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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이씨(驪州李氏)
【 여주이씨(驪州李氏) 종파 】
문순공파(文順公派) :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이규보(李奎報)를 중조
(中祖)로 모심 교위공파(校尉公派) :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모심 경
주 파(慶州派) :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모심 이 3파의 여주이씨 선조
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에 자리 잡아 대대로 호장중윤(戶
長中尹), 향동진사(鄕貢進士)등 향직(鄕職)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
던 호족(豪族)으로 군림하였다.
【 여주이씨(驪州李氏) 관향(貫鄕) 】
교위공파에서는 문중에 전래하는 <개성호적>에 따라 고려때는 <황여
>라 하였고, 조선조 때는 주로<여흥>또는 <여주>라 하였으며, 간혹 <
영의>라는 관향을 쓴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고려조 이래 대체로
‘여주’ 라는 단일관향을 썼으나 이규보의 후손가운데 그 습봉(襲封)의
지명에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으로 관향을 삼은 종파가 있었고, 경주파
는 ‘을축대동보’ 부터 ‘여강’이란 관향을 정하였다.그러다가 근년에 이르
러‘여흥’`영의’'하회’등의 관향 이름을 여주로 단일화 했으며 경주파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여강’ 이란 관향도 갑자보로부터는 `여주’라는 관향
과 함께 쓰기로 하였다.
【 여주이씨(驪州李氏) 주요 세거지 】
교위공파는 시조 이인덕에서 3세 이효온까지는 여주에서 향직에 종사
했으나,4세 이교에 이르러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개성 북부 흥국리에
정거하였다. 그 아들 3형제 가운데 장자 이수산은 유배지인 평부 선천에
눌러 살았고 6세 이상은 중화군 상원에 살았다. 13세 이호신에 이르러
다시 중화 풍동에 자리 잡은 후 일부 자손은 수산에 이주했으며 정주.축
안. 평양과 전남 광양에도 후손들이 세거 하였다. 차자 이수해는 처음
개성 덕산리와 오관리에 거주를 정했으나 조선조 개국과 함께 후손들이
한양으로 옮겨 세거하였다. 8세 이고는 고려가 망하자 수원 팔달산에
은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 곳을 세거지로 삼았는데 그의 5세손인 이
란은 함안여항으로, 이응은 남원으로 각각 남하하여 자손들이 번창하였
다. 11세 이계손의 자손들도 한양에서 수원으로 낙향하여 살았으나 조
선조 중기이후 16세 이상홍의 자손은 공주,홍주,장호원 등지에서, 이상
의의 자손은 양주,김포,안산덕산,횡성,부평 등지에서,이상준의 자손은
충주,포천,홍성,청양에서 각각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3세인 이수용은
개성 오관리로 분가하여 자손들이 수대를 살았으나 8세 이천배는 함북
북청으로 옮겼고 고려가 망한 후 9세 이행이 강음(지금의 김천군)에 주
거를 정하였다. 그 아들 이적은 한양 남촌에 살았고, 이몽가는 평산,봉
산,백천 등지에 자손들이 세거했으며 12세 이증약의 후손은 홍성,영광,
춘천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었다.이적의 중손 이사필은 한양에서 멀리
밀양,용성으로 낙남(落南)하여 자손들은 그곳 활천,장선,평리,무능,퇴
노,단정, 사연등지에 산거, 각각 종촌을 이루고 살았다 또 15세 이지충
은 경북 용궁에 세거지를 정하였다. 문순공파는 3세 이윤수가 관인으로
일찍이 중앙에 진출하여 개성,서교에 주거를 정한 후 그 아들 문순공 이
규보가 다시 개성 동부 봉향리로 옮겨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만년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피란 정부를 따라 하음(지금의 강화) 객사의 서랑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러므로 자손들도 문순공의 유택을 지키며 오랫동안
강화에서 살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각각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전국 각
지에서 산거하였다. 9세 이증의 후손들은 고양군 송포를 비롯, 파주.논
산.영동.옥천 등지에 세거의 뿌리를 내렸으며,이번의 자손들은 주로 군
위군 우보를 중심으로 상주.영천.청송 등지에서 큰 문중을 이루었다. 13
세 이능백의 후손은 아직도 강화를 지키고 있으며, 이정의 후손은 김포.
파주.음성 등지에 살고있다. 8세 이미숭의 증손인 이계문의 자손은 고령
에서, 이신문의 자손은 고성에서 각각 큰 문중을 이루고 있으며 6세 이
환검의 후손은 조선조 초기 이래 금산.영동.옥천.무주에서 세거하였다.
경주파는 시조 이세정이 향공진사로 입신한 점으로 미루어, 당시에 이
미 개경에 진출하여 일문을 이루었다. 고려가 망할때까지 개성에 살았
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변혁기를 맞아 자
손들은 경상도 동남해안으로 낙향한듯한데 8세 이근의 자손은 울주.언
양에서 이상도.이극랑의 자손은 흥해에서, 이숭예의 자손은 경주와 영
일 등지에 각각 정착하였다.10세 이상중의 자손은 개성에서 해주로 이
주했으며, 이숭예의 손자 이번은 그 곳에서 아들 이언적. 이언괄과 같은
명현을 낳아 그 자손들은 약 500년간 양좌동을 중심으로 인근인 옥산.
천서.안계.하곡.원동.우각 등지에 산거하여 명가의 전통을 빛냈다.특히
양동과 옥산마을은 이가문이 남긴 양반마을로서의 전통과 유습이 보존
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옥산서원의 사적
을 비롯하여 많은 지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 여주
군의 역사(연혁) ### [고 대] 구석기 시대의 유뮬은 발견된 바 없으나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파사성에서 마제석촉이 발견되었고 점동면 혼암
리와 여주읍 멱곡리에서 민무늬토기, 마제석부,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19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로 확인된 혼암리의
집터와 반월형석도 갈돌(碣石), 무문토기 홍도(紅陶)를 비롯하여 탄화
된 보리, 조 수수가 발견되어 청동기 시대에는 이 지방에서 농경문화가
발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농경문화의 흔적은 우리
나라 미작사(米作史) 와 벼농사의 전개경로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
고 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의 유적으로는 여주읍
매룡리고분군의, 시기를 달리하는 축조양식과 출토된 고배, 도자(刀
子), 석침(石枕) 등 7세기경의 토기류가 발견되어 여주군은 삼국시대 이
래 통일신라에 이르기가지 큰 세력을 이룬 토하집단이 살엇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온조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할 때 전략적으로 요충지인 여주군은 공방전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22년(온조왕 40)부터 214년(구수왕 1)까지는 술천성
(述川城-지금의 금사면 이포리 외평리 성지)에 말갈병의 침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때에는 잠시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다시 백제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장수왕의 남진정
책으로 한강유역을 점령할 때인 475년(장수왕 63)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骨乃斤縣)이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으
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할 때인 550년(진흥왕 11)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까지도 점유한 562년(진흥왕 23)까지는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660년(무열왕 7) 천령군(川寧郡)에 술천성을 축조하여 고구려 방비의
제2선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때에는 황효(黃驍)라 고치고 기천(沂川)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 려] 940년(태조 23) 황려현(黃驪縣)으로 개칭하였
고, 1018년(현종 9) 강원도 원주(原州) 임내(任內)에 이속하였다가 1031
년에 다시 경기도로 복구하여 감무를 두었다. 고종 때에 영의(永義)로
1305년(충렬왕 31)에는 여흥(驪興)으로 고치고 원종비(元宗妃) 순경태
후(順敬太后)의 내향이라 하여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知郡事)
를 두었다. 1388년(우왕 14)에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黃麗)라 하였
다가 1389년(공양왕 1)에 우왕을 폐위시켜 이곳으로 보내면서 다시 여
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 선] 1401년(태종 1)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의
내향이라고 해서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음죽현의 어서이촌(於西伊村-
지금의 장호원 어석리 북부)이 여흥군에 병합되었다. 1413년 안성, 양
지, 음죽이 충청도로부터 경기좌, 우도에 합치될 때 경기도에 예속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69년(예종 1) 세종의 영릉(英陵)이 천장(遷葬)
되면서 천령현을 폐하여 여흥에 병합, 목으로 승격되었다. 이때 판관을
두어 여주(驪州)로 고쳤다. 천령현은 지금의 흥천면, 금사면 전역과 부
발면 북부를 합하였던 지역으로 고구려 때는 술천(述川) 성지매(省知
買) 신라 경덕왕 때는 기천으로 불렸고 황효(여주)땅을 영현으로 삼았던
곳이다. 천령현은 1018년 광주에 예속되어 감무를 두었다가 1413년 현
으로 되었고 1469년 고을을 없애면서 여주에 병합되었다. 임진왜란 때
는 이 고장 출신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향병(鄕兵)을 초집(招集)
하여 5월에 여강벽사(驪江壁寺-신륵사)에서 이천부사 변웅정과 협력,
한강을 내왕하는 왜적을 섬멸, 충주, 원주에 주둔한 왜적이 지평, 양근,
양주, 광주의 길을 취하여 한성과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고 6월 10일에는
구미포(九尾浦-지금의 개군면 구미리)에 주둔한 왜병을 기습하여 50여
급을 참수하는 전과를 얻었다. [근 대] 1895년 목에서 군으로 강등, 충
주부의 속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로 환우언되어 3등군으로 되었
다. 제1차 의병활동기인 을미의병항쟁 때는 심상희가 1896년 2월 여주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명의 의병을 지휘, 일본군을 살해하였다. 을사조
약 체결로 일어난 제2차 의병항쟁 때는 13도 창의 대장으로 양주에 연합
의병부대를 집결시켜 서울 공격을 지휘하였던 이인영과 여주의병장으
로 이범주 부대가 유명하였고, 민긍호, 김봉기도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7년 8월 10일 여주의병은 한강을 항행하는 일본국 목선을 안창(安
倉) 강변에서 기습하여 20여명을 사살하였고 12일에는 여주읍을 점령하
여 서울-원주간의 연락을 차단하여 원주의 일본군을 고립상태에 빠뜨
렸으며 계속 음죽, 장호우언을 장악하는 증 수천명의 의병이 여주에서
활약하였다. 1914년 부, 군, 면이 폐합될 때 원주의 지내면(池內面)과 서
면(西面)이 여주군에 편입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내, 강천, 흥천, 능서, 금사, 개군, 가남, 점동, 대신 등 10개면이 되었
다. 3.1운동 때는 4월 1일 이포(梨浦)의 2,000명, 4월 5일 북내면의 800
명, 곡수의 3,000여명의 시위가 있었고 신륵사 승려 김용식의 천송리 시
위도 있었다.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 대]
1963년 1월 1일 개군면이 양평군에 편입되었다. 1970년 12월 16일 금사
면 산북 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9년 4월 산북면으로 승격, 분리되었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