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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거룩한 땅,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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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신앙자료 스크랩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
세라 추천 0 조회 126 12.10.19 16: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의 저자

오스왈드 챔버스에 관한 사상과 그의 글들

(이 글의 저자권은 스데반 황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2009 by Stephen Hwang)

1. 오스왈드 챔버스에 관한 소개

2009년 3월 25일에 한국 땅에 토기장이 출판사를 통하여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 들어갔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 출판사를 통하여 번역되어 나왔지만 이 책은 저작권이 살아 있는 작품이기에 그들의 출판은 불법 출판인 셈이다.

이 책의 광고를 보면 “미국 기독교 역사상 60년 최장기 베스트 셀러” 라고 되어 있다. 이 광고의 내용은 과장이 아니다. 미국 또는 캐나다의 가정에 이 책이 한권이라도 없는 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서만 지금까지 수백만권이 판매되었다. 영국과 캐나다등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천만 권이 넘도록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몇 년 전에 미국 출판 협회는 미국 서점 매니저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투표 내용은 20세기에 쓰인 책들 중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책들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 질문 사항으로는:
1.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도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책은 무엇인가?
2. 여전히 발행되는 책은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3. 여전히 사랑받는 작품은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투표결과 20세기 최고의 책으로서 단 세 권만이 위의 세가지 질문 항목에서 선정되었다. 그 책은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씨. 에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진 에드워드의 “신의 열매”였다. 이만큼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미국에서 인지도가 높으며 가장 귀한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스왈드의 모든 책의 저작권은 영국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가 가지고 있다. 이 협회는 오스왈드 아내 비디 챔버스와 오스왈드의 친구들과 성경 훈련 학교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협회로서 후에 오스왈드의 강의와 설교를 책으로 출간하는 일을 감당하였다. 이 협회는 미국에 있는 오늘의 양식을 전세계적으로 배포하는 라디오 바이블 클래스(Radio Bible Class)의 부속 기관인 디스커버리 하우스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된다. 디스커버리 하우스 출판사는 오스왈드의 책을 전 세계에 배포할 수 있는 독점 라이센스를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로부터 얻게 된다. 따라서 토기장이 출판사는 2008년에 디스커버리와 독점 계약을 함으로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모든 글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오스왈드 챔버스가 미치는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그의 책들은 어떤 붐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신기하게도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나아가 여러 지역의 선교사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 이라는 매일 묵상은 영성의 책 가운데 고전으로 인정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필자는 복음주의 형제회에서 나오는 간행물에 오스왈드와 관련한 내용들을 실을 생각이다. 그 내용으로는 오스왈드의 신학 사상 분석 및 그의 책에 관한 간략한 소개들이 될 것이다. 오늘 그 첫번째 내용으로서 이 지면을 통하여 오스왈드 챔버스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책들이 어떻게 세상에 출판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다루어 보겠다. 이를 위하여 비디 챔버스의 오스왈드 자서전, 데이빗 맥캐스란드의 오스왈드 자서전, 데이빗 람버트의 오스왈드 자서전, 그리고 캐나다 시인 마르다 크리스챤의 비디 챔버스 자서전을 참조하였다. 신학을 전공한 전문가답게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각 내용마다 주를 달아야 하지만, 많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위의 자서전 가운데서 인용한 것이기에 각주를 다는 것을 생략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1) 오스왈드 챔버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먼저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1874년 7월 24일 스콜틀랜드 애벌딘에서 태어나서 1917년 11월 15일 이집트에서 소천하였다. 챔버스는 스코틀랜드 언약 신학의 영향을 받은 침례교 목사이며 교사였다. 그의 사역으로는 미국, 일본, 이집트를 향한 순회 집회가 있고, 성경 훈련 학교를 세워서 운영한 점, 그리고 일차 세계 대전시에 이집트 자이툰에 가서 YMCA 군목으로 군병들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요약된다. 그의 향년 43세였다.

챔버스의 부모님은 아주 독실한 침례교 신자로서 챔버스에게 많은 신앙의 영향을 미쳤다. 특히 챔버스는 챨스 스펄전의 설교를 들은 후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챔버스는 그의 아버지께 말하길 스펄전을 일찍 만났다면 더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챔버스의 믿음은 아주 빠르게 성장하였으나 그는 사역자가 될 계획을 하지는 않았다. 캔싱톤 예술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에딘버그 대학을 다니면서 예술과 고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에딘버그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수업료가 없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의 사역을 향한 강한 부르심을 느끼며 더눈(Dunoon) 대학으로 편입하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하나님의 뚜렷한 손길을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챔버스는 시와 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었다. 또한 더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울 때는 남들보다 실력이 훨출하여 조교로서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외부로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을 위한 작은 동호회를 만들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챔버스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복음의 진수를 깊게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지적으로는 많은 신학과 철학을 알고 있었으며 성경 지식도 많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 교제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앙 생활은 뭔가 허전하였고 삶의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하였으며 성경은 의무감으로 대하여야 하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지근한 신앙 상태로 무려 4년간을 지나던 어느날 챔버스는 자신 스스로는 절대로 거룩하여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가 찾던 힘과 평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부터 챔버스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즉, 복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챔버스는 자신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의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깊게 깨달았다. 후에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복음을 깨달았을 때의 체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빛나는 자유함을 얻는 순간이었다.”

새롭게 발견된 힘을 가지고 챔버스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말씀을 가르쳤다. 특히 이집트, 일본, 미국을 다녔다. 어느날 그는 순회 여행을 위하여 미국을 향하는 배를 타야 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항해를 떠나기 전에 거투루드 홉스 (Gertrude Hobbs)라는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형이 침례교 목사였는데 거투르드 홉스는 그 교회의 성도였던 것이다. 한번은 오스왈드가 형이 섬기는 교회에서 저녁 설교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때 한 성도의 가정으로부터 저녁 식사를 초대받게 되었는데 그곳이 거투르드 홉스의 집이었다. 홉스의 어머니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미국에 순회 선교를 갈 것을 알고는 자기의 딸 거투르드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이유는 거투르드가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미국 으로 항해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같은 배에서 항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스왈드와 거투르드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1910년에 그 둘은 결혼하게 된다. 챔버스는 아내된 그녀를 언제나 “비디”라고 불렀다. 그 뜻은 사랑스런 제자(Beloved Disciples)라는 뜻인데 빨리 부르다 보니 비디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3년 5월 24일에 비디는 첫째이며 유일한 외동딸 캐스린을 낳게 된다.

1911년에 챔버스는 런던 클랩햄에 성경 훈련 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이 되었다. 1915년에는 일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강한 부름을 받는 가운데 YMCA 군목이 되게 된다. 일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성경 훈련 대학을 휴교시키고 이집트 자이툰으로 군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자이툰에서 챔버스는 영국, 스코틀랜드 군인들 뿐만 아니라 오스트랠리아 및 뉴질랜드 군사들을 섬겼다.

1917년, 챔버스는 갑자기 앓게 되면서 카이로의 기제(Gizeh) 적십자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임기 웅변으로 맹장 파열 수술을 하였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11월 15일 그는 주님 품으로 가게 되었다.

챔버스는 구-카이로의 대영 연방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묘지는 일차 세계 대전의 묘지 방문에 있어서 가장 많은 방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의 묘지를 찾으려면 구-카이로의 대영 연방 묘지에 가서 묘지 중앙에 가장 큰 흰색 돌로 된 묘지를 찾으면 된다.

그의 비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 그리고 그 밑에는 성경이 열려 있고 누가복음 11:13절이 적혀 있다. 이 구절은 챔버스의 삶에 가장 큰 변화와 의미를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2)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오스왈드 챔버스의 이름으로 약 40권 이상의 책들이 있다. 미국 디스커버리 하우스 출판사는 2000년 초에 그의 책을 다 모아서 오스왈드 챔버스 전집(the complete works of Oswald Chambers)이라는 한권의 큰 책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책에도 과거의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중에 빠진 것들이 있다. 미국 오하이오의 성경 대학과 시카고의 휫튼 대학을 방문하면 오스왈드 챔버스가 신앙 잡지에 낸 글들과 그의 강의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자신의 손으로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그의 모든 책은 속기사였던 그의 아내 비디가 성경 훈련 대학과 이집트에서 속기로 받아 적었던 것들을 오스왈드 챔버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약 30년 동안 재편집하여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를 통하여 세상에 내어 놓은 것들이다.

간략하게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훑어보자.

오스왈드 챔버스는 1917년 11월 15일 이집트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아내 비디 챔버스 부인은 1966년 1월 15일에 소천하였다. 계산해 보면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대략 50년 동안 아내 비디는 남편이 남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전념하였다는 계산을 얻어낼 수 있다. 그녀는 죽는 그날까지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챔버스의 가르침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이를 위한 아내 비디의 수고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1917년 오스왈드 챔버스가 세상을 떠난 후, 어떤 군인이 비디 챔버스를 찾아왔다. 그 당시 비디 챔버스는 남편을 잃은 좌절과 실망 속에서 가장 깊은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이 군인이 비디 챔버스에게 오스왈드 챔버스의 메시지가 군인들에게 너무나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슬픔에 차 있는 챔버스 부인에게 “도움의 장소”라는 소책자를 많이 만들어 이번 성탄에 군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제안은 비디 챔버스로 하여금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챔버스가 너무나 좋은 친구요 멋진 선생님이었다며 챔버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가 전방으로부터 수없이 날라오고 있었다.

여러 손길의 도움을 얻어서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을 만들어 전방에 보내자 그 소책자로부터 너무나 많은 위로와 축복을 얻게 되었다며 수도 없는 답장이 날라오는 것이었다. 그 후 비디 챔버스는 챔버스의 강의를 소책자로 발간하여 매 달 전해야겠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YMCA의 도움으로 이집트, 팔레스틴, 프랑스의 모든 야영에 챔버스의 책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업은 1919년 5월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이후 챔버스의 글들이 책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챔버스를 잘 알던 친구들이 힘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 군병들을 지원하자고 뜻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발간된 책은 욥기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담은 “더 나은 싸움을 위한 좌절(Baffled to Fight Better)”이었다. 그 후 “고통의 그림자(Shadow of an Agony)”가 출간되었고 다른 책들이 계속 뒤를 이어 발간되었다. 책은 무료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을 통하여 큰 영적 축복을 누리게 되면서 자발적인 기부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서 이 일을 통하여 뜻하시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발간할 책이 없을 때까지 오스왈드 챔버스의 모든 책들이 출간해야 한다”는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챔버스 부인은 어린 딸 캐스린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영국으로 돌아온 챔버스 부인은 한동안 옥스포드에서 살았다. 그때 어린 소녀였던 캐스린의 기억 속엔 어머니는 지하실에서 아침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타이핑을 하였다고 한다. 그 일을 하면서 동시에 돈을 벌기 위하여 서너 명의 대학생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비디 챔버스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최선을 다 드리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계속 책을 편집하여 출간하였다.

비디 챔버스는 최고로 훌륭한 매일 묵상집을 만들기 위하여 챔버스의 글들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에 얼마나 많은 기도와 고된 수고를 하였는지 모른다. 그 결과로 빚어진 작품이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작품은 셀 수 없이 많은 독자들에게 위대한 축복이 되었고 또한 지금까지 약 40개의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챔버스와 가깝던 친구들이 챔버스를 기억하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들은 챔버스 부인을 찾아와 출판을 통하여 챔버스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목적으로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꾸준하게 새로운 책들을 준비하고 재정이 허락될 때마다 책을 출간하였다. 이 모임이 후에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Oswald Chambers Publications Association)”가 된 것이다.

한편 챔버스의 책은 꾸준하게 팔려 나갔다.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헌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에 챔버스 책의 발행 부수와 판매 부수가 기록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철저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배후에는 출판과 관련한 지루한 수고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번개처럼 찾아오는 반가운 소식들은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한 번은 오스왈드 챔버스 출판 협회가 모일 때 화란어와 독일어로 챔버스의 글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그 후 2년 후에는 스웨덴어로, 중국어로, 일본어로, 심지어 맹인을 위한 점자어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얼마 후에는 스페인어로, 핀란드어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대단히 오랜 기간 동안 출판으로 인한 이윤이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윤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 이윤은 다시 책을 발행하고 배포하는 일에 투자되었다.

그 후 이차 세계 대전이 왔다. 참으로 믿음의 시련의 기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챔버스의 책들을 보관하는 일과 종이를 조달하는 일이었다. 모든 어려움 중에 가장 좌절되었던 일은 영국에 큰 불이 났을 때 (the great fire of London, Dec 29-30, 1941) 수 만권의 책이 다 타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위로의 뉴스가 있었는데 독일에 남아있는 모든 챔버스의 책들의 재고가 안전하게 스위스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힌두어와 벵골어로 번역되었다는 뉴스였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러시아인 망명자들이 챔버스의 책 중에 몇 권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러시아인들을 위한 작은 소책자들을 만들었다. 그와 같은 때에 챔버스의 책들이 헝가리어와 아프리카어로 번역되었다.

1944년에서 1945년의 2년 기간은 전 세계가 가장 어려웠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이 24,000 권이나 팔렸다. 그 당시에 이러한 판매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계속 호황을 이루었다. 이제는 초기에 이 일을 시작했던 분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맡아 동일한 헌신을 하고 있다. 2030년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들은 저작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고전이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챔버스의 책들은 주님 오실 날까지 계속 판매되고 공급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모든 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때문에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글을 통하여 복음의 세계를 알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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