산님이 가이드에게 말해서 별도의 비용으로 유람선을 타게 된 것이다.(1인당 요금은 정확히 기억에 없으나 10원이 안되었던거 같음, 혹 3원이 아니던가?).
곤명호를 한바퀴 빙돌고 나서 제자리에 온다음 화랑을 따라 다시 또 걸으니 서태후가 만들었다는 石船, 즉 돌로만든 배가 나타난다. 이석선은 거대한 곤명호를 만들어놓은 서태후가 배는 타고 싶은데 배멀리가 심하여 타지 못하고 대신 물가운데 돌로 만든 거대한 배를 띄워놓고 달밤이면 이곳에 나와 야경을 구경하곤 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들이란 참으로 알수 없는 인간들이다.
덕분에 후손들이 관광사업으로 톡톡히 많은 재미를 보고 있긴 하지만.
이화원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후문을 통해 골목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후문에서 주차장까지의 거리가 꽤 되는데, 골목 양옆으로 길바닥, 혹은 낡은 담벽위에 또는 방을 점포로 개조한 진열대에 몇가지 기념품을, 조금은 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기념품들을 진열해놓고 서투른 한국말로 '싸요','오시요'를 외치는 상인들을 지나치게 된다.
9/24(금) 셋째날(3)
오늘이 바로 추석인지라 오늘 저녁은 한식으로 정한 모양이다. 그래서 장소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춘천처갓집' 식당에서 월병시식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도중 '서원의원'이라는 중의원에 들렀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이가 지긋하신 조선족 할머니가 우리일행에게 이곳의 역사와 중의학의 우수성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이곳 병원 원장이 조선족이라 한다. 물론 국가에서 운영하는....
무료로 진맥을 해준다는 할머니의 말에 따라 우리 일행중 몇몇은 2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버스에 돌아와 잠시 피로를 씻고자 눈을 붙인다. 진맥을 마치고 돌아온 일행과함께 시내 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내가 북경에 오기전 서점에 갈수 있는 시간을 안배해달라 했더니 알산님이 소프트웨어 쇼핑겸 서점쇼핑을 위해 컴퓨터 전문거리에 가자고 한 모양이다.
북경에 와서 느끼는 것중 하나가 교통질서가 원만치 못하는 점이었는데 차들이 천천히 달려서 인지 신기하게도 교통사고를 목격치 못했었다. 그런데 웬걸....
이화원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길목에 3건의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된다. 나는 버스에서 이동하는 순간에도 북경시내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위해 잠을 자지않고 유심히 창밖을 보고가는데, 우리 기사 아저씨도 그렇고 차량이 붐비는 도로에서 차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조건 앞대가리를 들이민다. 두대중 누구도 서로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차량끼리 부딪힐려는 순간 내가 뒤졌다고 생각되는 차량이 비로서 멈춘다. 이날따라 도로 곳곳에 정체가 심하다. 추석이라 그런가? 중국인들은 중추절 공휴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두건의 교통사고는 일반도로에서 목격하게 되고 한건은 고가도로 위에서 목격했는데 자그만치 5중충돌 사고였다. 다행히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은것 같고....
차량들이 앞뒤로 심하게 찌그러져 있다. 내가 가이드한테 궁금한게 있어, 이처럼 복잡한 길에서 끼어들기 하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잘잘못을 어떻게 판단하냐고 물었더니 누구잘못을 떠나서 일단 지위가 높은사람, 배경이 든든한 사람순으로 잘잘못이가려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사고를 당한 경우 한푼도 보상받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한다 한다. 과거 우리나라가 이랬으리라 생각되면서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북경시내 어느 이름모를 컴퓨터 전문 거리에 도착하였으나 알산님이 보기에 별로 살만한게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가이드가 안내한 서점 하나도 무슨 문방구점 같은 곳으로 내가 원하는 책이 있을법 하지가 않다. 재키만 몇개 씨디하고 테이프를 산다음 우리 일행은 다시 또 차에 올라서 저녁을 먹기 위해 '춘천 처갓집' 한식당으로 향한다.
처갓집으로 가는 길이 보통 밀리는게 아니다. 기사아저씨도 지체가 심하다 싶은지 내가 보기에도 많은 운전규칙을 위반하면서 손발을 바삐 움직인다. 어떤곳에선 일방통행인 출구금지 지역에서 빠져나가기도 하고....시골길 같은 지름길을 지나칠때에는 퇴근길의 수많은 자전거 행렬과 더불어 도로옆 나무 가지가지에 올려놓은 빨래감들이 눈에 띈다. 내가 가이드에게 빨래를 저 나무위에 올려놓으면 먼지가 묻어서 다시 빨아야 되지 않느냐 했더니 그냥 웃고 만다.
어렵게 어렵게 처갓집에 도착하였다. 차량이 도착하자 스커프를 손에든 상인들이 스커프를 흔들면서 '10원' '10원' '싸요' '싸요'를 외친다.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한국인들로 붐비고 오늘이 추석이라 그런지 주인인듯 또는 총 책임자인듯한 젊은 여인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우리를 반가이 맞이한다. 가이드가 예약을 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에도 불구하고 늦게 도착한 탓인지 빈방이 없다. 겨우 10명이서 앉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일부가 그자리에 앉고 옆테이블에서 식사중인 한국인 손님이 먹고 일어서기를 기다려 한참만에 모두 한방에 앉게 되었다. 종업원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밖을 내다보니 로비에 있는 식탁에도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게중 몇몇은 중국인도 있을 터이고 노란머리를 한 서양인도 몇몇 눈에 띄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우리테이블위에 김치를 시작으로 빈대떡도 나오고, 무침나물도 나오고 마지막으로 된장찌게와 공기밥이 나온다. 그러나 김치를 비롯한 찌게등이 한국에서 먹었던 맛이 전혀 아니다. 그저 배고품에 잘 먹었다는 기억 외에는...
반주를 곁들인 식사가 끝나자 알산님이 월병 시식이 있다고 한다. 너무 배부른 탓에저녁에 밤참으로 하자고 했으나 일부 월병에 배고픈 인간들로 인해 그자리에서 한두개씩 작살이 난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실은 버스는 말로만 들어왔던 왕푸징 거리에 우리를 내려놓고 돌아간다. 가이드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멋들어지게 장식한 왕푸징 한복판 신동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북경은 9시 30분이면 모든 상가가 철시를 한다. 그런데 오늘 이동하면서 교통이 순탄치 못한 관계로 저녁식사가 늦어지고 따라서 왕푸징거리 참관도 다소 늦은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8시 40분경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9시 20분 신동안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헤여졌다. 장인 장모도 없는 '처갓집'에서 과식한 탓인가? 오는 도중에 배탈이 났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찾는데 화살표가 지하1층을 향하고 있다. 어렵게 화장실을 찾았는데 7,8개는 됨직한 큰방(大便)이 모두 만원이다. 이들은 노크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건가. 문을 두드리면 노크대신 사람소리가 들린다.
'이어우'
어떤곳은 아예 소리도 내지 않는다. 빈방인줄 알고 문을 열면 열리지 않는다. 한곳에서는 노크를 하자 아무소리가 없어 문을 열었더니 사람이 앉아 용변을 보고 있다.
망칙스럽게 문을 잠그지도 않은채....
베낭을 질머맨 나의 이런모습이 신기한듯 벽쪽을 향해 작은것을 보고 있던 중국인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화장실은 우리나라 일류호텔 못지 않게 깨끗하다. 남자종업원이 걸레를 들고 서있는 것으로보아 수시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모양이다. 중국사람들은 먹기도 많이먹고 내놓기도 많이 내놓는 모양.....
나는 밖에 서서 그 많은 방중에 한놈이라도 누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물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근 5분여를 기다린 후 어렵게 용변을 마칠수 있었다. 그만큼 이곳 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용변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오니 아무도 안보인다. 일면 두려우면서도 나홀로 일행에서 떨어지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없지 않았던터라 무조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이곳 신동안시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과연 중국인 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가운데 둥근 원형을 빈공간으로하여 점포들이 작은 골목골목 사이로 즐비하다. 나중에 알산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곳 왕푸정은 과거 거대한 재래시장이었다 한다. 이러한 고풍스러운 재래시장을 이곳 신동안시장으로 모두 흡수하여 거대한 상가를 형성하였다는 얘기다. 우리시각으로는 분명히 백화점인데 굳이 시장이라는 표현을 쓰게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5층쯤에 올라 선물점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우연히 오리커플이 안으로 들어온다. 옥보석, 칠보보석등의 가격을 보니 둘째날 관광했던 전문 쇼핑점에 비해 오히려 가격이 싸다는 느낌이 든다. 집사람에게 줄 옥보석 선물을 몇개 사고서 책을 한권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점의 위치를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지하 1층에 있다고 한다. 오리커플과 헤어진후 다시 또 지하1층을 향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조금전 화장실 갈때는 자세히 못보았지만 지금 보니 음식점 골목도 보이고 어린이 장난감 코너도 보이고 내가 찾던 서점이보인다. 서울에서 죠세핀이 만화책 한권만 사달라는 부탁도 있고 해서 서점에 들렸는데 상당히 큰 서점이라 생각되었다. 구름님이 추천한 사전 한권을 사고 세핀에게 줄 만화책을 살려는데 만화책이 보이지 않는다. 할수 없이 대만에서 원작한 4컷씩 세로로 배열된 단행본 만화 몇권을 손에들고 서점을 나섰다. 시간은 벌써 9시 30분이 가까워지면서 종업원들은 벌써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1층에 도착하니 어느새 우리 일행이 모여있다. 이곳에서 숙소까지는 걸어가기로 하였다. 길거리에는 주말을 맞아 쇼핑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중추절에 월병을 먹는 중국인들의 습관에 따라 월병을 먹기위함인지 아이의 손을잡고 나온 가족 무리들이 특히 많이 눈에 띈다. 휘황찬란한 왕푸징 거리를...사람과 사람사이를 비집어 뚫고 나가면서 가이드 뒤를 바짝 따라온 우리는 무사히 대로변에 나와서 큰길을 건널수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만한 거리를 수많은 차량들이 지나다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신호등을 무시한채 건넜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알산님을 비롯한 10명 내외의 나머지 일행이 눈에 띄지 않는다. 처음 왕푸징 거리에 들어섰을때부터 불안해 하던 가이드의 걱정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난것이다. 어젯밤에는 샤오짜오 때문에 걱정스러워 잠을 자지 못했다는데 오늘은 그 많은 일행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모두 알산님과 같이 있을 터이고 알산님이 어느정도 북경 거리에 익숙하니 그냥 숙소로 들어가자는 우리들의 설득에 20여분을 걸어 숙소에 도착하였다. 호텔에서도 알산님은 보이지 않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니 알산님 일행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다. 또한 1023호에서 맥주파티가 있으니 건너오란다. 지난번에 이어 2차 맥주파티가 있다고...
알산님 말에 따르면 대로변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우리 일행을 놓치고서 반대방향으로 갔다 한다. 가다보니 무슨 천안문 광장이 나오더라나....
티엔님 방에 들어가니 황과장 가족 일행과 몇몇 회원을 제외한 10여명이 모여 있다. 아마 첫날 도착하여 마시고 남은 맥주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첫날에 알산님과 황과장이 각각 한번씩 두번에 걸쳐 맥주를 사왔고 그날 실컷 마시고 남은 맥주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내가 서울에서 가져온 과자 몇봉을 안주삼아 이런저런 이야기에 새벽 1시가 넘도록 마셔된다.
9/25(토) 넷째날(1)
6시에 모님콜이 울리면서 다른날보다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동단공원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동단공원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 건너편에 걸어서 3분거리에 있다. 건널목이 보이지 않는 왕복 6차선 거리를 용감하게 횡단하였다. 출근길이 가까워지면서 동단공원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부터 공원 입구까지 길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왕래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고 있는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것역시 한국에선 볼수 없는 풍경이다. 출근길, 공원산책길의 행인들이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도 보이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수빈이를 비롯한 몇몇이 이곳에서 값이싼 물건을 몇개 샀다고 한다. 공원에 들어서자 TV에서만 보았던 노인들의 기체조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넓다란 공원에 주로 노인층인 이들은 군데군데 무리를 이루어 인도자의 동작에 따라 천천히 그러나 힘차고 역동적인 몸짓으로 기를 수련하고있다.
기체조하고 우슈하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노부부는 칼 한자루씩을 손에 들고 기체조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칼춤을 추고 있다. 군데 군데 카셋트가 보이고 카셋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몸동작을 하고 있다. 서양 외국인들도 아침 일찍 이들의 체조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고작 베드맨틴이나 조깅에 그치고 있는데 반해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장수의 비결을 터득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후 식사를 하기위해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친후 일행과 함께 자금성과 유리창 관광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이곳에서 자금성 천안문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북경은 서울과 달리 넓다란 평원위에 도시가 들어서 있기 때문에 도로들이 큼직큼직하다. 또한 두부모처럼 네모모양으로 길이 반듯반듯 잘 닦여져 있다. 산구릉위에 도시가 세워진 서울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래서 옛부터 무슨 건물을 짓는다거나 길을 닦을 때도 대국답게 큼직큼직하게 지어졌던 모양이다.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였다. 오매불망, 꿈에서나 그리워 보던 천안문이다. 광장을 가로질러 걷다보면 정면으로 천안문 앞에 모택동 사진이 보이고 건너편 모주석과 정면으로 손문의 사진이 걸려있다. 한사람은 중화민국 건국의 주역이고 또 한사람은 중화인민 공화국 건국의 주역이다. 아이러니컬 하지 않을 수 없다. 손문은 중국의 근대 인물중 대륙과 대만 양안으로부터 모두 존경 받는 유일한 인물이다.
왼편으로는 인민대회당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역사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평소 이곳 광장엔 온갖 꽃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건국 50주년 기념행사 준비때문에 넓다란 광장에 온갖 행사용품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 일행이 이곳 천안문 광장을 처음 방문한 때문인지 천안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 물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더불어...
드디어 오성기가 펄럭이는 국기게양대 앞에 이른다. 게양대 양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제복차림의 경비대원이 무척이나 멋있게 보였다. 경비대원과 기념사진을 찍고 싶어 옆에가서 서투른 중국말을 건네본다.
'워 샹 건니 이치 자오 자오상, 커이마?'
내 참, 물어본 내가 미친놈이지. 부동자세로 꼼짝않고 근무하고 있는 사람한테...
무표정한 채로 ...'뿌싱'
샤오짜오는 이미 거절당할 것을 뻔히 알고 뒤에 가서 살짝 서있을테니 셔터만 한번 눌러달란다.
게양대 앞에 모인 우리 일행은 '천리안 중국어동호회' 깃발을 앞에 세우고 몇차례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모두들 물러나게 한후 알산님과 내가 깃발 양쪽을 잡고 개념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멘을 불렀다. 그런데 어느새 공안원이 달려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소리지른다.
'## &$ @$ %$ ##'
가이드가 대답한다.
'&& #$ %$ @$ &&'
무슨 시위용품으로 오인한 모양이다. 가이드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시위용품을 빼앗길까봐 얼른 중국어 동호회 깃발을 베낭속에 집어넣고....
10년전 천안문 사태를 겪고 나더니
머보고 놀란 가슴 머보고 놀란다고.....
한글도 읽을줄 모르는 무지한놈들 때문에 고생이다.
지하도를 통해 장안대로를 건너 천안문 앞에 당도하였다. 천안문 앞에 내걸린 모주석 사진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누군가 나를 보더니 모주석과 내가 무척이나 닮았단다. 하긴 그런 유명한 사람과 닮았다는 이야기 한두번 들은게 아니니까. ^^
나는 보통 자신을 소개할때 상대방에게 내이름을 확실히 기억시키기 위해 이렇게 소개한다.
'저는 전두환 全에다, 김대중 大자에다, 이철승 喆자를 씁니다' 라고...^^
첫날 맥주 파티에서 중국어로 나를 소개할때 못알아 들었던 사람은 참고하기 바란다
(사실은 이철승씨는 哲자를 쓰지만 발음이나 뜻은 똑같다)
가이드로부터 자금성의 유래에 대해 설명 듣는다. 이곳 천안문부터 황제가 기거하였던 침궁에 이르기까지는 9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구중궁궐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일까?
천안문 앞에는 물이 흐르고 그위로 다섯개의 아치형 다리가 있다. 다섯개의 다리를 건너면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다섯개의 문이 나타난다. 가운데 문이 제일 크고 양옆으로 크기가 약간 다른 두개씩의 문이 달려 있다. 한가운데 통로는 오로지 황제만이다녔다 한다. 그리고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드나들었고.....
아마 제일 바깥쪽은 제일 낮은 신분을 가진자나 일반 백성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만일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길로 드나들다 발각되면 목이 달아났다고 한다.
천안문 바깥 양옆에는 3,4미터 높이의 흰색 돌기둥위에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조그마한 사자상이 놓여 있고 천안문 바로 안쪽에는 침궁을 향한 똑같은 크기의 사자상이 양옆에 놓여있다. 바깥의 사자상은 멀리 민정을 살피러 나간 황제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무사히 돌아오시라는 의미이고 안쪽의 황궁을 향한 사자상은 황제가 궁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궁밖의 민심에도 귀를 기울여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한다. 우리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서 황제가 다니는 길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황제(하오런)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무백관을 거느린 채로....
천안문을 들어서면 두번째 문인 午門이 나오는데 일반 백성들은 이곳 이상은 안으로들어 갈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황제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반역의 대역죄를 저지른 자를 참수하여 이곳 오문에 걸어놓기도 했다는데....
오문을 지나면 태화문이 나온다. 크고 웅장함이 이를데 없다. 태화문을 지나면 넓다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중국최대의 목조건물인 太和殿이 나오는데 모두 나무못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한다. 태화전은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다가 황제 즉위식이나 군대 출정식이 있는 특정한 의식이 있을 때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화전 앞광장 지하에는 자그만치 13층 높이의 돌벽돌이 깔려있다 한다.
혹시 밖에서 땅을 파고 들어와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객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내참, 죽기가 그리도 무서웠나?)
태화전 뒷편의 中和殿은 태화전에서 의식을 치르다 황제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한곳이라 한다. 그리고 바로 뒤편의 保和殿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았던 곳이고....
문하나를 지나면 또 똑같은 문이 다시 나오고,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다시 또 나온다. 과연 말로만 듣던 자금성의 웅장함을 느낄수 있다. 이곳 자금성에는 또한 9,999.5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만이라는 숫자는 神만이 가질수 있는 숫자이기에 만개의 방을 만들지 않고 인간이 소유할수 있는 최대의 방인 구천구백구십구개하고 반쪽의 방을 만들어 놓았다 하니...
아이가 태어나 하루에 한방씩 번갈아 침숙한다 해도 30년 가까이 걸리지 않겠는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乾淸宮(건청궁)을 지나 황제와 황후가 거닐며 놀았다는 어화원에 이르렀다. 수백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눈에 띄고 강소성의 太湖에서 운반해 왔다는 거대한 태호석도 보인다. 태호석은 마치 화산석처럼 구멍이 빵빵 뚫린 하얀색의 거대한 바위인데 수천년을 태호 밑바닥에 묻혀있다 아름다운 생김새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건져올려진 바위라 한다. 이화원, 동단공원 등에서도 여러개 목격한바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자금성 전체는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남에서 북으로 뚫려 있는 여러개의 문을 따라 자금성 관광을 마치고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뒷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기 위해 역사 박물관내에 있는 중식당에 도착하였다. 아무래도 어제 왕푸징 쇼핑시간이 너무 짧은 거 같아 다시한번 쇼핑할 시간을 할애 해 달라하였더니 오후에 재차 왕푸징에 가기로 하고 다른 일정하나를 생략하였나 보다. 자금성 관광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느낌이다. 중식을 하기위해 11시 30분 이른시간에 식당을 찾았다.
점심 시간이 좀 이르다 했으나 그래도 먹을건 다 먹는다. 여느때와 똑 같은 점심 메뉴로 반주도 한잔 곁들이면서....점심이 끝나고서 박물관내에 있는 쇼핑센타에서 또 쇼핑한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오히려 조선족 점원이 더 많은 느낌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온 관광객임을 눈치채고 집요하게 쫓아 다닌다. 일본사람은 전혀 할인이 안돼는데 같은 조선족이니 특별히 싸게 잘 해 주겠다는....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수 없는 유혹을 하면서....
할 수 없이 맘이 약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나(?)는 큰맘먹고 애들에게 줄 선물용 칠보석 책갈피와 열쇠고리를 사들었다.
9/25(토) 넷째날(2)
다시 또 차를 타고 이번에는 琉璃廠(유리창) 거리로 향했다. 유리창은 우리나라의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고서점, 골동품점들이 밀집한 곳이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각자 흩어져 쇼핑길에 나섰다. 나는 그저 특별히 살만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구경삼아 이곳 저곳을 둘러 봤다. 사람들의 왕래가 생각만큼 그리 많지 않다.
물건값도 그리 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에서는 무조건 값을 깍아야 한단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한 가게에 이르니 우리 일행 한무리가 우글거린다. 그곳에서 유리창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중국차를 사고 있었다. 국화차, 쟈스민차등... 이런 차라면 백화점에도 많이 있을텐데 하면서도 값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나도 몇개 집어들었다.
밖을 나오는데 알산님이 길건녀편에 서점이 있다 한다. 혹시나 해서 큰길을 가로질러 서점에 들어서니 온갖 고서점들로 가득하다. 구경삼아 이것 저것 뒤척이다 "中國城市辭典" 이라는 중국 각도시의 유래가 기록된 책 한권과 북경 지도 2개를 사가지고 나왔다. 예정시간이 되자 모두들 버스를 타고 왕푸징 거리로 이동한다. 생각같아서는 유리창 거리를 이곳 저곳 여유있게 둘러보았으면 좋으련만, 다른 사람들은 상당히 큰 가게에서 여러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나온 모양이다.
3시경 왕푸징 거리 뒷골목에 차를 댄 우리는 5시 30분에 만나기로 하고 여유있게 쇼핑길에 올랐다. 어젯저녁 미처 다녀보지 못한 왕푸징 거리를 실컷 걷고 싶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대낮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사람들이 가득차 있다. 중국은 주 5일제 근무를 하니 토요일은 공휴일인 셈이다. 특별히 살만한게 없었던 나는 무조건 아이쇼핑에 나섰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어여쁜 중국인 아가씨에게 사진좀 찍어달라는 부탁도 해보고....
신동안시장 건너편에 있는 신화서점에 들렀는데 각국의 사전류가 잘 진열되어 있었다. 영어, 일어, 아어, 법어, 등등 을 쭈욱 따라가보니 맨 마지막에 한국어 안내판이 보인다. 호기심에 둘러보았더니 다른나라 언어 사전들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북한에서 발행된 사전도 눈에 보이고....
2층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컴퓨터 씨디 판매대도 있고 건너방엔 외국인을 위한 중국어 교재 판매점이 눈에 보인다. 혹시 테이프 교재나 하나 사볼까 해서 들어가봔는데 어느걸 선택해야 될지, 내 수준에 어느정도 맞는지도 모르겠고 해서 구경만 하다가 그냥 나왔다. 서점 옆에 있는 백화점에 들려서 선물용 죽엽청주 한병과 분주 한병, 월병 한봉지를 산후 다시 거리로 나왔다.
내가 分酒를 산 이유는 서울에서 산서성 지리를 공부하는데 분주에 대한 칭찬 일색이고 술담그는 방법등이 자세히 나오는 매우 유명한 명주로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도대체 어떤 술인지 맛보고 싶어졌고, 죽엽청주는 하도 유명한 술이라 그냥 하나 선물용으로 사보았다. 마오타이를 사볼까 하고 가격을 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7,8만원이 넘는듯 하여 포기하였다.
밖으로 나와보니 옆에 중국건설은행 간판이 눈에 뜨인다.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호기심 찬 눈으로 안에 들어가 보았다. 안에는 청경 인듯한 제복입은 20대인 경비 아저씨가 문을지키고 있고 카운터 안에는 대여섯명의 여직원이 쇠창살 안에서 업무를 보고있다. 전체공간이 채 10평도 안되는 듯 싶다.
마치 전당포처럼 카운터 위의 유리를 반달모양으로 구멍을 내어 접시위에 돈을 주고받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거의 모두 쇠창살을 박아 직원과 고객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카운터 앞부분에 쇼파가 놓여 있고 손님들이 대기하고 앉아 있다. 카운터 안을 슬쩍 훔쳐보니 컴퓨터 모니터가 보이는 걸로 보아 은행 업무가 온라인화 되어 있는 듯 했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온라인 되어 있는 은행이 많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던터라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에는 현금 자동지급기를 찾아 볼 수 없던 것으로 미루어 아직까지 그런 자동화기기 부분은 뒤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도 충분하고 해서 청경아저씨와 이것 저것 서투른 중국말로 몇가지 물어보았다. 내가 들렸던 곳은 아마 예금취급소 였던 모양이다.
예금취급소 위에 支行이 있고 지행위에 分行이 있는데 분행위에 總行이 있다 한다. 분행과 지행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는 얘기였고 총행에 대해 궁금해 했었는데 총행도 역시 북경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에는 많은 은행이 있다. 인민은행은 우리나라의 한국은행에 해당되고 중국은행이 우리나라의 외환은행에 해당된다. 그밖에 공상은행은 우리나라 일반 시중은행 역할을 할것이고 건설은행은 우리나라 주택은행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밖에도 중국에는 농업은행을 비롯 수많은 은행이 있는데 은행마다 각 省에 우리나라 본점에 해당하는 分行들이 있다. 이처럼 독자적인 독립체산제에 의해 인사권 예산권등이 모두 별도로 집행되는 分行이 각省에 하나씩 있으니, 이들을 총괄할 總行이 바로이곳 북경에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은행에서 나오면서 내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건네주고서 건너편에 있는 동안시장에 들렀다.
우리가 어제밤 들렸던 신동안 시장 옆에 東安市場이 있는 것이다. 동안시장은 신동안 시장과 거의 비슷한 규모가 아닌가 싶다. 시장내 수많은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과연 사회주의 국가인가 싶다. 우리나라 롯데나 현대 백화점 보다 오히려 물건이 많고 화려한듯 하다. 아이쇼핑을 마치고 다시 또 밖으로 나오니 손에 들고다니는 물건들이 묵직하다.
어젯밤 생각이 나서 신동안시장에 들려 쇼핑좀 해볼까 하였으나 손이 무거워 할 수 없이 버스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아직 여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차했던 곳으로 왔으나 차는 보이지 않고 티엔님과 샤오짜오만 나무밑에서 앉아있다. 차가 아직 안왔다고 한다. 샤오짜오는 신동안시장안에 있는 동인당에서 호랑이연고 10개를 사왓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한개에 2원(\240)씩 주고 샀다 하니 막역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에 적당하다 싶었다.
나도 사무실 직원 선물용으로 구입하고 싶었으나 피곤한 상태에서 다시 가기도 싫고 북경공항 면세점에 있을거라는 말에 주저 앉았다. 조금 있으니 버스가 돌아오고 알산님을 비롯 모두들 손에손에 선물들을 가득 들고 있다. 일행이 모두 오기를 기다려 만두를 먹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오늘 저녁 메뉴는 중국전통 만두다. 그리고 저녁 식사후 서커스 관람이 있을 예정이다. 어느 중식당에 들어서 전통 만두를 실컷 먹었다. 점심을 일찍먹고 한참을 돌아다녔으니 식욕이 당길만 하다.
시장(허기)이 반찬이라고...
몇차례 만두 접시가 동나고 추가 접시가 두서너번 나오고....
나는 생선을 잘못먹다 목에 가시가 박혀 죽을 뻔하고...
화장실가서 몇번 토해내고서야 겨우 생선가시를 뱉어낸다.
중국 요리에 거의 잉어만한 생선이 올라오는데 어떤때는 맛이 있고 어떤때는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일순배 술이 돌아가자 나는 곧바로 얼굴이 빨개지고....모두들 일어나 서커스 관람길에 올랐다.
7시 10분경 극장에 도착하였다. 서커스가 시작되려면 20분의 여유가 있었으나 좋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가이드의 재촉에 부랴부랴 일찍 극장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전망이 좋은 중간석은 특석을 제외하곤 이미 자리가 꽉들어차 있었다. 특히 노란 머리의 서양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나는 베레베레와 방글이, 하루등과 나란히 앉아 있고 뒤로 황과장 가족, 남상원씨 이인숙씨등이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일행은 머얼리 떨어져 있고...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알산님이 사주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해치우고 공연을 관람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노천에서 천막을 치고 공연하는 유랑서커스단이 아닌, 극장에서 공연하기 때문인지 외줄을 타고 건너가는 줄타기 공연이나 호랑이 사자등을 대동한 동물 서커스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묘기에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한편으로 어린 아이들, 이제 갖 6,7세 또는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가 나와서 둥근 통나무속을 들락날락하며 공연하는데, 실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안쓰럽고 처량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자탈을 쓴 네사람이 둥근공위에 올라 발로 공을 굴리는 모습, 수십명 선녀들의 접시돌리기, 자전거타기 등등 갖가지 묘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서 중간 10분의 휴식시간을 포함 2시간여의 공연을 관람하고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왠지 북경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이심전심일까. 숙소에 도착하자 마자 일단 북경시내 야경을 관광키로 하였다.
특히 지난번 광란의 밤을 만끽하지 못한 일행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한번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디스코텍이 아나면 나가지 않겠다는 소연, 소현이를 꼬셔서 호텔 로비에 나섰는데 어디로 갈것인지를 놓고 의견들이 분분하다. 할 수 없이 일단서너명씩 택시를 타고 모주석 사진이 걸려있는 천안문 금수교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수빈이, 베레등과 함께 같은 택시를 타고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였다.
아침에 보았던 천안문 광장보다 밤의 천안문이 한층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마침 경축일 기념행사를 앞두고 광장 양옆에서 쏘아 올리는 서치라이트는 서울에서 볼 수 없는 황홀한 모습이었다. 천안문 주의의 북경거리는 정말 화려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천안문 광장을 가로질러 아침에걸었던 똑같은 코스를 통과하여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티엔, 남상원 일행이 눈에 띄고...잠시후 아리산님이 도착하면서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물론 황과장 가족을 비롯한 몇몇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여기에서 청운이 부인을 만나게 된다. 상당한 미인이다. 취재차 어제 서울로 향한 청운에게 갔다줄 물건을 티엔님이 부탁받은 모양이다. 같이서 기념사진을 찍고 청운댁과 헤어진후 왕푸징 거리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거리에서 팔고 있는 고구마도 사먹고 이국 밤하늘의 정취에 흠뻑 빠지면서 이곳에 온후 세번째로 왕푸징 거리를 향하고 있다. 왕푸징은 밤늦은 시간이라 낮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았으나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오간다.
천안문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 내내 현주는 여인의 향기를 내뿜으며 센티해진 모습으로... 이처럼 어둠이 깔린 밤을 좋아한다며... 조용히 걷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상가는 철시하였고 어디 가서 술한잔 기울일 만한 곳이 없다. 디스코텍이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나의 약속은 물거품이되고 왕푸징 야경을 구경하며 마지막 북경의 밤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서 달려가보니 지름 1미터가 됨직한 둥그런 동판위에 "王府井" 이 새겨져 있는데 옛날 왕푸징이라는 우물이 있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동판의 착판일자가 1999. 9. 9일로 되어있다. 암튼 중국사람들은 9라는 숫자를 되게 좋아하는 모양이다.
중간쯤에 이르르서 24시간 운영하는 永和식당 2층으로 안내되어 야참과 더불어 맥주를 마시면서 북경의 마지막 밤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심야 12시를 전후한 시간에 한적한 왕푸징 거리를 걷는 묘미 또한 남다른 것이었다. 만약 연인과 더불어 북경을 찾는다면 이런 시각에 북경거리를 걸어보는 것 또한 좋은 추억거리가 되리라 싶어 꼭 권하고 싶다.
서울 명동 같으면 이시간에도 취객들을 유혹하는 네온사인으로 인해 불야성을 이룰법도 하건만 9시 30분 이후에는 모두 철시하는 북경 거리는 특별한곳을 제외하고 모두 이와 같으리라.
영화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어제밤과 똑같은 코스로 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쉬움을남긴채...
북경의 밤거리....
그 아름다움을 정확히 글로써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북경여행중 가장 추억에 남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9/26(일) 마지막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우리를 싣고갈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서 9시에 이륙한다. 중국민항은 예정된 시간에 탑승수속을 받지 않으면 예약이 취소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비행기 출발시간 2시간전까지 공항에 도착할 수 있도록 5시에 모닝콜이 울리고 6시가 조금 넘는 시각, 부랴부랴 버스에 올랐다. 한결 무거워진 짐꾸러기들을 버스의 맨뒷편에다 가지런히 정돈한다. 그리고 아침식사는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였다.
조금은 이른 시각에 북경시내를 여유있게 빠져나와 예정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위해 5일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가이드 이영화씨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내가 리샤오지에로 호칭했었던....같이 있는 동안 우리에게 성심 성의껏 열심히 안내해주고 설명해주었던 오랫동안 잊지 못할 여인이다. 우리 일행중 학생들이 여럿 있는걸 알고서 다음에 공부하러 북경에 오는 일이 있거든 연락해 달란다.
내년쯤 서울에 올 수 있을것 같다는 말에 내 명함도 한장 건네주고....
공항 터미날에서 탑승 수속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가이드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게 조금은 아쉽다.
면세점에서 이것 저것 쇼핑도 하고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휴식을 취하는 도중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50여명의 청장년 남성들이 똑같은 곤색 복장을 하고서 줄줄이 의자에 앉아 있다. 덥수룩한 머리,
까맣게 그을린 모습, 창밖의 비행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해외 취업에 나서는 일꾼들인 모양이다.
그곳이 우리 한국이 될 수도 있고....
그들의 모습에서 새삼 말로만 듣던 6,70년대 우리나라 건설 일꾼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긴 여정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기내식 취식 시간을 제외한 1시간 30여분의 비행시간 내내 잠으로 일관하였다. 내 바로 옆에는 상철이가 앉아 있고 통로 건너편 창가엔 수빈이와 하루가 앉아 있고....
드디어 4박 5일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왠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모든 여행의 뒤끝이 항상 그러한 것처럼....
에필로그....
이것도 일종의 기행문이라면 기행문일까?
아뭏튼 여행을 다녀와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이번이 처음일듯 싶다. 기행문을 남길만큼 그럴듯한 여행을 다녀온 것도 처음이고....
나름대로 동행했던 중동인의 인물평을 내려본다.
아리산 : 우리의 리더로서 노심초사 항상 우리 일행을 돌봐 주시는, 술이 필요할땐
술을, 아이스크림이 필요할땐 아이스크림을, 길을 잃어버렸을땐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그리고 모르는 것이 있을땐 우리의 스승이....
티 엔 : 항상 미소짓는 모습으로 우리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 이 없고, 뒤에서는 남모르게 일행의 안위에 조바심 하시는 나이에 어울리지지 않는 젊음을 간직하신 분...
남상원 : 겉모습만 보고서는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과묵한 성 격. 그러나 대화가 시작되면 따뜻한 인간미가 절로 풍기는 딸부잣집 큰 오빠 같은.....
조한경 : 조금은 엉뚱하게, 조금은 튀기를 좋아하는, 그러나 마음씨는 항상 흥부같 은, 여행기간 내내 일행의 궂은일을 도맡았던, 나와 동행하며 나의 카메라에 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담아 주었던 다정한 친구.....
이인숙 : 완숙미가 넘치는 여인, 일행의 맏언니로서 그저 세상일이 모두 조용해지기 만을 바라는 듯한, 그래서 화려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의 북경의 밤거리를 너무 좋아할 것만 같은 여인....
한수빈 : 장학우를 너무 좋아하는, 그래서 이름이 러브재키로 불리우는 보기보담 풍 류를 즐길줄 아는 여인, 여행기간 내내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주로 살찐하루와 같이 다니며 얼굴화장에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웃음을 잃지 않던 여인....
장미애 : 중동에선 장트리오 멤버의 일원으로 알려진, 단지 하룻 동안만이라도 살이 찌고 싶어서 이름을 '살찐하루'로 정했다는 어릿꽝스런 몸짓으로 우리일행에게 항상 웃음을 선사했던 그래서 진지한 사랑보담 투박한 웃음을 더 좋아 할 것 같은 여인.....
이금주 : 일명 안반대기, 글쓰는 재주가 중동 제일이라는, 무엇이든 항상 끈기있고 도전정신이 강한 중동의 순동이. 남상원님으로부터 하고싶은 말을 맘속에 담아놓고 있기를 싫어하는 직설적 성격이 재미 있다는 상상력과 표현력이 풍부한 話術에 뛰어난 여인.
박소연 : 중동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중동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중 문학도 출신의, 늘씬한 키 때문에 항상 옆에서 기립자세로 사진찍기를 제일 기피하고 싶었던 한 미모하는 여인, 살살 치는 눈웃음이 백만불짜리인
김현주 : 중동에 가입한지는 한참 된듯하나, 눈에 익숙치 않았던 '여인의 향기' 머나먼 여행지에 동생과 동행할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는 여인. 천안문의 화려한 불빛보다 철시한 왕푸징의 희미한 밤거리를 더 좋아했던, 분위기 좋아하는 총각들이 데이트라도 한번쯤 신청을 해볼만한.....
김미선 : 일명 얌시오리, 우리 일행 모두로부터 가장 부러움을 샀던 여인, 커플이 동행하므로써 우리를 기죽게 만들고, 항상 웃음을 잃치 않고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보아 향후 참으로 아름다운 커플이 될거 같다는 예감을 갖게하여 나를 여러번 기죽게 만든 장본인....
조소현 : 여행기간 내내 소연이와 단짝, 이름이 닮았다는 이유로 소연이와 같은 방 을 쓰게 되고, 줄곧 둘이서 손잡고 다니는 모습이 우리눈에는 同名의 자매 사이로, 외국인 눈에는 同性 연애자(?)로 오해 받고, 나와는 잠시 황제와 황후의 인연(사진에서만)을 맺기도 했던 신디....
최방글 : 준희와 더불어 얼굴이 동그랗기로 중동에 소문난.... 사진발이 끝내주는, 술을 너무 잘마셔서 자기 자신도 주량을 알수 없다는 귀염동이, 여행기간 내내 준희와 더불어 우리를 즐겁게 해준 신세대 스타
이준희 : 여행기간 내내 방글이와 단짝을 이루어 우리 일행을 웃음 분위기로 이끌어 준 막내군단. 일명 베레베레, 중동의 건강미 넘치는 영원한 귀염동이. 죽어도 비리비리한 모습을 찾아볼수 없는 미래 중동의 기둥감....
끝까지 본인의 졸고를 읽어주신 중동인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틈틈히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쓰다보니 거의 열흘에 걸쳐 여행기를 완성했습니다.
다군다나 지나간 기억을 되살리며 쓰다보니 꼭 하고싶었던 말이 빠지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 등 아쉬운점이 많습니다.
방글이가 디스코텍에서 너무열심히 노는 바람에 오른쪽 콘텍트 렌즈를 잃어버려 고생을 했던점, 천단에는 오직 神만이 다닐 수 있는 神道가 있어서 감히 황제도 걷지 못한 곳이 있었다는 점, 가이드가 아리산님을 옆에 세워놓고 장개석 총통을 자금성에서 보물을 절취한 도둑으로 설명했을때의 느낀점 등 다시 쓰고 싶은 구절이 군데군데 눈에 띄입니다.
그러나 이런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한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이쯤해서 북경여행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