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응, 그래!”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고, 밥 맛있게 먹고, 쉬 어디 가서 하지?”
“화장실”
“그래 바지에 쉬 하면 어떤 사람?”
“미운사람”
늘 아침이면 대문을 나서면서 나누는 승현이와의 대화입니다.
발음은 정확하지 않지만 제법 마를 곧잘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승현이가 태어난 지 벌써 10년.
지난 10년 세월! 나에겐 정말 길고 긴 시간들이었습니다.
1981년 12월 11일 6시 57분 2.9kg의 승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때의 기쁨! 신기함! 엄마가 되었다는 묘한 신비감!
그러나 그 신비함도 잠시뿐 이었습니다. 아이는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하고 별로 건강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한 달이 되었을 때 소아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승현이를 보시고 “혀를 자꾸 내 놓죠?” 하시더니 손을 살펴보시고는
대뜸 하시는 말씀이 “정상아는 못되겠네요.” 하셨습니다.
우리 아이가 설마 “아니에요. 말도 안돼요. 그럴 리가 없어요. 선생님 잘못 보신 것에요.”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다른 소아과로 데리고 갔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상인은 염색체수가 46개인데 21번 염색체가 2개로 47개인 다운증
일명 몽고리즘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현기증이 났습니다.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해야만 할 것인가!
승현아빠한테는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한 달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이는 건강하질 못해서 거의 매일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음식도 통 먹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아픔, 고통은 장애아를 키우지 않은 분은
상상할 수도 없는 눈물의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또한 인생에 대하여 골똘히 탐구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승현이를 통하여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 때부터 전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우리 승현이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정상아로 생각하고 조기교육을 내 나름대로 시켜보자 생각했습니다.
3개월째 국민서관에서 나온 조기교육 책을 월부로 30만원어치를 들여 놓았습니다.
승현아빠는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한테 그림책을 보여주고 이야기도 들려주고 하는 것을 어이없어 했지만
그렇게 하는 제가 너무나도 측은한지 그런대로 협조하여 주셨습니다.
돌이 지나도록 승현이는 걷지를 못했습니다.
밥만 먹었다 하면 걷지 못한 아이를 세발자전거에 태워서 놀이터에 갔습니다.
그네도 태워주고 미끄럼도 태워주면서 몸을 부추기며 걸음 연습을 시켰습니다.
1년 8개월 여름이었습니다. 풍선을 가지고 놀다가 풍선이 날아가자 풍선을 잡으려고
한발, 두발, 세발 걸었습니다.
그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어린 생명을 이 세상에 주셨으니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자 빨리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답답한 마음에
5살 때 지금은 없어진 조촌동 농아학교에 데리고 갔습니다.
너무 어려서 받을 수가 없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니는 구암교회 선교원에 넣기로 작정하고 선생님을 만나서
“우리 아이는 정상아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받아주시겠습니까?” 했더니만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선 한번 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일반 아이들과 어울려서 잘 따라 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상상외로 엄마인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감사하게 1년을 마치고 선교원을 1년 더 다니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농아학교에서 두 분 선생님께서 승현일 학교에 보내라고 가정방문을 오셨습니다.
선생님들은 무척이나 자상하고 따뜻했습니다.
1987년 3월 농아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학교는 사립이라 학교라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장애아를 위하여 어렵고 힘든 교육의 길을 택하신 선생님들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따로 없이 눈에 보이는 천사였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정상 아이들과 같이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학부모들은 뜻을 모아서 도교육위원회에 공립학교를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사립학교는 폐지되고 공립학교인 군산명화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교장선생님이하 여러 선생님의 노력으로 전국 어느 학교 못지않게 아름답게
우리 아이들이 꿈의 동산으로 가꾸어 주셨습니다.
승현이가 이제 5학년.
지금은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말도 제법 잘 하고 밥도 잘 먹고, 공부도 잘 합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고집이 세고 요즘도 가끔 바지에 실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진 군산명화학교 선생님들의 자상함과 따뜻함,
넘치는 사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승현아! 부디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서
정상인 못지않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다오.
그리고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