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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이론(social bond theory)
Travis Hirschi
비행의 원인(Causes of Delinquency)은 난해한 이론적 논의와 무수한 통계적 분석으로 가득찬 복잡한 책이지만 Hirschi의 이론은 매력적인 특성이 있다. 그것은 범죄자들에 의하여 간단하게 명확히 제시되고 이리하여 쉽게 이해되고 연구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이론은 두 가지 명제(命題)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비행과 사회유대는 반비례관계가 있다. 둘째, 사회유대의 개념은 범죄행위를 독립적으로 또는 결합하여 억제하는 4가지 요소 -애착(愛着), 전념(專念), 참여(參與), 신념(信念)- 가 있다.
그러나 얼마나 정확히 이들 유대가 젊은이들에 대하여 통제를 행사하는가? Hirschi는 부모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만 젊은이들은 또래, 교사와 다른 성인에게 애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애착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서적 관계를 수반하다. 이러한 관계가 존재할 때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이 그들을 생각하는 것에 보다 더 신경 쓸 것 같다. 차례로 근심의 기회가 생긴 상황에서는 이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거나 이 관계를 붕괴시킬 것에 관심이 있다면 그들은 비행으로부터 억제될 것이다.
애착의 중요성은 10대동안 젊은이들은 자주 부모의 감시 눈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에서 부모는 직접통제(直接統制) - 즉 직접 그들의 자녀를 감시하고 비행이 일어나면 처벌하는 -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젊은이들이 그들 부모의 선호를 고려하다면 간접통제(間接統制)를 행사할 수 있다. 애착이 강할 때 “범죄를 범할 유혹이 있을 때 부모는 정신적으로 존재한다. 유혹의 상황에서 부모반응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주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이 한도에서 자유롭게 행위를 한다(1969:88)”고. Hirschi는 말하였다.
합리적 선택이론과 흡사하게(참조, 제Ⅴ부) Hirschi가 말하는 “헌신” 즉 동조에 대한 “합리적 구성요소”가 있다고 시사하였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소녀들은 그들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릴 행위에 덜 관여할 것 같다. 거꾸로 동조에 거의 또는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인 의무를 지지 않는(언질을 주지 않는) 젊은이들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리하여 보다 더 자유롭게 법을 위반한다.
Hirschi는 또한 인습적인 활동에의 참여만으로도 통제를 원활히 한다고 주장했다. 나태가 죄를 범할 기회를 제공하면 학교와 여가활동과 같은 건전한 활동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은 말썽을 피울 시간을 거의 없게 한다.
마지막으로 Hirschi(1969:26)는 “사회의 규칙을 준수”해애 한다고 믿는 젊은이들은 규칙을 덜 위반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 또는 “정의”가 또한 차별적 접촉이론(differential association theory<또는 Hirschi가 “문화일탈”이론으로 부르는 것>)에 또한 중심적이므로 “신념”이라는 사회유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Hirschi는 중요한 분석적 구별이 된다고 주장했다: Sutherland(제10장)와 같은 문화일탈이론가들은 범죄를 긍정적으로 소중히 하는 신념(“법의 위반에 호의적인 정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통제이론가들은 범죄를 금지하는 신념에 초점을 맞춘다. “비행”은 비행을 요구하는 신념에 의하여 야기되지 않으나 오히려 비행을 금하는 (효율적인) 신념의 부재에 의하여 가능해진다“고 Hirschi는 특별히 언급하였다(1969:198).
Hirschi의 사회유대이론은 아마도 다른 이론보다도 무수한 경험적 검증을 받아왔다. 이 이론의 경험적 확인은 연구의 방법론과 같은 요인에 의하여 다르지만(Agnew, 1985; Costello와 Vowel, 1999; Kempf, 1993; Krohn, 2000; Kubrin 외, 2009) 전반적으로 약한 사회연대가 범죄행동에 관련될 위험이 늘어난다는 일반명제에 대한 꽤 일관성 있는 지원이 있다(Akers와 Sellers, 2008; Sampson과 Laub, 1993). 경쟁하는 관점들 특히 “문화일탈”이론들은 경험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는 Hirschi의 주장은 잘못되었다(Akers와 Sellers, 2008; Krohn, 2000; Kubrin 외, 2009).부가적인 제한은 Hirschi의 접근방법이 주로 비구조적이고 비역사적이다. Shaw와 McKay(제7장)와는 다르게 그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시적 사회변화가 미국사회의 서로 다른 부문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유대에 영향을 미치는가는 고찰하지 않는다(Sampson과 Wilson, 1995[이 책 제8장]; Sampson과 Laub, 1994)
참고문헌(references)
비행과 일탈행위에 대한 3가지 기본적 관점들은 현재의 정황을 지배한다. 긴장(strain) 또는 동기이론에 의하면 준수로 만족시킬 수 없는 합법적인 욕구들은 사람을 일탈을 피할 수 없게 한다(욕구들 때문에 사람은 일탈을 한다). 통제(control) 또는 유대이론에 의하면 인습적 질서와의 유대가 어떻게 해서 무너졌으므로 사람은 자유롭게 일탈행위를 한다. 문화일탈(cultural deviance)이론에 의하면 일탈자는 보다 큰 또는 영향력 있는 사회에 의해서 수용하지 않는 일련의 기준을 따른다. 범죄와 비행에 대한 대부분의 현재이론들은 이들 관점들중 적어도 둘 및 때로는 셋 모두를 포함하지만 그들의 가정들의 조화는 매우 어렵다. 토제이론가가 가정하듯이 인습적인 질서에 대한 사람들의 구속은 약하거나 사실상 부존재할지라도 긴장이론가는 그들의 비행을 설명함에 있어서 불필요한 설명압박감을 형성한다. 한편 누구든지 어떤 시점에서 인습적인 제도에 강하게 구속된다는 긴장이론가에 대하여 여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것들이 서로 다른 “인습적인” 제도에 구속도지 않거나 또는 많은 사람이 구속되어 있다(문화일탈이론)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
통제이론들은 개인의 사회에 대한 유대가 약하거나 단절되었을 때 비행행위가 결과로서 생긴다고 가정한다. 이 이론들은 두 개의 아무 복잡한 개념인 개인의 사회에 대한 유대(the bond of the individual to society)를 채택하므로 그들이 한때 또는 다른 때에 대부분 형태의 정도에서 벗어나거나 유별난 행동의 설명의 기초를 형성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통제이론들이 여러 가지로 사회에 대한 유대의 요소를 기술했고 그들은 통제의 요점으로서 다양한 단위들에 초점을 맞춘다.
유대의 요소(elements of the bond)
애착(attachment)
준수행동을 설명함에 있어 사회학자들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한다. 유감스럽게도 앞장에서 시사한대로 그들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민감하고 이리하여 일탈행동에 대한 그들의 설명으로부터 민감성(영향 받음)을 배제한다고 시사하는 경향이 있다. 일탈행동을 설명함에 있어 심리학자들은 대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무감각(영향 받지 않음)을 강조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또한 변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게다가 그들은 민감성을 증후군의 일부 또는 “유형”으로 만들고 이리하여 설명개념으로서의 그 가치를 심하게 줄이기 위해서 민감성을 다른 변수들에게 유리할 수 없게 관련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신병질자(psychopath)는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존경(respect) 또는 경의(regard)에서 드러난 보통의 동기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충분한 애착 또는 애호”가 부분적으로만 특징이다. 그는 또한 “과도한 공격성”, “초자아통제의 부족” 및 “유아수준의 반응”과 같은 것들이 특징이다. 유감스럽게도 정신병이 많은 경우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행동은 또한 정신병이란 개념의 일부가 된다. 결과로서 Barbara Wootton의 말로는:[정신병은] 유달리 및 수치심도 없고 제한 없이 정신이상이 반사회행동에서 추론되는 순환과정의 모델인 반면 반사회적행동은 정신이상에 의하여 설명된다.
정신병의 차원이 논리적으로 및 그러므로 서로 구속된 것보다는 오히려 인과적으로 및 그러므로 개연적으로 상호관련된 것으로 다루어지면 되면 진단, 동어반복 및 욕설의 문제는 피해진다. 사실상 정신병자에게 귀착되는 모든 특성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부족의 영향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부족이 도덕적 억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분명히 양심 또는 초자아가 없다는 사실인 정신병자의 무죄를 설명하기 위해 애착의 부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의 부족은 단지 정신병의 증후군이 아니라 그것이 정신병이다; 양심의 결여는 같은 것을 말하는 바로 또 다른 방법이고 규범의 위반은 결과이거나 (결과일 수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사람은 동물이므로 “충동성”과 “공격성”은 도덕적 억제가 없는 자연적 결과로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과 같이 타고난 성향과 능력이 부여된 인간의 관점은 사회학자들에게 특히 싫은 것이므로 우리는 비도덕적인 인간의 공격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견해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疎外)되는 과정은 많은 경우 행동적인 비인간적인 갈등을 수반하거나 근거하고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약화된 사람들의 공격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사회적으로 파생한 적개심의 보고(寶庫, reservoir)를 쉽게 공급할 수 있다.
Durkheim은 그것을 수년전에 말했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한” 한에는 우리는 도덕적 존재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했다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의 규범은 정의상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한다. 그러므로 규범을 위반한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소망과 기대에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소망과 기대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즉 그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둔감하다면 그렇다면 그는 그 범위에서 규범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게 일탈한다.
규범, 양심 또는 초자아의 내면화의 본질은 이리하여 개인의 다른 사람ㅁ들에 대한 애착에 있다. 이 관점은 내면화의 개념에 대하여 몇 가지 장점이 있다. 한 예로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애착을 갖는 정도는 그의 일탈행동과는 관계없이 측정될 수 있으므로 애착에 근거한 일탈행동의 설명은 교묘히 피하지 않는다. 게다가, 행동의 변화는 내면화 또는 초자아의 관념이 사용되는 때가 아닌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혼한 남자는 이혼 후 자살 또는 위조와 같은 많은 일탈행위를 보다 더 할 것 같다. 우리가 초자아(또는 내부통제)에 의하여 이들 행위를 설명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은 이혼했을 때 :“양심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물론 그가 결혼하면 그가 양심을 되찾았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인습적인 사회에 대한 유대의 이 차원은 대부분의 사회통제지향 연구와 이론에서 마주친다. 우리는 유대를 성격의 일부로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유대에서의 “양심”을 찾아내서 시간을 두고 변화를 설명하는 문제는 피하지만 F. Ivan Nye의 “내부통제”와 “간접통제”는 동일한 요소를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유대는 바로 Albert J. Reiss의 “인적통제”의 한 국면이다; 우리는 애착과 비행간의 관계를 정의(정의)상 보다는 오히려 문제가 되도록 하여 동어반복적 경험적 관찰의 문제를 피한다. 마지막으로 Scott Briar와 Irving Pilavin의 “헌신” 또는 “준수에의 이해관계”는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논의될 다음 요소와 보다 밀접하게 관련되지만 그들의 논의가 예증하듯이 애착을 포섭한다.
헌신(commitment)
“모든 열정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가장 적게 법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공포(두려움)이다. 뿐만 아니라 몇가지 관대한 본성을 제외하고 법을 위반하여 이윤 또는 쾌락의 있을 때 사람들에게 본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유일한 것이다.” 사람들이 때때로 단지 결과의 위험 때문에 규칙을 지킨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준수에서의 이 합리적인구성요소를 우리는 헌신이라고 칭한다. 사람이 준수에 명확한 태도를 지녔다고 말하는 r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Howard S. Becker의 공식화에서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첫째, 개인은 어떤 특정한 행동방침에 대한 그의 결정이 필연적으로 그것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다른 이해관계와 활동에 대한 결과가 있는 입장에 있다. 둘째, 그는 자신의 앞선 행동에 의하여 자신을 그 입장에 두었다. 세 번째 요소는 [다른 이해관계를] 알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만 존재하고 이 사례에서 그의 결정은 그것을 초과하는 결과를 가져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관념은 사람은 일정한 활동방침 예컨대 교육을 받거나, 기업을 증강시키거나 덕을 위한 평판을 얻는 것에 시간, 에너지 및 자신을 투자한다. 그가 일탈행동을 고려할 때 또는 할 때마다 그는 그가 인습적인 노동에 한 투자를 잃을 위험인 이 일탈행위의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초자아 또는 양심의 사회학적 대상물(대응하는 것, counterpart)이라면 헌신은 자아 또는 상식의 대상물이다. 인습적인 행동방침에 명확한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비용과 위험은 분명히 가치가 10달러를 초과하기 때문에 10달러 노상강도로 1~10년 징역형은 어리석음이다. (정신분석자에게 이러한 행동은 “현실원리”에 의하여 지배될 실패를 나타낸다.) 사회학적 통제이론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르겠다는 결정은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행위자의 결정은 그가 직면하는 위험과 비용으로 보아 불합리하지 않다고 가정될 수 있고 보통 가정된다. 물론, Becker가 지적하는 대로 행위자가 어떤 의미에서 행동방침의 비용을 계산할 수 있다면 그는 또한 계산상의 오류들 즉 일탈행위의 그럴싸한 설명으로서 통제이론에서의 무식과 오류보고를 할 수 있다.
헌신의 개념은 사회의 조직은 범죄행위에 관여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화된 사회에서 단순히 사는 과정에 의하여 재화, 평판 및 잃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성공할 가망을 획득한다. 이 축적물들은 그들이 규칙을 준수할 사회의 보험이다. 비행행동의 선행연구들에 대한 많은 가정들은 이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반항은 .... 미래 지위가 현재의 성과와 명확하게 관련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는 Arthur L. Stinchcombe의 가정은 사람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얻고 싶어 하는 것에 의해서도 준수에 명확한 태도를 갖고 있다고 시사한다. 이리하여 “야망”과/또는 “열망”은 준수를 낳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사람은 인습적인 생활방침에 헌신하게 되고 그는 그러므로 준수에 명확한 태도를 갖고 있다.
사회에서 대부분의 행동방침들은 물론 인습적이다. 가장 명확한 예들은 교육적 및 직업적 경력이다. 이 영역들에서 기회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은 아파도 회피된다. 재미있게도 비인습적인 약속들은 인습적인 준수를 야기하도록 작동할 수 있다. 적어도 조직적 비합법활동 직업 또는 전문절도를 열망하는 소년들은 사무직소년의 구직자들간의 수요에서의 전통적인 특질인 그들의 “정직”과 “신뢰성‘에 의하여 판단된다고 우리는 듣고 있다. 의
참여(involvement)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고결한 삶을 그렇지 않으면 할 기회의 부족의 덕택이다. 시간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유한(有限)이다: 나는 잘생기고 살지고 옷을 잘 입고, 훌륭한 운동선수, 일년에 100만달러를 벌고 재주꾼, 미식가와 여자를 잘 호리는 사나이는 물론 자선사업가, 정치가, 전사 및 아프리카탐험가는 물론 음시인(音詩人) 및 성자는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좋겠다. William James가 여기에서 되고 싶거나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상상하기에 모두 다 인습성의 범위내에 있지만 그가 불법행동을 포함하고자 한다면 그는 여전히 그들 중 일부를 단지 불가능한 것으로 배제해야 한다.
인습적인활동에이 참여 또는 몰두는 이리하여 많은 경우 통제이론의 일부이다. 널리 공유된 가정은 사람은 일탈행동에 관여할 시간을 찾는 인습적인 일들을 하느라 그저 너무 바쁠 수 있다. 인습적인 활동에 관여하는 사람은 약속, 마감기한, 업무시간, 계획 등에 구속되고 그래서 일탈행위를 저지를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가 인습적인 활동에 몰두하는 한 그는 그의 성향을 실행으로 옮기기는커녕 일탈행위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
이 논증 방침은 비행을 줄일 많은 프로그램에서의 오락시설에 주어지는 강조, 고등학교 중도탈락에의 많은 관심과 소년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군에 징집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원인이다. 인습적인 활동에의 관여가 비행에 대한 중요한 억제력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어 Sutherland에 의해서까지 받아들여졌다.
비행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비행에 관여하는 청소년들과 그렇지 않는 청소년들 간의 차이는 후자는 그들의 오락적 이해관계를 만족시킬 인습적 유형과 같은 많은 기회가 제공되는 반면 전자는 그러한 기회 또는 시설들이 부족하다고 할 것 같다.
“게으른 노동자들은 악마의 작업장이다”라는 견해는 비행에 관한 최근의 사회학적 저술에서 보다 야박한 대접을 받았다. 예를 들면 David Matza와 Gresham M. Sykes는 비행자들은 Veblen에 의하여 유한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동일한 가치 즉 스릴을 맛보려는 탐색(a search for kicks), 일의 경멸, 좋은 점수를 위한 욕구 및 남자다움의 증거로서의 공격적 강인함의 수용인 재미를 유한계급(the leisure [idle] class)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시사한다. Matza와 Sykes는 이 가치체계에 의하여 비행을 설명하나 그들은 모든 계층에 있는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 유한계급의 구성원이어서 그들은 “이전의 부모의 지배와 일과 결혼의 유대를 통한 사회구조와의 미래통합간의 중간상태(limbo)로 이동한다”고 주목한다. 결국,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여가는 일련의 가치를 낳고 이번에는 이것은 비행으로 된다.
신념(belief)
문화적 일탈이론과는 다르게 통제이론은 그 규범들이 위반되고 있는 사회 또는 집단내의 공동가치체계의 존재를 가정한다. 일탈자가 인습적인 사회의 체계와 다른 가치체계에 명확한 태도를 갖고 있으면 이론의 상황내에서는 설명할 것이 없다. 문제는 “왜 사람은 그가 존재를 믿고 있는 규칙을 위반하는가?”이다. 그것은 “왜 사람들은 선(善)과 바람직한 결과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 다른가?”가 아니다. 사람은 그 규칙을 그가 위반하고 있는 집단으로 (아마도 불완전하게) 사회화된 것으로 가정된다; 일탈은 한 집단이 또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그 규칙을 부과하는 문제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일탈자가 규칙을 신뢰했다고 단지 가정하지 않고 우리는 그가 규칙을 위반한대로 그는 규칙을 믿는다고 가정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가 훔치고 있는 동시에 훔치는 것이 나쁘다고 믿는가? 긴장이론에서,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앞장에서 시사된 대로 긴장이론은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안되었다.) 긴장이론가에 의하여 인용(引用)된 일탈에 대한 동기유발이 너무 강하여 일탈자가 그것이 잘못이라고 강하게 믿는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일탈행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기이론에 대한 통제이론에 비추어 일탈자와 비일탈자가 일탈행위가 나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은 범죄를 범하고 다른 사람은 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가?
통제이론들은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법을 취해왔다. 한 접근방법에서 다른 형태들의 통제가 없다면 신념들은 거의 또는 전혀 의미가 없는 단지 말에 불과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정신병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리적 능력과 정서적 통제간의 분열인 “의미론적 치매”는 그 문제를 다루는 이 방식을 예증하고 있다. 요컨대, 적어도 말로서 표현되는 한 신념은 동떨어진다; 그들은 일탈자와 비일탈자를 구별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언어” 또는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인 다른 특징과 같은 계층에 있다. 그들은 비행행위의 수행에 실질적인 장애를 나타내지 못하므로 어떻게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범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루어지는가에 대하여 어느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신념 (또는 가치)을 언급하지 않고 많은 것들이 하지 않는 통제이론들은 문제에 대한 이 접근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두 번째 접근방법은 일탈자는 그의 행동을 합리화하여 그는 당장 규칙을 위반하고 그것에의 신념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Donald R. Cressy는 횡령에 대하여 이 논거를 주장했고 Sykes와 Matza는 비행에 대하여 그것을 주창했다. Cressy 및 Sykes와 Matza의 취급방법에서 이 합리화들(Cressy는 그들을 “언어화(verbalization)”라 부르고, Sykes와 Matza는 그들을 “중화기술(techniques of neutralization)"이라고 칭한다)은 일탈행위의 수행전에 일어난다. 중화가 성공적이면 그 사람은 문제의 행동을 자유롭게 범한다. Cressy 및 Sykes와 Matza 둘 다에서 중화의 노력을 촉구하는 긴장은 또한 그 다음의 일탈행위를 끝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론들은 이 의미에서 긴장이론이다. 통제이론에서 중화를 설명할 특별한 동기유발력이 없기 때문에 중화는 통제이론가정을 충실히 신봉하는 이론의 상황내에서는 다루기 어렵다. 이 어려움은 이 주제에 대한 Matza의 나중의 취급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여기에서 동기 구성요소인 ”비행의지“는 도덕적 진공상태가가 중화기술에 의하여 야기된 후 나타난다. 이리하여 문제가 된다: 왜 중화하는가?
통제이론도구로 긴장이론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통제이론가는 이리하여 함정에 빠진다. 그는 중요한 문제에 답할 수 없다. 중화의 개념은 일탈행위의 수행에의 도덕적 장애의 존재를 가정한다. 일탈행위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 도덕적 장애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저항에 최소한 효력상 상응하는 일탈에 대한 동기를 유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도덕적 장애들이 제거되면 중화와 특별동기부여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제이론의 암묵적 논리를 따르고 가정에 의하여 이 도덕적 장애물을 제거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규칙들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 장점에 관계없이 준수할 도덕적 의무를 느끼지 못한다. 이 사람들의 가치와 신념들이 그들의 감정에 일치하고 일관성에 대한 경향이 있는 한 중화는 불필요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이것이 단지 문제를 한발 뒤로 밀어내고 동시에 공통가치체계의 가정과의 충돌을 낳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 우리는 Cressy가 하듯이 중화는 특정한 범죄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우리는 Sykes와 Matza가 그러듯이 중화는 많은 비행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사람은 그가 범하고자 하는 행위의 수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합리화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우리는 일탈행위를 범하는 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신념들은 그는 불법목적의 달성을 원활화하기 위해 신념을 구성하거나 채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동기가 없다. 둘째, Matza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비행자들은 비행의 인습적인 평가에서 일치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은 사회의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한도내에서 변화가 있고 게다가 사람이 규칙들을 복종해야 한다고 적게 믿으면 믿을수록 그는 그것들을 더욱 더 위반할 것 같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연대순으로 규범의 도덕적 타당성에서의 사람의 신념은 목적론적 이유없이 약화되었다. 그가 비행행위를 저지를 확률은 그러므로 증가된다. 그가 비행행위를 한때 및 하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는데 있어 그의 신념의 약점을 정당화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어떤 특별한 동기도 그의 신념의 약점 또는 아마도 그의 비행행위를 설명하는데 요구되지 않는다.
이 논거의 요지는 물론 사회규칙의 도덕적 타당성에서의 신념의 변화가 잇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직접실험검증을 받을 수 있고 이리하여 적어도 자료와의 첫대면까지 생존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이 단락이 시작된 공통가치체계의 관념에 돌아가야 한다.
공통 (또는 아마도 더 좋은 단일) 가치체계의 관념은 도덕적 신념에서의 강도의 사실 또는 추정과 일치한다. 우리는 비행이 인습적인 도덕에 어긋나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암시하지 않았지만 이 신념들의 의미와 효능은 다른 신념들 및 실제로 인습적 질서에 대한 다른 유대의 강도를 조건으로 한다.
동기부여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motivation?)
통제이론이 부딪치는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는 이것과 같다: “예, 그러나 왜 그들이 그것을 하죠?” 옛날에는 통제이론가는 단지 “문명의 허식”을 벗기고 모두가 보도록 “동물적 충동”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충동들은 그(와 분명히 그의 지지자들)에게 범죄와 비행에 대한 동기의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논거는 비행자들과 범죄자들만이 동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 동물이고 이리하여 모두 자연스럽게 범죄행위를 범할 수 있다. 아이들, 닭들과 개들이 때때로 그들의 동료 짐승들을 공격하고 훔친다는 것; 아이들, 닭들과 개들은 또한 완전히 도덕적 방법으로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행동한다고 밝히는데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물론 ;닭들과 개들의 행동은 “폭행” 또는 “절도”도 아니고 이러한 행동은 “도덕적‘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닭 또는 갱의 행위일 뿐이다. 이웃으로부터 옥수수를 훔치는 닭은 도덕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규칙을 위반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단지 옥수수를 먹고자 한다. 베개를 악의적으로 파괴하거나 다른 개를 사납게 공격하는 개는 닭의 도덕적 동등물이다. 고안에 대한 어떤 동기도 그의 행위를 설명하는데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또한 그의 범죄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동물내에 범죄에 대한 특별한 동기유발은 없었다.
시대는 변했다. 동물적 본능을 언급하는 것은 (사회내에서 적어도) 더 이상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통제이론가는 그의 이론의 동기적 구성요소를 점 점 더 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 “보편적 인간욕구” 또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나 범죄와 비행 뒤에 있는 추진력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동시에 범죄와 비행에 대한 그의 설명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무엇이 통제이론을 가정하는가라고 독자는 말했다. Albert Kochen과 James F. Short는 이렇게 문제에 답한다.
이론의 (두 유형)의 중요한 제한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 [ 문화갈등과 사회해체이론들]은 그들이 효과적인 통제의 부재에서 비행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둘 다 통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행에 대한 충동이 젊은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그 자체는 설명될 필요도 없다고 가정하는 동기부여의 모델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것은 경찰의 단속(lid) - 내면화된 문화적 억제 또는 외부적 권한-이 없을 때 분출하는 것이다.
이 비판들에 대한 몇가지 가능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반응이 있다. 하나의 반응은 가정을 단지 인정하는 것 즉 사람이 통제이론가들이 범죄에 대한 동기에 관하여 언제나 가정해온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인정하는 것 - 그것이 (적어도 해당 시스템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정하다는 것이다.
일탈행위를 최종적으로 범하는 사람들만이 보통 그렇게 할 충동이 있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주 일탈충동을 보다 더 경험할 것 같다. 적어도 상상속에서 사람들은 보기보다는 보다 더 일탈적이다.
이러한 가정을 하는 것에 확실히 잘못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정하고 싶은 것을 어느 것이나 자유롭게 가정한다; 이론의 진실은 아마도 실험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
아마도 다소 억지스러운 변명(애매한 말)을 포함하는 두 번째 반응은 통제이론의 논리를 지지(defend)하고 (증거없이) 주장된 가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정적 관계가 긍정적 관계만큼이나 과학적 수용가능성에 대한 많은 설명을 요구하므로 무엇인간의 부재가 비행을 야기한다고 시사하는 통제이론은 적절한 비판이 아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현재의 이론이 누구에게나 비행에 대한 타고난 충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은 이러한 귀속의 필요성 부정한다:
사람의 욕망과 다른 열정들은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니다. 그러한 열정들로부터 생기는 행동들은 마침내 그것들이 그것들을 금하는 법을 알게되면 더 이상 행동이 아니다.
세 번째 반응은 비행의 완전한 설명이 필요한 자극(impetus0을 제공하고 통제이론과 일치하는 동기부여의 설명을 해석하기 된다고 인정하여 그 비판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Briar와 Piliavin은 상황적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행위들이 가치 있는 재화를 획득하거나, 또래들의 면전에서 용기를 표현하거나 또는 충성하기 위해서 마음에 들지 않은 누군가에 주먹을 휘두르거나(strike out at) 단지 “스릴을 맛보려고(to get kicks)” 모든 소년들이 경험한 단기 상황적으로 유발된 욕구에 의하여 촉발된다고 가정한다.
...내 생각에는 설득력이 있고 동시에 보통 통제이론과 양립하는 “왜 그들이 그것을 하는가”의 몇 가지 부가적인 설명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이 통제이론과 양립할지는 모른지만 그들은 결코 그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비행자에게 좀처럼 고유하고 이상한 동기부여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같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는 (예를 들면 Briar와 Piliavin으로부터의 앞서의 인용에서 분명하듯이) 다른 소년들과 같은 압박감에 반응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포함된다면 동기부여의 설명들은 ‘동물적 본능’이 전통적으로 도움이 된 이론에서 동일한 기능에 유용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의 설득력과 그럴듯함에 더해지나 그들이 비행자와 비비행자를 구별하지 않으므로 별로 달리 부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통제이론은 여전히 지금까지 그래왔던 일탈이 문제가 아닌 이론 그대로이다. “왜 그들은 그것을 하는가”의 문제는 그 이론이 답하기 위해 설계된 문제만은 아니다. 문제는 “왜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는가?‘이다. 도전한다면 할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