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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염불(實相念佛)
유위 공덕을 떠나는 공부
종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유위 공덕有爲功德을 떠나는 공부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말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유위법이며 상대적인 것을 떠나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무위법이라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다 제한적인 것을 떠나서 무제한적인 것,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우리 불교는 생사해탈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생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불교 외에 없습니다. 종교의 본뜻에서 보면 해탈이라는 뜻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들어있다 하더라도, 직설적으로 바로 생사를 떠나버리는, 즉 죽거나 사는 한계를 뛰어넘어 버리는 가르침은 실로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생사를 떠나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슨 종교나 마음을 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애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잘못하게 되면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는 그렇게 잔혹한 사건을 자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사회는 숭고한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처참하고 암담했습니다. 특히 가톨릭에서 행한 종교재판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16~17세기까지 10년 동안에 이단자로 몰려서 불에 태워져 죽은 사람이 10만 명이 됩니다. 10만 명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일본 불교사를 볼 때도 종파가 나눠지면서 법화경을 신봉하는 종파,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종 등, 종파이기주의의 대립이 첨예했습니다. 염불종과 법화종, 천태종 사이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스님들끼리 서로 싸워서 귀를 베고 코를 베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독단, 그 도그마, 집착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여기저기 집회에 다니면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만, 가령 염불을 한다고 하면 염불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야말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속으로 외우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자기 식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리도 꼭 자기 식으로 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염불종도, 특히 일본 불교에서 있는 것입니다만, 생각은 말고 꼭 소리만 내서 하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진종眞宗의 경우에는 꼭 소리만 내서 하라고 합니다.
염불하는 법으로는 먼저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원만스런 모습을 관찰하는 염불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얼마나 산란스럽고 분별심이 많습니까? 산란하고 분별심이 많아서 그냥 염불만 하면 마음이 통일이 안돼요. 그래서 부처님의 원만 덕상을 상상하거나 보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이여요. 가령 관음상을 모시고 참배하면서 또 우러르면서 염불을 하면 훨씬 마음이 차분하고 공부가 더 잘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상은 우리의 마음을, 그 순수한 마음을 지속시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상을 상상하지 말고 소리만 내야 된다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또 염불중에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진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에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하는,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 자체가 부처님의 몸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바로 대승불법이 됩니다.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중생은 자꾸만 나누어 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은 겉에 있는 상만 보고 집착합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밉다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천파만파 부서져도 파도는 결국 물인 것을
성자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을 봅니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많이 인용하는 수파水波의 비유가 있습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입니다. 바람에 따라 파도가 일파만파로 갈라져도, 결국엔 똑같은 물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부처님은 광대무변한 우주바다의 물에 비유할 수 있고, 중생의 번뇌나 모든 분별심은 파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도가 천파만파 부서지더라도, 이 파도는 결국 물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산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고 인간이 되고 금수가 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우주의 법인 그 부처님 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나 금강경을 보나, 전부 다 그런 도리와 성품과 현상의 관계가 담겨 있지요. 중생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그 본 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은 가장 고도한 염불로서, 우주의 실상, 우주의 본바탕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더라도, 덮어 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도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것은 타력염불他力念佛입니다. 보통 그렇게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써서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하고 외면, 부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가호를 주시고 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 참다운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꼭 권하고 싶은 염불법은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염불이 실상염불입니다.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중생 근기에 맞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절대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나 대승으로 나눈 것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든 의단을 품고 화두 공부를 하든, 그 본뜻은 모두가 부처님이 되어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 꼭 부처님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이 되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아는 것에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면으로나 최선의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것이지요. 부처라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존재 아닙니까? 자비로 보나 지혜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 본성이 부처라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거예요.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떻게 다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계가 없으나, 물질도 한계가 있고 자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이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모두 허망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다고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림자같고 꿈같은 것들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합니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상이 공입니다. 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고 합니다.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인데, 마치 꿈이요 도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꿈이 형상이 있습니까? 꿈을 꿀 때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는 빛이 비치고 모양이 있으면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보이지만,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너요 나요 밉다 좋다 하는 것은 그림자같고 꿈같다는 것입니다.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요?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면 허망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미운 사람은 꼭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게만 보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그것은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상虛妄像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초의 몇 천 분의 일초 동안도 세포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하며 변화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란 것은 다 그러합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안의 참다운 실상을 회복해서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이라는 한계 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 버린 저쪽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는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깊이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이라. 우리가 꿈을 깨서 참다운 진리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염불법
우리 불자님들, 기왕에 실상염불을 하시려면, 제일 고도의 경지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이란 것은 그냥 마음으로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 바탕을 그대로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온 우주 전체가 다 부처입니다. 이 사람을 보나 저 사람을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길 가다 독사를 보나 무엇을 보든지, 그 모든 것이 본래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것이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그렇게 우리의 본래 성품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시려면 그렇게 바르게 실상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공功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에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보나, 좋은 사람을 보나 나쁜 사람을 보나, 복 있는 사람을 보나 인상이 나쁜 사람을 보나 어떤 것이나 다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면, 그때는 서로 상통이 됩니다.
내외가 살 때도 부인이 남편을 부처로 보고 남편이 부인을 부처로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친지나 사제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다 부처로 보는 실상염불을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
신념을 부정할 수 없어서
부르노라고 하는 16세기에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도미니꼬 교회의 유명한 수사입니다. 또 니콜라스 콘돌라스라는 신학자가 있어요. 그분은 이른바 범신론자汎神論者였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만 믿는 일신론 아닙니까? 우리 불교 또는 힌두교와 같이 천지사물 일체존재와 우주자연이 바로 신이라고 하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이 범신론과 일신론 사이에서 서로 잦은 다툼이 있어 왔습니다.
신부인 니콜라스라고 하는 분은 추기경을 지낸 분인데, 교황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 있던 분인데도, 일신교가 아닌 범신론을 주장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해 가지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요. 부르노라는 수사 역시 이 니콜라스라는 선배를 따라서 일신론이 아닌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는 가톨릭 측에서 범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제일의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으로 잡혀가서, “그대가 살려면 이 범신론 주장을 포기해라”고 강요받았습니다. 용기가 없고 신념이 약한 사람이라면, 화형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걸 면하기 위해서 “신념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그 수사는 신조가 굳은 사람이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7년이나 감금을 당했는데도, 그분은 7년 동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7년 후에 화형을 당했지요.
얼마 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분한테 대해 로마 교황청에서 재판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그 당시는 지동설과 천동설로 다툼이 많았습니다. 당시 가톨릭 사회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이 지배했었습니다. 그것이 가톨릭의 세계관으로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면 그 권위가 무너지고 세계관이 흔들리겠지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부 종교재판에 몰아서 화형 시켰습니다.
이 갈릴레오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감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부르노와 달리 신념이 약했던지, “지동설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판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신념을 꺾었습니다. 그러니까 화형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년이나 감금당했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가 70세였는데, 78세로 죽을 때까지 집에서 감금당했습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자기는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 주장을 폐기하라고 해서 표면적으로는 폐기를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부정할 수는 없어서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독단주의, 도그마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 독단주의를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독단주의에서 벗어나야
앞으로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믿든지 간에, 절대로 독단적인 사고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단주의를 지양해서 정말로 성자의 바른 자세로 종교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현상적인 문제는 상대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세상의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은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독단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를 다 그 근본 자리에서 원래의 생긴 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 본래 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자기 업대로 보지요.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상대할 때도, 우리 중생들은 먹는 물로 봅니다. 귀신은 물을 피로 봅니다. 고기는 물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봅니다. 천상사람들은 물을 영롱한 구슬, 보배로 보고, 부처님은 물을 신묘한 불성으로 봅니다. 중생은 업의 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이지,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보는 것은 실상관입니다. 실상관이란 우주를 부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조금도 가림이 없이 전부를 다 하나의 불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의 견해대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우리 중생은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어 보는데, 부처님의 참다운 혜안,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다만 부처님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중생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자기가 가진 견해대로, 보고 배운 지식대로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如語)하시고, 참다운 진리를 말씀(眞語)하시고, 헛된 말씀(不異語)을 하지 않으시고,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씀(不誑語)은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 온전히 인정하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면,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견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 소견을 따르는 것은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하는데,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육조혜능이란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일자무식입니다. 그분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통하고 보니까 우주가 훤히 보이는데,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 명이 아주 멀리서 오고 그러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저 같은 사람 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자주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법문이 제일 간단하고 확실하고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꼭 믿어버리면 두 번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꼭 신인信認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심작시불心作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위대한 부처님의 마음을 대비해 보아도 조금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달마스님께서 2조 혜가스님께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2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오.“ 하시니까, 달마스님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 하셨어요. 그러나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여요.
아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 따로 있단 말입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합니다. 김가나 박가나 예수나 맹자나, 그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만큼 크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어디 국한되게 크고 작은 것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입정入定 후에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자리를 열어서 온전히 간직한 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내 마음, 내 몸뚱이 내 심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몸뚱이도 제 것이 아닙니다.
범부와 성자를 구별한다면, 범부는 꼭 제 몸, 제 집, 제 가정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봉사를 권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더라도 자기 몫은 남겨두고 남한테 베풀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함이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 자기 몸을 몽땅 바쳐 버립니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귀신羅刹鬼神한테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십이겁十二劫 동안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뚱이를 개인적인 존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어느 누구 것이라고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나 아내 몸이나,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고 금생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에서도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에 가서 가능합니다. 극락세계에서는 영원히 한곳에서 만납니다. 구회일처俱會一處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 믿고 부처님 믿고 염불 많이 하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에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 때 그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 버립니다. 그 때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절대로 자기 소견 하나로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 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해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ㆍ본바탕, 주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세우셔야,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게 됩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한 부처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하게 부처 뿐이예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불안의식을 온전히 없애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 중생의 최상의 행복을 위한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할 때는, 본바탕은 정말로 부처라고 생각할지라도, 인간생활은 역시 업장 많은 생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많습니다. 제 아무리 자기가 옳게 생활한다 하더라도, 옆에서 미혹 중생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고 불공정하고 무서운 산업사회 아닙니까?
어려운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7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끝끝내 자기 신념을 바꾸지 않고 불에 타서 죽은 이탈리아 수사修士 부르노 같이, 우리가 부처님만 믿는 굳건한 신앙심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어디 있으나 바로 그것이 최상의 사회적인 봉사가 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봉사는 물질로 남한테 베풀고, 어려운 데 가서 같이 도와주고 일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선방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남들이 해 주는 것을 다 먹고 쓰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봉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중생들한테 신세만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끝도 없는 바닷물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 에너지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생기고, 결합에 따라 물질이 생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항시 그대로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생명자체, 에너지의 실제 자체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중 선방에서 가만히 눈감고 참선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산에서 공부하면 사회봉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깨달음과 사회봉사는 둘이 아닙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 버리면, 그때는 집에 있으나 산중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결국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것입니다.
가령 많은 돈을 절에 시주하고 사회에 봉사한다 하더라도, 저는 저고 나는 나다, 이와같이 구분을 짓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래 못갑니다. 불교로 말하면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라, 상相을 떠나지 않는 보시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반야바라밀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지혜입니다.
부처님을 부른 만큼 업장은 소멸되고
여러 불자님들! 무엇보다도 먼저 아실 것은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제법이 공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부처란 말입니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제법이 공이라 하면,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허망하지 않는가, 허무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공만이 아니라, 그 공 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으로 충만되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제법이 공한 자리입니다. 말로는 제법공이지만, 정말로 우리 마음을 깨달아서 자타自他를 떠난 하나의 자리에 들어가면 성자가 되어 버려요. 그 자리가 진여불성이 충만한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중생 버릇이 굉장히 많습니다. 법문 듣다가도 금방 세속의 분위기에 말려들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자님들은 마음을 가다듬는 데 제일 쉬운 염불을 하세요. 염불이란 본래 부처인 우리가 본래 부처인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서 본래 부처인 줄 알고,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가 되는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불러야 되겠지요. 우리 환경이 너무나 복잡하고 산란스러워, 부처님한테 귀의하려면 부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번 부처님을 부르면 부른 만큼 우리 업장을 소멸합니다.
서산대사 염불송念佛頌에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는 마명馬鳴보살도 염불하고,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용수龍樹보살도 염불했거니,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염불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심下心을 하면서 염불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염불의 방식으로는, 심즉연불경계心則緣佛境界라, 부처님 경계에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입은 부처님의 이름을 분명히 외우는 거예요. 이 말씀은 이른바 실상염불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계는 오직 우주 전체가 하나의 부처라는 경계입니다. 마음을 그런 경계에 머무르게 하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외운단 말입니다. 이것이 염불법, 실상염불법입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면서 입으로 부처님을 외는 것이 하나가 되어 염불하면, 팔만사천 번뇌를 소멸하고 동시에 팔만사천 공덕을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닦기 쉽고 행하기 쉬운 염불삼매
걸음걸음(步步) 소리소리(聲聲) 생각생각(念念)마다 오직 아미타 부처님만 왼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염불삼매에 들어갑니다. 염불삼매에 들어가지 못하면, 업장을 온전히 소멸시키기가 어렵습니다. 한번 하면 한번 한만큼 공덕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가호하고 여러 선신善神들도 지키고 여러 가지 공덕이 많이 있으나,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나아가 매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금생 번뇌, 전생 번뇌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번뇌를 녹이기 위해서는, 깊은 명상을 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명상은 참선입니다. 가장 고도한 명상이지요. 참선이 삼매입니다. 염불삼매란, 염불로 해서 깊은 참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근본 번뇌의 뿌리를 녹이고서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깨달아야 우리 중생들이 성자의 경계,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을 온전히 스스로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깨달음의 단계가 되려면, 오로지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삼매는 가장 깊은 명상입니다. 세간의 명상법이 많이 있지만, 그런 법은 유위적인 상대적인 마음을 다스리는 법인 것이지, 정말 완벽한 행복을 추구하는 법은 되지 못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영원불멸한 우리 행복의 구경지究竟地, 최상의 행복을 이루게 하는 삼매법입니다. 따라서 다른 여러가지 명상법을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데에 끌려가지 말고서, 부처님 명상법처럼 쉽고 효과적인 구경락究竟樂,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명상법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염불이 쉽기도 하고 효과적이지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을 깊게 해서, 우리의 본래자리, 고향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삼매법입니다. 부처님의 참선법입니다. 많은 법이 있지만, 법 가운데서 제일 하기 쉽기에 부처님께서 제일 많이 말씀한 것입니다. 이왕이수易往易修라, 가기 쉽고 닦기 쉽고 행하기 쉽지요. 금생에 좋고 내생에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보장하고, 따라서 보보성성념념유재아미타불步步聲聲念念唯在阿彌陀佛이라, 오직 아미타불을 놓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외워서 염불삼매에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조석朝夕으로 될수록 시간을 많이 내셔야 합니다. 잘 때도 염불하다가 잠들면, 꿈속에서도 염불하고 있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야 습기習氣가 녹아집니다. 습관성이 없어져요. 하다안하다 그러면 안한 것보다 낫지만, 큰 힘을 얻지 못합니다. 득력得力을 못합니다. 기왕 하려면 힘을 얻고 덕도 많이 봐서 부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법입니다.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 오직 아미타불과 함께 있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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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 감사합니다_()_
아! 바로 이 법문이었구나
내가 해야 할 공부방법...
고맙습니다.보보성성염염 오늘부터 꼭 염불하기를 발원합니다.아미타불...()_
청화스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타행자님 감사드립니다. 구구절절, 마음마음 절절히 감사말씀 올립니다. 이렇게 좋은 법문 이렇게 쉽게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신 큰스님과 여러 스님들에게
삼배올립니다. 보보성성염염유재아미타불, 오직 우주전체가 하나의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아미타불 명호를 외우겠습니다. 세세생생 잊지않고 실천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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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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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소리도 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아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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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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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 오직 아미타불과 함께 있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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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말씀 법문으로 참된 공부합니다. 깊이 감사드림니다
감사합니다_()()()_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법향 가득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步步 聲聲 念念 唯在阿彌陀佛
連功最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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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한 법문 감사드림니다,
법문 올려주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