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음식史 ① 냉면과 인천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해장국과 추탕, 그리고 냉면이 과거 인천의 향토 음식이었다고 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1930년 무렵까지는 ‘상품으로서 인천 고유의 음식’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1910년대 인천항 축항 공사와 미두취인소의 번창은 많은 외지 인구를 인천으로 유인했다. 이렇게 유입된 각지 외지인들에게 제공된 음식이 바로 해장국과 냉면, 그리고 추탕이었다. 밥집들은 늘어나는 매식(買食) 인구에 비례해 점차 번창해 가면서 한국 초유의 대중 외식업을 발생시킨 것이다.
더불어 구미에 맞게 향상된 이들 음식에 대한 소문이 전국 각지로 전파되면서 ‘인천 원조 외식 메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특히 외식 산업의 효시가 인천이라는 점은 향토학자이셨던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풍경』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미두장을 중심으로 점심을 사 먹는 인구가 부쩍 늘면서 냉면, 비빔밥, 장국밥 같은 비교적 고급인 식사를 제공하는 업소가 탄생했다. 평양관, 경인관, 신경관, 사정옥, 복영루 등이 번창했다. 주문 받은 음식을 직접 현장에 배달도 했는데 값은 업소 내와 같은 20전(錢)이었다. (중략) 당시 서울에는 종로에 몇 군데 설렁탕집이 있을 뿐 이러한 규모는 아니었다. 근대식 외식업소도 역시 인천이 효시이고 서울에 생긴 것은 조선박람회(1925년)부터였다.”
주막이나 방술집 같은 것이 전국 곳곳에 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정식 외식업소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일정한 손님이 없었다는 점과 메뉴의 비규격화 때문’이다. 당시의 주막에는 그야말로 드문드문 길 가던 길손 외에 상시 외식 인구가 없었던 데다가 음식 자체도 ‘상품으로서 질적, 양적 규격’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곳이 인천이었다. 우선 미두장을 통해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고정 외식 인구였으며, 인천 업소들은 이들을 상대로 규격화된 똑같은 음식, 즉 음식의 내용물이 균질화되고 정량화된 규격품을 제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품으로서 인천 고유의 냉면이고 해장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인천은, 원래 탄생한 곳에서는 양과 내용이 만드는 사람에 따라 들쭉날쭉했던 음식들을 나름대로 정식 상품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으로 손님들에게 공급했다는 음식사적인 효시라는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냉면은 그때도 겨울 음식인 평양냉면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국수와 곁들이가 비슷할 뿐 국물은 동치미가 아니라 육수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귀물(貴物)이었던 얼음덩어리가 들어있는 것이 신기했고, 사철 음식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구절을 역시 신 박사의 저서『먹는재미 사는재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고유한 육수의 변화와 얼음덩어리의 첨가’가 냉면을 인천화, 사계절화한 효시이면서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인천의 냉면이 얼마나 유명했는가, 하는 것은 “서울의 호사가나 한량들이 인천 냉면을 먹으러 경인기차를 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서울에서 한량들이 장난삼아 사정옥에 냉면을 주문했더니 자전거를 타고 종로까지 배달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경인선이 놓이기 전의, 믿기지 않는 내용이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인천 냉면집들은 이미 서울보다 훨씬 전에 외식업소로서 체제를 갖추었고, 동시에 맛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천 냉면에 관련한 것으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 당시 배달원들이 보여주던 ‘곡예’였다. 어려서 직접 목격한 바도 있는데, 스무 그릇도 넘는 냉면 대접이 들어찬 긴 목판을 한쪽 손으로 받쳐 어깨에 얹고 반쯤 옆으로 뉜 자전거를 타던 배달원의 아슬아슬한 곡예는 가히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인천 냉면이 시들해진 것은 1931년 이후로 대략 미두취인소가 쇠퇴하는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인천 냉면이 점차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6․25 후에도 내동이나 용동 일원에는 인천 전통의 냉면집들이 몇 군데 남아 있었다. 문 앞에 긴 대나무 장대를 새워 끝에 하얀 종이 술이 달린 둥근 테두리를 매달아 놓았었던 것을 어려서 본 적이 있다.
“냉면집의 빨간 깃발은 그 당시부터 생겨난 풍경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냉면을 찾자 눈에 띄는 깃발을 음식점 앞에 내걸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붉은 깃발은 요즘에 생겨난 것이다.
이제 옛날 명성 있던 냉면집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지금은 내동 골목에 ‘경인면옥’과 숭의동의 ‘평양옥’만이 노포(老鋪)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경인면옥의 육수는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향수를 자극한다. 그밖에, ‘인천 냉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안의 ‘옹진면옥’ 숭의동의 ‘춘천막국수’ 그리고 최근에 생겨난 남동구의 한두 집이 냉면 마니아들의 미각을 그런대로 만족시키고 있다. 동구 화평동 일대의 속칭 ‘세수대야냉면’은 정통 인천 냉면과는 거리가 있음을 밝힌다.
제 고장의 평범한 향토 음식이었던 냉면은 이처럼 인천을 통해 최초로 외식 상품으로서 규격을 갖추게 되었고 다시 각지로 파급됨으로써 전국 보편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2007. 5. 11. 인천도개동 사보 여름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