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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의 섬, 그러나 내겐 고통의 섬이기도 했던 제주 200Km 울트라 마라톤 완주기 >
2003년 6월 빛고을 광주 울트라 마라톤 100Km를 14시간에 힘들게 완주하고 울트라 마라톤은 보통이상의 의지력, 지구력, 체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전하기 힘들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근력, 지구력, 정신력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부족함을 많이 느낀 대회였다. 그러나 가능성은 확인한 대회였다.
그 후 부족한 근력 운동 등을 보충한 후 10월 동아시아 대회에 다시 도전하여 12시간대에 완주하였다.
그 후 환상의 섬 제주 200Km에 대한 도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2월 중순 도전을 최종 결심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1월 19일 대회 53일 전부터 본격적인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동절기라 외부 훈련은 전혀 없이 헬스클럽에서 근력운동과 하체 운동에 치중하고 장거리 훈련에 돌입했다.
대회 32일전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에 이상이 생겼다. 행여 이 통증으로 인하여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면 어쩌나 내심 불안한 마음이다. 병원에 가니 아킬레스건이 부었다는 진단이 나와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2월 15일 해남 마라톤에서 헬스회원님과 하프코스를 무리 없이 소화한 후 대회 25일전 불안한 마음에 두 번째 병원을 찾아 MRI 사진을 찍어보니 아킬레스건 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무리한 훈련은 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뒤로한 채 약을 복용해가며 조심스럽게 훈련에 치중했다.
대회 10일전 3월 2일 오늘이 접수 마감일이다. 대회에 출전해야할지 포기해야 할지 엄청난 갈등이 밀려온다. 세 번째 병원에 가니 출전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리를 해서라도 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간청하여 왼쪽 발목과 엉덩이에 주사를 두 대씩 맞았다. 얼마나 아프던지 3일간 통증이 왔다. 하루에 한 알씩 3일분의 약을 복용하니 다소 통증이 완화되는 듯 하다.
대회 일주일을 앞둔 후부터는 꿈에 완주시간에 들어오지 못해 좌절하는 나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종종 잠을 설치곤 한다. 다시 잠을 청해도 길을 잘못 들어 헤메는 등 깊은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짧은 경력으로 무모하게 200Km에 도전 결정을 해버리고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꼈다. 선후배님들의 걱정 어린 충고와 격려 덕분에 한편으로는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지워버리고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고자 부단히도 노력하였다. 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스스로 키워가고 있었다. 나에게 이번 도전은 너무나 엄청나고도 큰일이었기에......
머릿속엔 이미 벌써 결승 테이프를 끊고 들어오는 환상 속의 내 모습에 스스로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고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 대회 3일전(3월 10일 수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가 대회 준비물을 점검해본다. 배낭, 복장(상의: 반팔 유니폼2장, 하의: 짧은 타이즈 2장, 반바지 2장), 모자, 장갑, 화장지, 핸드폰, 반창고, 일회용반창고, 안티프라민, 바세린, 야간 주행 물품(깜박이등, 헤드랜턴, 소형 후레쉬), 사탕, 비타민, 아나볼릭 젤, 현금(동전포함), 분사식 소염진통제, 우비, 양말 4족, 바늘과 실, 안경, 운동화, 슬리퍼, 타올, 칫솔, 치약, 비누, 테이핑, 가위, 볼펜, 메모지, 무통침(근육경련에 대비), 초코렛, 초코파이, 옷핀, 손목시계, 허리쌕, 노끈, 스카치테이프, 커피, 매실차......
뭐가 이리도 많은지 머리가 아프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커다란 심적 부담감을 안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 대회 2일전(3월 11일 목요일)
대회가 가까워짐에 따라 근심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아마 절대로 참가자들 모두에게 완주를 허락하지만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리라.
대회 전일에는 대개 숙면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잠을 청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공상만 가득하고 새벽 늦게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 대회 1일전(3월 12일 금요일)
09:40분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한지 15분 정도 지나니 잠시 후 제주 국제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밖을 바라보니 눈 덮힌 한라산과 푸른 바다가 시야에 시원하게 들어오고 내일 내가 달릴 해변가 도로에는 차들이 성냥갑처럼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쿵당쿵당하면서 묘한 기분이 든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은 달리기에 적당하다.
이대로 날씨가 내일까지 유지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제주 공항에 10:40분경 도착하여 제주도가 고향인 대학 친구의 반가운 만남을 갖고서 다음날 달려야할 해변도로를 답사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상당히 난코스다. 큰 오르막은 서귀포인근과 제주 KAL호텔 인근 두 군데지만 크고 작은 언덕이 무수히 많다.
오후 4시경 대회본부가 설치된 KAL호텔에 도착해 물품을 받고 서약서<대회도중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에 서명하고 인근 모텔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오후 6시경 이른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 다음날 출발에 쓰게 될 장비 및 100Km 보관 물품을 점검하고 새벽 02시로 모닝콜을 부탁했다.
밤 10시경 취침을 위하여 침대에 누워 보지만 다음날 대회의 긴장 탓인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시끄러운 전화 벨소리에 깜짝 놀라 시계를 바라보니 정확히 02시였다.
재빠르게 화장실에 들러 세면을 하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바세린을 듬뿍 바르며 영양갱과 초코파이로 아침을 해결했다. 짐을 챙겨 03시에 대회 장소인 KAL호텔에 가니 일본인 주자들과 각지에서 몰려든 울트라 런너들이 형형색색의 복장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대회 본부에 보관 물품과 100Km 지점으로 보낼 물품을 구분하여 맡기고 스트레칭을 했다.
04시 정각...
목표시간대를 적은 페이스 테이블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스타트라인에 섰다.
열, 아홉, ... , 셋, 둘, 하나. 와!
드디어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내일 이 곳에 뛰어서 들어올 수 있을까?
아니면 걸어서 들어올까?
아니면 생각하기조차 싫지만 택시로 들어오는 불상사가 발생할까?
이 순간부턴 자신과의 싸움이다.
누구하나의 도움도 이제는 없다.
"살아남는 자만이 골인을 할 수 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 이후 36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후회 없는 시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이를 악물었다.
1. 0 ∼ 10 Km
KAL호텔을 빠져나와 시내를 통과하여 해안도로로 접어들며 생각한 것은 절대 안정된 주법으로 천천히 가자였다. 군데군데 가로등 불빛이 환히 비치고 오른쪽으로는 용두암이 보이고, 파도 소리만이 정적을 깨우며 달리는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다. 언제 보아도 가슴 설레고 낭만적인 천혜의 섬, 신비의 섬, 환상의 섬 등 모든 수식어가 함께 할 수 있을 정도의 꿈의 도시 제주일주를 내 발로 뛰어 볼 수 있는 영광이 나에게도 왔다.
기필코 제주 일주를 내 품에 안고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발을 내 달렸다. 도착 예정시간보다 5분 빨리 들어왔다. 물을 한잔 마시고 스트레칭하고 귤 한 개를 먹었다.
2. 10 ∼ 20 Km
계속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리며 왼쪽 발목에 신경을 써본다. 제발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텐데 500리는 200Km. 사람 걸음으로 1Km는 1,200보, 200Km는 240,000걸음. 이 거리를 36시간안에 주파를 해야 한다.
지금 시간은 06:20분 우리 체육관에도 음악소리에 맞춰 트레이드 밀에서 재미있게 운동들을 하시겠지...
20Km에 도착 예정보다 10분이 빠르다.
다시 물과 귤 두 개를 먹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주자 한 분이 포기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뛰다 넘어져 무릎 부상이란다.
안타까워하는 그분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출발.
3. 20 ∼ 30 Km
이제 서서히 각 주자간에 간격이 멀어진다.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과 함께 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라토너로서 대단한 영광이다. 아나볼릭 젤(영양제)을 먹으며 다시 뛰기 시작.
장거리를 달려보면 순간순간 멈추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인내하면서 달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성자 같으면서도 아름답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순수 밖에 없고 달리는 순간에는 모함이나 협잡, 또는 빙자 같은 마음은 존재할 곳이 없다.
평소 체육관에서 뛰는 페이스로 달려본다. 길가에 핀 노란 유채꽃이 무척 아름답다.
내 마음도 항상 유채꽃처럼 예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고질병인 왼쪽 발바닥에 약간의 통증이 온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는 하느님을 부르며 아무 이상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4. 30 ∼ 40 Km
예정보다 30분 정도가 빠르다. "돈과 힘은 있을 때 아끼는 것이다."
너무 무리라 싶어 속도를 늦추고 물과 귤을 먹고 초코파이도 먹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아한 듯 쳐다본다.
반바지, 반팔, 검정 썬글라스에 푹 눌러쓴 모자, 가방을 둘러맨 모습이 이상한가 보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나는 고행의 불구덩이에 기름통을 지고 달려들었으니 어찌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제 조금만 가면 풀 코스 완주다.
5. 40 ∼ 50 Km
1차 CP에 도착해 이제 ¼은 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시계를 보니 무려 1시간이나 빠르다.
물도 마시고, 초코파이, 사탕을 먹고 바나나도 먹었다.
스트레칭을 하니 다리가 뻐근하다. 앉아서 양말을 벗고 왼쪽 발목에 멘소래담을 발랐다.
발바닥을 정성스럽게 맛사지하며 발목이 부러지더래도 완주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 해 본다.
날씨가 너무 화창하다.
뜨거워진 발바닥을 주무르다 보니 100Km 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다.
출발 후 6시간이 넘어서인지 슬슬 지루함이 느껴지는 시간이다.
아름다운 제주 경치도 이제 달리는데 신선함을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 서서히 육체와 정신이 이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면 혼자 외롭게 달려서 그런 것일까?
6. 50 ∼ 60 Km
미리 준비해간 소염 진통제 스프레이로 왼쪽 발목을 뿌리고 급수대에서 스트레칭을 하니 양쪽 대퇴직근(허벅지)이 쥐가 날려고 한다. 안티푸라민으로 정성껏 맛사지를 하며 제발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텐데 걱정이다. 다시 출발하여 해변가쪽으로 향하니 바람이 엄청 불어 모자가 날라갈 지경이다.
스트레칭을 해서인지 달리는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해는 이제 중천에 떠 있어 볕도 따갑고 땀도 이제 제법 흐른다.
오른쪽으로 바다, 왼쪽으로는 간간이 수산물 가공공장이 있다.
달리는 중 다른 주자를 추월할 때 "안녕하세요, 힘내세요, 먼저 가겠습니다."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급작스런 기력 소진을 방지하고 달리면서 내 자신과의 대화를 더 많이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결국 이것이 가끔씩 엄청난 외로움과 지루함, 그리고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7. 70 ∼ 80 Km
삼방산이 한 눈에 보인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나며 주변에는 갑자기 유채꽃이 더욱더 아름답게한들 가득히 펼쳐진다. 이 구간 어디에선가 식사를 해야 한다.
지금 시간은 오후 3시 30분. 아침겸 점심을 먹어야 하나 너무 긴장 탓인지 배고픔을 모르겠다.
잠시 내 주변을 뒤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해본다. 허나 현실은 냉엄한 것! 가야할 거리에 대한 부담감이 머리를 짓누르고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가슴속 가득하다.
하여간 이런 저런 생각에 어느 동네에 들어가니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식사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몸상태를 체크하고 양말을 벗어 발바닥을 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 다만 양쪽 대퇴근만 뻐근할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 식사를 하고 나니 뛸 수가 없어 걷고 뛰고를 반복.
너무 힘든 레이스다.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8. 80 ∼ 90 Km
방금 지난 10Km로는 너무 힘이 들었다. 소화가 되지 않는지 배속이 거북스럽다.
언덕을 걷고 내리막은 살살 달리고 어렵게 어렵게 앞을 향한다.
이제 조금만 가면 100Km cp이다.
점점 어두워진다. 왼쪽 발목에 신경을 쓰다보니 오히려 오른쪽 발목이 이상이 온다.
힘을 내자, 해 보자, 누가 대신 달려주지 않는 길을 망설이지 말고 성실하게 달려보자.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바로 인생살이의 축소판이다.
9. 90 ∼ 100 Km
서귀포로 향하는 길에 월드컵 경기장이 우뚝 서 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주로를 확인한다.
너무 힘이 들어 걷다 뛰다를 반복하니 저멀리 대학 동창생이 응원을 나온다. 다 왔다며 함께 뛰면서 힘을 실어준다.
천지연 폭포를 지나 100Km cp도착. 싸인을 한 후 김밥 2개를 받아들고서 주저앉는다. 너무 힘들고 이게 무슨 미친짓인지 기가 막히다.
어쨓든 이제 중간이다. 지금부터는 가면 갈수록 집에 빨리 도착한다. 라는 생각에 스스로 자위를 해본다.
인근 식당에 들어가 된장찌개를 시키고 야간에 갖추어야 할 것들을 챙긴다.
광부가 머리에 두르는 전기불인 헤드렌턴, 후레쉬, 야간에 입을 옷에 형광부치기 등 만반에 준비를 하였다.
급하게 음식을 먹어도 약 한시간이 걸렸다. 이때에 옆에서 누군가가 챙겨주면 조금더 쉴 수 있으련만 싶었으나, 만일 도움을 받는다면 마음이 풀려서 200Km 도전하는 것 같은 엄청난 일은 포기했으리라 생각된다.
200Km는 독한 독종의 인간이 독하게 하는 것이지 부드러운 인간이 부드러워서는 발상조차 못할 경기였다.
자! 이제 출발이다.
어둠속을 뛰어 나가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기필코 완주하리라......!!!
10. 100 ∼ 110 Km
계속 달려가다 보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저 멀리 깜박이등 몇 개만 깜빡거릴 뿐 칠흙 같은 어둠뿐이다.
걷는 건지 뛰는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정한 레이스로 간다. 아마 1시간에 6Km 페이스는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나는 달리면서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내 삶의 방향을 오랫동안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11. 110 ∼ 120 Km
어둠속에서 빨리 오란 손짓은 오로지 주자들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빨간 불빛뿐이다.
걷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늦은 밤이 되면서 기온이 갑작스럽게 떨어져 너무 춥다. 이러다 저체온증이 오지 않나 걱정이 된다.
덜덜덜 떨면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이제는 손이 시려워 장갑을 낀 채 부벼댄다.
지금 시간 밤 12시경 피곤이 몰려와 잠이 온다.
12. 120 ∼ 140 Km
이 구간은 정말 마의 구간이다. 쏟아지는 졸음과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뛰다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 달리다 쓰러질 것 같아 걸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은 감겨오고, 발바닥, 발가락, 발목의 고통은 지속되고 도저히 달릴 수가 없다.
추위보다도 졸음이 문제다. 달리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죽음이다. 걸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포기할 수 있다는데 나는 그런 용기도 없는 모양이다. 알량한 자존심에 되먹지 못한 오기로 포기를 거부한다.
가자! 무조건 가는 거다. 뛰다가 정 못 뛰겠으면 걷고, 걷기도 힘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
한겨울인 1월에 하사 훈련받은 군생활을 생각해본다.
새벽 02시에 기상해 발가벗은 채 하수구에 들어가 포복을 하고 쌓인 눈위에 드러누워 나의 살던 고향에 노래를 부르며 이겨냈던 그 시절도 현재에 비하면 머나먼 추억에 불과하다.
다시 군가를 부르자.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에......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님 말씀 나라 위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이제 군가도 지친다.
13. 140 ∼ 150 Km
새벽 04시경이 지나자 졸음과 함께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히 살인적인 졸음이다.
해안도로를 뛰다보니 제주 바닷가의 크고 작은 돌들이 덩실덩실 나를 향해 춤을 추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차려 보려고 하지만 나의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너무 힘들다.
잠도 오고 몸은 으스스하고 조금만 가면 성산 일출봉 제 3 cp인데 가도가도 끝이 없다.
내가 왜 이래야 되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서 걷고 뛰자니 내 자신이 기가 막히다. 내가 미친놈인가. 그래 미친놈이라 이 짓을 하지......
다시 노래를 부른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아름다운 강산", "울산 아리랑", "자옥아" 이제 노래도 싫다.
다시 잠이 온다. 저절로 발걸음은 느려지고 걷고 있으니 추워서 참을 수 없다. 눈이 감긴다. 편안하다. 비몽사몽간 고인이 되신 어머님의 생전 모습이 생각난다.
이제 다 필요 없다.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성당에도 나가고 절에도 나가야지 어머니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이번 마라톤이 끝나면 다시는 뛰지 않겠습니다.
05:30분경... 갑작스런 휴대폰 벨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받아보니 고길수 회원이 힘내라 응원을 해준다. 그 소리가 너무나 반갑고 서러움에 눈물이 절로 난다. 아니 통곡을 했다. 너무 힘들다고......
이제 다시는 뛰지 않겠다고 울고 또 운다. 정말 이렇게 울어보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이다. 너무 갑작스런 울음에 고길수 회원이 말을 못한다.
캄캄한 새벽녘에 원없이 울고 나서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기 위해 이곳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죽지 않는 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만 든다.
힘들게 정말 어렵게 150Km 성산 일출봉에 도착했다.
물, 바나나, 초코파이, 귤을 먹고 스트레칭을 한다.
심사위원이 빨리가야 시간내에 들어간다고 서두르란다.
14. 150 ∼ 160 Km
새벽 어스름이 걷치기 시작한다. 성산일출봉을 뒤로하고 다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장시간 레이스로 인해 사타구니 부분이 완전히 헐어 뛸 때마다 통증이 온다. 할 수 없이 해변가 바위로가서 바세린을 듬뿍 바른다.
아나볼릭 젤을 먹으며 꾸벅꾸벅 조는 내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애처로움이 솟았다. 눈부신 아침햇살...... 서럽도록 좋은 날씨다.
멀리 아름다운 햇살아래 가물가물 잡히던 주자들 막상 가까워져 서로 인사를 나눌 때 눈물겹도록 지친 모습이다. 두려운 행군을 계속한다.
먹은 게 없으니 간과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원인 글리코겐이 있을 턱이 없다. 아마도 지방을 태워서 겨우겨우 앞으로 가는 것 같다. 처절하다.
정신력이 한계점에 다다른 듯하다.
15. 160 ∼ 170 Km
바닷바람을 친구 삼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 또 전진하였다. 기분이 좋아진다. 쉬지 않고 걷고 뛰며 확신을 가져본다.
이제 남은 거리는 풀코스 거리다. 나는 완주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끌고 간다. 간다... 가자... 힘이 나질 않는다.
정신력으로 버텨본다. 앞에 가는 주자가 눈물을 삼키며 포기, 회수차가 올때까지 쉬고 있다. 갑자기 나는 그 사람의 용기가 부러웠다.
그러나 이미 도전은 승리를 겨냥한 일, 도저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 망설이다가는 나약한 자신에게 백기를 들 것 같아 다시 출발한다.
16. 170 ∼ 180 Km
냄새도 맡기 싫은 초코파이와 바나나를 먹고 출발, 쉬었다가 달리니 도저히 발이 안나간다. 레이스도중 악을 써보기도 하고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을 향해 욕을 해대고 쌍소리를 하면서 달린다.
누가 들으면 대낮에 그런 미친놈이 따로 없다고 했을 것이다. 최면을 거는 중얼거림으로 완주만을 생각하였다. 이 구간만 잘 마무리하면 남은 하프 거리는 걸어서라도 갈 수 있겠지. 내가 앞으로 언제 170Km 이상을 이렇게 달릴 수 있겠는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전진 또 전진이다. 아무 곳에나 눕고 싶은 충동을 이기며 달리다 걷다가 하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된다. 집도 가족도 없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는 곧 무덤과 무엇이 다를까.
17. 180 ∼ 190 Km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제 스트레칭도 앉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가다가 잠시 그냥 멈추고 있는 상태다. 이제 체력이 다 소진되었나 보다.
조심스레 앉아보지만 몸의 근육이 굳어져서 다리를 접기도 어렵다. 먹기가 힘들지만 물과 바나나, 사탕으로 배를 채운다.
지금부터 골인 지점까지 남은 20Km를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마음만이라도 우리 선·후배 회원들과 함께 뛴다고 생각하고 쉬지 않고 뛰어서 멋있게 골인하리라 다짐해 본다.
184Km쯤 왔을까. 오른쪽 발에 엄청난 통증이 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갓길에 주저앉아 양말을 벗어보니 큼지막하게 물집이 생겼다. 바늘과 실로 처치를 하고 전진하나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도로변에 다시 주저앉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억울할 정도의 아쉬움이 머리를 짓누르며 뛰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일어나 거의 왼발에 의존하며 걷다보니 어느 마을에 약국이 보여 들어가 진통제(샤이닝) 2알을 복용하고 다시 전진해 본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발의 통증은 계속되고 물집은 기승을 부리고 조금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 고통을 즐기자. 온갖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즐거운 일, 슬픈 일 주변에 모든 일들을 떠올리며 웃고 울기를 반복, 이제는 남을 미워하고 증오할 힘도 없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발의 통증만 없어지면 좋겠다.
다시는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발 한 발 뛰면서 다짐을 하며 마라톤에 관계된 모든 것을 모조리 끌어다 불태워 버리리라.
약발이 받는가보다. 통증이 덜한 틈을 타 다시 달린다.
18. 190 ∼ 200 Km
급수대에서 물 한잔을 마시고 쉬고 싶으나 180Km에서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쉴 시간이 없다. 정말 쉬고 싶다.
목, 어깨, 가슴, 배, 허리, 엉치,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목, 발바닥, 발가락까지 안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
정말 징글징글하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밀려오는 통증은 도를 더해 걷기조차 힘들다. 두 번 다시 제주도에는 안 온다. 아니 누가 제주 200Km를 뛴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정신 차리자. 정말 인간 한계의 시험장이다.
그래 이제 10Km만 가면 된다. 지금까지는 잘했다. "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하고 자위를 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뭐하러 돈들여 시간들여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한단 말이냐? 취미생활이면 적당히 하면 되지 오히려 건강을 해쳐가면서 하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울트라 마라톤은 하지 않겠다. 절뚝거리며 평지는 걷고 내리막은 아주 천천히 달리기를 계속 반복하니 제주시내가 눈앞에 들어온다. 골인할 때의 완주 모습을 그려보며 육신의 고통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물어본다. 오르막과 교차로가 반복되고 물통의 물은 바닥이 나서 먹을 물조차 없다. 체력과 정신력은 완전히 소진된 상태라 한 발자국 내딛기가 힘들고 갈증은 더 심해진다.
이렇게 마지막 10Km의 거리는 정복되어져 간다.
이제 고통도 없고 아무런 상념도 없다. 기분 좋은 어지러움과 아늑함, 구름 위에서 달리는 기분이다. 이제 200여m만 가면 골인지점인 KAL호텔이다.
갑자기 지난밤의 추위와 졸음, 극한 상황과 그동안의 준비과정이 떠오르면서 해냈다는 행복감에 가슴이 미어진다. 골인 테이프를 가슴에 안으며 나는 두손을 높이 들었다.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내 발로 제주 일주를 품에 안은 순간이다.
" 나는 해 내었다. "
코리아 울트라 임원 몇몇이 뜨거운 포옹으로 반겼다.
정말 감격스런 상황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들이다. 완주기념 사진을 찍고 완주 사인을 한 후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 먼길을 달리려고 했는지..."
그리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으로 긴장이 풀려서 모든 육체 및 정신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듯 한다.
끝없이 드리워진 고통의 주로. 그 길고도 긴 무박 2일의 고통스러운 마라톤 여행은 끝이 났다.
<< 후 기 >>
지난밤에 내가 지나간 200Km는 이제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왜 다들 그 고통을 안고 뛰어야만 할까...
일상들이 싱거워서 일까 아니면 더 이상 가슴에 담을 아름다움이 퇴색해서 일까. 모르겠다...... 누군가 마라톤은 인생과 같다고 했다. 나도 동감한다.
어쩌면 나는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자신감이 없어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인 마라톤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완주기를 가능한 소상하게 쓰는 것도 마라톤이 인생과 같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가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을 찾는다면 분명 그 고통스러웠던 시절은 물론 행복했던 시절의 흔적들은 유무상의 행태로 우리 주변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날들을 헛되이 보낸 건 아닌지 아니면 앞으로 남은 젊은 날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건지, 나의 의지와 체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열망이 더 컸을 것 같다.
독일 외무부장관 요쉬카 피셔는 50살의 문턱에서 숱한 결혼과 이혼 그리고 비만의 고통속에서 지금처럼 되는대로 살든가 아니면 완벽한 변화를 시도하든가 선택의 기로에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달려본 자는 알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 체력의 한계를 체험하며 느끼는 새로운 환희를 사람들은 200Km를 뛰었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말하지만 나는 처음에 이것을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의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리고 이를 완수했다.
배낭을 매고 나의 두 다리로 제주 바닷가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달릴 때의 그 장엄함을 그 웅장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함으로써 나와 같이 마라톤 인생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멋지게 인생을 달릴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실제 인생에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나의 마라톤 인생을 돌이켜 봄으로서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바람을 가로지르며 오늘도 나는 달린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세포 하나하나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내가 살아있음을 오늘도 확인해본다.
◈ 완주를 위한 10계명 < 선수 생각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남 >
1. 누구나 할 수 있되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2. 배낭의 부피를 줄여라.
3. 출발 전 잠을 충분히 자라.
4. 식사는 제 때 자주 하라.
5. 추월을 절대 의식하지 마라.
6. 야간 주행시 추위에 대비하라.
7. 야간에는 반드시 동반주를 하라.
8. 부상을 예방하라.
9. 충분한 사전 정보를 입수하라.
10. 포기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동안 수많은 격려와 성원해 주신 부안 마라톤 회장님 外 회원 여러분과 나의 소중한 선·후배님, 그리고 헬스클럽 회원 여러분.
특히 성모병원 정형외과 과장이신 양재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이글을읽으면서 감동및감격에벅차 몇번이고 눈물을흘리며,감동의고동소리에 가슴을짖눌러보지만 그럴수록더가슴이벌렁벌렁하는군요,정말대단하십니다,분명당신은 인간이기에앞서무쇠로만든사람입니다.우리회원에게많은감동및교훈을안겨준회원님에게깊은감사를드리며,존경합니다.이제는우리가해내겠읍니다부안의자존심을위해
가슴이 메어오며 콧끝이찡하면서 나도모르는사이 눈물이 주루룩!!글속에서 회원님에대한 인내와용기에힘찬박수를보냅니다.마라톤을처음 시작할때만해도 풀코스는생각도 못하던제가 회원님에게서 많은힘을얻어 저는올가을에100km에 도전하겠습니다.완주할수있도록 많은 조언과 지도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완주 하시느니라 정말 수고 하셨구요...선배님의 이런 힘들었던 과정은 분명 부안 마라톤 클럽 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완주기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안 마라튼 화이팅...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것 같습니다. 인내심엔 한계가 없는걸까요...존경스럽습니다. 목적을 갖고 달리는 인생. 자신의 모든노력을 기울여 세운 금자탑. 위인전을 읽은느낌입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대단하십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우송님 꼭 뵙고 싶네요~~가입 신참이라 뵙지를 못했네요..마라톤 초보한테 느낄수 없는 고통과 완주의 감격을 지면으로나마 100분의 1일라도 감미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