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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판윤공파)월남종중
 
 
 
카페 게시글
전주최씨 중앙화수회 스크랩 전주 최씨 최순작시조 평도공(판윤공)파 이야기
용천 추천 0 조회 151 13.03.19 21: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주최씨 판윤공파(判尹公派) 계보

전주최씨 30세 최재춘(광락)

 

- 최씨 기원 : 우리나라 성씨중 오래된 성씨중 하나로 신라시대 여섯촌장 중 하나인 돌산 고허촌 소벌도리공이 그 시조다 이후 본격적인 파가 분화된것은 고려시대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문종때다 최씨는 문헌에 의하면 약 300개의 본관이 있는걸로 전해지나 현재는 127개정도 있으며 그중에서도 40여개가 시조가 확실하게 밝혀진 상태다

전주 최씨는 현재 약 40만으로 286개 전통성씨 4,179개 전통 본관중 20위에 해당하는 숫자로 217만명의 최씨중 100만명의 경주 최씨에 이어 2번째다

 

 

- 전주최씨 : 크게 4개파로 나누어져 있다

. 문열공파(시조 최순작) =>적거리 시조

: 시조 최순작(崔純爵, 시호는 문열공)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최순작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 문성공파(시조 최아)

. 문충공파(시조 최군옥)

. 사도공파(시조 최균)

 

1세 문열공파(시조 최순작)는 8세에 이르러 다시 예의판서공파(사미)와 평도공파(유경)로 나뉘어 진다

다시 8세 평도공파(유경)는 9세에 이르러 판윤공파(사위) 양도공파(사의) 지평공파(사규) 경절공파(사강) 첨추공파(사용) 감무공파(사흥)으로 6개의 파로 나뉘어진다(전주최씨 문열공파는 예의판서공파를 포함하여 총7개파로 나뉘어짐)

: 최재의 아들 평도공 최유경은 고려말 조선초 전주 최씨를 중흥시킨 인물로 조선조의 전주 최씨 3정승 2대 제학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조선개국후 중추원사 판한성부사를 역임했으며 태종조에는 청백리에도 뽑혔다

평도공은 사위, 사의, 사규, 사강, 사용, 사흥 여섯 아들을 두었으며 최사위는 한성 판윤을 지냈고 최사의는 판돈녕 부사 최사규는 사헌부지평 최사강은 우찬성 최사용은 첨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최명길은 최사강의 후손이다

 

- 문열공파는 현재 전주, 김제, 익산, 곡성, 경기도 용인, 의정부 충북 청원, 진천 충남 천안에 집성촌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다

 

 

- 해제 자서리 오룡동 적거리로 온 시기

 

1세시조 최순작(문열공) -900년전 조상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짐고려정종-숙종때까지활동(1016-1100년정도)2세 최숭(이부상서) , 최공(개성소윤)|3세 최남부(공부상서,수문전태학,대장군)|4세 최전(비소소윤)|5세 최정신(병부사랑)|6세 최득평(선부상서)|7세 최재(감찰대부,시중완산군 문정공)|최재의 아들 3형제8세 첫째 - 최사미 (예의판서공파 중시조)8세 둘째 - 최덕성 (삼사좌윤)8세 세째 - 최유경 (평도공파 중시조) - 588년전조상- 휘는 유경, 자는 경지, 호는 죽정- 전주최씨 최순작계통 7세(최재)의 세째아들로 태어남- 세번 장가 가셨다.(여복이 많으신 조상님입니다.)- 활동시기: (1342~1413, 고려말 충혜왕 3년 ~조선 태종13년)- 1360년 - 장령벼슬- 태?이성계가 등극하기전 고려를 섬김에 충성심을 가상히 여김- 조선개국공신- 조선태조(이성계)때 -영촉도 감사 제수, 청백리라 칭함- 대사헌, 정헌대부,의정부 좌참찬 벼슬함- 1413년(조선 태종13년) - 별세- 조선세종대왕때 " 평도공 "시호 받음최유경(평도공파 중시조) 의 아들 6형제9세 첫째 - 최사위, 판윤공파 ,파시조-562년전 조상- 파시조: 최사위,전주최씨9세 문열계(시조-최순작)- 최유경(평도공파 중시조,전주최씨8세)의 첫째아들- 모친은 지밀직사 김달상의 딸(일선김씨) 소생- 활동시기: (1362~1439, 고려말 공민왕 10년~조선 세종20년)- 1411년(태종11년)-- 우군동지총제- 개성부사,풍해도(황해도)관찰사- 1424년(세종6년)-- 자헌대부, 한성판윤- 1439년(세종20년)-- 별세- 묘좌 --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완압리 산78번지 자봉산 * 한성판윤--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조선때 한성부의 우두머리로 정2품의 관직9세 둘째 - 최사의, 양도공파 파시조9세 세째 - 최사규, 지평공파 파시조9세 네째 - 최사강, 경절공파 파시조9세 다섯째-최사용, 첨추공파 파시조9세 여섯째-최사흥, 감무공파 파시조최사위(판윤공,파시조) 의 아들 4형제10세- 1)처사조파(소시조-최조):벼슬하지않음,전주최씨10세-장손2)학생계파(소시조-최계):사직,전주최씨10세,단종복위때 귀양감3)예판원파(소시조-최원):예조판사,전주최씨10세,단종복위 귀양4)학생?파 (소시조- 최?):전주최씨10세, 단종복위때 귀양장손들11,12세묘역- 경기도 용인13,14세묘역-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공사로 적거리로 이장 15세 최덕봉 기묘생 1579년생 묘역 -전주 송강동에서적거리로 묘이장16세 최대인 경자생 1600-1635 묘역-전주 송강동에서 적거리로 묘이장 *1세 최순작부터 16세최대인 까지 장손들이 1016년부터- 1636년까지 약 620여년을 서울,전주,철원, 청원등 지금의 수도권 중심으로 거주 한성판윤공파 장손 17세손 최치현 지금부터 364년전인 1637년3월30 전남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에 최초 들어옴(무오년 1618.3.3-갑진년 1664.4.10 -47세)1636년 12월12일 한성의 조선 조정은 긴장감이 감돈다그동안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고 괴롭히던 청나라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 급기야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황금과 백금만냥 전마 3천필을 요구할뿐아니라 정병 3만명지원을 요구하더니 조선이 이를 묵살하자1636년12월1일 청태종은 압록강이 얼어붙자 1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한성을 향해 처들어왔다 ,병자호란인것이다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가 중앙조정에 바로 1636년12월12일 도달한것이였다인조는 조정대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숙의하였으나 청군이 이렇게 빨리 한성을 향해 밀고 내려올지는 예상하지 못해 조선조정으로써는 특별한 대비책이 나오지 못해 조정은 극도로 혼한에 휩싸였고 드디어 인조는 1636년12월14일 세자와 백관을 대동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였다도성내의 주민들도 추운겨을임에도 불구 이미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15세손 호조참의 최덕린 은 청군이 도성을향해 밀고 내려온다는소식을 듣은후 그날밤부터 퇴청치 못하고 한숨도 자지못한가운데 조정대신들과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으며한편으로는 장남집안으로써 전주에 살고 있는 장손인 사촌형 15세손 최덕봉에게 이러한 전란 소식을 전해 600여년 내려온 조상들이 위패를보호해야 겠다는 생각 또한 간절했다최덕린 자신또한 한성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만 조상에게 늘 죄지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것이였다자신은 장손집안의 사촌 동생이지만 그동안 정부인 양천허씨로부터 후사가 없자 둘째부인 하동정씨를 맞이하면서까지 후사를 기대하였으나 그마져 끝내 후사를 얻지못하자 지난해 친척인 16세손 최숙(8살)을 양자로 입적하여 대를이어가고 있는 형편이라어떻게 하던지 전주에 있는 사촌형 최덕봉의 장손가족이 무엇보다 먼저 걱정이 되고 있는것이다최덕린은 자신의 두부인과 양아들 최숙을 가솔들과함께 직산으로 피난가도록 내려보내고 전주 최덕봉 형에게도 사람을보내 금번 전란의 심각성을 알리고 가능하면 장손이 안전하도록 멀리 남쪽으로 피난가도록 조치를 하였던것이다전주에 살고있는 한성판윤공파 장손 15세손 최덕봉은 지난해인 1935년 독자인 16세손 아들 최대인을 병으로 잃고 며느리 김씨손자인 17세손 최치현 (18살)손자며느리 박씨증손자 18세손 최영귀 (3살)증손자 18세손 최영후(1살) 와 함게 어린 손자 증손자들을 거두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그러던차에 한성에서 벼슬을 하며 가끔씩 돌봐주던 최덕린 사촌동생이 사람을 보내왔으니 반가웁게는 맞이하였으나전해온 소식은 금번 전란의 심각함과 하루빨리 피난길에 오르라는 장손을 걱정하는 소식이였다전란소식을 전해듣은 최덕봉은 전란의 심각성을 이해하면서도 한성이남으로 청군이 내려올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것으로 보고또한 추운겨을철에 어린 증손자들을 피난길로 보낼수없어 당분간 한성의 사태를 지켜보기로 하고 있는가운데해가 바뀌고 1937년 1월30일 그동난 남한산성에서 버티었던 인조가 세자와함께 청태종에게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무릎을 끊고 신하의예를하고 조선이 청나라의 복속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청나라 군사들이 닥치는데로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잡아가고 (철군하면서 조선의 부녀자 50만명 데려감) 도성뿐만아니라 한성이남 각 성에도 청군이 파견하여 온다는 급박한 소식을 전해들은 한성판윤공파 지혜로운 장손인 15세손 최덕봉 조상님은1637년 2월10일 날씨가 조금풀리자 자신(당시 58세)과 작년에 병으로 사망한 16세손 최대인의 처인며느리 김씨만 전주에 남아 집안을 지키기로 하고손자인 17세손 최치현 (당시 19살)선자며느리 박씨18세증손 장손인 최영귀(4살)18세증손 차남인 최영후(2살) 등 4명을간단한 짐과 노자를 챙겨 피난길에 오르게 하면서 가능한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청군이 완전히 철군할때까지 숨어 살아 남도록 당부를 하였다피난길에 오른 17세손 최치현은 처와 어린 두아들을 데리고 전주에서 나주무안 해제반도를 거쳐 양월리 나루를건너 두달여만인1937년3월30일 드디어 당시로는전혀 외부위험이 접근하기힘든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에 도착 지방민들에게 한성의 전란소식과 청군의 횡포를 전하고 도움을 요청 지방민들의 따뜻한 호의속에 의식주를해결하면서 당분간 거주하는심정으로 거주하게되었다전쟁이 끝나면 고향인 전주에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생각은 인심좋고 살기좋은 평화로운 적거리에서 두아들들이 아무탈없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정이들었고 2년이 지난 1639년 전주에 계신 15세손 최덕봉 할아버지마져 돌아가심으로 이곳 적거리에 아예눌러앉아 살기로 마음먹고 정착하게 된 것이다이렇듯시조인 1세 최순작부터 16세 최대인 까지 1016년-1636년 까지 한성판윤공파 장손 집안은 약 620여년간을 고려,조선 도성인 철원 한성 과 전주 천원 등 지금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거주하였고1636년 병자호란을 시점으로 17세손 최치현이 적거리에 들어온1637년3월30일부터 현재2001년까지 약 364년간을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오룡, 자서리, 해제등지에 번창하여 많은후손들이 살고 있으며최치현의 손자인 19세 최응홍 장손이 오룡동으로 분가 지금까지 오룡동에서 장손집안이 이어지고 있는것이다17세 최치현은 1637년 3월30일부터 적거리에 정착 두아들 18세손 최영귀(1634년생)와 최영후(1636년생) 그리고 부인 박씨와 함게 열심히 생활하여 가세를일으켜18세손 장손 최영귀 가 18살때인 1652년 처인 양성이씨와 혼례를 치루고 세아들을 두었으며장손(19세최응홍1653-1689)-오룡동 종암,기호,광선집안둘째(19세 최창홍1655생) - 오룡동 영주,완규,병남집안셋째(19세최응발1657생)-오룡동현섭,용섭,종두,적거리집안18세손 차남인 최영후(1636년생) 도 1658년 22살 때 인동정씨와 결혼 1659년 두아들을 두었는데첫째(19세손 최시흥 1659년생) -오룡동 명욱,재 락 ,기수,자서리 둘째(19세손 최직홍 1662년생) - 해제쪽 적거리로들어온지 40여년이 지나자 손들이 성장 각자 오룡동,자서리 해제등으로 분가하여 오늘의 한성판윤공파 자손들로 번창하게된것이다한성판윤공파 장손 19세 최응홍이 적거리에서 오룡동으로 지금부터 323년전인 1678년 3월 30일 처 제주고씨와 함께 최초 분가19세 최응홍 (최응승) (1653년계사생- 1689년) 이할아버지 17세 최치현, 아버지 18세 최영귀 와 함께 적거리서 거주 25살때까지 함께거주하다가 25살때인 1678년 (지금부터 323년전) 효지거주하는 고효직의 딸 제주 고씨와 혼례를 치루고 처가집 옆 골짜기인 지금의 오룡동 감나무골 로 분가하여 다섯 마리 용의형상을 하고 있는 지세를살펴 오룡이라 마을이름을 짓고 마을앞 우물가에 정착기념으로 전나무 한그루를 심으니 이때가 바로 오룡마을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그이듬해인 1679년 독자인 20세 최무조 (기미생 1679년)를 오룡동에서 출산 최무조가 10살때인 1689년 36세 나이로 사망함묘역 -선황산 태천넘어가는길 고개넘어 왼편위치

 

* 적거리 분파

 

17세 최치현 (적거리 중산)

18세 최영귀(적거리 중산) 영후(적거리 중산)

19세 최응홍(오룡동 선황산) 최창홍(오룡동) 최응발(적거리 중산) 최시홍(자서리) 직홍(해제)

20세 최승조(선황산)

21세 최종후(해제)

22세 최효도 최효솔

23세 최인여(적거리 동백) 최의여(적거리 수박) 예여(태천 차본) 지여(적거 안산)

24세 최한남(적거 수박) 최한익(해제 봉대산) 최상원/한진 상해

25세 최성철(적거 수박) 최근철(적거 수박)

26세 최문식(적거 동백) 최윤식(적거 수박)

27세 최병우(적거 동백) 최병렬(적거 수박) 병연

28세 최형규 최원규(적거 수박)한규/

민규/덕규 용규 최춘원/석연/기호 최판길

29세 최종필 최종일/태화/승 최종갑/담연/정섭 최혁진/최영

30세 최재우 최무송 최영준

31세 최동희 최용수/성윤

 

17세 최치현 장손이 적거리에 터를 잡은후 두아들과 함께 기반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때 18세 장손 최영귀에게는 19세 최응홍 최창홍 최응발 세 아들을 두었으며 첫째와 둘째는 오룡동 집안에 가정을 이룬 반면 셋째 최응발은 20세 최승조를 낳았고 다시 21세 최종후를 낳았다 22세에서는 최효도와 최효술 두 아들을 낳았으며 둘째인 최효술은 23세손인 최인여 최의여 최예여 최지여 네 아들을 낳으니 이 네분이 바로 적거리 대부분에 가정을 이루고 있다

 

23세손 첫째 최인여는 29세 최종필까지 독자를 두었으나 29세손으로 대가 중단 되었으며

 

둘째 최의여는 독자로 내려오다 28세에 이르러 손이 번성하여 오늘에 29세손 최종일 최태화 최승 최종택 최재환 최재원 최재윤 최흥식 최일성 최영철 30세손 최재우 최재만 최재춘 최이석 최지환 최승선 최인성 최광현 최낙훈 31세손 최동희 최동혁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최예여는 가장 많은 자손을 두어 후손이 적거리에서 가장 많이 퍼져 있으며 대부분이 해당된다 28세손으로는 최기호 최석연 최춘원 29세손으로는 최종필 최담연 최정섭 최종갑 최복순 최종선 최영학 30세손으로는 최무송 최윤곤 최경일 최용만 최용재 최생진 31세손으로는 최용수 최성윤 최재윤 등이 있다

 

넷째 최지여에는 28세손 최판길 29세손 최영 최종태 최혁진 30세손 최원영 최영준등이 있다

 

 

전주최씨 한성판윤공파 장손묘역 위치묘역 :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완압리 산 78번지(1979년 3월 서울대공원건설로 과천선영에서 이장)9세 최사위 (한성판윤공) - 파시조10세 최 조 ( 처사조파) - 소시조11세 , 12세 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적거리 산 248번지 등13세,14세 과천에서 1979년 적거리로 이장15세 최덕봉, 16세 최대인 전주 송강동에서 적거리로 이장 17세 최치현,18세 최영귀 적거리에서 사망 적거리 중산촌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동 앞 선황산 19세 최응홍,20세 최무조 선황산 고개넘어 왼쪽 선영21세 최종빈 선황산 상봉22세효보,23세영여,24세창인,25세승봉,26세달관-선황산선영(오룡동 종암,석오,종신 집안관리)묘역: 전남 신안군 지도읍 자동리 오룡부락 입구27세 최봉오 (최병채) -작은저수지위(22세 최효문묘역)(29세 장손 최상필의 6촌동생 최종암이 관리) 묘역 : 전북 군산시28세손 최인학 ,29세손 최상필 (1994년12월 사망)* 30세손 최철민(정미생1967년생)-군산시 조촌동 거주

 

 

崔純爵(문열공)系 항렬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진(鎭)

철(澈)

식(植)

병(炳)

규(奎)

종(鍾)

락(洛)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동(東)

섭(燮)

원(遠)

호(鎬)

승(承)

근(根)

용(容)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교(敎)

선(善)

수(洙)

상(相)

양(陽)

용(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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