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4년 3월 31일 오후 5시 장소: 홍대 앞 ‘회이재’ 그리고 인근 소주집 말꾼: 마영화와 전진삼
동교동 서교호텔 뒤편에 위치한 열림원 사옥 4층. 계단에 공포가 있는 나는 힌산 편집장과 함께 곧장 4층까지 올라갔다. 맨 꼭대기층, 나무바닥의 브릿지를 지나 천정이 비스듬한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이 기거하기에는 다소 좁은 듯한 공간이지만 하얀색으로 칠해진 내부공간과 전망 좋은 외부공간이 인상적이었다. 벽면을 향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길령 공주(사무실에서 유일한 홍일점인 김길령 씨)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두 건축가이다. 김재관 님과 함성호 님.
하얀 면 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김재관 님(이하 ‘김’으로 표기)은 제주도의 민박집을, 카키 색 브이 네크라인 티에 올리브그린 색의 면바지를 입은 함성호 님(이하 ‘함’으로 표기)은 헤이리촌의 가정집을 진행 중이었다. 두 사람의 머리에는 벌써 희끗희끗한 세치가 하나 둘 자라고 있었다. 맥주 다섯 병에 소금에 버무려진 멸치와 땅콩이 담긴 캔 하나를 놓고 얘기는 시작되었다.
국회의원 총선을 3주 정도 앞둔 시점이어서 뭉뚱그려진 정치 이야기와 각자가 지지하는 당에 대해 짧은 얘기가 오갔다. “열린우리당은 확실히 될 것 같아서 민노당을 지지하겠다”고 밝힌 함과 집주인답게 마당의 나무와 화분에 대해 자상한 설명을 덧붙였던 김은 함의 말에 대해 “그건 맞는 말이다”라고 응수했다.
“내 건축이 어떤 계층에게 봉사하고 있느냐 하는 철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건축가한테 가장 필요한 사회적 윤리를 들자면?
“그것은 예술가라면 응당 가져야 할 정치적 도덕적 사회적 윤리이겠죠. 건축은 다른 예술보다 특히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치가들도 어떤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건축 역시 내 건축이 어떤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느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자기 일과 연관지어서 내 건축이 어떤 계층에게 봉사하고 있느냐 하는 철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아주 펑키하게 작업하든지. 그것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든지 말이다. 그것을 작업과 연관짓자면 건축주를 선택할 수 없으니까 건축주를 내 입장에서 속여야지. 좋은 말로 하자면 설득이죠.”(함)
“이런 것 나와도 되나 모르겠다 !!” 둘: 건축주를 대하는 태도
“난 정치에 대한 원래 어의(語義)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곳은 없죠. 늘 생각하는 문제 같은데… 나는 건축주와 어긋나는 것 보니까 정치를 잘 못하나 봐요.”(일동 웃음) 연이어 “이런 것 나와도 되나 모르겠다”(김)를 시작으로 최근에 건축주와 자신 사이의 모종의 갈등을 풀어놓았다. 덕분에 첫 번째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건축주를 대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이 사람(제주도 민박집의 건축주)과 만난 지 1년 2개월 됐는데, 만남이 시작되다가 친해졌어요. 현재까지는 건축주가 나한테 호감을 많이 갖는 편이기도 해. 근데 이 사람이 요즘 멈칫 멈칫 해요. 어느 날은 건축주였다가 어느 날은 반쯤 동생인 것 같다가…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까 ‘자기 집이 늦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저께 건축주가 왔어요. 내가 준비한 것이 별로 없었어. 건축주가 아침에 오자마자 난 술을 먹이기 시작했어. 계속 떠들고. 술집으로 목욕탕으로 데리고 다녔지. 하루 종일 술을 먹여서 건축주가 한 마디도 말을 못하게 만들었어. 그런데 건축얘기를 안 할 수는 없잖아. 헤어지면서 차에서 도면 한 장을 보여주면서 내가 설명을 했어. 그랬더니 건축주의 하루 종일 좋았던 표정이 싹 사라지더라구... 헤어지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불쑥 전화가 왔는데 그의 목소리가 딱 건축주 목소리였어. 개인으로서의 자기와 건축주로서의 자기. 아마 건축주는 자신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이 문제를 대립적 구도로 갈까 말까 고민 중이야. 나의 관성 같은 것도 있고.... 근데 이 관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애.”라고 김은 말했다.
그의 얘기 속에서 최근 고민은 오로지 이 집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일단 손대기로 작정하면 열혈남아(?)가 되어 버리는 그의 고민은 죽 이어졌다.
“이상하게 이 집은 나에게 실감이 오지 않아. 그래서 초조하지. 예측하는 공간과 형식은 나에게 있지만 실감이 없어요. 아주 드문 경험이다. 그것이 새로운 국면인지 아님 이상한 상황인지......”라고 김은 말끝을 흐렸다.
“의외로 쓰는 용어가 정치적이다.”라는 힌산 편집장의 훈수를 들은 김과 달리 함은 건축주를 어떻게 대할까?
“저는 건축주한테 빤스를 다 벗어요. 설설 기어요.”
“저는 건축주한테 빤스를 다 벗어요. 설설 기어요.” 날카로운 사회적 인식을 드러내는 그의 시(詩)작품과 너무 다르다는 말에 함은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혼자 하는 시 작업과 달리 건축은 건축주와 같이 하는 것이죠. 시와 건축은 관련 없어요. 일부러라도 떼어 놓으려고 애쓰죠. 건축이 시가 되면 안 될 거 같아요. 가령 시는 땅이 마음에 안 들면 땅을 만들어 버리면 되는데 건축은 그렇지 않거든요. 건축은 현실적인 조건들이 너무 많다. 물론 시도 언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것은 표현의 한계일 뿐이다. 건축을 하는 나에게 있어서 땅과 건축주가 어떤 사람인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예술이다 라고 생각했어도 그것을 건축주가 시큰둥해하면 그 작품이 진정으로 싫어져요. 건축주가 행복해야지 나도 행복하지. 철저한 서비스 정신. 고객만족 우선.”(함)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이들처럼 스텝이나 어떤 시스템 없이 혼자서 작업 하는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지 않을까. 계약관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 역시 ‘관계’이기에 이 두 사람이 건축주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건축가는 예술생산자가 아니라 예술의 조건이다.” 셋.... 건축에 어떤 새로움을 던지고 싶은가?
“난 건축예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놓은 것 같다.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건축예술은 다른 일반 예술과 엄청 다르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한다는 생각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그것이 다른 점이 아닐까. 작품을 한다는 것, 곧 예술은 예술가의 의지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그것을 대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은 그렇지 못하다. 건축은 다른 예술인 것이다.”(함)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요청에 그가 답하길 “건축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조건이 제약하는 게 아니라 옵티멀한 해결책들이 이미 있는 것 같다. 건축은 그것을 찾는 것이다. 거기에는 땅의 조건 인간의 조건도 있겠지만 그곳에 건축을 하는 건축예술가의 조건도 조건이다.
건축가가 무엇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조차도 예술조건으로 편입된다는 점이 다른 예술가와 다른 점이다. 건축가는 예술생산자가 아니라 예술의 조건이다. 생산자인 예술가가 예술품을 생산하는데 건축가는 그렇지 않다. 조건 중의 하나이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건축가는 예술생산자가 아니라 예술의 조건인 것이다.”(함)
문제가 발생했다. ‘건축에 어떤 새로움을 던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다시 김에게 던졌다. 그랬더니 김은 대답 대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난 집중이 안돼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질문을 받으면 다른 얘기가 나와요. 함성호와 난 생각이 무진장 달라요. 1년 정도 함소장과 거의 같이 살았죠. 함소장이 갖는 건축주에 대한 생각, 건축의 사회적 윤리 그리고 ‘빤스를 벗는다’는 생각 등이 나를 놀라게 해요. 그 사람의 시야에 대해서 놀라고 그로 인해 건드려진 나에 대해 놀란다. 때론 함소장이 비난하는 작가 곧 빤스 안 벗는 건축가에 나도 해당된다. 그리고 함소장에 대해 동의 하든 안 하든 일부분 새롭게 생각을 시작해야겠다고 하는 부분도 있다.”(김)
“생각은 시작이 필요하다. 생각의 기본 골격은 이미 나한테 있기도 했다. 어떤 새로운 시점에 내가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과정에 함소장이 있다. 동일한 박자로 나갈 수 없다. 리듬이 체질적으로 틀리다.” 라고 불편함을 드러내던 김.
대화 말미에 다시 “건축계에 새로움을 던질 수 없을까요! 김소장님”이라고 질문을 강요(?)했다.
“나는 시작이 너무 기성화된 상태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함성호의 경우 생각과 언어의 문제 등이 있겠지만, 내 경우는 생각이 구축되기 이전에 건축가들이 먼저 와 있었다. 함성호와 달리 난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건축가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것이 너무 강력했다. 곽재환과 이일훈. 그 두 사람은 강력한 에너지였다. 오랫동안 그랬다. 초반기에 내 마음을 장악하다보니 너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나에게 건축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틀림없다.”(김)
“한국사회는 만만해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가 있다.” 넷 .... “시인이자 건축비평가이자 건축가인 다재다능한 그런 능력이 어디서 나오죠”라는 질문에 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사회가 만만해서 그렇다. 한국사회는 만만해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가 있다.(답변이 너무 방자하다,고 훈수를 두는 김) 좀 열심히 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맞는 말이야,라고 응수하는 김) 제가 여러 군데 찔러 봤잖아요. 한국사회는 너무 느슨해요. 그래서 나는 한국사회에만 눈길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건축은 항상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내 건축이다. 물론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이지만. 작품은 세계 건축작품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작업한다."(함)
“난 인터뷰형 인간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밝힌 김은 자신의 작품을 어떤 태도로 대할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산책’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니면 대화 도중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야릇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에 칼을 대기 위해서 스스로의 육체를 가두었다.” 다섯... 강정교회 설계할 때 1년 3개월 동안 제주도행 비행기를 무려 73회 탄 것으로 안다.
“사실 그 때 작정한 것이 있었다. 인간만큼 자신을 잘 변명하는 존재도 없다. 나 역시 그랬다. 나를 진단하는 입장에서, 내가 그동안 변명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들, 즉 습관적인 고리를 끊고 싶었다. 그 작품은 맥 건축에서 독립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내 사고방식의 범주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넘어가는 방식이 다 다르지 않은가. 당시 나는 나의 육체를 건축행위에 묶어두기로 결심했다. 나를 한 번만 강정교회에 묶어두자고 작정을 하고 덤볐다. 한 번 가면 보름씩 혹은 한 달씩 그곳에 머물렀다. 난 그냥 현장에 서 있었다. 딴 생각하고 말이다. 그땐 저기가 각이 안 나왔다 라든지 샤시 등의 건축 세부적인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땐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다. 단지 본질이 무엇이냐?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 내 생각이 어디로 흐를 것이냐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으로써 난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의식에 칼을 대기 위해서 스스로의 육체를 가두었던 것이기도 했다.”(김)
이쯤 되면 그에게 건축은 이미 건축을 넘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넌 너무 거칠어서 건축 못 한다”라는 말도 들었다는 즉흥적이고 다혈질인 그가 지었던 강정교회는 김재관을 낯선 제주땅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열혈남아인 그가 요즘엔 도통 건축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죽는(?) 소리를 한다. 그의 말은 이랬다.
“건축적 행위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젠 건축적 ‘행위’를 통해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가령 그동안 혐의를 두고 밀쳐 낸 것들, 혹은 열등감을 품었던 것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직면해 볼 작정이다. 사실 이전에는 일 밖에 몰랐다. 그런데 이러다가 나도 선배 건축가들의 행로를 밟아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지치기도 했다. 하여튼 지금 나는 새로운 시점에 서 있다. 이전과는 달리 나의 생각들이 언어로 튕겨 나온다. 돈은 없고 힘들기도 하지만 올바로 나를 진단할 수 있는 낯선 경험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김)
“80년대 감옥 안 간 장르는 건축이 유일하다.” 여섯....“ 건축은 건축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
“비평하면서 건축은 예술이지만 사회학에 보다 더 가깝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대의 필요성도 절감했다. 문제는 80년대 감옥 안 간 장르는 건축이 유일하다고 말한 것에 닿아 있는 것인데, 모든 예술가는 정치적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건축가들은 분명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다. 상당히 부족하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다. 어린아이 수준의 건축가들, 내가 이렇게 얘기해도 되나? 건축가들에게 얘기하면 잘 알아들어요. 그런데 철저하게 그것을 인식한 후 반작용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건축가들은 그렇지를 못한다.”(함)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라고 질문을 던졌다.
“원인을 들자면 건축과가 공학 소속인 데가 많고, 건축가들이 읽는 책은 인문학 베스트셀러이지만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에 있지 않을까.”(함)
“함성호와 난 본질적으로 극명하게 다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난 그를 랍비처럼 여긴다.”라고 말했던 김의 생각은 이랬다.
“어떤 움직임에 대해 날카롭게 포착하는 나는 직관에 상당부분 의존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짝 디테일이나 현장 사람들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별 의미 없다. 즉 행위가 행위로 그쳐서만은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방임했던 것들을 ‘자식’처럼 만나고 싶어진다. 이전에는 건축학과 인문학적 소양의 결합을 미더워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상당부분 당치도 않았거니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과 그저 언어적 사변에 그치고 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난 거부감을 느꼈고 난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젠 ‘작업이 작업으로만 끝나 버리는 것 아닌가?’하는 회의가 밀려든다. 일 자체를 떠나 일에 반응하는 ‘나’를 주시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5, 6년 하고 나니까 점차 인문학적 필요성이 열등감처럼 나를 옥죄고 있다. 난 이젠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김)
“한국 건축계에는 언어가 없다. 옹아리 수준도 안 된다.” 일곱...한국건축판과 본인의 작업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세요.
“승효상 선생의 얘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브랜드로 받아들여 그것에 편승하면 뭔가 되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 건축계의 층위가 그만큼 얕다는 것이다. 좋은 건축가들이 없다는 얘기이다. ‘빈자의 미학’만 해도 말이 안 된다. 그것이 어떻게 철학이 되고 개념이 되는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을 한국 건축계가 만든 것이다.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허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들의 연대? 안 된다. 건축가들은 언어가 없다. 단정적으로 얘기하자면 한국 건축계에는 언어가 없다. 옹아리 수준도 안 된다.”(함)
질문....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되는데...... 나는 한국 건축계를 인정 안 한다. 인정 안한 상태에서 혼자 갈 수가 없다. 이것이 나의 딜레마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에서 가도 무리인데 말이다. 그러니 혼자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 섣불리 발언을 자제하고, 작품 발표도 자제하는 이유가 다 그런 것 때문이다. 브랜드가 아니라 내가 흡인력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기 전까지는 칼을 뺄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승효상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은 승효상 하나로 충분하다.
내가 건축비평을 한 것은 포석이 있었다. 딴일 하다보니 설계를 늦게 시작했다. 늦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평을 하면 더 빨리 배울 수 있겠다 싶어서 비평을 선택한 것이었다. 집 한 채씩 지을 때마다 고민한 흔적을 건축이론화하고 또 그것을 내 작업에 내재하게 하고 싶다. 그냥 예쁘게 짓는 것은 쉬운 것 같다. 그런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을 끌어내려고 하니까 어려워지는 것 같다. 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먼저 이론부터 세워 놓고 작업에 임했다. 거기에는 글도 꽤 있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아니더라. 건축주와 부딪치면서 계속 이론을 수정해 나가고 있다.”(함)
“본능에 몰입할 때, 나를 움직이는 그 ‘무엇’을 신뢰한다.”
“도움 되는 책은 그냥 막 읽어나가는 함소장과 달리 나는 내가 재미있는 책만 읽는 편이다. 편식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 속 ‘현재문제’를 충분히 토로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인지 본능에 몰입할 때, 나를 움직이는 그 ‘무엇’을 신뢰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과. ‘공부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공부가 재미있다.” 라고 말하는 김에게 하루 일과를 물어 보았다.
“사람들이 놀라는 부분인데 나는 새벽에 일어난다. 일찍 자고 졸음이 오면 잔다. 전날 술을 먹었어도 여섯 시 십 오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베란다에 1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일찍 사무실로 오는 편이다. 아무리 늦게 오더라도 여덟 시 정도면 도착한다. 전에는 설계를 열심히 했다. 지금은 열심을 사모한다(일동 웃음). 요즘은 ‘열심’의 형식을 취하고서 하루를 보낸다. 그것이 날 덜 황량하게 만드는, 최소한 양심 같은 행위인 것이다.”(김)
‘열심’을 사모하는 김과 달리 “일은 네 댓 시간 쯤 하고 사무실에 열두시나 한시 쯤 온다”는 함은 “그렇게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라는 김의 부럼과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함소장은 건축계의 김기덕? ! 여덟.... 시(詩)에서 보여주었던 ‘건축사회학’ 같은 노력을 건축에선 어떻게 펼칠 것인가?
“건축이란 장르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예술 일반이 아니라 전공 분야로 인식되었다.”고 말했던 그에게 시에서 보여주었던 ‘건축사회학’ 같은 노력을 건축에선 어떻게 펼칠 것인가를 물어 보았다.
“그런 생각은 간절히 있다. 빤스를 벗는 것 자체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나는 건축주를 이해하려고 한다. 건축주를 통해 데이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항상 고민한다. 그래서 일을 좀 더 많이 해야겠다고 늘상 생각한다. 김기덕이 16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가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김의 경우 벌써 교회를 여덟 개 하지 않았나. 또래치곤 일 많이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가 백날 얘기해봐야 무엇하나. 작품을 많이 해 봐야지. 그렇지 않은가?”(함)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 최초로 나를 흥미롭게 한 것이 건축이었을 뿐이다.” 아홉.... 또래 건축가들에 비해 많은 작품을 설계한(전적으로 함의 기준에 빗대어 볼 경우) 건축가인 김에게 “설계하면서 작품 세계의 전환점을 맞이한 계기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나는 건축가로 인식 받는 것이 몹시 부담스럽다. 난 그런 경험도 사실 별로 없다. 현실 같은 것에 대한 관심만 많고. 어떻게 하면 일을 많이 할까? 라는 생각들만 가득하다. 나의 확인들이 있다. 건축가들은 보통 자기 공간에 대한 욕심들이 많다. 실은 나는 그렇지는 않다. 제주도 있을 때 한 교회(강정교회) 하면서 1년 3개월 정도 있었다. 잡지에 비행기를 73번 탔다고 나왔다.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개 열심히 하는 건축가라고 얘기하는데 난 그런 식으로 평가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그 때 건축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니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그것이 건축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그런데 그것은 건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무엇 곧 나의 열정을 풀어낼 수 있었던 장소 같은 것이었다. 풀어 놓듯이 하는 것 말이다. 내가 신났던 것들은 건축물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의 경험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열정의 대상은 건축이 아니더라구.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 최초로 나를 흥미롭게 한 것이 건축이었을 뿐. 아마 그 대상이 다른 데 있으면 다른 것을 할 것이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가지 군인 혹은 사냥꾼이 되고 싶었다.”라고 김은 말했다.
영화 ‘그녀에게’의 오프닝에 흘렀던 피나 바우쉬의 쇼 ″카페 뮬러″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던 그는 ‘말’의 소통력 못지않게 ‘몸’이라는 또 다른 언어의 전달력을 중시했다. 아마 그는 그 날에 오갔던 말들이 소통되지 못해 안타까웠던 것 같았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반응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그, 무진장 자기를 표현하고 좌중을 장악해야 하는 그에게 우리는 좋은 먹이감이 되지 못했던 것일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건축가 몇 명 만들 수 있겠구나!” 열....대학에서 설계강의를 하고 있는 김에게 “우리 후배세대들은 잘 하고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심정적으론 왜 나만큼 열심히 하지 않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보니까 마찬가지더라. 단지 그들이 생각하는 ‘열심히’의 방식이 나와 동일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더라. 스튜디오에는 9명이 있다. 9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에너지로 올까에 집중한다. 내가 갖고 있는 사고, 그리고 사물에 대해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나인데 설계 수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허용되는 차이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 덕분에 사람에 대해 갖는 시각이 변모한 점도 있다.
나는 잘 할 생각은 없다. 크리틱 할 때, 엘리베이터 사이즈나 복도의 폭 같은 것들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학생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건드리고자 한다. 때론 크리틱 할 때, 책상 위로 올라가거나 미친 듯이 떠들어 댄다. 신명나서 말이다. 학생들과 교감할 때 행복을 느낀다. 요즘은 ‘내가 여기서 건축가 몇 명 만들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주에 못 갔더니 학생들이 보고 싶더라. 이제 그들과 연애얘기 등 사소한 일상얘기마저 서슴없이 건넨다.”(김)
“이전에 특강을 한 적이 있지만 커리큘럼이 바뀌지 않으면 난 별로 강의하고 싶지 않다. 마음 같아선 첫 시집에서 ‘건축사회학’ 연작을 쓴 것처럼 건축사회학과를 만들고 싶다. 건축가가 대사회적인 발언을 하려면 예술가적 욕망만으론 안 된다. 철저한 사회인식과 정치적 구도를 보는 눈, 미래를 보는 대안 이런 게 있어야 가능하다.”(함)
열 하나 ....한 지붕 아래 달라도 한참 다른 두 남자, 그들은 어떻게 만났나? (이 부분은 녹음이 잘 되지 않아 옮겨 적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힌산 편집장의 견해를 빌려 적고자 했다. 자기 작업실 공간 없이 떠돌던 함이 어느 날 김의 다섯 평도 안 되는 작업공간을 찾아와 대뜸 공간 쓸 욕심을 내었고, 사람 욕심 많은 김이 그걸 받아들여 한 지붕 아래 모이게 되었는데 계산은 계산, 철저하게 매달 함이 임대료의 일부를 내는 조건으로 했다고 한다. 피차에 돈내고 받는 사이이니까 성징이 한참 다르다고 문제 될 것이 없다. 글구 아예 다른 것이 조금 비슷한 것보다 서로 간 흡인력이 강하다는 자석의 법칙을 말해주었다.)
“나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런 욕망이 있다.” 열 둘.... 2004년, 그들은 어디에 서 있는가?
|
|
|
|
함성호作, 장유당 |
|
|
|
|
“문학과 건축을 넘나들다 보니까 다른 시각을 지니게 되었다. 문학판 사람들이 보지 못한 시각이 생기고, 마찬가지로 건축판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시각이 생겼다. 가령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 그들은 다른 현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맥락적 이론, 그 맥락적 이론이 만들어지는 그 세계 안에서만 사고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 실제 하는 것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반대로 자연과학 하는 이들은 상황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정작 모른다. 내가 건축비평에서 해 왔던 작업 역시 인문학 체계를 건축에 끌어오는 것이었다. 비평의 제일 목적은 작가의 뿌리를 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 위치를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본다면 어정쩡, 긍정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나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런 욕망이 있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세계 건축계는 정체가 없다. 렘 쿨하스도 그렇고, 자기 얘기를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세계 건축계는 옹알이 수준이다. 과대망상일지 모르지만 딱 한 번 가공하면 되겠네 하는 오만이 있다. 돈도 많이 벌고 싶다. 그리고 치기를 치기로 보여주지 않고 치기가 굉장히 그럴 듯한 것이 될 때까지 열심히 작업에 임하겠다.”(함)
“요즘은 술도 안 먹고 이전에 강정교회 설계 시 직면했던 것들에 다시 직면하고 있다.”
“현재의 내 위치...... 맘에 든다. 내가 갖고 있는 포지션이 맘에 든다. 난 성향상 주류는 못 된다. 그들(곽재환과 이일훈)의 영향이라기보다 유전자 속에 흐르는 나의 성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난 내가 열정을 쏟는 대상을 향해 나를 막 표출하는 것일 뿐이다. 건축에 있어서 내가 추구하는 기성적인 모델은 없다.”(김)
그런데 김은 “요즘 세상이 너무 멀겋다.”고 푸념했다. 그의 표현대로 ‘자기만의 발동기’가 새로운 모드로 전환하기 위해 잠시 꺼 둔 상태인지 모른다. 하여튼 그는 조금 우울한 것 같다.
“요즘은 술도 안 먹고 이전에 강정교회 설계 시 직면했던 것들에 다시 직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15개월 동안 제주도 행 비행기에 73번이나 몸을 실을 수 있는 건축가가 과연 몇 명 있을까?
김은 최근에 보았던 춘천(춘천에 오피스 설계 중)댐의 바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의 ‘살’은 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의 바닥을 보았다. 그런데 뼈만 남은 강의 바닥은 충격적이고 소름 끼쳤다.” ‘혹시 춘천댐에서 그의 현재 모습을 기어코 확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강정교회’가 낯선 제주에 김을 알리는 작품이었다면, 조만간에 또 다른 작품으로 그만의 장소를 점령하고야 말 것 같은 직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인터뷰 후기: 인터뷰를 끝내고 정리하면서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공격적이고도 선명치 못한 질문에 충실히 응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인터뷰를 즐긴 함과 달리 “파악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난 정형화된 것을 못 견딘다. 나를 죽이는 방법은 ‘묶’어 두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김에게 틀에 얽매인 인터뷰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것이다.
200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