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글은 은성출판사 엄성옥씨 번역으로 나온 죤 폭스의 순교사 앞부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말투를 바꾸었네요.
요즘 순교사에 대해서 돌이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진정 주님을 위한 순교에 대해 돌이켜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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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폭스는 1516년 영국 동부의 링컨셔주 보스톤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단히 학구적이었던 그는 16살 때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하여
1537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538년에는 모들린 단과대학의 특별연구원 후보가 되었으며,
이듬 해인 1539년에 특별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539년부터 1540년까지 논리학을 강의했고, 1543년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옥스포드 대학 시절 그의 절친한 친구로는 휴 라티머와 윌리엄 틴데일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강력하게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1545년 폭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모들린 단과대학
특별연구원이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옥스퍼드를 떠난 그는 워릭셔주 찰르코트에 있는 루시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습니다.
1547년 초 찰르코트교회에서 아그네스 랜달과 결혼한 그는 생계를 위해 런던으로 왔습니다.
1548년이 저물어갈 무렵 폭스는 1547년 처형된 서리의 백작 헨리 하워드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하워드에게는 2남 3녀가 있었는데 아들 토마스는 후일 노포크의 공장이 되었고, 헨리 하워드는 노스햄톤의 백작이 되었습니다.
폭스는 그들의 조부 노포크 백작의 영지인 레이게이트 성에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550년 런던의 주교 리들리는 폭스를 성 바울교회의 부제로 임명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비록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 곳에서 설교를 했으며, 그 곳에서 개신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신학 논문들을 출판하고, 많은 교회사 책을 읽었습니다.
1553년 7월 메리 여왕이 즉위하게 됨으로써 폭스에게는 불안한 시기가 시작되었고 카톨릭 신자였던 늙은 노포크 백작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자기의 손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폭스를 해임하고 말았습니다. 폭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갔으며, 폭스도 그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죠. 그는 입스위치에서 배를 타고 뉴포트를 거쳐
스트라스부르그 까지 갔는데, 그 곳에서 친구 에드문트 그린달을 만나게되었습니다.
그는 위클리프 시대부터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 있었던 개혁자들의 박해에 관한 라틴어 논문의 첫 부분을
복사하여 가져갔습니다. 이 책은 주로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한 것으로써 행위와 불후의 업적(일반적으로 순교자들의 이야기)의
초안이 되었고 1554년 출판되었습니다.
폭스는 1년간 프랑크프르트에서 머물면서 존 낙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후 바슬레라는 지역으로 이사한 그는 극심한
가난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며 개신교 서적을 출판하던 요한 헙스트의 인쇄소에서 원고조사계로 일했는데
헙스트는 폭스에게 자기의 저서를 집필할 시간을 주었죠.
그 동안 폭스는 그린달을 통해 영국에서의 박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고 브래드포드 사건이 그가 입수한 최초의 박해
사건이었으며 크랜머의 심문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 때 폭스는 출판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린달은 폭스에게 헨리 8세의 통치 말기까지에 있었던 영국에서의 개혁자 박해에 관한 기사를 즉시 완성하라고 권하게
되었고 폭스는 착실하게 작업하여 1551년 헨리 8세 통치 말기까지의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다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라틴어로 기록된 이 저서는 1559년 9월 1일 옛날 그가 가르쳤던 학생으로서 이제는 백작이 된 노포크 백작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같은 해 폭스는 영국으로 귀환했으며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그린달은 1560년 그를 사제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앞서 말한 저서를 영어로 번역까지 했고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다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크랜머의 비서였던
랠프 모리스의 서류를 비롯하여 많은 새로운 자료들을 입수했죠.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63년 3월 20일 출판되었고 출판되던 날부터 순교자들의 책으로 알려졌습니다. 폭스는 이 책 한 권을
모들린 단과대학에 우송하여 그 값으로 6파운드 13실링 4페니를 받았습니다. 이 책의 출판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는 샐리스베리 성당에서 성직자록을 받았고 1563년 5월 11일 심톤의 교구 목사에 임명되지만 여전히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했습니다.
1570년 성금요일, 엘리자베스 여왕을 파문한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발표된 후, 폭스는 그린달의 명령에 따라 성 바울교회에서
강력한 설교를 하여 카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70년에 재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 회의에서 이 책을 교회, 그리고 대주교, 주교, 집사, 부감독의 집에 반드시 비치하라는 결정을 하게되었습니다.
폭스는 1575년 화형 선고를 받은 두 명의 재세례파 사람들의 극형을 면하기 위해 여왕, 벌리경, 수석판사 맨슨에게 서신을 보내고
이단에게 사형을 반대하지만 한 달의 유예기간이 허용된 후 결국 이 재세례파 신자들은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행위와 불후의 업적은 1576년 3판, 1583년에 4판이 발행되었습니다.
1586년 폭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많은 고생을 하다가 1587년 4월에 죽게되고 런던에 있는 성 가일즈교회에 매장되게 됩니다.
폭스의 아들 사무엘이 새긴 기념비가 오늘날까지 있습니다.
폭스는 자신의 처지도 곤궁하고 넉넉치 못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했고 언제나 명랑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18년을 더 살다가 1605년에 사망했고, 그들에게는 다섯 자녀가 남겨졌습니다.
폭스는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 중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될 불후의 역작은 순교사입니다.
첫댓글 느낀점
1. 가난 가운데서 누군가를 항상 돕고 극단적 모습(이단 처형 부분)이 아닌 도리어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의 상황에 누군가의 도움을 바람보다는 누군가를 더 돕고 아끼길! 그리고 극단으로 가지 않길 기도하네요.
2. 이제부터 존 폭스의 순교사를 정독하려고합니다. 주님의 사랑하던 자들의 흔적을 돌이켜보는 가운데 선교에 대해서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깨닫길 기도하네요.
^^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좋은 내용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가 앞 부분을 조금 올린 것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머리 킹이 편집한 것을 영은순 씨가 번역한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 누구나 존 폭스의 순교사에 대해서는 다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좋은 글 올려 주세요. 개혁 신학 또는 청교도 신앙이라면 언제든지 같이 공유 할 수 있도록요.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사58:10上). 선교의 사명은 주린자와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임을 기억하게 해준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이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