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ort Summary
고향, 동무, 먼 산 진달래, 청보리, 달빛 여울, 구름 솜사탕, 하얀 발자국, 그리고 영원히 머물 것 같았던 시간들. 기억 저편 꼭꼭 숨어 있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쓰라린 아픔까지도 사랑할 수 있으련만. 이 책은 경향신문에서 2000년 2월부터 지난달까지 1년 4개월여 동안 연재한 같은 제목의 기획 기사를 한데 묶은 것이다. 없고 힘들었던 과거로의 추억 여행이 될 이 책에 담긴 즐거웠던 추억은 오래 남고, 괴로웠던 추억은 더 오래 남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낯익은 풍경 사진과 그림, 그리고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단어들에 대한 설명이 함께 담겨 있다.
밥상머리 풍경
지금이야 보리밥이 건강식이지만 그때 보리밥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상징이었다.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 보리쌀을 솥 한쪽에 따로 안쳤다. 한쪽은 흰쌀밥, 한쪽은 거무튀튀한 깡보리밥. 그 명료한 흑백의 대비! 어머니는 흰쌀밥 쪽에서 아버지 밥을 먼저 푸신 뒤 보리밥과 쌀밥을 섞어 아이들 밥을 푸셨다. 솥에 남은 커다란 깡보리밥, 그것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그 깡보리밥을 양푼에 퍼 고추장에 썩썩 비벼 잡수시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보리밥이 소화가 잘 돼."하셨다. 하긴 보리밥이 소화가 잘 되긴 되는지 골목길 달음박질 한 번에 아이들의 배는 꺼져버렸다.
풀반찬만 먹다가 오랜만에 고등어나 꽁치 조림이 밥상에 올라오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가운데 도막 덥석 집어다 먹었으면 원이 없으련만! 아이들은 슬금슬금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머니들 몫은 항상 생선 대가리였다. 어두일미 혹은 어두육미라고 하지만 돼지 머릿고기 누른 것도 아닌데 거기에 무슨 살점이나 붙었겠는가. 그래도 어머니는 "생선은 대가리가 제일 맛있지."하며 그 알량한 살을 발라 잡수셨다. 맛없는(?) 생선 가운데 도막은 아버지 앞에 놓였다. 어머니는 아예 생선 대가리를 통째 입에 넣으시고는 밥사발 뚜껑에 보기 좋게 뼈만 뱉어놓으셨다. 아이들은 아무리 따라 해도 살과 뼈가 발리지 않았다. 우물우물 입 속에서 생선 대가리를 발라보지만 뼈를 뱉으면 입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어머니들이 평생 배워온 그 기술(?)을 어찌 흉내나 낼 수 있으랴.
그 시절에는 보온밥통이 없으니 아랫목이 보온밥통 역할을 했다. 하루 종일 이불을 펴놓는 아랫목에 밥사발 뚜껑 덮어 파묻어놓으면 그런대로 최소한의 보온은 됐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고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잠자는 아이의 밥사발을,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아버지의 밥사발과 함께 아랫목에 묻어놓았다.
아랫목은 또한 바깥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들이 언 몸을 녹이는 곳이어서 아이들은 흥부네 아이처럼 옹기종기 이불 속에 배깔고 엎드려 만화도 보고 장난도 쳤다. 장난을 치다 밥사발을 발로 차 뒤집어놓으면 이불이고 발이고 밥풀이 더덕더덕, 아랫목은 온통 밥풀 난리가 났다. 들킬세라 아이들은 이불과 발바닥에 붙은 밥풀을 부지런히 떼어먹었다. 때딱지 않은 손으로 주물럭 주물럭 밥사밥에 밥을 쓸어 담아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느지막이 들어오신 아버지는 그 밥을 맛있게 잡수셨다. 모르는 게 약!
쇠다리를 접어 넣은 호마이카상이 나오기 전 교자상 같은 큰 상이 드물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같이 사는 집에선 밥상을 두 개씩 봤다. 밥상이 둘 차려지면 대개 여자와 남자가 따로 앉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니라 남녀칠세부동상이랄까. 반찬은 뭐든지 남자 쪽 상이 푸짐했다. 여자아이들은 입이 튀어나왔고, 할머니는 습관 때문인지 굳이 여자 쪽 상에 가서 앉으셨다. 호마이카상도 한 집에 하나뿐이어서 잔치가 나면 동네 상들이 모두 잔칫집으로 징발됐다. 일회용 숟갈은 없던 때라 잔치용 수저를 공동으로 사놓고 쓰기도 했고 아니면 이웃집 수저를 빌려 썼다. 어머니는 잔치 품앗이 가고, 집엔 상도 수저도 없으니 천생 잔칫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잔치가 나면 동네 잔치였다.
다방과 디제이
성년이 되어야 다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성년의 기준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느냐였다. 고등학생까지는 다방 근처에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도 이젠 성인이 됐다'며 볼일도 없이 담배 하나 꼬나물고 다방에 한참 앉아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방에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연애까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때 결혼은 대부분이 중매결혼이어서 과년한 처녀가 다방에서 사내와 앉아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동네에서 아예 '날라리'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남녀 사이는 인력으로 안 되는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하는 쌍도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동거하는 여자는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다방엔 레지라고 부르는 차를 나르는 아가씨가 있었다. 동네 젊은이들은 말이라도 한번 붙이고 손이라도 한번 만져보려고 다방엘 자주 들락거렸다. 레지들은 손님이 혼자 앉아있으면 옆자리에 앉아 말동무가 돼주곤 했다. 손님은 말동무를 얻은 대신 레지에게 커피나 쌍화차 같은 것을 한 잔 사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커피 한 잔 마시곤 하루 종일 붕어처럼 오차만 마셔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런 손님일수록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서 레지들과 노닥거리곤 했다. 그러니 다방 주인이 싫어할 수밖에. 그래서 다방 주인들은 레지들이 어느 정도 단골이 생기면 다른 동네 다방과 서로 바꾸곤 했다.
다방엔 노래와 음악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다방은 전축을 카운터에 들여놓고 주인 맘에 드는 가요들을 틀어줬다. 그런 다방은 으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어서 '노땅다방'이라고 불렀다. 젊은이들은 주로 팝송을 틀어주는 다방으로 모였다. 그땐 그거나 저거나 다 다방이라고 써붙였는데 나중에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다방들은 '커피숍'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커피숍엔 디스크자키(디제이)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유리로 된 박스를 만들고 거기에 앉아서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틀어줬다. 머리도 길게 기르고 일부러 낮게 깐 음성으로 닐 다이아몬드가 어쩌고, CCR이 어쩌고 하는 멘트를 한바탕 늘어놓고 음악을 틀어줬다. 그게 멋있게 보였는지 디제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매일 디제이 박스 앞에 몇 시간씩 앉았다 가는 여자들도 꽤 있었다. 디제이의 시선을 끌려고 음악 신청용 쪽지에 하트 모양을 그려넣기도 하고 껌이나 사탕을 넣어주기도 했다.
주전부리 2
'쫀디기'라는 과자가 있었다. 녹말가루쯤으로 만든 과자 같은데 쫄깃쫄깃한게 씹는 맛이 있어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껌처럼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쫀디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쫀디기를 튀기면 생긴 모양대로 부풀어올랐다. 튀겨놓은 과자는 쫀디기와는 달리 바삭바삭했다. 그걸 아이들은 '바가지과자', '반지과자' 등으로 불렀다. 네모난 쫀디기를 튀겨 만든 바가지과자는 쫀디기가 뜨거운 열에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어 바가지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반지과자는 두툼한 반지처럼 생겨 아이들이 열 손가락에 끼워가지고 다니며 하나씩 빼먹었다. 공장 아저씨가 바가지과자나 반지과자를 튀겨 커다란 봉지에 담아놓으면 구멍가게와 좌판 아주머니들이 떼어다 행인들과 아이들에게 팔았다.
그때의 껌은 지금처럼 부드럽지 못하고 조금 씹다 보면 딱딱해져 '아구리'가 무척 아팠다. 뒤에 풍선껌이 나왔는데 아마 '홍길동 풍선껌'이었던 것 같다. 그냥 껌이 10원에 다섯 개쯤이면 풍선껌은 두 개밖에 안 돼서 아이들은 껌을 살 때 늘 고민해야 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가 아이들한테 인기를 얻자 판박이껌이 나왔다. 껌 포장지에 덧씌워진 비닐에 그림이 있었는데 그 비닐을 공책 같은 데 붙이고 손톱으로 문지르면 비닐에 있던 그림이 떨어져나와 공책에 붙었다.
강냉이를 튀기는 뻥아저씨가 오면 동네 골목은 시끌시끌했다. 뻥 아저씨는 강냉이나 튀밥을 튀겨주고 한 홉에 얼마씩 돈을 받았는데 돈 대신 쌀이나 곡식으로도 받았다. 뻥 아저씨는 그렇게 뻥삯으로 받은 곡식을 튀겨서 봉지에 담아 팔았다. 뻥아저씨는 깡통을 잘라 만든 됫박으로 쌀을 가늠해보곤 거기에 병아리 오줌만큼 물을 붓고 사카린을 조금 뿌려 시커먼 뻥기계에 넣고 돌렸다. 뻥기계는 석유버너로 달궜다. 그러면 기계 안에 넣은 쌀이나 옥수수는 높은 압력에서 익었다. 기계 머리에 달린 눈금을 보던 뻥아저씨가 큰 소리로 "뻥이요!"하고 외치면 이젠 터질 때다. 뻥아저씨의 외침은 놀라지 말라는 일종의 경계경보인데 그 소리만 나면 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던 아이들은 골목골목으로 도망을 가거나 귀를 막은 채 머리를 괴춤에 쿡 처박았다.
"뻥!" 기계의 뚜껑이 열리면 하얗게 터져나오는 김을 헤치고 강냉이와 튀밥이 폭죽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도망갔던 아이들은 불 본 나방처럼 뻥기계 앞으로 몰려들었고, 뻥아저씨는 싸주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튀밥은 그런 대로 먹을 만했지만 강냉이는 좀 달랐다. 뻥아저씨가 주는 것은 부스러기라 부스러진 간냉이 반에 꺼끌꺼끌한 옥수수 껍질이 반이었다. 껍질은 씹히지 않고 입을 겉돌다 이 사이에 끼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강냉이 부스러기를 손위에 올려놓고 후후 바람을 불거나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쏟아가며 바람을 불어 꺼끌꺼끌한 옥수수 껍질을 가려냈다. 그리고 뻥아저씨는 기계 돌리는 게 귀찮아지면 아이들 중에 한 명을 골라 기계 돌리는 일을 시켰다. 기계를 돌리는 아이에게는 뻥아저씨가 특별히 강냉이나 튀밥을 챙겨서 줬다. 기계 돌리는 일은 어렵거나 힘들지도 않은 데다 강냉이까지 듬뿍 얻을 수 있으니 아이들은 턱을 괴고 둥글게 둘러앉아 '이제나 저제나 뻥아저씨가 나를 부를까.'하고 기다렸다.
반공 포스터
6월 25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아이들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똑같게 그리는 것은 북괴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도깨비처럼 뿔을 그려야 했고, 얼굴과 팔엔 빨간색을 칠했다. 왜? 빨갱이니까. 또 팔뚝엔 온통 고슴도치 가시같이 뻣뻣한 털을 그려넣어야 비로소 북괴의 모습이 됐다. 그리고 북괴가 남한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이나 용감한 아이가 북괴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그리든지.
우리 나라 지도도 북한은 빨갛게 칠했다. 북한이 빨갱이라면 남한은 그 반대로 파랭이라고 해서 아이들은 남한을 파랗게 칠했다. 빨강과 파랑이 칠해진 우리 나라 지도는 남한 국기의 태극과 모습이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포스터 아래나 위에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반공 방첩"과 같은 구호를 써넣었다. 반공 표어 짓기도 거의 의무적으로 해가야 했다. 잘 된 포스터와 표어를 뽑아 6·25날 운동장 조회시간에 상을 줬다.
반공 웅변 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그런데 반공 웅변은 어찌된 일인지 가난한 애들은 잘 못했다. 못 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가난한 탓에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을 거다. 학교에서는 웅변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웅변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반공 웅변 대회도 학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대회, 전국 대회가 있어 학교끼리 경쟁을 했기 때문이다.
웅변 원고의 단골 메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절규와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새벽 네시'로 시작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또 한 오른손과 왼손을 치켜든 뒤 허공에서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도 단골 메뉴였다. 듣는 사람은 딴청을 하다가도 그 소리만 나오면 박수를 쳤다. 그러나 웅변 원고는 아이들이 썼다기보다 선생님의 작품인 경우가 더 많았다.
길거리에도 그런 구호는 많이 붙어 있었다. 반공 구호의 베스트셀러인 '의심나면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같은 것이었다. 양철판에 써서 전봇대 같은 데다 묶어놓기도 했고, 동네 반장 집이나 통장 집 대문 한쪽에 꼭 붙여 놨었다. 빨간 삐라를 주워오면 학교에서 상품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상품으로 주는 연필을 타려고 동네 뒤 돌산을 뒤지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남산이나 한강이나 기찻길 주변에서 뭉텅이째 불온삐라를 줍기도 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 장을 내도 상품은 하나 뿐이라 아이들은 서로 나눠서 학교에 냈다. 물론 아이들이 주워온 삐라의 장수를 합산해 1년에 한번 6·25날 많이 주워온 아이들에게 '삐라상'을 주기도 했지만.
자전거와 버스 이야기
가겟집에서 물건 배달하는 데 쓰는 짐빠자전거는 윗동네에는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짐을 싣고 다니는 자전거라 아랫동네 시장통 가겟집에서도 쌀가게나 야채가게, 막걸리 도매상같이 무거운 짐을 배달해야 하는 가게에만 있었다. 윗마을 돌산 동네 아이들에겐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시장통 아이들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그 짐빠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다. 당시 조금 큰 가게에서는 배달원을 두고 장사를 했는데 아이들은 그 '배달 형'들을 졸라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다.
배달 형들은 달동네 아이들의 부모들처럼 쌀밥을 꿈꾸며 무작정 상경해 떠돌다 가겟집에 취직한 20대들이었다. 당시 무작정 상경한 시골 형들은 공장의 공돌이나 가겟집 배달꾼으로 취직했다. 짐빠자전거 뒤 짐 싣는 곳에 자기 키보다도 더 높게 물건을 쌓고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배달 형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보기엔 신기에 가까웠다.
짐빠자전거보다 작고 가벼웠지만 짐빠자전거에 없는 뒷거울이 핸들 양쪽에 달려 있던 신사용 자전거는 동네에 몇 대밖에 없었다. 달동네 아버지들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돈을 모아 자전거를 샀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파는 게 주업이 아니고 '빵꾸' 때워주고 바퀴에 바람도 넣어주는 자전거포가 있었다. 지금 보면 별로 고장날 곳이 없고 연장만 있으면 아무나 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엔 시골서 올라온 형들이 봉급도 몇 푼 못 받고 매맞아가며 자전거포에서 수리를 배웠다. 그들의 꿈은 빨리 기술을 배우고 돈도 모아 자신의 자전거포를 차리는 거였다. 그래서 무작정 상경해 서울에서 자전거포를 냈다고 하면 고향 사람들이 "그놈 서울 가서 출세했네."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60년대 중순부터는 버스가 대중교통 수단이 됐다. 당시 버스는 타는 문 쪽에 돈통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운전사 외에도 차장이 탔다. 차장은 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고, 요즘은 녹음해서 틀어주는 정류장 안내도 했다. 차장은 처음엔 남자가 했는데 점차 시골에서 상경한 누나들로 바뀌었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누나들은 시골 형들처럼 공순이가 되거나 차장이 됐다. 차장 누나들은 코맹맹이 소리로 정류장 안내를 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에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 가요."가 있었다. 차장 누나들이 "청량리 중량교 망우리 가요."를 코맹맹이 소리로 하면 그렇게 들린다나.
차장 누나들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긴 끈이 달린 손가방을 앞으로 메고 차비를 받았다. 대중교통 수단이 된 만큼 버스는 늘 만원이었는데 몸 전체를 버스 안으로 디밀지 못한 승객들은 늘 버스 문짝에 매달려 가야 했다. 그러니 말로 해서는 운전사와 차장 간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무전을 치듯 차체를 두르려 보내는 신호였다. 차장이 버스 차체를 두 번 두드리면 '가시오'이고, 한 번 두드리면 '서시오'였다. 운전사는 승객들이 문짝에 매달린 채로 출발하게 되면 지그재그 운전을 해 승객들을 버스 안으로 우겨넣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승객들이 안쪽으로 쏠리면 신기하게도 발 하나 디딜 틈이 없을 것 같은 버스 속으로 승객들이 모두 들어갔다. 물론 이 곡예운전 통에 매달려가던 차장 누나들이 손잡이를 놓쳐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신문에 났다. 차장 누나들은 그렇게 번 돈을 모아 고향에 있는 남동생의 학비를 댔다.
타작
장다리꽃 지천으로 널린 초여름, 보리 타작을 시작으로 농가는 거둬들이는 기쁨을 맛본다. 탈곡기가 요란하게 돌기 시작하면 꺼럭(벼, 보리 등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 까끄라기의 사투리)이 꽃가루 날리듯 했고, 댓돌 위에 올려놓은 요강에도 미숫가루처럼 뽀얗게 올라앉았다. 품앗이 일꾼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벌겋게 충혈된 눈만 빠끔 열어놨다. 손 잘 맞는 두세 명이 박자를 타며 탈곡기 수레 보릿단을 밀어넣으면 맨송맨송한 알곡이 바닥에 소복이 쌓이고, 보릿짚은 머리 깎은 중마냥 개운하게 검불 속에 던져졌다. 바심이 끝나면 일꾼들은 땅바닥에 빙 둘러앉아 농주를 돌리고 갓 담가낸 김치를 흙 묻은 손으로 나눠먹으며 꺼끌한 목을 축였다.
그렇게 타작한 보리는 주린 보릿고개를 넘기는 고마운 주식이었다. 새벽이면 가마솥이 덜컹덜컹 끓고 구수한 밥 냄새가 창호지를 밀치고 들어오면 뱃속은 요동을 쳤다. 여름에 구들을 달궈가며 밥짓는 일은 고통이었다. 가능하면 아침에 밥을 지어 점심까지 해결했다. 그래서 그 시절 부엌 천장엔 흔들흔들 밥고리(새끼줄로 삼각형 틀을 만들어 삼베로 기운 소쿠리를 얹고 밥을 퍼담으면 밥이 쉬지 않는다)가 풍경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 밥소쿠리를 베보자기로 덮어 열무김치와 함께 들밥으로 내가면 꿀맛이었다.
콧속이 콰하게 밤 공기가 싸늘해지면 콩밭도 누렇게 주저앉았다. 날 잡아 볕 뉘엿뉘엿한 저녁 무렵 온 가족이 낫을 들고 비탈밭으로 간다. 아이들도 따라나서 콩대 묶는 일을 도왔다. 콩대는 마당에 눕혀 익은 볕에 사나흘 바싹 말린 후 타작을 했다. 도리깨는 쉴새없이 돌아 깍지 속 콩이 다 퉁겨나가도록 매질을 했다. 훗날 고향을 찾았을 때 완행버스에서 내려 집 쪽을 돌아보면 담장 너머로 도리깨가 올라갔다 내려오는 풍경이 어머니 손짓하는 모습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기억이 있다. 콩 타작이 끝나면 바람 좋은 날 키 내림을 했다. 키에 콩을 담아 살랑살랑 까부르면 알갱이는 소복이 쌓이고 잡물은 날아갔다. 동네에 서너 대밖에 없는 풍구를 빌리면 일이 좀 쉽기도 했다. 콩 한 알만 버려도 죄 된다고 여겼던 시절, 아이들은 풀숲, 나무 밑동으로 퉁겨나간 콩을 찾아 됫박을 들고 온 마당을 뒤졌다. 콩 타작을 끝내면 베어놓은 깨가 꼬투리를 툭툭 터뜨린다. 주로 할머니 차지였다. 산그늘에 앉아 바싹 마른 깻대를 물구나무 세워 부지깽이로 톡톡 두드리면 하얀 깨가 벌레처럼 솔솔 기어나왔다.
녹두는 아낙들이 한톨 한톨 일일이 손으로 땄다. 멍석에 말려 방망이로 두들기면 까만 껍데기 속의 녹색 알갱이가 튀밥처럼 퉁겨올랐다. 수수는 목을 따 담장에 얹어뒀다가 털었는데 간식이 별로 없었던 시절 밥솥 귀퉁이에 얹어 찌면 깔깔했지만 차지고 별미였다. 콩 한 알도 땀으로 거둔 그 시절의 타작. 자연은 고단한 만큼 옹골진 열매를 주었다. 여럿이 함께 일하며 힘든 노동을 놀이처럼 풀어갔던 순박한 그 시절 농투성이들. 지게끈 볏짚이 어깨에 딱정이로 올라앉도록 몸뚱이 하나로 삶을 때운 아버지들. 이젠 노인 기침 소리만 골골한 등 굽은 고향. 그 젊던 조막손이 동무들 다 어디 갔는가.
가을운동회
운동회 날. 아, 찬란한 햇살. 아이들 맘은 풍선처럼 떠다녔다. 새벽부터 지단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고샅을 휘돌았다. 노인들도 참빗에 물을 발라 쪽을 찌고, 부엌 곤로엔 달걀 두어 줄이 익어가고, 김밥이 뚝뚝 잘려 찬합에 담겼다. 아이들은 도마를 노려보며 김밥 꽁지를 눈치껏 나눠먹었다. 또 이틀 전 바늘로 흠집을 내어 소금물에 담가 아랫목에 우려둔 땡감도 건져내고 밤도 한 됫박이나 삶았다. 뙤약볕에서 밭만 매던 엄마한테도 그 날은 분 냄새가 났다.
학교에 도착하면 귀빈석 천막이 잔칫집처럼 세워지고, 선생님은 하얀 모자에 운동복, 호루라기 하나씩을 걸고 대통령처럼 호령했다. 전교생이 흰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 그리고 청군 백군을 나눈 모자를 하나씩 썼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운동복이었지만 날개 단 듯 신바람이 났다. 상고머리 여자아이들은 머리띠 색깔로 청백을 나눴다. 교문 주변은 꼬마 손님들을 유혹하는 장사치들로 일찌감치 성시를 이뤘다. 흔치 않던 손나팔 삑삑이며 빨간 닭털이 달린 풍선 등 조악한 플라스틱 장난감들이 펼쳐지고 뽑기 판이며 먹을 것들이 지천으로 들어섰다.
"탕!" 총소리가 울리고 화약 냄새가 하늘로 번지면 함성이 운동장을 흔들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또 응원 점수를 겨냥한 재주꾼들의 춤 솜씨가 현란하게 목소리를 조율하고 삼삼칠박수는 물결처럼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도토리 아우들의 100m 달리기선 꼭 무릎 깨져 우는 아이가 있었고, 고학년 언니들의 부채춤엔 모처럼 마실 나온 구들지기 노인들도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모자를 거꾸로 쓴 형들의 기마전 호령이 하늘을 가르고, 텀블링 시범 후 밀가루에 얼굴을 박고 엿을 고르면 말간 웃음이 깨알 튀듯 했다. 쪽지 속 손님 모셔 달리기 땐 제일 예쁜 선생님 손을 빼앗듯 잡고 뛰면 선생님도 무조건 달려줬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줄꼬리에 순자 엄마, 복순이 아버지 모두 달라붙어 나중엔 그쪽 사람이 많네, 이쪽이 많네 삿대질이 벌어지기도 했다. 숯검정 칠에 짚을 엮어 치마를 두르고 바가지에 물감을 칠해 여장을 한 사내아이들의 가장행렬이 지나가면 폭소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여기저기 아이들 부르는 소리, 달그락 달그락 찬합 여닫는 소리 그리고 김밥 냄새. 선생님은 이곳저곳 불려다니며 한 잔 두 잔 거절할 수 없는 탁배기 권유에 얼굴이 발개졌다. 먹성 좋은 아이들은 찐 달걀을 그 자리서 여남은 개씩 까먹으며 욕심을 채웠다. 그 때 마시는 톡 쏘는 사이다 맛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 뒤편엔 가난 탓에 배를 곯으며 수돗가 주변을 빙빙 도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존심 상할까봐 몰래 김밥 몇 개를 건네면 그 아이들의 눈엔 말간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오후의 하이라이트는 계주. 대부분 어깨가 쩍 벌어진 5, 6학년 오빠들은 콧김을 씩씩대며 줄 앞에 섰다. 총소리가 나기 무섭게 바지게만한 걸음이 성큼성큼 뛰기 시작하면 뒤로 물러섰던 어른들이 일제히 몰려들고 아수라장이 됐다. 이땐 꼭 배턴을 떨어뜨리는 아이가 한두 명씩 있었는데 그래도 아랑곳 않고 다시 주워 팔을 내두르며 마치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뭐니뭐니 해도 상이 있어 아이들은 더 즐거웠다. 보라색 인주로 '賞(상)'자와 1등, 2등, 3등 도장이 찍힌 공책이나 연필을 받았는데 계주며 개인전을 휩쓸어 많이 받은 아이들은 1년 내내 공책 걱정하지 않고 쓸 만큼 쏠쏠했다.
운동장서 제일 높은 미끄럼틀 위에 올려놓았던 게시판에 마지막 점수가 올라가면 이긴 쪽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아이들의 땀과 마을의 축제로 흥겹던 그 시절 운동회. 우린 늘 그 벅차던 기다림의 축제가 그립고, 시간의 저편이 부스럼처럼 가렵다.
보따리 장수
놀이도 시큰둥해지는 오후, 화들짝 사립을 밀치는 과일장수 '아짐니', 가끔 비린내 풍기며 고샅에 들어서던 생선장수도 반갑긴 마찬가지였다. "자반 사세유." "물 좋아유." 솔가지로 덮은 다라이에 무겁게 내려앉던 한숨. 밥 세 끼도 호강인데 생선 굽는 일은 이웃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애들 시켜 몰래 아짐니를 불러들였다. 하얀 소금이 꽃처럼 얹어진 자반 고등어, 짠 갈치, 꽁치 몇 마리…. 장에 다녀오시는 아버지 자전거에 어쩌다 한 번 건들건들 매달려 있던 귀한 생선을 먹을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두어 마리 들여놓으면 그 날 저녁은 냄새로 잔치했다. 아궁이에 짚불 대신 장작을 사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숯이 혀를 내밀면 시커먼 소금 툭툭 뿌려 석쇠에 올려지던 꽁치. 노릇노릇 익으면 아이들은 조막 강아지처럼 들락거렸고 어머니는 자꾸 부엌 문 닫으며 냄새 단속을 하셨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괜히 "식욕이 없다."며 생선 접시를 슬쩍 밀어놓으셨고, 어머니는 뽀얀 살을 발라 붓꽃만큼씩 수저 위에 올려주셨다.
늦가을에서 초겨울쯤이면 단지를 보자기로 싸서 이고 다니는 꿀장수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종지로 꿀을 길게 늘여 개면서 토종임을 강조했으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꿀은 다락이나 시렁 위에 영정 사진처럼 모셔졌다. 그러나 어린 사냥꾼들은 용케도 그 단지를 꺼내 한 수저씩 퍼먹고 시치미를 뗐다. 입 언저리가 부르트면 어머니는 손가락에 쥐똥만큼 찍어 발라주며 빨아먹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멀리 체장수가 지나가면 사람은 안 보이고 커다란 통가리(싸리를 새끼로 발처럼 엮어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 감자, 고구마 등 곡식을 갈무리했다. 겨우내 얼지 않도록 윗방이나 부엌 안에 설치했음)가 굼실굼실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가벼워 20∼30개를 끈으로 엮어 꼴처럼 지고 다녔다. 아래쪽엔 조리나 수세미도 달랑달랑 매달았다. 상(床)장수도 가끔 모습을 보였다. 네댓 개를 끄낵기(끈의 사투리)로 묶어 지거나 이고 다녔다. 망가진 상을 고쳐주고 덧칠해주며 공임을 받았다.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자 옷감을 지고 다니던 비단장수는 모습을 감췄다. 대신 속옷, 양말, 주름치마 등 온갖 의류를 이고 다니는 옷장수가 등장했다. 5일장에 가면 장돌뱅이들이 늘어섰지만 그래도 곡식과 바꾸는 방문 장수는 인기를 끌었다. 경상도 아짐니가 충청도 섬마을까지 들어와 마루에 알록달록 옷을 펼쳐놓으면 아이들 성화에 아낙들은 몸살을 앓았다. 이 보따리 장사꾼들은 누가 불러 앉히지 않으면 때 거르는 일은 예사였다. 찬밥이라도 내놓으면 고마워 눈물 그렁이며 옷가지나 과일을 슬쩍 내려놓고 갔다.
방물장수가 빼죽 얼굴을 디밀면 반가워하는 건 어머니였다. 면경(얼굴을 비추는 작은 거울), 참빗, 실, 바늘, 가위, 검정 고무줄, 족집게, 동동구리무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외상으로 슬쩍 분 등을 들여놓고 장에 갈 때만 살짝 분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시커먼 무쇠통을 지고 마을을 돌던 왜지름(일제가 들여온 석유라고 해서 부른 이름) 장수 아저씨도 환대를 받았다. 어쩌다 등잔이나 남포등 기름이 떨어지면 당장 읍내까지 나갈 수도 없고 난감할 때마다 골목을 돌며 "석유지름 사세유" 외치던 반가운 손님. 어른들은 기름병을 마루 기둥에 끄낵기로 매달아놓고 아껴 썼다.
이렇게 보따리 장수는 마을을 돌며 잔치, 초상, 시집간 재 너머 딸 소식 등 얘기 보따리를 함께 이고 다녔다. 변변히 차편도 없었고 늘 다리품을 팔아야 요긴한 물품을 구할 수 있었던 시절. 보따리 장수는 기다릴 사람 없는 무료한 시골 살림의 낭만이었고 반가운 손님이었다. 인기척 없이 사립에 불쑥 들어서도 탓하는 이 없었고, 끼니 때 들르면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맞았던 인정. 아지랑이 가물대는 둔덕길을 남실남실 넘던 꿀장수 아짐니가 아련한 추억 속에 피어오른다.
라디오
저녁상 설거지를 끝낸 어스름 무렵. 가족들은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케이스의 제니스 라디오나 사각형 나무통 속에 진공관이 촘촘히 박힌 금성 라디오 앞에 둘러앉았다. 선반이나 경대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당시의 라디오는 지금 같은 누름단추가 아니라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섞인 방송조차도 잘 나오지 않아 팡팡 치고 이리저리 다이얼을 맞추느라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라디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친구'였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바로 연속극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 마후라>,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은 나중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이미자가 구성지고 정감 어린 목소리로 불렀던 '총각 선생님'은 같은 제목의 연속극 주제가였다. 연속극이 시작되면 온 식구가 성우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다.
TV가 드물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엔 라디오 연속극에서 희로애락을 연기하던 성우의 인기가 대단했다. 구민, 고은정, 오승룡, 장민호 씨 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고은정 씨는 영화에서 엄앵란 씨 목소리를 도맡았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진공관 라디오가 퇴조하고 광석 라디오가 나온 뒤에는 집집마다 몸통보다 더 큰 '빳데리'를 고무줄로 친친 감아 뒤에 매단 낡은 트랜지스터가 있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 라디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들로 산으로 들고 다니며 축구와 권투 같은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을 수도 있었다. 누나들은 김을 맬 때나 보리를 벨 때도 라디오를 들고 나가 이미자, 패티김, 김추자, 남진, 나훈아의 노래를 배우고 따라불렀다. 사춘기 아이들은 임국희,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 씨 같은 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심야 음악방송을 즐겨 들었다. 전축이 드물 때여서 듣고 싶은 노래를 관제엽서에 적어 신청하는 일은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통과의례였다. 남진, 나훈아, 이미자만 알고 지내던 청소년들은 심야 프로를 통해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알게 됐다.
60년대 중반 몇몇 집에서는 흑백 텔레비전을 들여놓거나 야외전축을 사들였다. 고등학생들은 삼촌이나 형님의 야외전축을 몰래 들고 나가 '울리 불리'나 '상하이 트위스트'에 맞춰 신나게 개다리춤을 췄다. 킹스컵 축구나 김기수의 권투,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에는 돈을 내고 만화방에 가거나 이웃집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텔레비전, 컴퓨터 등에 익숙한 영상 시대. 그러나 라디오에는 보여주는 것이 결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가 있었다. 귀와 가슴을 활짝 열고 들었던 라디오. 머리맡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던 그 '옛 친구'의 향기가 그립다.
꽃상여
뎅그렁 뎅그렁. 할아버지 종소리는 달랐다. 소리는 또 얼마나 창창했던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고 물리는 소리. 눈이 부리부리한 공포할아버지(상여의 맨 앞에서 묘지로 인도하는 상엿소리꾼을 전라도에서 부르는 말)의 목소리는 탁하면서도 깨끗했다. "명사십리 해당화야/꽃잎 진다 서러워 마라/너는 가도 명년 봄이면 다시 피건마는/우리 인생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구나." 뒤를 잇는 상두꾼(상여를 메는 사람)들의 합창. 에헤에, 에에헤, 어허야 디야 어야. 동구 밖을 벗어나 산기슭으로 접어들면 할아버지의 가락은 구성지다 못해 숨이 넘어간다. 망자를 보내는 일가친척의 곡소리는 행여 가는 길 놓칠세라 서럽게 서럽게 메아리친다. 그리고 공포할아버지는 천연덕스럽게 가는 이의 넋두리를 풀어놓는다.
어린것이 무엇을 알까 마는 곡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더러 까닭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이도 잠시. 생전 보지 못했던 꽃상여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나도 나중엔 저런 꽃가마 타봐야지. 귀신이 살고 있다는 마을 밖 상여집은 무서움의 대상이었지만 꽃으로 뒤덮인 상여는 휘황찬란했다. 귀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나중엔 꽃집에서 종이꽃을 만들었지만 60년대만 해도 솜씨 좋은 마을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만들었다. 색색의 종이를 몇 번 접었다 폈다 하면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 마지막 가는 길, 대부분 처음 하는 호사였다. 그래서 죽기 전 할머니의 소원도 꽃상여 타고 저승 나들이하는 것이었다. 시집올 때 꽃가마를 타지 못했던 할머니는 겹꽃을 촘촘하게 박아달라고 했다.
잘났던 못났건 이승에 대한 미련을 두고 떠나는 길. 하지만 아이들에겐 더없는 잔치였다.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가 모두 넉넉했다. 죽음이 뭔지 모를 때인데다 모두 바쁜 터라 간섭하는 어른도 없었고, 더욱이 뜻하기 않게 맞이하는 해방의 시간이었으니 기쁨 또한 두 배였다. 삶은 돼지고기 입에 쑤셔넣고 떡 한 조각 디밀고 김치 한 움큼 집어넣으면 그런 행복이 없었다. 품앗이 나간 엄마도 행여 사람들이 볼세라 야단치는 척하면서도 꽃무늬 과자를 허리춤에 찔러주었다.
원래 '상가집 잔치'는 그렇게 넉넉하게 음식을 차려 인근 10리 거지까지도 배불리 먹여야 하는 법이었다. 망자를 욕먹이지 않으려는 배려였는데 넉넉하게 챙긴 동네 사람들은 앞다투어 덕담을 늘어놓았다. 태어나서 한 번은 호강하는 '하늘 가는 길'.
하지만 산 자도 보살필 겨를 없는 요즘 죽음의 의식도 지극히 명료하고 간단한 행사가 되었다. 상여꾼 소리를 대신하는 녹음기, 돈 받고 일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장례 사업자들, 트럭 뒷칸에 실려 가는 묘지. 죽음은 정말 죽음처럼 삭막하기만 하다. 하긴 소리할 사람도, 상여를 멜 젊은이들도, 종이꽃 만들 아낙도 없으니 만장을 거느린 꽃상여는 다시 꿀 수 없는 한여름밤의 꿈일 수밖에 없겠다. 죽음마저도 잔치로 승화시켰던 우리네 꽃상여. 살아 생전 일면식 없어도 영혼을 부르는 구성진 가락 때문에 맑은 눈물을 흘렸던 그 시절은 영영 다시 오지 않으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