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제 식민통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논쟁으로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 논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좌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논쟁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필자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 학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어 보기로 하였다. 원로 경제사학자인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가 첫 테이프를 끊었으며, 그 뒤를 이어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인터뷰에 참여하게 된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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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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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김지은 |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일본 식민통치가 단순히 조선을 착취한 데 그친 게 아니라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는 데에도 기여를 했다는 이론이다. 이는 1980년대에 등장하였으며, 안병직·이영훈 교수 등이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이영훈 교수 등은 사료와 수치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입장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일제의 착취 때문에 조선이 주체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민족주의적 접근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 맹아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북한·중국 등에서 활발히 연구된 자본주의 맹아론은,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로 자본주의를 심어주지 않았더라도 한국·중국 등이 내재적(주체적)으로 얼마든지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논쟁의 초점은,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 역사에 '독'이 되었느냐 아니면 '약'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사 청산이나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는 '독'인가 '약'인가
현재 한국사회가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 대해 다소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각 학자들의 주장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소개하기로 한다. 어느 쪽 입장이 맞느냐 하는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 나오는 주종환 교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을 지지하는 학자다. 주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일 이후 2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1단계에서는 여러 차례의 이메일 교환을 통해 기본적인 사항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졌고, 2단계에서는 주종환 교수의 마포구 도원동 자택에서 보충적인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경제사학자인 주종환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출생하여 일본 도쿄대학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으며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농업경제학 전공)를 받았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동국대 교수 및 농과대학장 등을 지낸 바 있는 주종환 명예교수는, 70을 훨씬 넘긴 지금도 여전히 학문과 현실참여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주 교수는 지난 1983년 국내에선 최초로 토지공개념 도입을 주장한 바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관해서도 1980년대부터 비판적 입장을 개진해 왔다.
다음은 주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안녕하세요? 학문과 실천 두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78세이지만, 건강합니다. 아내가 4년 전에 세상을 떠나 약간 외롭지만, 자식들이 잘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6·15 공동선언의 실천을 위한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2003년 한국경제학회 학술발표회 때 발표하신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 : 한국경제 근대화와 소농>이라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고 계신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쪽에 서 계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일제시대의 지배적 산업은 농업이었습니다. 그 농업에서 지배적이었던 게 바로 예속적인 소작농민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이 시대를 '반(反)봉건 사회'였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식민지 반자본주의사회론'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일제시대는 식민지 반봉건사회
-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지난 2002년 <역사와 현실>이라는 학술지에 <조선후기 이래 소농사회의 전개와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 교수는 1950년대까지의 한국사회를 소농사회로 규정한 뒤에, 소농은 이윤추구동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소농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기는 힘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반해 선생님께서는 조선조 말의 소농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맹아 즉 자본주의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조선시대의 자본주의 맹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자본주의 맹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상품경제의 발전 정도이고, 둘은 그 상품경제의 주도세력이 어떤 사회계급 또는 계층인가라는 측면입니다. 설사 상품경제가 발전되어 있어도 직접 노동하는 농민층이 전근대적인 봉건적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아직 근대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직접 경작하는 농민에게 토지소유권이 없고 봉건지주들에게 소유권이 있을 경우에는, 상품을 내다 파는 계급은 지주계급이므로 농민은 완전히 소외되어 상품의 거래담당자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그럼, 조선조 말에 근대화의 싹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나는 토지소유를 위한 소작농민들의 투쟁의 발달 속에서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조의 농민 대부분은 경작권은 있었지만 소유권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학문용어로 달리 표현하면, 하급소유권은 있어도 상급소유권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 소농이 토지를 소유하기 위해 지권투쟁(地權鬪爭)을 벌이는 게 근대화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 언뜻 생각하기에는 소농은 무력한 존재처럼 보이고 또 자본주의화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는 소농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한 것은, 봉건제가 가장 먼저 붕괴되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독립자영농민 즉 소농이 광범하게 나타난 데 있습니다. 소농이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에서도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드는 것이 근대화의 초석입니다. 이런 관점은, 소작농과 자작농을 뭉뚱그려 '소농'이란 개념 속에 집어넣은 이영훈 교수의 견해로는 파악될 수 없습니다.
'조선조 말에 소농이 지배했으니까 한국이 내부의 힘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없었다'라고 보는 것은 '형태를 달리한 식민사관'입니다."(소농이 토지소유권을 차지한 다음에 상품경제의 주도자가 되는 것이 자본주의화의 길이라는 것이 주종환 교수의 인식이다. 토지소유권을 장악하기 이전 즉 지권투쟁을 벌이는 단계를, 주종환 교수는 자본주의 맹아 단계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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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폐지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는 주종환 교수(왼쪽에서 두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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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권우성 |
| - 그런데 '평균적 토지소유'라는 것은 이미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사회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중국 주나라의 정전제(井田制)는 후대에 오래도록 한국·중국 등에서 이상적인 제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전근대 사회에서도 토지를 획득하기 위한 농민의 투쟁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에나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려고 했는데, 굳이 조선 말기의 지권투쟁만을 특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요? 토지 소유를 위한 농민의 투쟁이 자본주의적인 것이라면, 그런 것은 어느 시대에도 있었지 않습니까? "물론 어느 시대에나 농민들은 토지를 위해 싸웠어요. 하지만, 조선조 말의 농민투쟁은 농민 스스로 주체가 되어 토지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이전 시기의 농민투쟁과는 다른 것이죠."(이 대목에서 이영훈 교수와 주종환 교수의 차이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영훈 교수는 소농의 농업은 자급자족을 특징으로 한다고 보았다. 지배계급에게 공납과 지대를 내기 위해 혹은 자급 불능의 생활 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상품작물을 재배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농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영훈 교수의 견해다. 이에 비해, 주종환 교수는 소농의 지권 투쟁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발견하고 있다-필자주)
"소농의 지권 투쟁은 자본주의의 맹아"
- 한편,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대해 연세대 최윤오 교수는 조선 후기에 '경영형 부농' 혹은 '광작 농민'이 존재했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의 농업이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윤오 교수는, 조선조 말에 임금노동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적 광작농민(경영형 부농)이 광범하게 성립되어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김용섭 교수의 견해를 답습한 것입니다. 이 견해는 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봅니다. 광작농민의 경영은 지주-소작 관계 아래서 이룩되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피지배농민들은 신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고공' 즉 종놈 같은 신분의 계층도 많았습니다.
조선조 말에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으므로 자체적 힘으로도 근대국가가 될 수 있었는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그 싹이 잘렸다는 역사해석을 하려는 것 자체는 좋은 시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농업경영의 성립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지나친 해석이라고 봅니다.
조선조 말에 그렇게 농업이 근대화되어 있었다면, 일제하의 소작쟁의나 2차 대전 이후의 농지개혁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세계사적 안목에서 역사를 해석해야지, 도식적인 이론을 가지고 무리하게 선진국의 발전모형에 두들겨 맞추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이영훈 교수의 입장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주종환·최윤오·김용섭 교수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런데 무엇을 자본주의 맹아로 볼 것인가를 놓고 세 교수의 견해가 나뉘고 있다. 최윤오·김용섭 교수는 "조선조에서 경영형 부농이 출현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 맹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는데 비해, 주종환 교수는 부농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소농의 지권투쟁만 갖고도 자본주의 맹아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필자주)
"부농이 없었더라도 소농만으로 자본주의 맹아 인정 가능"
- 조선조 농업에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나타났다고 해도, 그 '정도의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약 조선조의 자본주의 맹아가 사소한 정도에 불과했다면, "일본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자본주의로 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않겠습니까? "조선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는 바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하급소유권(소농의 경작권)이 상급소유권(지주의 법률적 소유권)을 물리치고 완전한 소유권으로 올라서기 위한 투쟁의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이 실제로 폭발한 것이 동학농민전쟁이었습니다. 조선조 말의 근대화의 싹은 바로 이런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농민전쟁을 가져오게 된 정치·경제적 배경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소농 특히 살기 어려운 소작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농민전쟁이었습니다. 훗날 한국에서 2차 대전 이후에 실시된 농지개혁을, 조선조 말기에 선구적으로 시도한 것이라고 자리매김할 수도 있습니다. 이 혁명은 외세의 간섭으로 무참히 짓밟혔지만, 그때 외세의 간섭이 없었다면 한국의 근대화를 결정적으로 견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영훈 교수는 이 점을 보지 않고 '소농이니까 근대화의 힘을 갖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소농의 역사 창조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을 폭로한 것입니다.
조선조 말은, 그처럼 지주계급 주도의 근대화의 길과 피지배계급인 농민 주도의 근대화의 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습니다. 이 두 개의 길의 대립관계를 분석하면, 그 가운데서 근대화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소농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한국사회가 소농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니 자체의 힘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일본인 사학자들의 오래된 견해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이런 견해를 극복해야 하는데, 이영훈 교수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럼, 조선시대에 이미 자본주의의 씨앗이 나타났으므로, 일제가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도 조선이 스스로 자본주의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동학전쟁은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것"
- 자본주의 맹아론은 특히 북한과 중국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는데,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매우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찬성 여부를 떠나, 이 논의의 배경 자체가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지 않습니까? 서구 침략의 당위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 동기 자체가 학문의 과학성을 방해하는 요인은 아닐까요? "자본주의 맹아론이 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 주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비과학적이라고 본다면 그것도 문제 아닐까요?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실제의 역사 과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취사 선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할 때에는 역사가의 주관 즉 역사관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객관적 사실 자체를 억지로 두들겨 맞추는 것은 비과학적이겠지요.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놓고 그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서울대 법학과 박병호 교수는 조선조에 경작권자와 소유권자의 토지소유권 다툼에서 소유권자가 언제나 승소했다는 사실을 들어 조선조 말에 근대적 소유권이 이미 완전히 지배적이었다고 해석했는데, 나는 '이 사료를 뒤집어 보면 경작권자가 끈질기게 자기 소유권을 주장했던 사실 자체가 경작권자에 대해서도 소유권의 일부가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조 말의 농지 소유권은 상급소유권과 하급소유권으로 분리되어 대립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같은 역사적 사실도 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