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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수줍은 미소를 내미는 금단의 땅, 티벳
Reader's Digest (2003. 11)에서 Dan Rather란 작가는 이렇게 갈파했다.
“나는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은행계좌로 잴 수 있다고 믿어본 적이 절대 없다.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여행했는지를 가치의 잣대로 삼고 싶다.(I've never believed in measuring one's worth by the size of his or her bank account. I prefer to look at distance traveled.)”
사물의 일면이 아닌 다면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관조한다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티벳 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세계의 지붕, 금단의 땅 티벳....
깨질 듯 푸른 쪽빛 하늘, 해발 4,000m 고원에 펼쳐진 끝없는 초원, 그리고 거대한 대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티벳인들의 소박한 미소가 여행자를 사로잡는 땅 티벳.
한번 티벳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티벳 여행의 진한 여운에 사로잡히고 만다.
세상이 그리고 문명이 비켜가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가.
아니면 세계의 지붕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오르기 힘들었을까.
우선, 티벳의 개괄적인 현황부터 아는 대로 설명할까 한다.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중공군들이 이듬해 10월 티벳을 침공, 그 후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하며 달라이 라마 14세가 티벳의 지도자로 한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티벳인에 대한 박해를 계기로 1959년에 라사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나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다람살라)로 망명을 했으며 지금도 세계각지에 호소하며 티벳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티벳은 현재 중국 시짱(西藏)자치구에 해당되며 면적은 한반도의 약 6배이고 인구는 300만 정도이다. 위도 상으로 27-37도 사이에 위치해 있어 별로 높지는 않지만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한랭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지구상 최대, 최고의 고원위에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이 4,000m 가 넘음)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며 주위엔 높은 습곡산맥이 뻗어있고 빙하가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경계를 이룬다. 농업과 목축이 경제의 주종을 이루어 보리와 원근(둥근 무)이 대부분 들판을 차지하며 양과 야크 사육이 성행한다.
티벳행 비행기 안, 온통 하얀 거품덩어리의 운해 사이로 설산이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높이가 심상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신선한 호기심이 성급함으로 바뀌어 자리를 들썩이게 한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니 쌍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시계는 넓어지고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였다. 왜소한 공가 공항을 빠져나오니 오싹할 정도의 소슬바람에 놀라게 되고, 기다리던 버스를 오르니 길다란 흰 천(가타)을 목에 걸어준다. 티벳 고유의 환영의 표시란다.
이윽고 우리의 발길은 티벳의 품안으로 향한다.
겹겹이 에워싼 산은 온통 암갈색으로 나무 하나 없는 것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바위와 돌멩이, 그리고 거무튀튀한, 거친 흙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어 마치 달나라를 연상시킨다.
인적이 뜸한 도로에 어디론가 향하는 현지인들의 남루한 모습에서 문명이 비켜간 흔적이 역력하다.
게다가, 도로변에 줄지어 강물이 계속 따라오는데 색깔마저 장마철의 흙탕물이다.
민가는 어떠한가? 흙과 돌로 잘 포개어 마치 움집의 형상을 갖추고 지붕위엔 오색 천으로 깃발을 이룬 ‘타르쵸’가 펄럭인다. 선명한 구름은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산 중턱을 차지하고 있어 아름다웠다.
도처의 메마른 산자락과 코발트빛 하늘이 만나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이것이 티벳의 아름다움이라 성급한 단정을 내린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사뮈에 사원(Monastery)을 찾으려 강가에 버스를 댄다.
짙은 황토색의 강을 건너는데 약 50분이 소요되고 강나루엔 버스, 경운기, 트럭 등 온갖 매개물이 참배객을 기다린다.
사원은 티벳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렇다 할 교육기관이 없는 이 곳에서는 사원이 중요 교육을 맡아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장남을 사원으로 보내 경건한 수도 생활과 교육을 겸해 왔기에 도처에 사원이 산재해 있다. 사원은 눈부실 정도의 현란한 장식과 무늬로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갖가지 지하자원이 풍부한 티벳에서 금이 주요 생산품 인지라 몇 천 키로의 금이 상단 부분을 떡칠하고 있을 정도다.
사원 안에는 역대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걸려있다.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의 달라이 라마는 티벳인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자 지주이다. 현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중이어도 티벳인은 여전히 그를 정신적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는 티벳인의 영(靈)이고, 티벳 땅은 육(肉)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 달라이 라마는 神에 가깝다.
도대체 생업을 포기하고 부처님만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 현지인의 발길이 끊기 질 않아, 문자 그대로 문지방이 닳을 정도이다. 넉넉지 않는 살림에 아깝다 여기지 않고 부처님의 흔적마다 보시(布施)를 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액권은 한번 시주하면 손대지 않는 것에 반해, 티벳은 잔돈으로 거슬러 간다. 곳곳에 적선(積善)을 하여야 하기에 그럴 만도 하다는 수긍이 간다.
첫 사원 방문으로 티벳의 향취를 느낀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체땅으로 향한다.
도대체 교통법규가 있는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중앙차선은 지켜지지 않고 상대방 차량과 아슬아슬한 곡예라도 하듯 간담이 서늘하다.
육로를 통해 여기에 들어온 사람이면 오는 도중에 고산병을 느끼곤 하지만 비행기로 온 사람은 하루쯤 고소증을 느낀단다. 첫 날 저녁부터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고 눈이 뻑뻑하고 따갑기 시작하며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현기증과 함께 숨이 가쁘고 구름 위를 걷는 느낌도 들 정도이다. 여행 전 그까이꺼 고산증이야 대충 넘기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여행 중 처음 겪어보는 통증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더구나, 하늘 호수라고 불리우는 남쵸 호수를 가는 길 5,190m의 고갯길에서 내렸을 땐 마치 달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4,700m에 위치한 남쵸 호수는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간 여행‘이란 책의 배경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국 제 2의 호수인데 바람이 워낙 거세 초겨울의 날씨였으며 텐트에서 잠을 자야했지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으로 눈 한번 붙일 수 없었다.
티벳인이 삶 중에서 아마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들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종교적인 삶일 것이다.
수도 라사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보면 동이 트기 전 허름한 모습의 사람들이 포탈라 宮과 죠캉 사원을 향해 걸어간다.
구름처럼, 한 손엔 마니차를 돌리며 다른 한 손엔 염주를 손에 쥔 채, 입으로는 옴 마니 받메 홈을 연신 중얼거리면서....
그리곤 포탈라 궁을 시계방향으로 40바퀴 돈단다.
한 바퀴에 1km씩이나 걸리는 거리를... 죠캉 사원도 마찬가지다.
한낮의 뙤약볕도 문제가 못된다.
또한, ‘오체투지’라는 것이 있다.
사원에 가보면 정문에서 두 다리, 두 팔, 그리고 머리를 땅에 맞대며 자신을 낮춘다.
심지어 지방에서 수도 라사를 향해 3보 1배가 아닌 1보 1배를 오체투지로 나아간다.
실로 외경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종교적인 힘으로 그들은 18세기에 중국, 네팔, 인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거대한 영토를 거느릴 수 있었으며 찬란한 불교문화는 주변 국가에,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단다.
티벳의 고유 장례방식인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에 대해 말해보기로 한다.
티벳은 한랭 건조한 기후라서 사체가 잘 썩지 아니하고, 물이나 나무가 귀해 수장이나 화장을 하기가 어려워 그들만의 방식인 방법이 천장, 조장이다.
시신을 언덕위에 놓고 천장을 주관하는 천장사가 시신의 뼈와 살을 골라놓으면 구원의 커다란 독수리 떼가 물고 간다. 뼈도 잘 먹을 수 있도록 잘게 부숴준다. 실제 우리 일행은 이른 새벽부터 그 장면을 목격하러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 4,500m의 간덴 사원 뒤를 허겁지겁 갔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아 아쉬웠다.
티벳을 여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너무 흡사한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우선, 교육열에 있어 우리나라의 어머니들 이상으로 과열 양상이다. 매사에 열심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근면성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다. 주변의 인도, 네팔 사람들이 티벳인의 근검절약에 시샘과 질투를 던질 정도란다.
티벳어가 우리 국어와 유사한 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게 받침이 있고, 존칭이 있으며 어순이 같다는 점 등이다. 전통적으로 효심이 강하며 끈끈한 대가족을 이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먹거리에서도 많은 공통점을 보여 배추, 무, 가지, 호박, 오이, 마늘, 당근 등 우리 시장이 옮겨간 것처럼 보였으며 족발, 닭, 오리, 만두, 국수, 꽈배기 등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곤 했다.
1949년 중국이 티벳을 강점하여 1959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한 이후 중국은 한족을 대거 이동시키며 中國化를 꾀하고 있다. 거리 플래카드엔 붉은 글씨의 온갖 한자가 난무하고 중국어와 위엔貨를 공식으로 지정하며 중국식 프로그램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하자원의 매장이 풍부한 티벳에서 여행은 엄격히 통제하면서도 무엇을 곶감 빼먹듯이 가져갈라나 그 험준한 산세에도 불구하고 단선 철로를 거의 완공 중에 있었다.
현지인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려면 당국으로부터 여행 허가서를 발급받아야 하며, 외국인마저도 입경 허가서 등 여행에 까다로운 절차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마치 우리의 일제 식민지를 연상할 정도로 강압과 억압의 그늘이 역력했으며, 나라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경제적인 측면으로 상쇄시키려 개발의 삽질을 여러 군데서 목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근대적인 산업구조에서 경제의 윤활유격인 돈을 염출해내는 방법은 늘어나는 관광객으로부터 우려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방문지에서 만난 티벳인은 맑은 하늘과 같이 깨끗하고 순수한데 반해 관광지에서 마주친 그들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만큼이나 판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사원이나 명소 앞엔 구걸의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현지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면 꼭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실크로드 상에 놓여있어 전통적으로 상업에 눈을 뜬 상인들은 순수와는 멀리 교묘한 방법으로 영리를 추구하여 바가지를 씌우려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처음 가격과 자리를 뜰 때의 그것은 약 3배 이상의 차이가 날 정도로 그들의 상혼에 씁쓰름할 때가 많았다.
티벳에는 물이 귀하다고 전해 들었으나 우리가 다닌 도로 주변엔 흙탕물이나마 항상 물이 흐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 청결이란 마인드는 저편으로 달아나 있는 듯 지저분한 모습 일색이었다. 의복은 세탁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려는 양 모두가 거무튀튀하였으며 건조해서 인지 몸도 잘 씻지 않는 것 같아 얼굴은 꼬질꼬질하였고 그들의 1-2M 곁에만 다가가도 악취가 심했다.
특히, 화장실에 가는 것은 제 2의 고산병이었을 정도로 역한 냄새는 태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삶은 끝없는 여행이라고들 한다.
여행은 삶의 안목과 식견을 넓히고 자신이 향후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자침(磁針)과 같으며 인생에서 다른 역(役)으로 사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넓디넓은 세계를 주마간산 격으로 몇 군데 다녀봤지만, 고산병이라는 고통을 안아가며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드넓은 고원의 광활함에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일말의 미소가 찾아든다.
영혼에 깊게 울리는 메아리를 따라서....
시간 속으로의 여행이었고 어쩌면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척박하고 버려진 무대임에도 문명의 시계바늘에 연연치 않고 그들만의 느릿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내딛는 그들의 모습을 존중한다.
티벳 고원에 피어난 고귀한 정신이 향불처럼 살아있길 바라며...
옴 메니 받메 홈.
첫댓글 다녀 오셔서 공부 많이 하셨습니다....^^ 늘~ 평화 로우시기를....^^ 제 사진도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_()_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