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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산조 창시자 김창조
김창조는 전남 영암의 세습적 율객(律客)의 가정에서 태어나 근세 민간 기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그는 1890년 무렵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 리의 틀을 갖춘 가야금산조를 작곡함으로써 우리나라 모든 산조 음악의 효시가 됐다. 가야금산조 김창조의 진양조 양승희 연주 |
1890년경 진양조, 중머리 , 중중머리 , 잦은머리의 틀을 갖춘 하나의 음악 형식인 가야금 산조를 작곡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산조 음악의 효시가 된 것이다. 김창조의 산조 창작은 한국문화유산 중 탁월한 가치를 지닌 예술로써 11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각 악기마다의 기악 독주곡으로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워왔다. 가야금 산조 창작 이후 10여 년 후에는 김창조 산조 형식과 양식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백낙준에 의해 거문고 산조가 창작되었고, 뒤를 이어 박종기 , 강백천에 의해 대금 산조, 지웅구에 의해 해금 산조, 전웅선에 의해 단소 산조, 편재준에 의해 퉁애 산조 이충선에 의해 피리 산조, 한일섭에 의해 아쟁 및 새 납 산조가 창작되었다.
김창조류 가야금 산조를 연주하는 양승희씨 김창조 산조의 미학적 고찰 산조가락에서 변화를 주고 싶을 때는 앞에 나온 가락들을 덜어내고 가장 순수한 기본음들만을 장단틀에 얹어 만들었는데 이것은 새로 시작되는 가락의 제시(암시)의 측면과 여백의 美와 함께 변화의 묘미를 나타내며 긴장에서 이완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변화의 본체는 지극히 순수한 것부터 시작된다는 「장자」「心齋」의 예술철학사상을 김창조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김창조는 긴장을 이완시키는 방법으로 가장 순수한 기본음들만을 사용하였고 이것은「단순」그 자체가 아닌 조용한 가운데 위대한 힘이 응축되어 內在된 것으로서 독일의 빈켈만(J.J.Winckelmann)의 예술의 아름다움은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에 있다고 한 희랍예술의 특징인 예술철학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가락을 허탄하게 분산시키지 않고 가야금가락과 장고장단이 혼연일체가 되어 긴장과 이완의 대상을 모두 잊게 함으로써 무아의 경지의 경계로 이르게 한다. 이러한 경계는「大宗師」에서 장자가 남백자규(南伯子葵)와 여우(有道者)의 대화내용을 통하여 道를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즉, 道를 체득하여 세계의 존재와 우주만물의 존재를 잊게 되는데 자신의 존재마저 잊는 무아의 경지에 이른 뒤에는 마치 아침 햇볕이 어둠을 뚫듯이 눈부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대립이 없는, 도의 절대적인 경지를 보게 되며 절대적인 경지의 진리를 보게 되자 시간에 대한 의식도 잊게 되고, 고금을 초월하게 되어 생사의 구별도 없는 최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道의 체득으로 無極의 절대 세계에 참입(眞入)하는 실천적 process, 단순한 개체적인 나의 마음과 몸을 던져 없애주고 우주적인 나(自我)라는 순수한 자기 일체의 생멸 변화를 포함해서 영겁(永劫)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을 道와 명합(冥合)하는 것으로 최고의 경지인 무아의 경계를 말하고 있다. 莊子의 (齋物論篇)에서도 남곽자기(南郭子菉)와 안성자유(顔成子遊)의 대화에서 민간의 음악, 인뢰와 지뢰는 들었어도 하늘의 음악, 천뢰는 아직 못 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과 혼연 일체가 되어 道가 忘我에 의해 체득(體得)될 때만 천뢰를 들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므로 莊子는 자신이 도달한 예술정신의 무한성을 묘사했다. 산조 안에서 긴장과 이완은 곡 전체를 통하여 진양조와 중모리를 긴장과 이완의 대비로 볼 수도 있고, 자진모리와 휘모리를 긴장과 이완의 대비로 볼 수도 있으며, 진양조 안에서도 한 단락으로 또는 한 장단 안에서도 대비를 나눌 수 있고 마디로도 나누어 볼 수 있다. 엇박의 美
김창조는 산조 속에 수많은 엇박의 장단의 표를 통하여 한정된 규격에 매이지 않고 훌훌 떠나 참담한 현실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인간의 존재는 제한적이며 유한한 성격을 지닌 존재로 결핍과 불안과 고통의 상태에 놓여지게 되면 항상 모순 속에 빠지게 되는데 예술만이 이러한 압박과 위기 속으로부터 인간의 생명력을 회복시켜 줄 수 있고 절박한 상태일수록 주체적 자유의 희구를 강열하게 표출한다는 헤겔(G.W.F Hegel)의 미학사상과도 일치한다. 장자의 예술정신에서도 김창조의 엇박의 美를 조명할 수 있는데 장자의 遊의 기본조건이 구체적인 유희가 아니고 오히려 구체적인 유희 속에서 정현되어지는 자유활동을 취하여 그것을 승화시켜 나감으로서 정신상태가 자유로운 해방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遊」의 개념이다. <大宗師>편에 공자가 제자 子貢을 자상호(子桑戶)의 문상에 보냈는데 孟子反과 子琴張이 친구의 遺體를 옆에 놓고 琴을 연주하며 서로 화합하여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자공이 이상히 여겨 공자에게 물으니 “그들은 세상 밖에 노는 사람들이요, 나는 세상 안에 노는 사람이니 안과 밖이 서로 미치지 못하는구나. 그들은 바야흐로 造物者와 벗이 되어 天地의 一氣가 변화하는 대로 놀고 있으니 끝과 시작은 반복되어도 그 발단은 알지 못하는 무아의 경계에서 노니는(遊)구나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莊子의 遊의 개념은 장단 속에서 노니는 김창조 산조의 엇박의 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인생의 가치를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하는 상승적 허무주의를 엇박의 美를 통하여 조명해 본다면 우주론적 존재 위에서 예술의 美를 설정한 셀링(F.W.S. Schelling)은 주관과 객관의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절대자로서 대립을 해소하여 동일성의 존재로 보았는데 그의 의식과 무의식의 동일성은 지적인 영역에서 보면 모순의 개념이나 이러한 모순을 예술은 기적적으로 해소할 수 있어서 예술은 절대자의 유일한 계시로서의 위치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동일성의 존재로 보는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예술을 통해서 엑스타시로 들어가는 세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엇박은 모순된 것 같지만 遊의 개념과 함께 액스타시를 경험 하게하는 최고의 경계로 가는 멋이다. 철링의 예술이론을 계승한 졸거(K.W.F.Solger)는 예술의 현상에서 나타나는 두 세계를 단순한 동반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은 현상에 나타난 이념이 궁극적으로 「無」 극치점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념은 예술가의 오성이 특수를 지향해가는 가운데 말미암으며 이념은 이를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되는데 이때의 이념은곧 「無」로 되고, 이념이 「無」에로 옮겨지는 바로 그 순간이 곧 예술의 진정한 뿌리가 있는 곳이다」고생각했다. 엇박의 美는 이러한 잠재력을 조화시켜 「無」까지 도달하여 인생과 우주의 근원 속에 가야금산조의 美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를 나타내주는 김창조 예술의 정신이기도 하며, 이러한 다양한 美的 통찰력을 지닌 김창조 산조는 긴장과 이완의 美가 엇박의 멋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뛰어난 불후의 명작으로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양승희 편저 <김창조와 가야금 산조에서> |
가야금(伽倻琴), 가야고, 가얏고 좁고 긴 장방형의 오동나무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나무기둥[雁足]을 세워놓은 현악기. 연주자는 오른손으로 줄을 뜯거나 퉁기고, 왼손으로 줄을 떨거나 눌러서 소리를 조절한다. 음색이 맑고 우아하며 연주기교가 다양하다. 궁중음악이나 풍류에 사용되는 것을 법금(法琴) 또는 풍류 가야금이라 하며, 민속악에 사용되는 것을 산조 가야금이라 하는데, 법금이 원형이고 산조가야금은 19세기말 이후에 널리 쓰게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흙인형(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문헌인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흥왕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져 그 곡 수가 185곡에 이르렀다고 하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정과 민간에서 크게 애호되었다. 19세기말 김창조(金昌祖) 등에 의하여 가야금산조가 창시되면서, 전통적인 가야금, 즉 법금보다 빠르고 다양한 산조 기교에 적합한 소형의 산조가야금이 만들어져 널리 보급되었다. 법금과 산조가야금은 크기와 구조가 서로 다르다. 법금은 하나의 오동나무 판의 뒤를 파서 만들고, 부들을 고정시키는 공명동 하단에 T자 모양의 양이두(羊耳頭)가 있지만, 산조가야금은 거문고처럼 오동나무 앞판에 밤나무로 된 뒤 판을 붙여 만들고, 양이두 대신 봉미(鳳尾)를 붙인다. 법금은 길이가 151㎝, 너비 28.5㎝이며, 산조가야금은 공명동의 길이가 136㎝이며, 너비가 20㎝ 정도이다. 가야금줄은 명주 생사로 만드는데, 음높이에 따라 줄의 굵기가 달라, 낮은 음은 굵고, 높은 음은 가늘다. 가야금은 영산회상과 보허자계 변주곡, 가곡반주 등 지난날 풍류방에서 연주되었던 대부분의 악곡에 편성되는데, 이 경우는 법금을 주로 사용한다. 산조가야금은 민속풍류, 가야금병창, 민요, 창극, 무용곡 등의 반주로 널리 쓰이지만, 19세기 말경에 발생한 산조에서 악기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 가야금산조야말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순수한 기악독주곡이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산조로는 강태홍(姜太弘), 김병호(金炳昊), 김윤덕(金允德), 김죽파(金竹坡), 성금연(成錦鳶), 심상건(沈相健), 최옥삼(崔玉三), 서공철 등의 가락이 있다. 특히 가야금은 1960년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창작국악곡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는데, 황병기, 이성천 등의 작품을 통하여 독주악기로서의 가치와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연당야유도(부분) - 신윤복 그림 : 간송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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