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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
심광주(토지박물관 학예실장)
Ⅰ. 머리말
고구려 최전성기였던 4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국경은 서쪽으로 遼河, 북쪽으로 松花江유역, 동쪽으로 東海, 남쪽으로는 아산만에서 竹嶺·鳥嶺과 興海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이러한 영토확장을 통하여 고구려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구축하고 "日月之子 河伯之孫"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고구려적 天下觀을 갖게 되었다.
전성기의 고구려영토가 과연 어디까지였는가 하는 데에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서쪽과 북쪽, 동쪽의 경계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고구려 산성이나 고분, 토기·기와 등 고구려의 독특한 문화적 흔적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사성, 안시성, 백암성 등 요동반도 일대의 고구려 성들과 동단산성과 용담산성 등 송화강 일대의 산성유적들, 그리고 훈춘과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성들은 강성했던 시절 고구려의 위용을 느끼게 해준다.
남쪽 지역의 양상은 이와 다르다. 신라·백제와의 접경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대규모의 고구려성이나 고분 등 고구려의 유적임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고구려 國原城 治址로 알려져 있는 충주지역만 하더라도 중원고구려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이 확인된 바 없으며, 영월·단양일대의 유적중 고구려 성으로 알려져 있는 왕검성이나, 온달산성, 태화산성 등에서도 고구려유물이 확인된 바 없다. 아산만·청원일대도 마찬가지이다. 당성, 망이산성, 개소문성, 고려산성을 포함 고구려산성으로 주장되는 많은 유적 중 고구려토기가 출토된 곳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상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출토유물 중 일부가 高句麗系라는 이름으로 모호하게 설명하거나, 향후의 고고학적인 조사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될 것이라는 예견으로 마무리되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유적에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구의동 보루 같은 작은 규모의 유적에서도 4백여점의 고구려토기와 1천 3백여점이 넘는 무기류가 출토되고 지표조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고구려토기가 수습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여 쌓은 대규모의 고구려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정기간 동안 고구려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증거가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최 전성기 고구려의 남쪽 접경지역에서 고구려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아직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삼국시대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잘못되었거나 백제·신라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 형태가 요동지역이나 북부여 지역과 달랐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지역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Ⅱ. 남한지역 고구려유적 조사현황
남한지역에서 고구려유적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1977년에 실시된 구의동유적이다. 華陽地區 區劃整理事業과 관련하여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와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은 이 유적을 고구려 군사유적이 아닌 殯殿葬과 관련된 백제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구의동유적은 거의 20여 년 동안 백제유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출토유물도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제실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후 1983년부터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결과 성내에서 백제토기와는 이질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그것이 구의동유적 출토유물과 함께 고구려토기라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1994년 구리문화원에 의하여 아차산일대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남한지역에 많은 고구려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해 주었다. 아차산 일대에서 무려 20여개의 고구려 보루가 확인된 것이다.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 구축된 보루는 교통로를 따라 봉화산과 상계동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도 밝혀지게 되었다. 그후 1995년 육군박물관에서 연천군 일대의 군사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 등 몇 개의 고구려유적을 확인하였다.
1998년에는 토지박물관에서 양주군 광역지표조사를 실시하여 28개의 관방유적을 조사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가 고구려유적임이 밝혀졌다. 고구려보루는 3번 국도를 瞰制할 수 있는 천보산맥과 불곡산 도락산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어서 1999년 토지박물관에서 남양주시 광역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남양주 수석동에서 붉은색 승문 고구려기와편이 산재해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즐문토기가 함께 섞여있는 유물분포양상이 이상해 밭주인에게 문의한 결과 이곳은 서울지역에서 오는 흙을 받아 성토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흙이 반출된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같은 해에 토지박물관에서는 연천 호로고루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주변지역을 조사하여 새로운 고구려유적을 추가하였다. 특히 무등리2보루에서 대규모의 군량미창고를 발견하였다. 이곳에서는 많은 양의 탄화미와 탄화조가 출토되어 고구려 군사들의 식생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어서 1999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파주시 광역조사결과 德津山城에서도 탄화미와 함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2000년에는 세종대학교가 실시한 의정부시 광역조사에서 사패산1보루가 고구려유적임이 밝혀졌다. 2001년에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파주칠중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신라·백제유물과 함께 약간의 고구려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어 이 성을 한때 고구려가 장악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유적은 모두 40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그중 아차산4보루는 1997·1998년에 걸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수 백여 점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성벽과 치, 온돌과 집수시설을 갖춘 고구려 관방시설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1999년에는 아차산4보루에 인접해 있는 시루봉 보루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되어 역시 같은 구조의 성벽과 온돌시설 및 많은 양의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었다. 2000년에는 토지박물관에 의하여 연천 호로고루에 대한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결과 지상구조물인 동벽은 체성벽과 치를 갖춘 고구려성벽 바깥쪽에 신라성벽이 다시 구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수만점에 달하는 고구려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기와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1996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진천 大母山城을 지표조사 하는 과정에서 고구려토기 항아리 한 점을 수습한 바 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대전 월평산성에서도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었다.
한편 유구 형성의 주체세력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약간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거나 전혀 이질적인 집단의 유구에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는 경우가 있다. 1996년 연천 지역의 홍수로 인하여 노출된 파주 주월리 유적을 경기도박물관과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한 결과 주월리 2호주거지에서 고구려 토기 四耳壺와 兩耳壺, 단경호 등이 백제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1985년 월성로 고분군 가-5호분 출토 綠釉小壺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1998년 경기도 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된 성동리 마을유적에서는 2호주거지에서 유일하게 암문이 있는 고구려토기편 한점이 출토된 바 있다.
그 외에도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된 호우총 발굴조사에서 415년에 제작된 고구려청동호우 한점이 출토되었다. 이 호우에는 간지가 새겨져 있어 5세기대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으며, 같은 형태의 銅盒이 창령 교동 과 경산조영 E12-1호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이외에도 기형상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한 유물로는 금관총 출토의 四耳壺와 서봉총과 황남대총 남분출토 銀盒 등이 있다.
유구를 동반하지 않은 단일 유물로는 단국대학교 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된 中原高句麗碑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불상은 전국에서 여러 점이 발견되었으며, 그중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된 '延嘉七年銘金銅佛像' 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 유구의 형태와 구조상 고구려유적이거나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 1984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굴한 순흥의 於宿述干墓는 내부의 석비내면에 '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8자가 음각 되었는데 명문확인결과 595년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1985년 문화재연구소와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邑內里壁畵古墳고분은 벽화에 쓰여진 '乙未中墓像人名00' 명문은 539년으로 비정되어 고구려인에 의하여 직접 축조된 무덤이라기 보다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인의 무덤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어서 1986년에는 고분 주변에 있는 14기의 順興 邑內里古墳群 중에서 5기를 발굴조사 한 결과 역시 6∼7세기경에 조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벽화가 없는 석실분으로는 春川新梅里古墳과 春川芳洞里古墳, 그리고 漣川薪沓里古墳이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抹角藻井式 천장구조를 하고있다는 특징 때문에 고구려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중 춘천 신매리 고분군은 1982년 경작도중에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이 고분은 동편연도를 갖춘 석실무덤으로 내부에서 인골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이 신라영역이 되기 전 구축된 고구려계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춘천방동리 고분은 1983년 김원용교수가 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진 유적으로서 1993년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2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이 고분은 방형의 석축기단과 동편 羨道를 갖추고 있었으며, 조사단은 고구려 남하기간 동안인 5세기중엽부터 6세기 중엽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천장 구조가 네귀를 맞졸임하는 전형적인 抹角藻井式과는 차이가 나며, 2호분의 시상이나 연도부분, 또는 봉토에서 출토된 연질토기는 고구려토기라기 보다는 고려시대토기로 추정되고, 방형 기단의 경우는 오히려 고려시대에 많이 구축되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하면 이 고분을 고구려고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별로 없다. 연천 신답리 고분은 1992년 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이 군사보호구역 내의 지표조사과정에서 2기가 발견되었다. 이미 도굴된 상태인 이 고분은 회로 벽석 틈새를 메우고 말각조정식의 천장 등이 춘천 방동리나 신매리고분과 같은 구조여서 역시 고구려 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고분은 2001년 토지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므로 곧 구체적인 성격이 밝혀지게 될 것으로 기되된다.
석실분은 아니지만 최근 고구려 基壇式積石塚으로 알려져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유적이 있다. 단양 斜只院의 태장이묘가 그것이다. 산사면에 의지하여 山石으로 쌓은 이 유적은 외견은 기단식적석총과 유사하지만 아직 埋葬主體部가 확인되지 않아 고분인지 여부와 그 조성시점이 언제인지는 발굴조사가 더 진행되어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지금까지 많은 성들이 고구려 성으로 추정되어 왔다. 특히 한강유역 일대와 영월·단양지역과 금강상류지역에 있는 성들이 주로 고구려성으로 비정되어 왔다. 이것은 역사적인 통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먼저 한강유역 일대에 위치하는 성중에 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실시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적 351호로 지정된 烏頭山城은 백제 關彌城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92년 통일동산 조성사업과 관련하여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단은 이 성이 백제 관미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지만 출토유물은 대부분 신라-통일기의 것이며, 백제나 고구려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산성과 인접한 성동리 고분과의 연관성을 감안하면 현존 석축성은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축성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사적 403호로 지정된 포천 半月山城은 최근까지 6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특히 1995년 발굴조사시 이 지역의 고구려 지명인 [馬忽] 명 기와가 출토되어 고구려 마홀군의 治所로 추정되었으며, 고구려 娘臂城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고구려 娘臂城이나 馬忽郡의 치소로 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한다면 그에 걸맞는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어야 하지만,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유물이라고 판단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약점이다.
하남 二聖山城은 1985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9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성은 조선시대부터 백제 하남 위례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장되어 왔으며, 8차조사에서는 고구려성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결과 이성산성 역시 백제유물과 고구려유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많은 건물지와 신라토기로 미루어 신라 漢山州의 邑治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이남지역의 성중 망이산성은 안성군·이천군·음성군의 경계에 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성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1996년부터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2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백제·통일신라시기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으나 고구려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사단은 봉수지 주변의 토성은 백제, 남문·서문지는 통일신라, 2호 치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화성의 唐城은 삼국시대 對唐交易의 중심지였던 黨項城로 추정어 왔으며, 신라가 장악하기전 백제나 고구려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최근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된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테뫼식 석축산성은 7세기경에 축성된 신라성이고 포곡식 土石混築城은 829년 唐城鎭 설치와 관련되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남한강 상류의 溫達山城은 성의 명칭도 고구려의 온달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온달설화나 온달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어 지금까지 다른 어느 성보다 확실한 고구려성으로 추정되어 왔다. 온달산성은 1989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 축성되어 6세기 중엽 신라에 영유되었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古城化 되었다고 하였다. 지표조사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보고자는 유물자료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이 성이 고구려성임을 명확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축성기법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신라성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1978년 丹陽新羅赤城碑가 발견되어 사적 제265호로 지정된 단양적성은 1991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단은 이성이 신라 진흥왕대인 545∼551년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보고서에는 적성 주변의 貢文城, 獨樂城, 竹嶺古城, 加隱岩山城 등이 조사되어 있다. 그중 공문성은 신라가 죽령이북으로 진출하기 전의 고구려·백제계 유물이 보다 많이 산재한 곳으로서 주목된다고 하였지만 보고서에서 고구려의 유물로 추정되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영월지역은 고구려 奈生郡지역으로서 동강상류를 따라 정선을 지나면 강릉과 동해로 통하며, 서강을 거슬러 주천·원주를 지나면 춘천쪽으로 연결된다. 이 통로는 삼국시대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였으며 그 길목에 위치하는 정양산성은 일찍부터 고구려산성으로 비정되어 왔다. 正陽山城은 王儉城으로도 불리는데 2000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懸門式의 성문구조와 성벽 보축시설 등 신라성의 특징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은 대부분 신라토기와 기와편임이 밝혀졌다. 또한 왕검성 조사과정에서 주변의 대야리성과 완택산성, 태화산성에 대한 지표조사를 함께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정양산성과 함께 고구려성으로 추정되어온 太華山城은 성벽외측의 수직기둥홈이나, 甬道모양의 雉城 등 중세성벽의 특징을 보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청풍 望月山城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를 보면 이 성은 전형적인 삼국시대 신라성임을 알수 있다.
충주 단양지역에서 온달산성이나 정양산성과 함께 주목받고있는 산성이 薔薇山城이다.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북서편에 위치하고, 남쪽기슭에 中原高句麗碑가 자리하고 있어 고구려 國原城의 중심 성으로 비정되어 왔다. 그러나 199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 성으로서의 특징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조사단은 "고구려 유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뚜렷한 유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고구려와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애매하게 결론 내리고 있다. 薔薇山城의 동남쪽에 위치하는 大林山城은 1997년 상명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조사단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승전지였던 忠州山城에 비정하고 있다.
청주·청원지역에 있는 산성 중 父母山城은 1999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이 산성은 懸文式의 성문과 補築構造를 갖추고 있으며 출토유물로 미루어 통일신라기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청원 강내면의 猪山城도 고구려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1999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한 지표조사 결과 백제유물이 주로 수집되었다.
마지막으로 순흥의 飛鳳山城은 벽화가 발견된 순흥 읍내리 고분과의 연관성 때문에 주목받아왔다. 이 산성은 1985년부터 1991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이 산성은 신라가 이미 이지역에 진출하여 及伐山郡을 설치한 이후인 5세기 후반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Ⅲ.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
1. 夢村土城
몽촌초성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토성으로 한성백제시기의 주요 居城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1982년부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6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성곽과 성 내부의 시설은 모두 백제에 의해 축조되고 사용된 것이지만 고구려의 온돌건물이 확인되고, 고구려토기도 다수 출토되었다. 고구려 온돌건물지는 토성의 서남지구 고지대의 版築臺址, 장방형건물지, 적심건물지 주변에서 조사되어 ㄱ자형의 온돌고래와 굴뚝시설이 확인되었다. 고구려토기는 광구장경사이옹을 비롯한 15개기종 329개체분이 출토되었으며 이는 출토된 백제토기의 12%에 달하는 양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시기폭이 크지 않지 않지만 고구려 유구가 많지 않은데 비해 토기의 수량은 많은 편이어서 고구려군은 상당기간 동안 몽촌토성 내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구의동유적
구의동유적는 서울시 성동구 구의동의 해발 53m 정도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유적은 화양지구 토지 구획정리 사업으로 인해 1977년 발굴 조사된 후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유적은 직경 14.8m, 둘레 46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직경 7.6m 의 수혈을 파고 건조물을 세운 형태이다. 석축부에는 두 개의 치가 구축되어 있으며, 수혈 내부에는 벽체를 따라 22개의 柱孔과 배수시설 및 온돌이 확인되었다. 수혈의 중심부에는 폭1.5m 깊이 2.3m 정도의 집수시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400여점 달하는 고구려토기와 1천여 점 이상의 철제 화살촉과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3.정립회관 배수장 유적
성동구 광장동 산 383번지 정립회관 남쪽 해발 104m의 구릉 정상부에 있었다. 이곳은 홍련봉1보루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m 거리이며 구의동 유적과는 2km 정도의 거리이다. 구릉의 정상부는 평탄하게 삭토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정립회관의 배수지가 설치되어 있고 남서쪽에는 군사용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고구려 토기편은 경사진 곳에 쌓인 흙더미 속에서 여러 점이 발견되었으며, 유구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4. 홍련봉 1보루
성동구 광장동 아차산 유원지 입구 남쪽에 있는 해발 116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있다. 이 구릉은 북서-남동향으로 길쭉하고 가운데가 잘록하여 마치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데 원지명은 紅蓮峰이다. 이 구릉에는 각 봉우리마다 하나씩 고구려유적이 있다. 동남쪽의 유적은 정상부가 평탄하게 삭토되고 주위를 돌아가며 둘레 147m 정도의 타원형 토루가 형성되어 있으며, 토루 안쪽은 우묵하게 파여 있다. 남동쪽에는 문지두리석으로 보이는 홈이 파인 석재가 놓여 있다. 유물은 유적 동남쪽 토루 윗부분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토기편과 함께 아차산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5. 홍련봉 2보루
홍련봉 1보루에서 북서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삭토 되어 평탄하게 된 구릉의 정상부를 외곽을 돌아가며 쌓은 장타원형의 토루가 있다. 토루의 둘레는 169m 정도이며 흙에 덮여 있으나 부분적으로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토루의 내부 높이 2m 정도의 단이 져있으며 낮은 곳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고구려토기는 북동쪽의 고대지에서 주로 발견된다.
6. 아차산 1보루
아차산성에서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00m 정도 거리의 해발 250m의 봉우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기원정사 뒤편에서 시작된 석축 구조물이 산 복부를 타고 올라와 아차산의 주능선과 만나는 지점이다. 유적은 능선의 방향을 따라 장축이 북동-남서향인 장타원형의 토루 형태이다. 토루는 둘레가 91m, 안쪽에서의 높이는 1.5m, 하단부의 폭은 6m 정도이다. 마치 작은 평지토성을 연상하게 하는 이 구조물은 토루의 외곽 일부에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어 토루처럼 보이는 속에 석축 시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대부분 토기편으로 흑색마연의 동이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황갈색이나 홍갈색의 연질토기들도 많이 발견된다.
7. 아차산 2보루
구리시 교문동의 대성암 뒤편 해발 276m 지점의 소봉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서는 미사리 암사동 등 한강 일대를 조망하기 매우 용이하고 유적의 동쪽 하단부에는 암벽이 형성되어 있어 방어에 매우 용이한 곳이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인 석축부와 그 안쪽의 소토부로 구분이 된다. 직경 15m 정도인 원형의 석축부는 현재 3단 정도가 노출되어 있다. 석축 시설의 남쪽 부분에는 길이 1.6m, 폭 1.2m 의 방형 돌출부가 있으며 그 윗분에는 후대에 조성된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또한 석축부의 안쪽에는 적갈색의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다. 소토층 속과 주변에서는 고구려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8. 아차산 3보루
아차산 2보루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 상으로 능선이 한차례 낮아졌다가 높아지며 해발 296.9m를 정상부로 하며 길쭉하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보루가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몇 년 전에 들어선 국민체육시설이 들어서면서 상당 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네와 의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유구는 평탄한 구릉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석축 시설을 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 경계지점을 정확하게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둘레는 대략 110m 정도이다. 석축 시설은 유구의 남쪽 부분에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흙에 덮여 있다. 유구의 남쪽부분에서 고구려 토기편들이 발견된다.
9. 아차산 4보루
아차산 3보루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으로 용마봉으로 건너가기 직전 마지막 봉우리로서 해발 285m지점으로서 길쭉한 소봉의 정상부 북쪽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보루는 1997년과 1998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전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유적은 외곽의 석축성벽과 내부의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타원형을 이루는 성벽은 둘레 210m, 높이 4m 정도이며 동쪽과 서쪽에 각 1개소의 치가 조사되었다. 성벽 안쪽의 평탄면에는 모두 7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3호 건물지의 경우 3칸의 온돌방과 2기의 집수시설 및 배수시설이 설치되어있으며, 그밖에 3호건물지 북서쪽 모서리 외곽에 간이대장간 시설도 1기가 설치되었다. 저수시설은 2기가 확인되었는데 풍화암반토를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후 통나무를 직각으로 연결하여 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온돌은 모두 13기가 조사되었으며 2호 온돌을 제외하면 모두 건물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어 취사와 난방을 주요목적으로 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4보루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는 모두 26개 기종 538개체분이 출토되었다. 기능상 저장용기, 운반용기, 조리용기, 배식용기로 구분된다. 철기류는 총319점이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10. 용마산 1보루
성동구 중곡 4동 용마산 남쪽 능선 대원고등학교 동쪽의 해발 183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볼 때 마치 낙타 등처럼 볼록 볼록 솟아오른 봉우리의 가장 아래 부분이다. 보루는 능선 정상부의 좁은 지형을 활용하여 직경 5m, 길이 16m 정도 규모로 좁고 길쭉하게 구축하였다. 석축을 정연하게 쌓은 부분이 노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30∼40cm 정도의 할석들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석축 시설의 안쪽은 비교적 평탄하고 흙이 쌓여 있는데 그 남쪽 부분 퇴적토 속에서 상당량의 고구려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11. 용마산 2보루
용마산 1보루에서 북쪽으로 약 250m 거리의 해발 225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바라볼 때 볼록 솟아 오른 두 번째 봉우리이다. 보루는 둘레 60m, 직경 20m, 폭 8m 정도로 윗 부분이 평탄하게 조성되고 둘레를 돌아가며 석축이 되어 있다. 보루의 동쪽 중간 경사진 곳에는 민묘 한기가 있고 무덤 옆에는 燒土層이 노출되어 있다. 이 소토층 속에서 흑갈색과 황갈색의 고구려 토기편이 몇 점 채집되었다.
12. 용마산 3보루
성동구 중곡동과 중랑구 면목동의 경계지점으로 용마산의 최고봉인 해발 348m 지점에서 능선을 따라 망우리 쪽으로 250m 지점에 있다. 이곳은 헬기장을 조성하느라고 평탄하게 삭토 된 부분과 등산로 변에 다량의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다. 헬기장의 서쪽 부분에는 적갈색의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다. 이 유적은 석축 부분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헬기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흑회색이나 황갈색, 홍갈색을 띠고 있으며 정선된 태토에 붉은색의 보강재가 혼입 된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편들이다.
13. 용마산 4보루
용마산 3보루에서 능선을 따라 약 50m 정도의 거리에는 또다시 20m 정도 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편들이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용마산3보루와 연결된 하나의 보루일 가능성도 있다. 평탄한 곳의 동편에는 민묘 한기가 있으며 무덤 주변의 바닥에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편들이 박혀 있다. 토기들은 대체로 회흑색을 띠고 있으며 황갈색이나 홍갈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14. 시루봉 보루
구리시 아천동의 해발 205m의 시루봉정상부에 있다. 시루봉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 간 지류로서 정상부에 서면 구리시 일원과 한강 이남지역은 한눈에 조망되지만 북쪽으로는 아차산 줄기가 시야를 차단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99년과 2000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전면발굴이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성벽의 둘레는 220m 정도이며, 남동쪽 성벽에는 치가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석축성벽의 잔존높이는 1.7m 이나 원래의 성벽은 3∼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대형건물이 있고, 성벽과 대형건물 사이는 흙으로 단단히 다졌으며 이 공간은 주거 및 취사지역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온돌은 총 6기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직선형의 평면형태이며 아궁이는 온돌방향과 수직이다. 배수시설은 대형건물지 외곽에 건물지 벽체와 평행하게 조성되어 있다. 배수로는 암반을 굴토하고 바닥에 말각장방형의 판석을 깔고 그 옆에 판석을 세우고 다시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이다. 저수시설은 대형건물지의 가운데에 축조된 것으로 평면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규모는 남북9.5m, 동서6.3m, 깊이는 3.5m로 암반을 굴토하고 바닥과 벽에는 뻘흙을 붙여서 방수하였다. 유물은 주로 토기인데 군부대에서 참호를 말들면서 많은양의 토기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는 약 1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무기류로는 화살촉과 철모, 창고달이가 있다. 공구류는 철정과 철부, 삽날 등이 있다. 유물의 양상은 아차산 4보루의 토기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토기의 기종 및 기형을 통해볼 때 유적의 중심연대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15. 망우리 1보루
구리시 아천동의 해발 280.3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으로 용마봉에서 연결되는 능선이 한번 낮아지다가 솟아오르면서 남북으로 몇개의 봉우리를 형성하는데 공동묘지가 형성되는 지점의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곳에서는 광장동과 구리시 일대가 잘 조망되며, 현재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 헬기장의 주변을 돌아가며 부분적으로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데 석축시설의 직경은 11.2m 정도이고 둘레는 35m 정도이다. 남쪽부분이 무너지면서 석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주변에서 몇점의 고구려토기편이 채집되었다.
16. 망우리 2보루
망우리 1보루에서 북쪽으로 약 1.2km지점의 망우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 해발 281.7m의 산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는 100m 정도 간격으로 2개의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중 남쪽봉우리이다. 정상부를 비롯해 주변 일대에 거의 빈 공간이 없이 분묘가 조성되어 있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평탄한 정상부의 둘레는 대략 120m 정도이며, 보루의 축조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은 분묘의 담장으로 이용되어 원래의 유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조성된 분묘의 봉토사이나 분묘와 분묘 사이의 도로변에서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17. 망우리 3보루
망우리 2보루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거리의 돌출된 봉우리에 있다. 이곳에서는 봉화산과 불암산, 동쪽으로는 남양주 일대와 암사동 일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며, 특히 북쪽방면의 시야가 아주 양호하다. 이곳 역시 전역에 분묘가 조성되어 보루 원래의 유구는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평탄한 정상부의 둘레는 약 250m, 정도이며, 보루에 사용된 석재들이 분묘의 담장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이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정상부의 서쪽에 노출된 단면에서는 지표하 50cm 지점에서 두께 10cm 정도의 목탄이 섞인 부식토층이 가로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 목탄층의 윗부분에서는 무문토기편이 상당량 발견되고 있다.
18. 봉화산 보루
묵동,신내동, 상봉동에 접하여 있는 해발 160m 봉화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평지에 돌출 되어 있는 독립 구릉으로서 동쪽에 아차산 주능선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북쪽으로 불암산과 도봉산, 양주 일대까지 잘 조망되며,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 남산과 한강이남 지역도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목멱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화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고구려유적을 훼손하며 봉화대가 복원되어 있다. 보루는 평탄한 정상부의 외곽을 따라가며 구축되었는데 석축은 마치 머리띠를 돌리듯이 정상부에서 3∼4m 아래 부분을 돌아가며 7∼8단, 높이 100cm 정도로 쌓았다. 유물은 현재 체육 시설이 설치된 평탄면의 바닥과 남쪽 등산로에서 민가 쪽으로 가는 동쪽 도로 바닥에서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19. 상계동 보루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 남쪽 지봉의 정상부에 있다. 상계국민학교 뒷편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해발 192.5m의 소봉이 나타나는데 이 소봉의 정상부가 보루이다. 정상부는 평탄하고 북쪽과 동서쪽은 급경사를 이루지만 남쪽은 비교적 완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인수봉과 북한산 일대, 남쪽으로는 봉화산과 한강 일대, 동쪽으로는 불암산이 바라다 보이는 등 전망이 양호하지만 북쪽으로는 수락산과 계속되는 능선으로 인하여 시야가 막혀있다. 정상부에서 3∼4m아래로 돌아가며 석축을 하였다. 전체둘레는 150m 정도이고 형태는 북쪽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정상부는 삭토되어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고, 그 남쪽은 1∼1.5m 정도 낮아지면서 석축열이 돌아가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부가 두군데 있다. 현재 등산로 부분과 정상부 및 경사로 부분에 상당량의 고구려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20. 사패산1보루
의정부시 호원동의 사패산 동쪽지봉의 해발355m 지점에 구축되어 있다.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7km 지점에 상계동 보루가 있으며, 북쪽으로 5.5km 지점에는 천보산 2보루를 비롯한 천보산맥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 보루는 대부분 자연 암벽을 그대로 활용하여 통로로 이용될 수 있는 바위틈 사이 몇군데를 20m 정도 석축으로 보강한 정도이다. 이 보루는 접근이 어렵고 성내부가 협소해 최소한의 병사만이 주둔하며 교통로를 감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동남쪽부분에 약간의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보루 내부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대부분 고구려토기편이다. 이 보루는 양주일대의 고구려보루와 상계동 보루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당시의 주된 교통로가 의정부에서 중랑천쪽으로 연결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1. 천보산1보루
양주 주내면 마전리의 천보산 개암사 뒷편 해발 299미터 소봉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는 현재 방형의 석축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전체 둘레는 약 40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m이다. 석축은 1m 정도의 대형 석괴를 쌓아 조성하였으며, 주변에는 석축에 사용된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석축단 주변에서 어골문과 파상문와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고구려토기편도 발견되고 있다.
22. 천보산2보루
천보산 1보루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270m 지점의 해발 336.8m 천보산 정상부에 있다. 이곳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남쪽으로는 의정부 일대가 조망되고 북쪽으로는 양주분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97년 건립된 이동통신 천보산 기지국 건설로 인하여 유적의 90% 이상이 이미 훼손된 상태이다. 세장한 타원형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보루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약 5m 지점에 는 집수 시설로 추정되는 방형 유구가 남아 있다. 규모는 남-북이 460cm, 동서가 520cm 이며 내부에는 고운 마사토와 흑색의 부식토가 충진되어 있다. 주변에는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23. 불곡산2보루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의 해발288.8m 불곡산 능선상의 봉우리로 佛谷山1堡壘에서 서북쪽으로 500m 지점에 있다. 보루는 정상부를 평탄하게 삭토하고 둘레를 돌아가며 띠를 두르듯석축을 하였다. 평면형태는 북서-남동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 전체둘레는 76m 이고 장축은 28m, 단축은 14m 정도이다. 현재 남아 있는 축성부의 높이는 2m 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군사용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시설물의 북쪽 중앙에는 직경 5미터 정도 범위로 다른 곳에 비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아마 지하에 집수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편 몇점과 신라토기편이 수습되었다.
24. 불곡산5보루
양주 주내면 유양리 불곡산 정상부의 남동쪽 해발 443.5m 지점에 있다. 이곳은 역시 350번 지방도와 양주산성일대가 잘 조망되는 곳으로 佛谷山6보루와 100m, 불곡산4보루와는 400m, 불곡산3보루와는 500m, 불곡산2보루와는 850m 거리에 있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에서 5m 정도의 하단을 감싸안으며 축조되었으며, 북서쪽 부분은 높이 20-30m 정도의 수직에 가까운 자연암벽을 활용하였다. 평면형태는 북서-남동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다. 전체둘레는 105m, 장축의 폭은 29m, 단축의 폭은 20m 정도이다. 서쪽에는 2∼3단 정도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내부에는 암반이 노출되어있고, 암반에는 문확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파여있다. 보루내부의 서쪽사면에서 흑색마연의 고구려토기편과, 단경호 및, 장경호등 신라·통일신라토기편, 고려시대의 토기와 자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25. 도락산2보루
도락산 1보루에서 동북쪽으로 1.6km 지점의 해발 426.3m 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불곡산 일원의 보루들이 한눈에 조망되며, 광적면 일대의 움직임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보루는 정상부의 바로 아래쪽을 돌아가면서 돌로 쌓았는데 특히 방어에 가장 취약한 지점인 동쪽 능선쪽에는 내벽의 바깥쪽에 다시 한 겹의 성벽으로 돌리고 있다. 보루의 평면형태는 동-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이며, 전체 둘레는 170m 정도이고, 내벽의 둘레는 150m 정도이다. 보루 중간부분은 남-북의 폭이 18m 정도로서 세장한 형태이다. 보루의 남서쪽에서는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과 벽체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는 소토덩어리가 발견되었다.
26. 도락산3보루
도락산2보루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50m 지점의 해발 440.8m 도락산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서는 불곡산 주능선에 있는 보루성들과 동쪽으로 3번국도 일대 및 천보산 서쪽의 분지가 한눈에 조망된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20∼30cm 크기의 할석으로 높이 3m 정도 보축하여 돌출시켰다. 현재 남아 있는 정상부의 평면은 원형이며, 직경 5m, 전체 둘레는 약 20m이나 이것은 원래의 보루성중 서쪽 부분이 이미 상당부분 파괴되고 남은 상태라고 생각된다. 서쪽에서 정상부로 올라가기 직전의 길 좌우에는 약20cm 두께의 검은 부식토층이 있으며, 이 층에서 많은양의 고구려토기편과 벽체의 일부였던 것으로보이는 소토덩어리가 발견되고 있다.
27. 독바위보루
독바위는 회천읍 옥정리 천보산맥으로 둘러싸인 양주분지의 중심부에 있는 독립구릉이다. 독바위는 해발 181.1m로 그렇게 높지 않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유독 돌출되어 보이는데 최근 골재채취로 인하여 서쪽의 절반정도가 절취된 상태이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축조되어 있다. 남쪽과 서쪽은 암벽 경사면을 이용하였고, 북쪽과 동쪽을 석축을 하였다. 둘레는 150m, 성벽의 높이는 2∼3m 이다. 내부의 서쪽 최 정상부는 10×10m 규모로 평탄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고구려토기 2점과 승석문의 연질토기편, 그리고 건물 벽체시설의 일부로 보이는 붉은색 소토덩어리도 약간 발견되었다.
28. 아미성
아미성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와 연천군 전곡읍 눌목리의 경계지점인 해발 해발 260m의 봉우리 정상부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아미서은 368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수철성과 마주하고 있어 이곳이 삼국시대의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알수 있게 한다. 성은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서 동쪽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반면 서쪽과 북쪽부분은 대체로 무너진 상태이다. 전체 둘레는 290m 정도이다. 성내부에는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평탄지가 여러곳 조성되어 있다. 특히 성의 남서쪽 부분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있고, 이곳에 구축된 참호 속에서는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유물은 대부분 당초문을 양각하거나 음각한 수키와와 격자문을 타날한 회색이나 적갈색의 연질와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성의 정상부분과 동쪽부분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승문이 타날된 고구려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29. 칠중성
칠중성은 임진강의 남쪽에 위치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7세기대에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지였다. 칠중성은 해발147m 인 중성산 정상부에 석축으로 구축되었으며 전체 둘레는 603m 이다. 성벽은 정연하게 쌓여 있으며 기단 보축이 확인되고 있으며, 성 내부는 군사시설로 인하여 많이 훼손된 상태이나 문지와 입구부근의 집수시설 등이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대부분은 7세기대로 추정되는 신라계의 기와와 토기류지만 약간의 고구려기와편과 토기편도 수습되었다.
30. 덕진산성
덕진산성은 초평도의 서북쪽,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해발 65m인 야트막한 산의 정상부를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나,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넓은 지역이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동쪽에 있는 초평도는 임진강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초평도의 서쪽에 있는 수내나루는 임진나루와 함께 조선시대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덕진산성은 시기를 달리하며 3차에 걸쳐 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중 1차 성벽만이 고구려에 의하여 구축되었으며 2·3차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와 조선시대에 쌓아졌다.
고구려성벽은 해발 85m 정도인 최고봉의 둘레를 돌아가며 축조되어 있다. 이곳은 석축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봉우리 중 북쪽편에 있는 봉우리이다. 전체 둘레는 약 200m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함께 주거시설의 바닥이나 벽체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짚이 섞인 소토덩어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의동이나 아차산보루와 같이 벽체를 갖춘 군사들의 주거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토덩어리 사이에서 고구려토기편과 함께 탄화된 쌀과 철기편도 출토되었다.
31. 두루봉 보루
호로고루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4km 지점으로 파주시 진동면 용산리 산7번지와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의 경계지점에 있다. 이곳은 해발 69.8m 의 두루봉이라 불리는 산 정상부이다. 두루봉 보루는 돌출된 봉우리의 정상부를 이용하여 장타원형으로 조성하였는데 장축인 남-북은 15m, 동-서방향은 10m 로 전체 둘레는 약 50m 정도이다. 정상부에는 군부대에서 교통호를 구축하였는데 교통호의 양측벽은 성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유물은 교통호 내부와 정상부, 그리고 정상부 바로 아래쪽으로 돌아가면서 만든 교통호 내의 단면에서 고구려토기편과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32. 호로고루
瓠蘆古壘는 임진강 북쪽의 현무암 垂直斷崖 위에 있는 삼각형의 江岸平地城이다. 전체 둘레는 대략 401m 정도이다. 성내부의 면적은 2천평 정도이지만 성벽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과 외곽의 일부를 제외하면 사용 가능한 면적은 약 1,600평 정도이다. 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정도이다.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부분만 남-북을 가로막는 지상구조물을 쌓아 성벽을 조성하였고 나머지 두벽은 암벽의 윗부분에서 현재의 지표에 이르는 높이 4∼5m 정도만 돌아가면서 편축식으로 쌓았다.
호로고루는 2000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 의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동벽은 고구려 체성벽과 보축벽 바깥쪽에 신라성벽이 다시 덧붙여 쌓여 있으며 외곽쪽으로는 2개소에 치가 구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성벽과 성내부에서는 토기, 벼루, 철기등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유적 중 가장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가 출토되어 비록 규모는 작지만 행정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3. 당포성
당포성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의 당개나루터 동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상에 있는 江岸平地城이다. 당포성은 약 13m 정도 높이의 단애 위에 축조되었는데 성의 서쪽끝에서 내성까지의 길이는 200m 이며, 높이는 6m, 길이는 50m 정도이다. 성내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외곽을 돌아가며 군용참호가 구축되어 있다. 유물은 내부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고구려기와편과 통일신라 시기의 와편등이 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34. 우정리 보루
우정리 마을 3반 뒤편에 있는 해발 89.5m 산 정상에 있는 퇴뫼식 보루이다.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이 산을 매봉, 將臺峰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전체적인 성의 외형은 무등리 산성과 비슷하지만 방어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우정리 마을쪽에 인위적으로 삭토와 보축을 해놓은 폭 5∼8m 정도의 外環道가 개설되어 있다. 현재 이 성의 석축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6·25 당시 우정리에 주둔했던 많은 중공군들이 성벽 축조에 이용되었던 수많은 장타원형의 임진강 냇돌을 군사목적으로 쓰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지금은 석축성이 아닌 토축처럼 보인다. 전체 둘레는 약 250m, 동서 지름 약 50m, 남북 약 120m 크기이며, 편평한 정상부의 넓이는 약 1000평 정도이다. 내부에서는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정상부부근의 참호에서 고구려토기편 몇점이 수습되었다.
35. 무등리1보루
무등리 1보루는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의 장대봉에 있다.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향에서 20°정도 편서하고 있다. 남북 지름이 69m 이고 동서 지름이 34.5m 이며 전체 둘레는 168.4m 정도인 소규모의 보루이다. 이곳은 임진강에 접해 있어 임진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서 성내부의 움직임이 강 건너편에서도 관측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1995년 파평윤씨의 묘역을 조성당시 성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과 고구려와편이 수습되었다.
36. 무등리2보루
무등리2보루는 무등리1보루 북쪽의 500m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성벽이 토사에 묻혀 있으나 비로 인하여 일부 노출된 단면에는 강돌과 할석으로 구축된 석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보루의 평면형태는 가운데가 꼬부라진 반월형이며, 둘레는 244m 정도이다. 보루의 남쪽과 동쪽은 거의 수직단애에 가깝게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부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편이다. 보루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었으며, 북동쪽부분에서는 다량의 탄화된 곡물이 발견되어 군량미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탄화곡물은 쌀과 조로 밝혀졌으며, 고구려토기편과 소토덩어리가 함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벽체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탄화미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결과 1462±48BP(AD440∼536)에 보정연대는 AD534∼685년으로 분석되었다.
37. 고성산보루
고성산 보루는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의 해발 150m 고성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원형의 석축시설과 함몰부가 형성되어 있다. 석축부의 전체둘레는 약 30m 내외이고, 사면은 30°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능선 사면과 하단부로 돌아가고 있는 참호시설의 단면에도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함몰부는 한국전쟁당시 구축된 군사시설물이라고 생각되는데 함몰부 내에서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38. 은대리성
은대리성은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의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이성은 용암대지가 침식되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위에 구축된 江岸平地城이다. 성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400m 정도이고 지상구조물인 동벽의 길이가 120m 정도여서 전체 규모는 952m에 달한다. 성의 내부면적은 약 7천평 정도이며 그중 동쪽부분의 3천평 정도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다. 성벽은 석심토축으로 하여 양쪽 기단부에만 석축을 하고 안과 기단 윗부분에는 흙으로 쌓았다. 현재 동벽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며, 내부의 경작토에서는 백제토기를 비롯하여 상당량의 고구려토기편이 수습되었다.
39. 전곡리토성
전곡리 토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구석기유적인 전곡리 구석기유적지 일대를 감싸고 있다. 전체 둘레는 전체 둘레는 1.8km 이며 전체 면적은 49,000평이다. 문지는 동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의 3개소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인 형태는 부정형으 사각형이다. 현재 입구부분은 절단되어 단면이 노출되어 있는데 높이는 약 4m, 기저부의 폭은 30m 정도이다. 진입로의 서쪽부분은 거의 삭평되어 있으나 기저부를 이루었던 석축기단부는 남아있다. 토성내부에는 전체적으로 고토양층이 노출되어 있으며, 토기편은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유적기념관 앞쪽에서 몇 점의 고구려토기편이 수습되었다.
40. 진천 대모산성
대모산성은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에 위치하고 있는 토성으로 해발고도가 95m 이지만 주변지역의 상대고도는 약 20m 정도여서 산성이라기 보다는 평지성에 가깝다. 이 성은 1996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성은 중앙의 능선을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며, 전체 규모는 1,250m 정도이다. 성내에서는 5세기대의 백제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며, 성의 중간지점에서 고구려토기 항아리 한점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표면이 마연된 흑색토기로 한강유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토기와 기형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41. 대전 월평산성
대전시 서구 월평동에 위치한 월평산성은 1994년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된 6-7세기대의 백제유적이다. 이 유적은 대전분지 서부에 위치하며 갑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해발 130m의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木柵과 壕, 성벽, 목곽고, 대형수혈수혈, 주거지, 저장공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백제토기와 기와였는데 이중 몇점의 고구려토기가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고구려토기편은 직구호와 장동호편인데 조사단은 장수왕대에 중원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세력의 일부가 대전지역까지 내려왔을 가능성과 554년 고구려에서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기록을 근거로 하여 당시 고구려가 단발적이지만 공주에서 가까운 천안이나 조치원 혹은 유성쪽에 웅거하면서 웅천성을 공격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42. 파주 주월리 주거유적
파주 주월리 유적은 육계토성 내부에 있으며, 1996년 집중호우로 인하여 노출된 유적에 대하여 긴급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는 경기도박물관과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연합으로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경기도박물관 지역에서 12기의 원형주거지와 凸자형주거지가 조사되었으며, 지표에서 수습된 철기유물 중 鐵鏃과 鐵鋤, 鐵矛 등은 4세기대의 고구려 계통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양대학교 조사지역에서는 凸자형 주거지2기, 방형주거지1기 등이 조사되었으며 그중 2호주거지에서는 고구려토기 四耳壺와 兩耳壺, 短頸壺 등이 백제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조사단은 이 토기를 구의동과 몽촌토성 출토유물에 비견하여 4∼5세기대로 편년하고 있다.
43. 포천 성동리 마을유적
1998년 경기도 박물관이 토사채취로 인하여 노출된 유적에 대한 긴급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주거지와 소형유구등 55기의 유적이 조사되었으며, 그중 漢城百濟 유구는 주거지 4기, 소형유구 12기, 溝狀遺構 1기가 조사되었다. 신라시대 유구는 주거지2기, 소형유구 21기 등 총 23기가 조사되었다. 고구려토기편이 출토된 2호주거지는 타원형 주거지로 길이 4.5m, 너비3.8m 이며, 백제토기편과 신라토기완이 함께 출토되었다. 고구려토기편은 마연된 표면에 암문이 있는 연질토기로로 한점에 지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44. 중원고구려비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에 있는 中原高句麗碑는 남한지역에 있는 가장 명확한 고구려 유물중의 하나이다. 1979년 단국대학교 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된 이 비는 석주형으로서 화강암 자연석을 이용하여 刻字面을 갈고 4면에 비문을 세긴 四面碑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두에 高麗大王 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前部大使者, 諸位, 下部 등의 고구려관등 및 古牟婁城 등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비임이 분명하다. 비면의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자 정도이며 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Ⅲ.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의 특징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조사된 고구려유적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확인한 고구려 유적은 모두 44개이다. 여기에는 춘천 신매리나 방동리 고분같이 고분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지라도 토기나 방증유물이 없는 유적은 일단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청원 비중리 一光三尊石佛이나 중원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보살군처럼 양식적으로는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될지라도 공반되는 유물자료가 없는 경우나 延嘉七年銘金銅佛像처럼 이동이 가능한 유물 및 입지여건이나 축성기법에 있어서 고구려산성으로 추정되더라도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유적도 일단 보류하였다. 고구려유물이 출토된 유적과 중원고구려비처럼 공간적인 장소를 점유하는 유물만 포함된 숫자이다.
현실적으로 고구려유물의 유무로 고구려유적을 분류하고, 고구려유적의 분포양상을 분석하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유물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각 유적의 조사자가 고구려 유물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고,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구려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토기나 고구려기와에 대한 실물자료가 상당량 축적된 현 상황에서 고구려유물이 없는데도 고구려유적에 포함시키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구려 유적의 대부분은 지표조사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특히 고구려토기는 신라나 백제토기에 비해 명확한 辨別的 特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토기를 구분해 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여하튼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유적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고구려유적의 분포양상은 지역적 편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및 진천 대모산성과 대전 월평산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고구려유적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경기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교통로를 따라 다시 세 개의 群을 이루며 집중되어 있다. 몽촌토성에서 상계동보루까지 19개의 유적이 아차산을 중심으로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으며, 사패산1보루에서 독바위보루까지 8개의 보루가 천보산맥과 불곡산·도락산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군을 이루고, 아미성에서 전곡리토성까지 11개의 보루가 한탄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다른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분포양상은 보루의 배치가 교통로 장악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토적인 지배를 위해서는 성 하나 하나가 일정한 공간범위를 통제할 수 있도록 放射狀으로 위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는 100∼500m 간격으로 아차산 일대에서 의정부를 지나 임진강유역에 이르는 간선도로 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신라가 하강유역을 장악하고 구축하는 산성들이 대략 5km 정도 거리를 두고 둘레 1km 정도의 성이 구축되고 그 사이사이에 여러개의 보루를 배치한 것과 대비가 된다. 다시 말해 고구려보루들은 평양지역으로부터 한강에 이르는 최단거리의 교통로 확보를 위하여 최소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주요 거점별 집중 배치가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 이르러서는 종적 집중도가 떨어지는 반면 횡적으로 강을 따라 가면서 주요 도강지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다.
고구려 유적의 입지여건(比高)
다음으로 유적의 입지여건을 보면 남쪽방면의 조망이 양호하고 접근성이 좋은 곳에 구축되었다. 각 보루는 주변지역에서의 比高가 100m 이하인 경우가 16개소로 전체의 41%를 차지하고 있으며 200m 이하가 전체의 67%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비고가 200m 이상인 경우는 아차산과 불곡산 일대로 지정학적인 여건상 주변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고지확보를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만 비교적 比高가 높은 곳에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의 간선도로를 조망할 수 있고, 남쪽으로 넓게 시계가 확보되는 곳에 구축되었다.
또한 남한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소규모이다. 각 보루들은 둘레 100m 이하가 36%로 가장 많으며, 101∼200m는 31%를 차지하여 200m 이하의 규모가 전체의 67%에 달한다. 이중 둘레 1km 이상의 유적은 전곡리 토성과 풍납토성, 진천 대모산성 등이다. 이것들은 백제토성을 재활용것으로서 고구려에 의하여 구축된 남한지역의 고구려보루는 대략 200m 이하의 규모로 축조되었으며,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일대의 몇몇 평지성들만 둘레 400m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강은 고구려 국경 방어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한강유역을 나제연합군게 빼앗긴 이후에도 고구려 멸망시점까지 거의 100여년 이상 고구려가 경영하였다.
그런데도 임진강 북안의 고구려 성 역시 대부분 소규모의 보루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는 성들을 보면 황주산성(km), 풍천성(3.5km), 구월산성(5.2km),수양산성(5.2km), 장수산성(10km), 태백산성2.4km), 배천산성(3.6km), 비봉산성(2.2km) 등 큰규모의 성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성들은 대부분 예성강과 멸악산 이북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영토적인 주 방어선은 예성강 이북지역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여하튼 임진강과 한강유역의 고구려 성들이 작은 보루형태로 구축되었다고 하는 것은 對新羅나 對百濟와의 전투에 더 이상 큰 성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 지역에 대한 항구적 영토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보루가 배치되는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의 규모가 클 경우 축성하는데도 많은 인력과 경제적인 소모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더 많은 인력과 물자의 보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규모의 인력으로 거점을 확보하면서 유사시 기마병에 의한 신속한 攻守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루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보루들은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위한 보급로 확보가 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도, 장기간의 전투시 보급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요 길목을 통제하는 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평양이나 개성을 출발한 고구려군이 한강유역의 보루들을 중간거점으로 하여 중부지역의 백제나 신라성에 대한 신속한 공격과 철수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보루의 구조적인 측면을 보면 여러 가지 공통적인 구성요소가 있다. 구릉의 정상부에 석축으로 구축된 보루에는 치가 구축되며, 내부에 건물지와 온돌구조, 배수로, 집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온돌은 ㄱ자형과 직선형의 두종류가 있으며, 모두 외고래형식으로 판석을 세워서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납작하고 긴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형태이다. 집수시설은 방형을 이루며 생토나 암반을 파고 안에 점토로 다져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벽체는 짚같은 것을 섞은 점토로 바르고 내부에 판자를 대었기 때문에 고구려유적에서는 대체로 벽체의 잔존물이 수습되고 있다.
지붕은 갈대나 짚같은 것으로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차산 보루중에서는 유일하게 홍련봉에서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접근성도 주변의 보루들에 비해 가장 양호한 편이다. 삼국시대에 기와는 왕궁이나 사찰, 학교, 관청 등에만 사용되었음을 고려하면, 홍련봉1보루는 기능적으로 주변의 보루들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한탄강 일대에서는 기와가 출토되는 유적은 아미성과 무등리1·2보루, 두루봉 보루, 당포성, 호로고루 등 6개의 유적에 달한다. 그중 호로고루는 주변유적에 비하여 입지가 가장 양호하고, 성내에서 출토되는 고구려기와의 양이 다른 유적에 비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호로고루의 상대적인 位階가 다른 성들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보루중 중 호로고루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한강 유역 일대의 고구려보루를 통제하는 戰略司令部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보루의 운영방법을 시사해주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화재로 폐기되면서 유물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의동유적의 경우를 보면 출토유물 중 철제 농기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유적에서는 4개의 가래와 4개의 보습, 호미 7자루, 쇠스랑 2개 낫4자루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아차산 4보루도 마찬가지여서 호미 17자루, 삽날3자루, 보습1개 도끼 31개, 쇠스랑 5개 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곳에 주둔한 고구려 병사들이 일정기간 屯田형태로 주변의 농경지를 경작하며 거주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들이다. 보루마다 발견되는 온돌시설과 곡식을 저장할 수 있는 대형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이 유적이 일시적인 거점확보를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동절기를 포함한 장기적인 주둔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의동유적의 경우 출토된 무기류의 숫자를 근거로 하여 13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 출토된 400여 개체의 토기류는 13명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다. 아차산 4보루에서는 26개 기종 538개체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몽촌토성에서는 15개 기종 329개체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엄청난 토기의 양은 유적사용 기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 보루의 사용기간은 최소한 십여 년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토기자체의 양식적인 변화양상을 감지하기 어렵고, 유구의 개축흔적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퇴적토상에 문화층의 구분이 안되는 점을 미루어보면 장기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한강유역 고구려보루들이 언제 구축되어 언제까지 사용된 것일까? 이 문제의 답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출토유물만으로는 미세한 편년추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 아차산4보루나 시루봉보루, 호로고루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많은 양의 고구려 유물자료를 추가하게 됨으로써 고구려 유물을 중심으로 한 편년의 오차범위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4보루와 시루봉보루를 발굴하고 고구려토기를 분석한 최종택은 아차산보루는 고구려군이 4세기중엽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구축되었다가, 한성 함락후 6세기 중반 羅濟聯合軍이 한강유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전제하고 아차산 4보루 토기 그 자체는 대부분 6세기 이후로 편년되지만 상한 5세기중반, 하한 6세기 중반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한강유역의 경영에 관한 통설에 유물편년을 짜맞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되는데 과연 고구려가 475년 이후 한강유역을 경영했는가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장악과 관련하여 최근 매우 흥미 있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영관은 {삼국사기}의 내용 중 장수왕이 한성함락 후 철수하였다는 기록과 웅진천도 이후 한성경영 기록 및 삼국사기 지리지의 안장왕과 한씨 미녀 관련기사 등을 근거로 하여, 475년 웅진천도 이후에도 한강유역은 백제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으며, 고구려는 안장왕 11년(529)이후에야 비로소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가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경영과 관련한 이러한 견해가 물론 처음은 아니며, 북한학계에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학계는 남한학계와 마찬가지로 475년부터 551년까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확보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1991년에 간행된 『조선전사』수정판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신하여 '475년 장수왕의 한성함락이후 고구려군은 퇴각하고, 한강유역은 백제가 계속 경영하였으며, 안장왕 11년(529) 오곡(서흥지방)에서 백제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나서 고구려군은 단 며칠사이에 아산만-금강계선까지 밀고 나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유기간은 종래의 76년에서 22년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본기의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한강유역 경영기사와 지리지에 아산만에서 흥해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던 것으로 기록한 내용상의 모순을 해결하는 한 방편으로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역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한강이남지역에서의 고구려 유적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 한강 이남지역에서 대규모 고구려성이 발견된 바도 없고, 월평산성이나 진천 대모산성에서 고구려유물들이 출토되기는 했지만 출토되는 고구려토기의 양은 한강유역의 유적들에 비하여 매우 소략한 편이다. 향후 유적조사가 진전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하면 남한지역에서 고구려가 직접 성을 구축하고 장기간 군사가 주둔한 곳은 한강유역 일대에 한정될 수 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 영토로 비정되고 고구려 군현명이 표기된 대부분의 지역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군현적 지배가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고구려의 군사력이 미치는 범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유적 종류의 편중성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유적 중 성동리 마을유적과, 주월리유적을 제외하면 모든 유적이 군사적 목적으로 구축된 관방유적들이다. 성동리 마을유적이나 주월리 유적 출토 고구려토기가 주거지에서 출토되기는 하지만 이는 백제토기와 공반되며, 전체발굴 유물 중 그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화적인 해석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공반되는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는 거의 같은 시기로 편년되므로, 한강유역의 보루에서 출토되는 토기들과는 약간의 시간적이 공백이 있다. 다시 말해 한강유역 고구려보루들과 동시기의 주거유적이나 분묘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한강유역의 보루들은 요동지역의 성들처럼 성내에서 가족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성의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주변에 고구려 주민들의 직접적인 이주에 의한 촌락이 형성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재지 주민들에 대한 정치·문화적 통제를 통한 고구려화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보루의 기능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남한지역 고구려 보루들은 단순히 군사적인 목적에 의하여 소수의 군사들로 하여금 屯田을 하며 교대로 근무토록 병영으로 운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비롯한 중부지역을 장악하고 자국의 정치·문화·행정력이 미치는 영토에 포함시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거나, 죽령이북지역에서부터 한강유역일대까지를 백제·신라와의 군사적 완충지대로 남겨둘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남한지역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성이 발견되지 않는 것과 신라·백제와의 국경지역에서 고구려유적·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이라고할 수 있다.
Ⅳ 맺음말
1994년 아차산 일대에서 20여개의 고구려 보루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유적을 직접 발굴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었다. 남한지역에서만 현재까지 44개의 고구려유적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몇 개 유적은 이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고구려유적을 찾게 될 것이다.
유적 종류의 다양성이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남한의 고구려유적을 고구려의 중심지역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적의 보존상태는 중국이나 북한에 있는 고구려유적 보다 훨씬 양호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이나 북한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입지적인 여건상 고구려 이후에도 계속 재사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남쪽지역의 고구려보루는 규모도 작고 남쪽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구축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멸망이후에는 역사적으로 거의 활용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 보루들 중의 상당수는 폐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구의동보루나 아차산4보루, 시루봉보루에서 출토된 복원 가능한 고구려토기만 해도 1천여 점이 넘는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중국이나 북한에서 발굴된 완형의 고구려토기 총량보다 훨씬 많은 양이 될 것이다. 이제 고구려토기에 대한 연구여건은 남한이 훨씬 좋아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고구려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각 지역의 유적에 대한 정밀조사가 선행되어 확인 가능한 모든 고구려유적이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은 고구려유적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이다.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있었다고 하더라도 攻取한 모든 산성에 고구려의 병사가 주둔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과 그 산성을 고구려가 攻取한 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현존 산성의 축성과 사용시기를 무시하고 모든 성을 같은 시점에서 각 성의 유기적인 기능을 추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울러 우리나라 석축성은 그 기원을 고구려에 두고 있으므로, 굽도리기단과 쐐기모양의 성돌 사용 등 축성기법이 고구려성과 유사하다고 고구려성으로 추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집단이 일정한 기간동안, 일정한 장소에 머물게 되면 대부분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고구려의 유적은 반드시 고구려의 유물을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향후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조사는 무엇보다도 고구려유물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호로고루성
한국토지공사(사장 金鎔采) 토지박물관 호로고루 발굴조사단은 5월 25일 현장설명회를 개최하고 발굴성과를 공개했다. 호로고루는 임진강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성으로서 이번 조사를 통하여 축성방법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었고, 고구려기와와 금동불상을 비롯한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조사단은 ‘호로고루’는 성벽의 바닥과 가운데 부분은 판축을 하고, 안팎은 돌로 쌓고 바깥쪽에는 다시 보축을 하고 보강토로 덮어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특이한 구조라고 밝혔다. 이에대해 차용걸(충북대 교수)는 “발전된 고구려의 축성기술이 빚어낸 걸작품으로서 판축부와 석축부가 역학적으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축성기법”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보축성벽의 보강토 위에 형성된 고구려 기와층 바깥쪽에 7세기 후반경 신라가 이지역을 장악하고 쌓은 외벽이 잘 남아있어, 5세기경에 축성된 고구려성벽과 신라성벽의 축성기법의 차이를 비교해 볼수 있는 교과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보축성벽의 기원을 신라에서 찾았지만 고구려성벽에서 분명한 보축시설이 확인됨으로써 축성사 연구의 새로운 자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는 약 40여개소의 고구려성이 조사되었지만 대부분 둘레가 100-300m 정도인 보루 형태인데 비해, 호로고루는 둘레 401m의 평지성이고, 말을 타고 바로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는 여울목에 자리잡고 있어 평양-개성-서울을 잇는 최단거리상의 중요한 관문에 해당하며, 성내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성들에 비해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는 고구려토기편을 비롯하여 고구려 기와와 벼루, 철제화살촉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휴대용 금동불상 한점이 출토되어 주목받고 있다. 가로, 세로 4cm 정도 크기의 護身佛인 이 불상은 가운데에 있는 불좌상의 좌우에 보살상이 한구씩 있고, 그 사이에 합장한 인물이 하나씩 서있는 오존상의 형태로서, 향후 불상의 형태와 제작연대 등에 대한 관계 전문가의 정확한 조사?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 瓠蘆古壘는 瓠蘆와 오래된 성을 뜻하는 古壘가 결합된 명칭으로서 호로는 고구려어의 城이나 골(谷)을 뜻하는 忽과 같은 의미로 추정됨.
문화재청(청장 유홍준·兪弘濬)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미산면 동이리, 전곡읍 은대리 일대에 있는 『연천호로고루(사적 제467호)』, 『연천당포성(사적 제468호)』, 『연천은대리성(사적 제469호)』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지정되는 『연천호로고루』등 3개 성곽은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 대지위에 조성된 독특한 강안(江岸) 평지성으로 임진강이 국경 하천 역할을 했던 삼국시대와 관련이 있고,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학술조사는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1990년대부터 은대리성 등 3개 성곽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는 등 삼국시대 성곽에 대한 역사적·학술적 가치 및 규모 등이 어느 정도 규명돼 고고학계에선 큰 성과로 여기고 있다.
호로고루 성벽의 전체둘레는 약 400m 정도되고 지정면적은 21,768㎡이며, 당포성 성벽 전체둘레는 약 450m에 이르고 지정면적은 35,174㎡이며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전체규모는 동서 약 400여m, 남북 약 130여m, 총길이 약 1005여m 이다. 내성의 총길이는 약 230여m이며 지정면적은 91,848㎡이다.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수직단애(斷崖) 위에 축조된 이 성곽들을 역사적 고증 등을 거쳐 원형대로 복원 및 정비, 민족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하여 국민에게는 우리문화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 연천은대리성(사적 제469호)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중앙지점에 용암대지의 하천침식작용, 즉 주상절리(柱狀節理)에 의해 형성된 절벽 위에 조성돼 있다. 남쪽은 한탄강에 접해 50~60m 정도의 수직절벽으로 돼 있고, 북쪽은 장진천 옆 15~20m 정도의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동쪽을 통해서만 성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고구려가 어찌 이곳을 군사 요충지로 중히 여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대리성은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와 같이 임진강일대에서만 발견되는 江岸平地城이다. 성 내부 7000평을 둘러싼 둘레 952m 성벽 중 120m 가량이 남아 있는 은대리성에선 고구려 토기편 상당량이 출토됐다.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이다.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에 둘레가 총 1천5m이고 면적은 2만6천479㎡이다. 내성의 둘레는 총 230m로 내부면적은 2천770㎡이다. 내성이 있다는 것은 당포성과 흡사하지만 내성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성과 외성의 선후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1. 조사지역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번지 일원
2. 조사기관 :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3. 조사경위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津川(또는 車灘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이하 장진천으로 호칭한다.)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河岸段丘 위에 축조되었다. 현재는 은대리성 북쪽을 지나가는 37번 국도와 322번 지방도를 연결하는 도로에 의하여 전곡 방면과 연결되어 있으나 원래는 사방이 단애로 고립된 섬과 같은 곳이었다.
은대리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전무하다. 일제시대의 조사기록에도 이 성에 대한 조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은대리성은 1995년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여러 기관에 의해 조사되고 그 내용이 보고서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조사는 정밀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아니고 대부분 광역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의 축조 및 활용시기나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 이 성의 존재를 최초로 보고한 것은 1995년 9월 연천군에서 발간한 『鄕土史料集』이다. 이후 육군박물관에서 발간한 『京畿道 漣川郡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에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조사되어 있다.
4. 조사성과
1) 형태 및 내부시설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를 활용하여 축조되었다. 이 같은 형태의 성은 임진강 한탄강 일대에서 보이는 특이한 성이다. 현재까지 이 같은 형태의 성은 은대리성과 함께 당포성과 호루고루성이 알려져 있다. 이는 임진강과 한탄강의 兩岸은 단애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용암대지가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파이면서 수직단애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임진강이나 한탄강은 도강이 불가능한 지역이 많다. 그런데 지류가 흘러드는 곳은 지류에 의하여 침식된 부분이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행이 수월하다. 이런 곳 중에서도 여울이 발달된 곳은 장비가 없어도 도강이 가능하여 일찍부터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러한 지역은 수로를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군사적 활용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따라서 이 같은 지역에 성을 축조하는 것은 도강을 통제하고 수로를 장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성이 모두 고구려가 활용하였다는 공통점에 있어서 고구려의 남진 경영과 관련하여 주목되어 왔던 곳이다.
대형 건물지는 남벽에 접하여 폭 3m 정도의 석재열로 둘러쌓여 있다. 석재열이 형성하는 공간은 동서 60m×남북 30m 정도이다. 건물지가 위치한 지역은 3개의 문지에 둘러 쌓여 있다. 대형 건물지에서는 건물지 벽체에 사용되었던 소토된 점토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건물지 서쪽에서는 석전용 석재로 사용되었을 석재무더기가 2군데나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성내부에서 중요한 시설물이나 주거공간이 이 곳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은대리성에서는 인근 관방유적에서 보이는 적갈색 고구려 기와 및 신라기와 등 일체의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항은 신중하게 인접 성들과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치성은 2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이 들은 북문지 2와 남문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치성은 기존 성벽에서 ‘ㄷ’ 자 형태로 돌출시켜 문지의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규모는 8m×5m(돌출길이)로 2개가 같다. 이러한 구조는 문지 주위에 방형치성을 설치하여 문지를 보호하는 것은 고구려 산성에서 주로 확인된다. 치성은 적대(敵臺) 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적대가 확인되는 주변의 관방유적은 포천반월산성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산성에서 이러한 적대가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 중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치와 적대가 압록강 이북보다는 압록강 이남에 많으며, 청천강 이남의 성들에서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하고 있어, 치와 적대가 고구려 후기에 발달했을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또 다른 북문지 1에서는 문지를 북벽에서 15m 정도 들어와서 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지 양 성벽이 돌출되어 곡성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2) 성벽축조방식
그런데 성벽의 축조방식을 놓고 본다면, 은대리성의 축조방식은 지금까지 발굴된 토성이나 토석혼축성에서 보기 어려은 독특한 방식으로 축조되어 주목된다.
동벽 내벽에서는 토성의 내벽 경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우수를 처리하기 위한 시설인 溝가 확인되었다. 溝의 규모는 동서 폭 2m정도이며, 깊이는 약 30cm정도이다. 이 溝는 동벽을 축조하면서 같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은 1차 개축 때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심 기저부 토층의 흐름으로 보아 1차 개축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2차 내벽 개축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 내부에서 다수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는데, 1차 개축시 석심 기저부 층에서 수습되고 있다. 성벽 내부에서도 같은 층위에서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 토기들 분포상황이나 파손형태로 보아서 구가 폐기되는 시점에서 함께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초축 및 활용시기와 성격 문제
이상에서 은대리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일단은 양식적으로 한강유역 고구려유적에서 출토품과 유사한 것이 대부분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기형이 복원되는 것이 드물어 현 상태에서 더 이상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다만 출토품의 구성이 대형의 호류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비록 후에 정면하였으나 타날문의 형태가 많으며, 다른 유적에 비하여 흑색이나 회색으 토기가 많다는 것은 은대리성 출토 고구려토기의 표면상의 특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는 시기적 차이보다 대체로 기종의 차이에서 발생되는 것들로 볼 수 있어서, 은대리 출토 토기의 구성상의 차이가 편년의 근거로 활용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존의 고구려 토기 연구성과를 참조하여 은대리 고구려토기는 일단 고구려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것으로 편년하고자 한다. 토기에 대한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구체적인 기형이 복원된다면 좀더 편년의 폭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번 발굴이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한정적인 것이고 출토 유물도 저장용기로 한정되어 있어서 은대리성의 전체적인 편년문제를 거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문제는 호로고루나 당포성의 발굴 결과나 은대리성에 대한 연차발굴을 통해서 구체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적의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았는데 이 중 초축시기와 관련되는 것은 고구려토기로 추정된다. 이 같은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성벽 절개조사 결과이다. 동벽에 대한 절개조사 결과 내벽 전면에 시설된 溝 내부의 퇴적층에서 고구려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토층 조사 결과 溝는 초축 및 1차 수축시까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 매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벽 기저부와 외벽 보강부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반면에 성벽의 중앙부 내외 석재열 사이 다짐층에서는 한 점의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 같은 조사 결과로 보아 이 성벽은 출토된 고구려토기가 사용되던 시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초축시기를 추정하면, 이보다 앞선 시기에 것으로 보이는 소량의 백제토기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백제토기가 초축이나 활용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 은대리성에서 출토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합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은대리성을 축조하기 이전에 주거지나 백제가 시설한 소규모 방어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사 결과 이를 충족시킬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곳이 외부와 고립되어 군사적 활용가치는 있어도 주거지로서의 위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백제시대 주거지가 있었을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희박하지 않은가 한다. 또한 이 지역이 4~5세기 백제의 北境에 해당되는 곳으로 소량의 백제토기가 고구려토기의 사용과정에 섞여 들어갈 가능성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백제토기와 은대리성의 관계는 아직 여러 가지 의문점만 있을 뿐 무엇이라 설명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 문제 역시 앞으로 발굴과정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 보아 일단 은대리성의 축조는 고구려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고구려토기에 대한 편년이나 고구려가 이 지역에 진출하였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5세기 이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보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신라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일단 폐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 성이 일부가 단기간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은대리성 성격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기존의 조사에서 은대리성은 유사한 형태의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규모만 클 뿐 활용도 및 전략적 가치는 적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은대리성에서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 점과 성벽이 석성으로 개축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번 발굴조사 결과도 이 같은 기존의 추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에 비하여 은대리성은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덜하고 인근에 대전리산성이나 전곡리토성 등도 있어서 이들과의 관계도 고려하여 그 성격을 판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대리성이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동시기에 축조되어 활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고구려토기에 대한 편년체계가 정교하지 못하여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이르다. 따라서 은대리성의 성격 문제나 고구려의 방어체제에서의 역할 문제도 현재로서는 유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은대리성은 이중구조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그 지류인 차탄천 수직단애 위 삼각형 대지에 내·외성 이중구조로 쌓아 평지성으로 축조됐다.연천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이 임진강 유역에 위치한데 반해 은대리성(隱垈里城)은 한탄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번지 일대, 한탄강과 그 지류인 차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두 하천에 의해 침식되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축조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의 형태와 같은 구조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사적 268호) 부근 경기도립 연천의료원 옆, 한탄강 수직단애 위의 유적은 현재 동쪽과 북쪽 성벽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지만 성 내부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지난 2003년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은대리성의 대략적인 성격이 규명됐다.
시굴조사에 의해 밝혀진 성의 평면은 삼각형 형태로 남벽과 일부 북벽은 한탄강과 차탄천이 형성한 자연단애를 이용하고 있으며, 동쪽 평탄지에는 토석 혼축으로 동벽을 축조했다.
은대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이다. 외성의 전체 규모는 동서 400m, 남북 130m에 둘레가 총 1천5m이고 면적은 2만6천479㎡이다. 내성의 둘레는 총 230m로 내부면적은 2천770㎡이다.
내성이 있다는 것은 당포성과 흡사하지만 내성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성과 외성의 선후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성 내부 시설물로는 문지(門址) 3개소, 대형건물지 1개소, 치성 3개가 확인됐다. 문지가 개설된 지역은 지형이 비교적 낮은 지역이다. 북벽에서 확인된 2개의 문지는 배수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대형 건물지는 남벽에 접하여 폭 3m 정도의 석렬로 둘러싸여 있다. 석렬이 형성하l는 공간은 동서 60m, 남북 30m 정도이다. 건물지가 위치한 지역은 3개의 문지에 둘러싸여 있다.
대형 건물지에서는 건물지 벽체에 사용됐던 소토화된 점토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건물지 서쪽에서는 투석용으로 사용됐을 석재 무더기가 2군데서 확인됐다.
하지만 은대리성에서는 인근 관방유적에서 보이는 적갈색 고구려 기와 및 신라기와 등 일체의 기와가 출토되지 않았다.
치성은 북동 회절부와 북문지 2 및 남문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북문지 2와 남문지의 치성은 기존 성벽에서 ‘ㄷ’자 형태로 돌출시켜 문지의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규모는 8×5m(돌출길이)로 2곳 모두 같다.
문지 주위에 방형치성을 설치해 성문을 보호하는 구조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치성은 적대(敵臺)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적대가 확인되는 주변의 관방유적은 포천 반월산성을 들 수 있다.
백종오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은대리성의 축조방식은 지금까지 발굴된 토성이나 토석혼축성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방식으로 축조돼 주목된다”고 말했다.
성벽의 기저부를 조성하기 위해 구지표층 위에 점토+모래의 다짐을 사용했으며 중앙부는 2열의 석렬을 쌓아 만들었다. 동벽의 내벽부분에서는 성벽 축조시 기둥을 설치했던 흔적이 발견됐고 2회 이상 성을 고쳐쌓은 흔적도 확인됐다. 한편 동벽 내부에서는 토성의 내면에 고이는 빗물을 처리하기 위한 시설인 구(溝)가 확인됐다. 구의 규모는 동서 폭 2m 정도이며, 깊이는 약 30cm 정도이다. 이 시설은 동벽을 축조하면서 같이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편이고 철제 유물도 소량 출토됐다. 비교적 그 종류와 시대가 일정한 시기에 국한되어 있다. 한편 삼국시대 성에서 흔히 출토되는 기와가 단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특이성을 보인다. 유사한 형태의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의 경우 후대까지 시간적으로 긴 폭을 가지고 유물이 출토되는 상황과 비교할만 하다. 토기편은 크게 백제 토기와 고구려 토기로 대별된다. 이중 95% 이상이 고구려 토기이고 백제 토기는 극히 소량이다.
고구려 토기는 대부분 파편으로 출토돼 기형(器形)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토기는 표면에 새끼줄 문양인 승문이 시문된 것으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편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토기들이 초축과 관련된다면 은대리성의 축조시기는 4세기 후반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백종오씨는 “백제토기의 수량이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모두 교란층에서 고구려 토기와 섞여서 출토돼 이 토기를 초축 시기와 관련짓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며 “오히려 동벽의 축조시기와 일치하는 溝유구의 바닥퇴적층에 고구려 토기가 집중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을 처음 축조한 나라가 고구려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은대리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양식적으로 한강유역 출토품과 유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출토품이 대형의 호류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비록 시문 후에 정면했으나 타날문의 형태가 많으며 다른 유적에 비해 흑색이나 회색인 토기가 많다는 것은 은대리성 출토 고구려 토기의 특징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결과로 보아 은대리성의 축조는 고구려에 의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토기에 대한 편년이나 고구려가 이 지역에 진출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5세기 이후에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보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한편 신라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일단 폐성됐을 가능성이 있다.
은대리성은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과 같은 축조양상을 보이지만 당포성과 호로고루성이 동벽의 축조방식을 각각 석축, 판축 위에 석축을 취한 것에 비해 은대리성은 석심토축을 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세 성은 모두 한탄강 이북의 전곡평야 일대를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입지이지만 은대리성은 마땅한 도강로가 없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크게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교통로 위에 자리잡은 호로고루성(고랑포)이나 당포성(당개나루)에 비해 출토유물의 빈도가 낮고 점유시기가 짧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취재에 동행한 일본 고구려회 나가시마 회장은 “곧 국가 사적으로 지정될 것이란 은대리성, 당포성, 호로고루성에 대해 정밀 조사와 정비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도 좋을 것”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군부대 관할 민통선 지역 등에서 고구려 고분이나 고분벽화 등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서 남한지역 임진강 유역 고구려 유적지에 깊은 관심을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