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 독송 수행을 위한 준비
㰋« 장소, 방향
금강경 독송은 꼭 어디에서만 해야 한다거나 하는 정해진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형편 따라 인연 따라 절에서 할 수도 있고, 집에서나 혹은 회사에서나 그 어느 곳에서 해도 무방하다. 다만 처음에는 번잡한 곳 보다는 조용한 곳이 좋고, 본인이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곳이면 좋다. 또한 집에서 할 때도 어느 방에서 하는지, 어떤 방향을 보고 하는지도 정해진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이든 법신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우리 몸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자성 부처님의 처소이며, 처처가 도량이고 이 몸이 법당이니 정해진 바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편하고 단정한 곳에서 하면 된다. 굳이 어느 방향을 택하기 어렵다면 가까운 사찰이 있는 방향으로 할 수도 있다.
㰋« 기간, 때
수행은 언제든 항상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사정이 어려울 경우 기간을 정해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일, 7일, 3·7일(21일), 100일, 1000일, 1년, 3년, 10년 등 스스로 기간을 정하고 또 그 기간 동안 어떤 수행을 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다. 또 특히 어떤 한 가지 원을 세워서 발원기도를 할 경우에는 통상 기간을 정해 가행정진을 하기도 한다.
하루 중 수행의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이 또한 정해진 바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새벽시간이 좋다. 스님들이 절에서도 새벽 3시에 기도를 올리는데, 꼭 3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정진하는 것이 좋다. 새벽 시간이 어렵다면 주부는 남편과 아이들을 출근시켜 놓고 할 수도 있고, 혹은 사시 때나 가까운 절의 사시불공에 동참하여 수행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는 새벽기도 3시~5시, 사시불공 10:30-12:00, 저녁기도 6시~8시 정도에 기도를 하니 이 시간에 맞춰서 집에서 기도해도 좋다. 혹은 잠들기 직전에 TV를 끄고 가족이 모여 앉아 금강경 독송을 하거나, 108배 수행을 하고 잠을 청해도 좋다.
㰋« 횟수, 시간
그러면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하려면 과연 몇 번을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해야 할까. 물론 이 또한 정해진 바는 없다. 그러나 주로 금강경 독송은 한 번에 혹은 하루에 1독, 3독, 7독, 10독, 21독, 100독 정도를 하며, 요즘은 하루 7독 독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은 1,000독, 10,000독을 정해 놓고 그 독수를 채울 때까지 계속해서 하는 방법도 있다.
금강경 독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처음 독송하는 사람은 한문 독송은 30~40분, 한글 독송은 40분~1시간 정도가 소요되곤 한다. 그러나 꾸준히 독송하여 금강경이 입에 붙고 익숙해지다 보면 한문은 15분 정도, 한글은 25분 정도에 마쳐지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도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는 전혀 중요치 않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얼마만큼 독송 중에 ‘마음을 비우고 깨어있는가’즉 지관(止觀)의 지속여부에 있다.
하루 수행시간은 보통 30분, 1시간, 2시간, 3시간, 5시간 혹은 그 이상을 수행으로 보내기도 한다. 좌선 같은 수행은 시간을 정해서 하면 좋지만, 금강경 독송은 특히 몇 독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또 얼마만큼 금강경 독송을 해 왔느냐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곤 하기 때문에 몇 시간을 기도시간으로 정하느냐 보다는 몇 독을 정해서 하느냐가 중요하다.
㰋« 자세
독송 수행을 할 때는 주로 장궤합장의 자세를 권장한다. 장궤합장은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그대로 엉덩이만 들어 무릎을 땅에 댄 채 일어 선 자세이다. 보통 무릎 사이를 약간 벌린 채로 땅에 닿은 무릎 윗부분의 상체를 곧게 세운 자세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호흡이 아랫배까지 내려와 몸도 마음도 호흡도 고요하게 안정된다. 그러나 이 장궤의 자세를 처음 행하는 이들은 허리와 무릎 등에 통증이 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장궤를 하다가 힘들 때는 엉덩이를 내리고 무릎 꿇은 자세를 번갈아가며 해도 좋다.
이렇게 장궤의 자세로 금강경 경전을 눈높이까지 펴 들고 또박또박 독송을 하되, 경전을 아래로 내리거나 방바닥에 내려놓은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독송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장궤가 너무 어려운 경우 혹은 장궤의 자세를 하기 어려운 장소나 상황에서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해도 무방하다.
㰋« 보시
독송 수행을 할 때는 꼭 보시를 함께 하도록 한다. 꼭 얼마를 해야 한다는 정해진 바는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보시를 정해서 하고, 기도 기간이 끝나고 회향할 때는 불우이웃을 돕거나, 가까운 사찰에 보시하거나, 혹은 법보시로 경전이나 좋은 불서를 구입하여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다. 특히 경전이나 불서는 부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소중한 보고이므로 경전이나 불서를 구입하여 보시하는 일은 복과 지혜 두 가지 모두를 원만구족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수행이요 선행이 될 수 있다. 베풀 때는 꼭 아는 사람에게만 줄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모르게 베푸는 것이 더욱 좋다. 이를테면 매일 아침 만나는 버스 기사분께, 절의 도반들에게, 청소부 아주머님께, 평소 친하지 않던 직장동료나 이웃들에게 주는 것도 세상을 밝게 하고 행복을 늘려나갈 수 있는 소중한 방법이 될 것이다.
또한 꼭 물질적인 보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하루 세 번 이상 선행하기’,‘하루 열 번 이상 웃어주기’,‘힘든 친구 위로해주기’등 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행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실천할 수도 있다.
㰋« 수행일기
아울러 독송 수행을 하는 기간에는 매번 독송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잘 비추어 보고, 또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들을 잘 관찰해 보고, 그 마음 관찰의 내용을 ‘수행일기’로 쓰면 공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독송 수행할 때 일어나는 마음이나 잡념이나 몸의 통증, 그리고 호흡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관찰한 내용을 수행일기로 쓰다보면 공부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볼 수 있고, 또한 독송을 통한 지관의 수행을 선명하게 지켜볼 수 있다. 또한 독송 수행하는 그 순간만 지켜보고 수행일기에 적을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하루하루 일어났던 일들과 마음의 변화, 몸의 느낌 등을 전체적으로 지켜보고 일상의 삶을 있는 그대로 거울로 지켜보고 그림을 그리듯 적어 본다. 특히 하루 중 평상심, 여여한 마음이 흩어지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탐심과 성내는 마음, 혹은 괴롭거나 즐거운 마음 등 여여한 마음을 방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을 잘 지켜보고 수행일기에 마음관찰일기를 적어본다.
독송 수행의 실제
㰋« 독송의 마음자세
『금강경』을 계속해서 독송하다보면 자칫 어느 순간 형식적이 되고, 그저 몇 독을 끝내는 것이 목적이 될 때가 있다. 며칠 동안 몇 독을 하겠다고 원을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한독한독 독송할 때마다 바로 ‘지금 여기’라는 순간에 깨어있으며, 『금강경』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보면 어느 순간 『금강경』 독송의 본뜻을 잊고 형식적으로 숫자를 채우는데 연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수행은 백 년을 하더라도 차라리 깨어있는 정신으로 한 독을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수행의 기간 동안에는 될 수 있다면 별도로 『금강경』의 뜻을 새기는 경전공부를 함께 해 나가야 한다. 특히 한문으로 독송을 할 경우에는 독송의 속도에 비해 그 뜻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독송할 때는 독송에만 집중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금강경』의 강설이나 『금강경』 법문을 듣는 것도 좋다. 뜻을 환히 알고 독송할 때와 아무것도 모르고 독송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영가천도를 위해 『금강경』을 독송할 때는 될 수 있다면 한글로 독송을 하거나, 한문으로 독송하더라도 그 뜻을 새기면서 천천히 간경을 하는 것이 좋다. 영가는 단순히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독경하는 이의 마음에 비친 생각과 소식을 듣기 때문에 독경하는 이가 『금강경』의 내용도 모르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채로 독송을 한다면 영가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독송을 하면서 내 스스로 『금강경』에 감동을 하고, 『금강경』의 소식에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바로 그 마음을 영가는 그대로 듣고 환희심을 내어 『금강경』의 뜻에 따라 아상을 버리고, 아집을 버린 채 이생에서의 집착을 여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독송할 때는 『금강경』을 설하신 부처님께서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위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희유한 마음을 낼 일이다. 경전이라는 것이 곧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경전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부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니 그러한 경전을 내 입으로, 내 마음으로, 내 온 존재로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내 안에 모시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독송은 한독한독이 그대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성스럽고도 경이로운 수행의 순간인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금강경』을 또렷또렷 정성스럽게 독송할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내가 부처가 되는 순간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깨어있는 독송의 순간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우리의 본래 자성은 언제나 부처였지만 평상시에는 항상 본래성품을 잃고 번뇌를 일으킴으로써 중생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독송수행으로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에는 그 어떤 번뇌며 탐진치 삼독도 끼어 들 틈이 없기에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도 청안한 깨어있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온전한 깨어있음이 함께하는 『금강경』 일독의 독송시간은 그대로 우리를 열반으로 안내하는 부처님의 손길이다.
독송할 때는 얼버무리듯 속도만 빠르게 할 것이 아니라 또렷또렷하며 반듯한 목소리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독송의 소리를 온전히 관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독송을 계속하다보면 자꾸만 잡념이 일어난다. 아마도 끊임없이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왜 이렇게 잡념이 많은가’ 하고 한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필요는 없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수행이 잘 되느니, 안 되느니 하면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잡념이 일어나면 다만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고 관하면 된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일어나는 잡념을 놓치고 관하지 못하는 것을 주의할 일이다. 독송 중에 이렇게 잡념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금 경전으로 돌아와 집중하여 관하면 된다. 그러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말라. 그러면서 수행의 깊이는 깊어갈 것이다. 그것은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수행 중에 마가 있다는 것이 나쁜 소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닦아가야 할 것이다.
㰋« 집중수행과 생활수행
일반적으로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할 때는 절이나 집과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을 내어 수행한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자칫 『금강경』 독송을 할 때는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진이 되는듯 하다가도, 『금강경』 독송을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다시 산란해지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금강경』 독송 수행을 한다고 해 놓고 독송 할 때만 마음이 비워졌다가 독송을 끝내고 난 뒤에는 다시 욕심과 집착과 번뇌와 아상에 물들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금강경』을 독송할 때만 수행자의 모습이지 일상 생활 속에서는 탐욕과 진심으로 들끓어 가족이나 직장 동료 등 가까운 이웃과도 맑고 향기로운 인연을 맺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수행을 하면 삶이 고요해지고, 아울러 삶이 변화하며 가지런해지기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금강경』 수행을 한 사람은 아상이 없어 하심하고 겸손하기에 주위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못난 모습까지도 비춰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삶이 바뀌고, 그에 따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찬탄하며 뒤따르고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공부를 하는가’,‘어떤 수행을 하는가’ 싶어 물어오곤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써 교화를 하는 사람이다. 위의교화의 참된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금강경』 수행을 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함께 『금강경』 수행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참된 수행의 모습이요, 참된 포교의 모습이다.
그러려면 『금강경』 수행의 정진이 독송하는 때만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 중에도 기도 수행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생활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시간을 내어 별도로 집중하여 독송 수행하는 것을 ‘집중수행’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 항상 깨어있는 정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생활수행’이다. 사실은 집중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활수행이다. 집중수행을 하는 이유도 그 수행력을 통해 생활이 바르게 서고,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집중수행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활 속에서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생활수행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면 『금강경』 생활수행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보통 염불이나, 진언, 다라니, 혹은 반야심경과 같은 짧은 경전일 경우에는 외워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틈나는 대로 염불, 독송함으로써 깨어있음의 정진을 삼을 수 있으나, 『금강경』 같이 긴 경전인 경우는 모두 외우가가 어려우므로 중요한 핵심 경구인 ‘사구게’를 외워 독송하는 것이 좋다. 『금강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사구게는,‘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응무소주 이생기심’ 등이 있다.
이러한 사구게와 사구게의 내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언제 어디서든 『금강경』 독송을 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러한 사구게를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요달하고 마음을 집중시켜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사구게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함으로써 지관 수행의 방편을 삼을 수도 있으며, 사구게는 짧아 그 뜻을 이해하기도 쉬우니 마음을 그 뜻에 두고 간경함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나 경계를 맞았을 때 사구게의 의미가 우리에게 큰 힘과 지혜를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 화두처럼 놓치지 않고 삶을 살아가더라도 우리의 삶이 한층 밝아지고 지혜로워지며 여여해짐을 경험할 것이다. 처음에는 사구게의 뜻을 해석해 보더라도 그 깊은 의미를 잘 모르기 쉽지만 이 사구게들은 그 안에 팔만사천의 모든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진이 깊어갈수록 그 광대무변한 진리의 깊이가 우리의 온 존재를 환희와 지혜로 물들일 것이다.
㰋« 독송의 실제
『금강경』을 처음 독송할 때는 본 『금강경 독송 지침서』의 처음에 나온 순서대로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봉청팔금강, 봉청사보살, 발원문, 개경게, 개법장진언을 독송한 뒤에 금강반야바라밀경 제목을 읽고 바로 『금강경』의 본문을 독송한다. 그러나 봉청팔금강, 봉청사보살, 발원문을 빼고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만을 읽고 바로 『금강경』 독송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혹은 개법장진언 만을 읽고 바로 독송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경전의 제목을 읽고 난 뒤 바로 제1분인 ‘여시아문 일시 불…….’하고 경전 본문을 읽는다. 각 분의 제목인 ‘법회인유분 제일’,‘선현기청분 제이’등은 읽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한자 본문에 토를 달아 ‘여시아문 하시오니 일시에 불이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사…….’라고 독송하기도 하지만, 토를 빼고 그냥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하고 독송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32분까지 독송한 뒤에 ‘개대환희 신수봉행’으로 경전 독송을 끝마치기도 하지만, 그 뒤에 회향게인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를 읽으면서 끝내는 것이 좋다. 그 뜻은 ‘원컨대 내가 닦은 이 공덕이 널리 일체중생에게 회향되어 나와 중생들 모두 극락세계에 태어나서 함께 무량수부처님 뵈옵고 다 함께 성불하여지이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한글본 『금강경』을 독송할 때는 위의 한글독송본의 순서에 따라 독송하면 된다. 혹은 경전의 처음과 끝은 똑같이 한문으로 된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과 회향게를 읽고 본문만 한글로 독송할 수도 있다.
사구게를 독송할 때는 별도로 송경의식이나 회향게 없이 정해 놓은 사구게를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면 염불하듯 독송하면 된다.
또한 독송하면서 몇 가지 자주 하는 질문이, 독송을 하다가 한 독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부득이하게 중단하게 되면 다시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인데, 그냥 다음에 할 때 하던 곳부터 다시 독송해도 좋다.
금강경 독송의 2가지 방법
㰋« 독경 - 지관(止觀)의 금강경 수행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서는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독송한다는 구마라집 역의 ‘수지독송’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지독송’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표현의 짧은 번역이다.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이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 크다고 입으로만 외우고 만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수지독송이 아니며, 위타인설의 공덕이 크다고 타인에게 경전을 유포하기만 한다면 그 또한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아닌 것이다. 참된 수지독송이 되려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겨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완전히 이해된 『금강경』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수지독송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니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금강경』 독경의 수행을 하고자 발심한 수행자들이 묻는 질문 중 한 가지는 ‘금강경의 뜻을 잘 모르는데 독경해도 되는가’하는 질문이다. 여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무작정 독송만 하기 보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새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의 뜻을 모르는 초심자 입장에서 『금강경』 독경은 아무 공덕도 없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금강경』 독경은 두 가지 수행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금강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비우고 관하는 것이다. ‘지(止)’의 수행은 마음을 멈춘다는 것으로, 탐진치 삼독이며, 번뇌, 욕심, 집착, 상념 등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번잡함들을 다 멈추고 그쳐 말끔하게 비우는 것이며, ‘관(觀)’의 수행은 그렇게 멈춰진 고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멈추고 관한다’ ‘비우고 알아차린다’는 이 두 가지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핵심 중에 핵심 수행법인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표현도 관(觀)수행을 통해 ‘성성’의 지혜에 이르며, 지(止)수행을 통해 ‘적적’의 고요함에 이른다는 뜻이다. 모든 수행의 방편, 즉, 이를테면 염불, 참선, 간경, 주력, 간화선, 절, 사경 등 이 모든 수행이 지관에 이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마음을 비워라, 멈춰라 해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고 하고, 그 마음을 관하라, 깨어있으라 해도 잘 관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관세음 보살’ 염불이 되었든, ‘금강경’ 독경이 되었든, ‘옴 마니 반메홈’ 진언이 되었든, 절이 되었든, ‘화두’가 되었든 그 한 가지를 지관수행의 방편 삼아 붙잡고 정진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즉 잡념과 욕심과 번뇌를 다 버리기 힘들다고 하니 ‘금강경’이든, ‘관세음보살’이든, ‘대비주’든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관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모든 잡념을 한꺼번에 끊고 없앰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 독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수행은 바로 지관, 정혜, 적적성성의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지관의 수행을 위한 방편으로 『금강경』을 독경한다면 『금강경』은 그야말로 방편일 뿐이다. 『금강경』의 뜻을 굳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금강경』을 독경하면서 마음을 『금강경』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독경하는 순간순간 올라오는 잡념 등을 관찰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수행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의 첫 번째 공덕은 독경수행을 통해 지관의 수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㰋« 간경 - 해행(解行)의 금강경 공부
반면에 두 번째의 공덕은 『금강경』이라는 부처님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공부하고 완전히 갖추어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전공부와 이해의 공덕이다. 이 두 번째의 공부에 있어서는 『금강경』의 온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가지 단계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데, 그 첫째는 굳은 믿음[信]을 바탕으로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解]하고, 세 번째로 이해한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행[行]함으로써 네 번째로 결국 깨달음을 증득[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네 가지 신행의 단계, 경전 공부의 단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 즉, 바른 이해에 있다. 바른 사유를 통해 바로 이해해야지만 바로 실천할 수 있고 바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경과 간경이란 용어를 혼용하여 쓰곤 하는데, 별도로 그저 소리내어 읽으며 지관 수행의 방편으로 쓸 경우에 독경이라 하고, 그렇지 않고 금강경의 의미를 하나하나 새겨가면서 경전의 의미를 새겨보고 관하며 읽는 것을 간경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처럼 간경이란 독경처럼 단순히 읽으며 마음을 비우고 관하는 방편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라, 경전의 내용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마음으로 그 내용을 사유하고 새기면서 읽어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등명은 자신 스스로를 법의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깨달음을 얻으란 의미로 자력의 지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자의 의미고, 법등명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로 비우고 봄으로써 법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진리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라 여겨 따로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금강경』 독경 수행을 하면서도 『금강경』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이 함께해야 하고, 『금강경』 공부를 통해 이해와 실천을 함과 동시에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한 지관의 실천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가 『금강경』의 뜻을 모른다고 독경수행은 하지 않겠다거나, 『금강경』 뜻을 다 공부한 뒤에 독경 수행을 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관하면 되는 것이지 『금강경』을 꼭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바른 수행자라면 『금강경』 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고, 『금강경』 해석과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처음 출가해 사미계를 받고 나면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경전공부를 하는 강원이나, 지관의 참선공부를 하는 선원에서 공부를 필히 마쳐야 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수행이 그만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듯 금강경 수행에는 첫째 금강경 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아가는 ‘금강경 수행의 길’이 있고, 둘째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지혜를 닦아가는 ‘금강경 공부의 길’이 있다. 그러니 똑같이 금강경을 독송하더라도 지관 수행을 닦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독송하는 소리를 관하며 수행의 방편으로 금강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독경’이 되는 것이며,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이해하면서 읽는다면 그것은 ‘간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독경을 위해서라면 한글보다는 한문본의 경전이 좋으며, 간경을 위해서라면 한문보다는 그 의미가 쉽게 와 닿는 한글본의 경전이 좋다.
금강경 수행법 강설
금강경을 어떻게 닦아 갈 것인가. 금강경을 가지고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불자라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 부분이며 특히 초심자들의 입장에서는 막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나, 불교에서 금강경과 금강경 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높다보니 이 부분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면서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다른 많은 불교 국가에서나, 우리나라에서도 조계종을 비롯해 많은 종단에서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 바로 금강경이요, 금강경 수행이다. 이에 초심자들이 알아야 할 금강경 수행에 대한 지침이 될 만한 사항들을 몇 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3가지 금강경 수행법]
먼저 금강경으로 마음을 닦아가고자 한다면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금강경 15분 지경공덕분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금강경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다. 즉, 사경과 독송과 법보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㰋« 서사 - 사경
첫째, 서사(書寫)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寫經)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마음에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法身)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경의 정신이 구체적인 사경수행을 만들어냈다. 사경이란 말 그대로 글로써 금강경을 한 자 한 자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사경의 유래는 옛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경전을 베껴 책으로 유포함으로써 법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요즈음에는 경전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고 사경을 통해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 되고 있다.
사경의 방법은 경전 한 글자를 쓰고 나서 한 번 절하는 일자일배(一字一拜), 한 글자를 쓰고 세 번 절하는 일자삼례(一字三禮), 한 줄을 쓰고 세 번 절하는 일행삼례(一行三禮)등이 일반적인데, 중요한 것은 그만큼 한 자 한 자 베껴 새길 때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㰋« 수지독송 - 독경, 간경
둘째로 수지독송(受持讀誦)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 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無爲)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止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또한 다른 그 어떤 경전보다도 『금강경』 독송만이 더 큰 영험이 있다거나, 다른 경전보다 『금강경』이 더 좋다거나 하는 그런 상을 낸 적은 없는가.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금강경 수지독송은 금강경 수행 중에도 가장 보편적이며 널리 행해진 방법이고 핵심이 되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뒤에 좀 더 자세히 별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㰋« 위인해설 - 법보시
셋째로 위인해설(爲人解說)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回向)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게 위인해설의 법보시를 하면서도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놓아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구체적으로 위인해설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타인에게 가르쳐 주고 설법해 주는 것과 더불어 경전을 유포하거나 경전이 너무 어렵다면 경전을 쉽게 해설해 놓은 책들을 널리 유포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이타적인 보시의 수행법이다.
이처럼『금강경』에서는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다.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