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부락이란 동일조상에서 나온 동본동성이 한 부락 또는 한 지방에서 집단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193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마을의 반수 이상이 동성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마을 구성하는 마을사람 전원이 한 성씨를 갖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한 성씨가 비록 주민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을 주도 할 때 그 마을을 동족부락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족부락의 개념을 부락 내 동성집단의 구조와 기능이 비동성 각성(非同姓各姓) 거주집단까지를 포함하는 부락 전체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또는 지배적 영향력을 갖는 부락을 동족부락이라 할 수 하기도 한다.
본 조사에서 동족부락이라 함은, 하나의 자연촌락에서 하나의 성씨 혹은 두 세개의 성씨가 동본으로 세거하면서, 존재할 때 동족부락이라 설정하여 파악하였다. 조사의 범위는 대덕구로 한정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옛 회덕현의 행적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동구 직동·가양동·흥룡 등과 유성구 전민동 일대가 제외되었다.
◎ 대덕의 동족부락
대덕구 지역에서 파악된 동족부락은 약 40개 마을이었다. 물론 이러한 마을들 가운데에는 한마을에 2∼3개성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도 각각 별개의 동족부락으로 파악되었다. 그런 예로 와동 평촌의 충주박씨·순창설씨, 장동 산디의 경주최씨·옥천전씨·창령조씨, 갈전동에 원주변씨·제주고씨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자연촌락을 하나의 마을로 보면 37개 촌락에 해당된다.
그런데 대덕구의 자연촌락은 대덕구가 1960년대 이후 점차 도시화·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개발되어 현재 동족부락으로 존재하는 마을은 극히 적다. 조사된 동족부락 가운데 현재까지도 동족부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에서와 같이 모두 19개의 자연촌락이다. 이러한 촌락은 현재 대부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거나 대청댐 주변의 상수도보호구역이어서 온전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19개 마을을 제외한 23개의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 자연촌락이 사라지게 된 것은, 첫째로는 대청댐 건설로 황호·부수동처럼 사람이 거주하였던 마을 전체가 수몰된 경우이며, 둘째로는 신탄진동·덕암동에서처럼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상업지역과 주택지로 개발된 것이고, 셋째로는 대화동의 1·2 공단과 목상동·문평동·신일동의 3·4 공단처럼 산업단지로 개발된 경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상서동·평촌동처럼 국가기업이 입주하고 주변에 공장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공업지대가 되었다. 이러한 개발로 자연촌락들이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아울러 촌락의 인문 사회적 환경도 파괴되었다.
◎ 동족부락의 형성시기
각각의 동족부락들이 언제에 형성되었는가하는 점이다. 대덕구에 현재 남아있는 동족부락 가운데 정확하게 부락이 형성된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는 극소하다. 다만 후손들의 증언으로 입향조의 생몰 년대를 족보상에 찾아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입향시기를 대략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모두 27건이었다.
대덕의 동족마을 소재지
우리나라의 마을은 그 마을의 민가가 밀집한 마을을 집촌(集村)이라 하고, 민가가 흩어져 있는 경우를 산촌(散村)이라 한다. 동족부락의 경우에 집촌이 많으며 산촌이 적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동족부락이 위치한 곳의 지세를 조사한 선생영조(善生永助)에 의하면 1,685개 마을에서 산기슭에 위한 것이 602개, 평야에 위치한 마을이 356개, 배산임수에 위한 것이 277개, 강가에 위치한 연하부락이 98개,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 97개, 바다에 임한 임해부락이 62개, 구릉에 위한 것이 54개, 산음에 위치한 것이 51개, 분지에 위치한 것이 44개, 그리고 연도에 위치한 것이 44개 였다고 한다.
동족마을의 구조
한 동족부락의 구조를 언급하게 될 때 그 마을에 양반 또는 상민이나 천민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존재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마을의 신분구성에 있어서 어느 신분 층의 숫자가 주도적으로 많았는가 또는 특정 신분의 인구수와 관계없이 그 마을에서 어느 신분 층이 주도적이었는가에 따라서 반촌·일반 촌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회덕에서 파악된 동족부락의 경우는 대부분 반촌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회덕의 동족부락이 대부분 반촌으로 이루어진 것은 회덕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양반이 특히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마을이던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반은 있기 마련이고, 양반들은 항상 마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느 자연촌락에 양반만 거주한다든지, 아니면 양민이나 천민만이 거주하는 마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동족부락으로 파악되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양반이 그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비록 호구 수는 적어도 양반이 주도하였던 마을은 반촌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회덕에서 파악된 자연촌락의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반촌으로 파악된 경우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주도권 잡고 있던 자연촌락들은 양반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고, 따라서 토지에 경제적 기반을 둔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의 사회적 이동이 다른 신분 층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오래도록 후대까지 자연촌락이나 집성촌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반촌의 경우에도 그 마을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회덕현의 경우에 있어서 현 내의 주도적 성씨가 어느 성씨냐에 따라 붙여진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회덕향안}의 서문에는
내가 생각하건대 호서(湖西)에는 옛부터 삼대족의 이름이 있었으니, 연산의 김(金)과 이산의 윤(尹)이고 그 하나는 즉 회덕의 우리 송씨였다. 그러므로 향안에 수록된 송씨가 많고, 일향 중에 또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는 칭(稱)이 있으니 강씨가 다음으로 많다. 무릇 김·윤·송 삼족은 서로 혼하여 친목케 된 의가 더욱 다른 바가 있으니 그 가장 현저한 성씨들은 경주김·연안이·동래정·반남박·순천박씨이며, 황·한·연·변·노·양씨 등이 별처럼 이어져 그 거주지와 선영이 이어져 있고, 경조사에 빠지지 아니하니, 이미 족히 은근히 접촉하고 기쁨과 사랑을 맺고 있다.
라 하여 한지역내의 신분상의 위상의 차이를 보여 준다. 즉 회덕지역은 은진송씨와 진주강씨들이 많고, 그 다음으로 경주김씨, 연안이씨, 동래정씨, 반남박씨, 순천박씨 순 이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회덕황씨, 청주한씨, 곡산연씨, 원주변씨, 신창노씨, 남원양씨 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씨는 회덕 내에서 대부분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동족부락 사이에도 그 마을에 근거를 둔, 양반의 사회적 위상에 따라 어느 정도는 서열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이 세거하였던 자연촌락은 촌락의 위치가 산기슭과 구릉 지대에 존재하였고, 평야지대에 촌락을 형성한 경우는 몇 사례되지 않았다. 예컨대 은진송씨의 송촌, 진주강씨의 석봉동, 경주김씨의 중리, 동래정씨의 이현, 청주한씨의 중리동 한촌, 곡산연씨의 황호(부수), 원주변씨의 갈전 등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산기슭과 구릉지대에 형성된 촌락들이 다른 위치에 형성 된 마을에 비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회덕의 경우에 산기슭과 구릉지에 위치하는 촌락이 형성된 시기도 오래되었고, 회덕을 대표하는 양반들이 세거하였다. 그 까닭은 아마도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들은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는 경우, 배산임수의 마을이 되는 것으로 풍수 상 명당이기 때문에 이 곳의 지역을 먼저 차지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회덕의 경우에 촌락이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전하는 곳이 많다. 예컨대 부수동 부수골의 경우에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이 있었고, 그리고 용호동이 용의 형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지도서}의 회덕조에 의하면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경작지가 있는 구릉과 산기슭에 양반들이 먼저 반촌을 마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회덕은 대동법에서도 산군(山郡)에 해당하여 해군(海郡)에서 미로 납공하였던 것과는 달리 목면으로 납공하였다.
따라서 요약하면 회덕의 촌락은 대부분 반촌이었고, 반촌들도 그곳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어느 정도 서열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반촌들은 회덕의 자연촌락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촌락의 위치는 구릉지대나 산기슭에 주로 위치하였다. 이는 회덕의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 산기슭이나 구릉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였으며 또한 이곳이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