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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정희의 소설 <웃으면서 죽는 법>을 <현대문학>(2006년 7월호)에서 읽었다. 시작부터 가관이다. "그날 아침, 나는 드디어 목을 맬 도구를 결정했다.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그의 감색 버버리코트에서벨트를 빼냈다... 그리곤 벨트를 매달 곳을 찾아다녔다... 매듭을 지은 벨트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아다가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늘어지고 낡은 연하늘색 잠옷을 입고 목에 감색 벨트를 걸고 있는 모습이 아주 기괴하게 보였다. 목 주변은 벌써 벨트에 쓸려 벌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약간의 궁금증은 유발할 만하다. 이 '기괴한' 아줌마의 행동거지와 의식의 흐름을 조금은 더 따라가볼 맘이 생기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고 있지나 실제로 목을 매달면 어떤 기분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침에에 올라앉아서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벨트를 꽉 당겨보았다. 벨트를 바싹 당기자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양손에 힘을 가하자, 손에서 힘이 저절로 빠지면 벨트가 풀어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문득 아주 오래전에 한 의대생 친구가 '무용담'처럼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간지라 대학생활의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모이면 좌중을 압도한 건 이 의대생 친구였다. 특히나 해부학 실습을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우리는 숨도 크게 못 쉬었다(구역질을 하는 여학생 얘기는 꼭 들어갔다). 사체를 한 구씩 사서 해부학 연습을 하기도 하고 여자 사체는 지방이 많아서 애로가 많다는 이야기 등등으로 아직 여자 친구도 없던 주변 친구들의 야코를 한껏 죽여놓더니, "너네 그거 알아?"하면서 보탠 이야기는 넥타이로 목을 맨 다음에 한쪽 발은 침대를 딛고 나머지 한쪽 발로는 바닥을 디디면서 자빠지듯 목을 뒤로 쭉 빼는 사이 두 팔로는 넥타이를 전방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포즈의 자살연습법에 관한 것이었다(아니면 침대 기둥에 걸친 벨트를 목에 걸고 반대방향으로 기어가는 것이었나?).
'자살연습법'이란 표현은 다소 부정확한데, 그러한 기괴한 짓이 실제로 의도하는 건 죽음의 경험이 아니라 오르가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로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거의 유사-오르가즘을 경험한다고 했다. 이게 자위 정도와는 비교도 안된다나 어쩐다나. 짐짓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나는 실제로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자가 단속에 분주했다. 아직 오르가즘에 목숨 걸 나이는 아니었기에.
소설에서 아줌마 화자는 그런 순간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시 자살 기도를 방해받는다. 그러고 켜놓은 TV에서 권총 살인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는 다시 자살 생각에 전념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게도권총이 있다면, 페트병을 사용해서 머리를 관통시켜 시신도 온전한 상태로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언젠가 가보았다는 쿠바 교외의 헤밍웨이의 집과 그의자살. "그는 쿠바를 떠나 고국의 아이다호로 돌아가서 카빈총으로 자살했다. 아마도 그는 연화에서처럼 긴 카빈총을 거꾸로 세우고 총신을 입 안에 넣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까? 내 상상으로는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가 사용한 총은 9밀리가 아닌 카빈이었으므로 그의 뒤통수는 절반쯤 산산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줌마 총을 구할 가망성이 희박하다는 현실 때문에 권총자살은 포기한다. 그때 다시 걸려온 전화는 미국에 이민 간 대학동창의 전화였고 두 사람은 루게릭병에 걸려 10년전부터 투병중인 한 친구의 안부를 떠올린다. '나'는 그 친구가 병에 걸렸다고 고백한 초기에 그냥 죽으라고 말함으로써 분위기 아주 썰렁하게 만든 기억이 있다. '나'의 심사로는 "청춘도 지나왔고, 사랑도 했으며, 결혼도 해봤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인생의 행복을 맛보다았다는 자조적인 감정에 내몰려서 한 생각이었다."
몹쓸 병에 걸린 친구 '현임'은 대학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얽었고, 붉은빛이 도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검정 터틀넥 스웨터와 하늘거리는 검정색 저지 롱스커트를 입고 반들반들한 생기넘치는 얼굴에 자신감으로 꽉 찬 미소를 짓고 큰 키를 휘청거리며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은 너무 당당했다. 희디흰 손가락 사이로 가늘고 긴 담배를 물고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빛나는 미래를 포기하고 금속공장 여공으로 취헙한 시몬느 베이유 이야기를 할 때의 그녀에게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그녀의 추종자가 되었다." 하니, 그 친구 또한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삶을 무엇인가에 투척하는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주었을 법하다.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의 경우 많은 부분이 그렇듯 현임도 자신의 내면에서 도전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철학을 전공하고 영화판에 쫒아다니다가 배추장사를 했고 무슨 종교에 빠진 남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나, 생활은 기승전결이 무시된 컬트영화 같았다. 원래 현임의 기질 속에 타고났던 열정과 외면적 열등감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구애를 표현하는 그녀의 강렬함이 합쳐져서 빠르게 두 사람이 맺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의 삶은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학창시절의 그 빛나던 지성은 누추한 일상 속에 엉겨서 흘렀다." 그러니, 루게릭병에 걸렸다고 울었을 때, "죽으라고, 그냥 죽으라고, 그것이 너답게 죽는 거라고, 너를 지켜보는 나의 바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로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죽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도 남을 죽이는 일만큼의 노고를 필요로 하기에. "80년대만 하더라도 수많은 시위대 앞에서 분신자살 같은 극렬한 항의가 잦았다. 그런 죽음에 비해 목을 매달 자리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헤맸던 내 모습이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한낮의 햇볕이 강렬하게 쪼이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죽음은 어떨까. 물이 떨어지는 육신을 상냥하게 맞아줄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해 불테 타 죽는 것은 육신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약을 구할 수 있으면 그것도 손쉬운 방법일 텐데... 아, 지금 언니가 말한 것처럼 비닐봉지를 이용한 질식사도 신체를 훼손시키지 않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누가 뒤에서 손을 묶어줄 것인가?"
오래전 일이지만 나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고 잠수교를 건넌 적이 있었다. 요즘처럼 장마철이어서 흙탕물인데다가 유속이 너무 빠라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주변에 건져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이런 시를 잠깐 쓰는 걸로 참아두는 도리밖에 없었다: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너무도 두꺼운 책,/ 한장씩 찢어 달빛으로 태운다. 어둠의 재가 날린다./ 방안 구석구석에 어둠이 포진한다./ 장회를 신은 유령들! 언젠가,/ 나는 맨발로 물에 빠질 생각을 했었구나/ 발목엔 아직도 그때 물린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나는 자꾸 누군가를 깨물어주고 싶다." 미친 개처럼?
소설의 화자는 루게릭병에 걸린 친구를 찾아서 "개집하고 가죽공장 사이에" 있는 교외의 외딴집을 찾아간다. 그러는 중에 생가죽을 말려서("말이 가죽이지 '살'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했다") 가죽을 만드는 인부로부터 그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70도 훨씬 넘긴 노인"처럼 보이는 친구를 만난다.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그냥 죽으라고 했던 그 말을 철회하러 왔다는 말을, 널 보고 난 후에 자살하려고 했다는 말을 나는 꺼내지 못했다." 며칠 뒤에는 나는 10여년 동안 아내를 간호하던 현임의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는다.
"나는 삶의 밑바닥의 정체란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소리치는 대신에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비명 같은 이상한 소리로 미친 듯이 악을 쓰면서 남편을 불러대었을 현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과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없을 선에이르렀을 때, 인간의 긍지를 잃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선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속에는 더 무시무시한 경우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죽음보다도 삶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백화점 슈퍼에 들렀다가 상처난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가죽 숄더백을 보고 사든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거울 앞에 앉아 그 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깊이 숨을 쉬고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백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 백의 상처에서받은 느낌이 그처럼 뚜렷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볼을 적셨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백 위에 떨어진 내 눈물이 가죽을 적셔서 백의 상처를 점점 더 진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한 에피파니의 순간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모처럼 읽은 '진한' 소설이지만, 몇 가지 불만이 없지는 않다. '웃으면서 죽는 법'이란 제목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죽' 정도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상징성도 풍부하고. 그랬다면, 이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자살에 관한 무용담들을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동물원'이란 비유가 있다. 이젠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가죽공장', 이건 어떤가? 한동안은 버틸 만하지 않을까?
06. 07. 18.
P.S. 이 논평은 마감에 쫓겨 몇 자 적은 것이고, '화요논평'의 모델이 될 수는 없겠다. '시의성'을 고려하려고 했지만 요즘에 미사일과 물난리 말고 다룰 만한 이슈도 없는데다가 그 둘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 얘기가 없다(그에 관한 기사들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차고 지루하다). K님이 새로운 스타트를 끊어주시길 기대한다... |
첫댓글 본래 글에 이어지는 로쟈님의 'P.S.'에 미소짓게 되는 때가 자주 있는데, 이번 논평에도 P.S.가 등장했군요. 뭘 한다는 게 부담감이 없을 수는 없나봅니다. 아무리 '마음편하게' '자발적'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마감'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즐거운 부담이란 걸 생각해보게 됩니다.../사실 이 꼬리말을 쓰려고 이 글을 다시 클릭한 것은 아니었는데, 추신을 보다가 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오늘 오후에 문득 로쟈님의 이 논평이 떠올랐습니다. 카뮈와 함께요. 카뮈 때문인지, 로쟈님 글 때문인지, '웃으면서 죽는 법'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그 시작과 순서는 모르겠습니다.
<웃으면서 죽는 법>이란 제목에서 카뮈의 <행복한 죽음이>이, 중간 잠수교와 연관한 로쟈님의 기억에서 로쟈님의 시와는 별개로 <전락>이 떠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아서 뭘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 때문에라도 '읽지도 않은' 이 작품이 생각될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거울 앞에 앉아 그 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깊이 숨을 쉬고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백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 백의 상처에서받은 느낌이 그처럼 뚜렷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볼을 적셨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백 위에 떨어진 내 눈물이 가죽을 적셔서 백의 상처를 점점 더 진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눈물' 때문입니다.'바라만 봐도 뭔가 안겨져오는 시선의 힘, 손만 대보아도 후벼파는 고통'을 볼, 결코 과장되지 않는 눈/마음이라는데서, 이 소설을 언제 접하게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덕분에 '어떤 인상'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오늘 오후 돌연 출현한 카뮈를 생각하다가, 몇 자 적게 됩니다...(쓰지 않아도 아실테지만, 글, 잘 읽었습니다...)
홍수 속의 잠수교...장마 때면 언제나 뉴스에 단골로 나오는 장소.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도 그런 다리가 있는건지... 그렇게 잠길 다리를 왜 만들었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논평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소설을 귀동냥하게 돼서 좋습니다. 비평고원을 드나드는 이유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소설이고 텍스트고를 떠나서 그냥 이야기요. '세상은 가죽공장'이라는 비유...예전에 가죽농장에서 동물들을 산채로 처리(!)하는 광경을 영상으로 본적이 있는데 그 영상과 겹쳐져 꽤나 부대끼는군요. 첫번째 화요논평 잘 읽었습니다.
사실 너무 폼나게 쓰면 다른 분들이 부담스러워하실까봐 적당히 썼죠, 라고 하면 '폼나겠지만', 실상은 그제 아침에 이거라도 써야겠다며 허둥대며 쓰느라고 오타도 많습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인간의 피부 (결국 '가죽)에 대한 메를르 퐁티의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이군요. 우리의 가죽은 '나와 이 세계가 맞닿는 지점'이자 '세계를 향한 나 자신의 마직막 경계'이기도 하다는 거지요. 남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가죽'이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의 대변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가끔씩 그 가죽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은 당황해하기도 하지요. 왜 주인공 아줌마는 '상처난 가죽으로 만든 숄더백' 을 두고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녀는, 결국 자신과 세계와의 경계에서 허덕이는 자신이, 저 상처난 가죽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