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동고동락 시조와 이별 하다
'이제 붓을 놓고자 한다. 열일곱에 한시(漢詩) 짓기를 시작으로 아동문학, 시, 시조 여러 장르에 기초를 다졌으나 서른이 넘어 한시와 시조만을 흉내내다가 여든을 눈앞에 두고 창작을 마무리 한다.'
이렇게 올 여름 시조선집 '산자수명(山紫水明)'을 내면서 책머리에 절필을 선언한 시조시인 정재익은 그의 말처럼 60여 년 시를 안고 살아왔다. 문학에 대한 결백증이 있어서인지 "열의도 식고, 안목에 찬 작품을 쓰기가 어렵고 기력도 쇠잔한 것"이 붓을 놓는 이유라면 이유다.
1930년 청송에서 태어난 정재익은 교직에 있던 50년대 말, 시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년 방학이 되면 청송에서 서울 성북동의 조지훈을 찾아가 시를 배웠다. 그러기를 몇 해 계속하면서 58년 매일신문에 시를 처음 발표했다. '교외초(郊外抄)'였다. "푸른 물은 물들어라/ 나의 눈동자/ 마음은 떠간다/ 아득한 창공으로…." 그러나 어쩐 일인지 조지훈은 3년이 지나자 정재익에게 "시조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며 소개장을 써주면서 대구의 이호우를 찾으라고 했다. 그 후 정재익은 이호우를 찾았다. 정재익을 본 이호우는 "시조가 더 어려운데…"하면서도 받아주었다.
63년이었다. 능인고 교감 이우출이 "시조문학에 3회 추천 받으라"며 정재익에게 작품 3편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정재익은 작품을 골라 이호우에게 "시조문학에 낼 작품인데 봐 주십시오"하며 내놓았다. 가만히 작품을 보던 이호우는 "이걸 작품이라고 추천받으려 하느냐. 그러려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고 벼락같이 호통치며 작품을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쓸데없는 짓 말고 시조공부만 열심히 해라. 글자 수만 맞고 말만 되는 게 시조가 아니다"며 나무랐다.
정재익은 매주 토요일 이호우의 사랑방에서 2~3시간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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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겨울,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상 시상식 후 기념촬영한 모습. 맨 오른쪽이 정재익.
| | | 이호우의 성격은 과격한 편이었고 다른 사람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 몇 해 뒤 이호우는 정재익에게 "김천의 정완영에게 가라. 시조를 잘 쓰는 분이니 가서 사사 하라"고 했다. 70년 이호우의 문인장이 능인학교 교정에서 있을 때 정재익은 조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74년 추천을 거치지 않고 첫 시집 '무화과(無花果)'를 출판하면서 등단했다.
진보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정재익은 종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통감(通監)'을 2년 배웠다. 광복되던 16세때 송산(松山) 김면식에게 여름에는 한시를, 겨울에는 '시전(詩傳)' '서전(書傳)' 원문을 배우고 외워 어느 정도 한학과 한시에 물미가 틔게 되었다. 19세에 안동사범 강습과를 졸업하고 제대 후 청송 부곡초등에 복직했다. 61년 대구 신암초등으로 왔다가 69년 퇴직하기까지 18년을 교직에 있었다. 퇴직의 변은 '아들 공부시키기 위해서'였고 그 후 원대동에서 제재소를 20년 가량 운영했다. 백형이 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65년 결성된 영남시조문학회 창립회원인 그는 77년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97년 대구문인협회장, 98년 월간문학 시조부문 심사위원을 지냈다. 90년에는 '이호우 문학상'을 제정하고 운영위원이 됐다. 기금은 대구시문화상 상금으로 받은 것과 유가족이 낸 800만원이었으나 부족해 심재완 박사의 도움으로 시화전을 개최, 4천만원을 확보했다.
"시조는 국시(國詩)다. 우리 조상이 창시한 것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한다. 문학장르의 하나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형식에 속박돼 자수를 맞추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시조를 알고 가까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재익은 앞으로 젊은 시조시인들이 대구 시조시단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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