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 安 趙 氏
◆ 始祖 : 원윤공(元尹公) 조 정(趙 鼎)
우리 함안(咸安) 趙氏의 시조(始祖)는 휘(諱)는 정(鼎)이시다. 고려조(高麗朝)에 원윤(元尹)의 벼슬을 하셨고 후손이 함안(咸安)에 정착하여 대대로 세거 하면서 본관(本貫)을 함안으로 삼았다.
◆ 始祖에 대한 고찰
1). 서기1664년에 처음 간행한 후 1825년까지의 사대보(四大譜)기록내용
<참고> 四大譜
-1526(중종21) 병술보---대소헌선생 선대기록
* 갑진보 1664 목판본
* 무오보 1738
* 경자보 1780
* 을유보 1825
가). 서기1664년 현종 갑진(甲辰)년의 함안 조씨 최초의 족보에는 시조께서 신라 원윤(元尹)이라 기록되어 있었으나
나). 서기1738년에 간행된 무오(戊午)보에는 고려대장군 원윤(高麗大將軍元尹)으로 수정되었으며, 주서(注書) 하기를 고찰해보니 이전의 보첩에는 신라 원윤 이라 되어있으나 집안에 소장된 옛 기록 중에 고려조에 벼슬살이 하셨다 하였고, 또한 시조로부터 9대째의 전서공대에 조선조가 건국되었으니 신라부터 고려에 이르는 약 오백년 사이에 대수가 9대 밖에 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원윤(元尹) 이란 관직은 고려조의 관명인즉 고려 원윤(元尹)임이 의심되지 않아 이렇게 기록한다. 하였고
다). 서기1780년(庚子)과 서기1825년(乙酉)에 간행한 족보에도 위의 사실을 그대로 기재하고 있다
2). 잘못된 기록사항
가). 서기1926년 간행된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에 의하면 시조께서는 후당(後唐)시절 아우 부(釜)와 당(鐺)을 대동하여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 오셔서 고려건국에 수차례의 큰 공을 세웠다고 되어있으며,
나). 그 후, 1927년에 발행된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 에는 공의 이름은 정(鼎)이요 자는 우보며 호는 모당이요, 본래는 당나라 사람이었다.
신라 경애왕 시절에 부와 당 두 아우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함안 조씨가 되었으며 고려조의 대장군 원윤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며 시호는 충장이라 하였고,
다). 또,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의 유사(遺事)에는 공은 후당 희종 12년 정사년에 태어났고 지혜는 천명을 능가했으며 신장은 팔 척이나 되었다. 당나라가 태평하여 너무나 무료하다고 한탄하다가 동방에 난리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 경애왕 병술년에 절강성의 장길(張吉)과 함께 무장을 갖추고 귀화하여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등과 결의(結義)하니 세상이 이르기를 칠형제라 하였다. 처음 고려왕을 송도에서 만났을 때 왕건(王建)은 궁예(弓裔)의 신하였으나 장차 왕건(王建)이 왕이 될 것을 짐작하고 그를 도우겠다는 약속을 한 후 돌아왔다. 공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김선평 (金宣平) 권행(權幸)은 안동에서 기병(起兵) 하였다. 왕건(王建)이 공산동수에서 적에게 포위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 동수에 도착하니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은 전사한 뒤였다. 견훤(甄萱)과 전투하면서 왕건(王建)을 도와서 뒤 따라 송악에 도착했다. 경순왕 신묘년에 견훤(甄萱)을 안동에서 크게 무찔러 동경고을 일백 십여 성을 다 항복 받으니 고려 태조는 공을 대장군 원윤(元尹)으로 삼고 개국벽상일등공신(開國壁上一等功臣)으로 봉(封)했다.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趙鼎)과 장길(張吉)은 한나라의 조자룡(趙子龍)과 장비(張飛)와 같으니 당 나라 로서는 불행한 일이나 나로서는 큰 복이라 했다. 고창 칠현묘와 동수 충열사에 배향하였다.
<출처는 조씨 가장>이라고 기록 되고 있다.
3). 위의 사항들을 깊이 고찰해보면
가). 서기1825년 을유보(乙酉譜)이전의 사대보(四大譜) 에서는 이러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나).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을 위시하여 고려건국에 관한 역사기록 중에도 이러한 사실은 찾을 수 없음.
다). 조선 명신록과 동국 명현언행록이 모두가 그 출처를 조씨 가장이라고 명기 했으나 집안에 소장된 이러한 문적은 없음.
라). 고려태조가 시조공을 개국벽상 일등공신(開國壁上一等功臣) 으로 봉작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벽상공신 중에 시조공은 들어있지 않으며 관련문헌에 정의된 벽상공신은 아래와 같다.
벽상공신은 고려시대 공신(功臣)에게 내린 호(號)로서. <고려사><세가(世家)의 태조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 벽상공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명종이 무신난의 주동자들에게 내린 예 외에는 없다.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홍유(洪儒:殷悅),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今弼), 김선궁(金宣弓), 이총언(李言),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이도(李棹),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김훤술(金萱術),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 김홍술(金弘述), (金樂) 등이다.
또 무신 집권 때 벽상공신 칭호가 내린 인물은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3인이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이들 3인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인 데서 연유(緣由)한다.
마). 장길(張吉)에 관한 기록
정사(正史)에는 찾을 수 없으며 조선 명신록의 안동 장씨편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음
바). 이 처럼 존재하지도 않은 조씨 가장을 빙자하여 오백여년밖에 되지 않은 여말(麗末)의 사실도 허무맹랑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이나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의 천년이 넘는 고려 초의 여러 사항은 일고의 값어치도 없다
4.). 결론
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엄연한 현실역사로써 기록되어야 할 사적들을 선대를 과대히 미화하려는 뜻으로 없는 사실들을 진실인양 남기는 것은 오히려 선대를 욕되게 하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1979년의 기미보로부터 공공연히 이러한 사례들이 관행되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니 빨리 시정되어야 하겠다.
나). 앞으로는 시조공의 행력(行歷)은 고려(高麗)원윤(元尹)으로 기록해야 하겠다.
2004. - 함안조씨 대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