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상의사 尙義祠 충남.청양군 화성면 구재리 소재
원래는 번암 채제공 상공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에서 제각으로 세운 상현당 이었는데 채씨문중에서 국고 보조로 중수 재건해서
평강채씨 15세
영국공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판의금부사 행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시 諡 문혜공 아호 호주 채 유 후 蔡裕後 공 영정
평강채씨 17세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예문관 제학 아호 희암공 채팽윤 公 영정
평강채씨 19세
대광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諡 문숙공 아호 번암공 채제공 상공 영정을 뫼시고
선조 삼위三位에 대해 추시향(가을시제)으로 배향하는 사당이다
15세 유후(裕後)공은 14세 진사 충연(忠衍)의 큰아들로서 호는 호주(湖洲) 시호는 문혜공(諡號 文惠公)이다.(소감공 주부공계)
광해 7년(1615) 17세에 생원과 급제하고 인조 원년(1623) 문과전시탁1인(文科殿試擢1人)으로 장원급제(壯元及第=문과 전시 갑과 제1등)하여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리고 경관직, 외관직(京官職, 外官職)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인조 14=1636)때에는 국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고 청(淸)과의 화친을 극력반대 하였으며 세자(봉림대군-후에 효종)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압송될때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으나 반청관(反淸官=청나라를 배척 반대하는 관원)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력으로 강계(江界)에서 귀양살이도 하였다.
인조19년(1641) 광해군이 제주에서 죽자 예조참의가 되어 제주에 가서 호상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세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자 당상관이 되어 인조실록 효종실록을 편찬하고 대제학(문관 최고의 영예직)이 된 후에는 광해군때 역신들이 잘못 기록한 선조, 인조 신록을 보정 수찬한바 있다.
그후 6조의 참판,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좌, 우윤을 거쳐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우참찬, 세자좌빈객, 경연, 춘추관, 성균관, 중추부 돈녕부, 의금부의 지사와 오위도 총부 도총관, 내의원 봉상시의 제조등 정2품관 요직을 모두 겸직하였다.
현종원년(1660) 향년 62세로 타계하였는바 인조 22년 심기원(沈奇元)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적으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혜공(文惠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또한 선조, 인조, 효종 3세의 금궤지문(金櫃之文)으로 파격적인 추영(追榮)이 내려 고조 용양위호군 중경은 예조참판겸 양관제학에, 증조 사헌부 집의 난종은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조고 홍문관응교 경선은 이조참판에, 선고 진사 충연은 이조판서에 각각 증직되었다.
17세 팽윤(彭胤)공은 16세 동지중추부사 시상(時祥)의 넷째아들로서 호는 희암(希菴)이다. (소감공주부공계)
숙종13년(1687)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동15년(1689)에 증광시문과 갑과 제3인(增廣試 文科 甲科 第3人=3等)으로 백형, 명륜은 병과로 두 형제가 동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재임중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렸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외관직으로 서천, 남포(보령), 양양, 무주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병조참판, 예조참판, 예문관 제학을 역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밀풍군을 추대하며 반역 변란)때는 중형인 한성부좌윤 채성윤과 함께 적진을 거쳐 국왕께 달려가 안위를 물으니 영조가 흐뭇하여 여러차례 포상하기도 하였다. 공은 만 1세때 글자를 판독하였고 4세이후에는 놀라운 신동이 되어 이를 보고파 찾아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륐다고 하며 글씨와 문장에 당대를 주름잡아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 중창비(頭輪山 大花寺 重創碑)와 대흥사 사적비(大興寺 寺蹟碑)와 양산통도사 세존비와 지리산 화엄사의 상량문등 비문을 짓고 썼다고 한다. 영조 7년(1731)4. 26 졸하다.
19세 제공(濟恭) 번암상공은 18세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독자로서 호는 번암(樊岩)이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소감공 주부공계)
조선왕조 500년중 영, 정(英祖, 正祖)시대를 문예부흥기, 실학전성기, 탕평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는 번암정승의 탁월한 정치역량과 탕평이념의 구현에 수반한 피나는 숨은 공이 있었기에 초당적 문인정치를 꽃피웠을 것이다.
정조라는 불세출의 성왕(聖王)이 재위하면서 그 자신이 탁월한 문장가요 화가였기에 일찍부터 천재를 알아 보았다. 그 밑에 제공이 있었기에 10여년간 독상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조 3대 명재상(황희, 상진, 채제공)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현재까지도 국영, 민영 방송국(특히교육방송국)에서 그 높은 치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영조10년(1734) 15세때 향시(생원, 진사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동19년(1743)24세때 탁별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서(충청)암행어사, 도승지, 양사의 수장, 경기, 함경, 평안도 관찰사 6조의 각 판서를 모두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영조34년(1758)에는 도승지가 되어 열성지장(列聖誌狀)을 증보편찬 하였고 역신들에 의한 폐세자의 명이 내린것을 제공이 한사극간하여 이를 막아냈다.
영조 38년(1762)모친상으로 거상중(居喪中)인때 사도세자의 비보를 듣고 상복을 입은채 입궁하여 10여일동안 통곡하였으며 만일 이때 제공이 도승지나 정승에 재직중이었다면 이런 당쟁의 제물이 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게 당시의 야사(野史)이기도 하다.
영조 52년(1776)에는 서응명과 같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이해 영조가 승하(사망)하자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 국장을 치루었다.
정조원년(1777)에는 정조가 등극(登極)하자 역신 홍계희, 김상로 등이 국왕을 시해코자 심야 입궁하는 역변이 발생하자 제공이 수궁대장(守宮大將)에 임용되었다.(이판, 형판, 예판, 병판 겸직중에) 정조 12년(1788) 우의정으로 승진할때에는 6대 정책을 진언해서 그대로 시행하였다.
정조 14년(1790)부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제공은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다가 반대정파의 모략으로 정조 16년(1792) 좌의정을 일시 사임하고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다음해 정조17년(1393) 영의정에 승진 임명되다. 정조23년(1799)1월 18일 향년 80세로 임종하자 정조대왕의 친제문(親祭文)으로 대신들이 장례를 치루게 하고 비석은 물론이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한 행장뢰문을 지어서 또 친필로써서 비석에 새겨(뢰문비=추모비에 해당)장례시에 세워줬으니 이것도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종 소식을 들은 서울 관민 수천명이 상가에 몰려와 상중 3개월간 연일 호곡하였고 3월 26일 출상일에는 영남의 10여서원 유생(학자, 선비)들이 장지에서 회의를 열고 사림장(士林葬)으로 장사를 지냈으니 이것도 조선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묘 소: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산 3, 4, 5 경기도 기념물 제17호
뢰문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배향사당
상의사(尙義祠) 충남, 청양, 화성, 구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30호
미천서원(眉泉書院) 전남, 나주 전남 지방문화재 제29호
도강영당(道江影堂) 충남, 부여 충남 문화재자료 제116호
추영 4세의 은전이 내려 아래와 같이 증직되다
고조고 화순현감 진후(振後)는 이조참판에
증조고 동지중추부사 시상(時祥)은 이조판서에
조고 한성부좌윤 성윤(成胤)은 의정부 좌찬성, 양관대제학에
선고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은 의정부 영의정에
<일화(逸話)>
1. 14세 어린날의 채제공
눈 내린 깊은 산속의 호랑이(현재 대학 국어에서 교육 중)
단풍도 끝물이라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절간의 풍경 소리도 차갑게 느껴지는 늦가을이었다.
골짜기를 감싸고 흐르는 계곡수(溪谷水)는 단풍잎을 점점이 띄운 채 흘렀다. 그 광경(光景)을 굽어 보는 높드리에 마당처럼 널찍한 바위가 있었고, 바위에는 열명 남짓한 젊은 선비들이 조촐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봄, 이 산(山)에 들어와 한솥밥을 먹은 우리가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부지런히 공부들 하였으니, 각자 시(詩)를 한 수(首)씩 지어 나누어 가지도록 합시다.”
흥이 무르익자 판서(判書)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좋소이다. 바람 불 적마다 겨울을 재촉하는 나뭇잎이 애달프게 지는데, 어찌 이별의 시(詩) 한 수(首)가 없겠소.”
“오늘 시(詩)를 보며 장차 누가 장원(壯元)을 할지 점쳐 보는 것도 재미있겠구료.”
모두들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열다섯에서 스물 살 남짓한 그들은 대개 권세(權勢)있는 양반(兩班)집 도령이었다. 누구는 재상(宰相)의 아들이고, 누구는 판서(判書)의 아들이며, 모두 권문세족(權門勢族) 출신이었다. 그런 가운데 행색(行色)이 초라한 홍안(紅顔)의 소년(少年)도 끼어 앉아 흡사 개밥에 도토리마냥 무시당하고 있었다.
심산(深山) 계곡의 너럭바위가 과장(科場)이라도 되는 듯 모두들 하얀 종이 위에 먹물을 찍어 써나갔다. 그런 다음 차례로 시(詩)를 읽고는 촌평(寸評)과 더불어 덕담(德談)을 나누었다. 시평회(詩評會)가 끝나고 다시 잔에 술이 채워질 때였다.
“왜 내 시(詩)는 돌려보지 않는 겁니까?”
오랫동안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소년(少年)이 말했다. 그는 무리 가운데 가장 어려 솜털이 보송보송하였다.
“아하, 그대가 있는 줄을 미처 몰랐네 그려. 하도 조용해서 없는 줄로 알았지 뭔가. 자네가 직접 소리내어 읊어 보게. 하하하.”
판서(判書)의 아들이 웃자 모두들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少年)은 늘 도령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가세(家勢)가 어려워져 있어 절을 찾아도 시줏돈 조차 제대로 못 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少年)은 당당히 자신의 시지(詩紙)를 들고 낭송(朗誦)하였다.
한상고백 응생자, 설월공림 호양정.
寒霜古柏 鷹生子, 雪月空林 虎養精.
찬서리 내린 잣나무 고목(古木)에 매가 새끼를 낳고
눈 쌓인 달밤 깊은 숲속에 호랑이가 정기(精氣)를 기르다.
모두들 작의(作意)를 간파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러는 시지(詩紙)를 받아 찬찬히 뜯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 도령이 입을 열었다.
“매와 호랑이의 기상(氣像)을 본받으려는 건 좋지만, 너무 허황(虛荒)되지 않은가. 참새는 매가 될 수 없고, 강아지가 범이 될 리도 없으니 말일세.”(무식한 해석)
소년(少年)의 기울어진 집안형편과 초라한 행색(行色)을 비아냥거리는 말에 골짜기는 웃음 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소년(少年)은 당황하거나 노(怒)하지도 않고 일어서서 공손히 절을 하고는 수북하게 쌓인 낙엽(落葉)을 밟으며 총총히 물러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상(宰相)의 아들이 소년(少年)의 시(詩)를 다시 보고는 챙겨 넣었다.
“아버님, 이 시(詩)를 좀 보아주십시오.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듯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귀가(歸家)한 재상(宰相)의 아들이 부친에게 소년(少年)의 시(詩)를 펼쳐 보였다. 심드렁하게 시지(詩紙)를 받아 들었던 재상(宰相)의 눈에 어느 순간 반짝 빛이 감돌았다.
“이게 누구의 시(詩)더냐?”
“이번에 같이 산사(山寺)에서 공부한 소년이 송별연(送別宴)에서 지은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러 사람이 그 소년(少年)을 놀려대며 업신여겼겠구나.”
“예. 아직 어리기도 하고, 집안이 하도 가난해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리석은 것들.”
재상(宰相)은 혀를 끌끌 차고는 그 시(詩)를 풀이해 주었다.
“매는 가을에 새끼를 치지 않는다. 가을에 태어났다면 추운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용맹(勇猛)스런 매가 되지 못할 테니까. 이는 곧 그 소년(少年)이 자신을 놀려대는 너희들이 볼품없는 무리라고 조롱(嘲弄)한 것이다.”
“다음 구절(句節)은 무슨 뜻입니까?”
아들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생각해 보아라. 눈으로 덮인 산(山)에서 호랑이가 홀로 달빛을 받으며 기개(氣槪)를 기르는 모습을! 이는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대장부(大丈夫)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말하는 것으로, 곧 자기 자신을 나타냄이다. 그 아이 이름이 무엇이더냐?”
“忠淸道 洪州(충청도 홍주) 사람인데, 관심을 두지 않아 이름은 잊었습니다.”
재상(宰相)이 무릎을 철썩 치면서 말했다.
“너는 참으로 아까운 벗을 놓쳤구나.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인물(人物)임에 분명하거늘, 쯧쯧.”
인물(人物)은 역시 인물(人物)을 알아보는 법인가. 재상(宰相)은 시(詩)만 보고도 가난한 그 소년(少年)이 장차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르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소년(少年)의 이름은 바로 채제공(蔡濟恭)이었다.
2. 죽은 후의 채제공
화부화(花復花) “꽃진 열매에 다시 피는 꽃”
정조(正祖)는 크게 상심하여 승지(承旨)를 보내 채제공의 장례(葬禮)를 치르게 하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학문(學問)과 정치적 동반자로서 사이가 두터웠던 것이다.
『大東紀聞』은 정조(正祖)와 채제공(蔡濟恭) 사이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話) 한 편을 전한다.
정조(正祖)는 규강작(奎章閣)선비들에게 종종 시(詩)를 쓰게 하거나 시제(詩題)를 내어 재주를 가늠하기를 즐겼는데, 하루는 아주 기발한 시제(詩題)를 떠올렸다.
화부화(花復花)!
이는 어느 책에도 용사(用辭)가 없는 어휘로 정조(正祖)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과제(科題)를 내려니 문득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채제공(蔡濟恭)은 알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정조(正祖)는 채제공(蔡濟恭)이 타계(他界)한 얼마 뒤에 과장(科場)을 열어 그 소재를 내걸었다.
결과는 정조(正祖)가 생각한 바와 같았다. 제대로 답을 써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정곡(正鵠)을 찌른 답안지(答案紙)가 딱 하나 있었다. 이름 없는 시골 선비가 출제(出題) 의도(意圖)를 정확히 파악하고 합당한 논술(論述)를 편 것이었다. 정조(正祖)는 그 답안(答案)을 장원(壯元)으로 뽑고 선비에게 물었다.
“누가 이 제목의 뜻을 가르쳐 주던가?”
그러자 선비는 상경(上京) 길에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선비가 용인(龍仁)의 어느 산마루를 지날 때였다. 날이 저물어 하루밤 묵을 곳을 찾는데 마침 한 노인(老人)이 나타나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노인(老人)이 넌지시 말했다.
“이번 과거(科擧)의 제목은 화부화(花復花)일 테니 미리 대비하시오.”
선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굳이 풀이하자면, ‘꽃이 진 열매에서 다시 피는 꽃’이라는 뜻이오.”
“처음 듣는 말인데, 대체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句節)입니까?”
“그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소.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우리네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꽃이니, 바로 목화라오.”
선비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도 그 뜻을 곰곰 헤아리며 입경(入京)하였고, ‘花復花’라는 과제(科題)가 내걸리자 옳다구나 하고 써내려간 것이었다.
“그 노인(老人)의 생김생김이 어떠하던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정조(正祖)가 물었다.
“얼굴이 길고 갸름하고 키는 훌쩍 컸으며, 코도 크고 입술은 두툼하였습니다.”
정조(正祖)는 즉시 사람을 보내 선비가 하룻밤 유숙(留宿)했던 장소를 확인하였다.
“거기에 집은 없고 다만 무덤이 있었는데, 바로 전임(前任) 재상(宰相) 채제공(蔡濟恭)의 비석(碑石)이 있었습니다."
이에 정조(正祖)가 감탄하여 말했다.
“번암(樊巖)이 죽어서도 재주를 부리는구나!”
花復花. 참으로 그럴듯한 제목(題目)입니다. 세종(世宗)~성종(成宗) 시대(時代)에 활짝 피었던 조선(朝鮮)의 문화(文化)가 영조(英祖)~정조(正祖) 시대(時代)에 다시 꽃핀 것이니, 곧 花復花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나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는 말보다 얼마나 사실적(寫實的)이고 멋들어진가. 정조(正祖)가 이 말을 만들어 내고 채제공(蔡濟恭)이 홀로 이 뜻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당쟁(黨爭)을 일소(一掃)하고 문화(文化)를 꽃 피우고자 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음을 입증한다.
충남.청야군 화성면 구재리 소재 상의사의 추시향 배향일은 매해년 음력10월 마지막 일요일 이다.
향사 주관은 대종회 상의사 종중(회장 채영석 연락처 010-9769-4500)에서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