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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왠지 마크가 가고 나서도 마음이 굉장히 복잡해서 방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빈센트와 마주 대하기도 왠지 마음이 안좋았고. 빈센트는 최대한 저를 믿고 제 속도에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정작 제가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라는 게 굉장히 미안했고, 안타까웠어요.
왠지 하릴 없이 학교를 거닐었어요. 저는 캠퍼스를 걷는 게 굉장히 좋더라구요. 저는 일부러 사람이 없는 길을 골라서 다녔는데, 그렇게 혼자서 조용히 걷다보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겨서 굉장히 좋았어요. 그렇게 걷다가 보니까 어느샌가 학교의 축구 필드로 오게 되었어요. 이곳은 가을에는 축구팀이, 봄에는 라크로스팀이 사용하는 곳이었죠. 지금은 라크로스 시즌에 대비해서 학생들이 연습을 하는 것이 보였어요. 그 중에는 브랜든도 끼어 있었죠.
왠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브랜든의 모습은 아름다웠어요. 항상 짧게 자른 금발 머리에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 그리고 사파이어를 박아 놓은 것 같은 파란색 눈동자까지. 아마 학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을 거에요. 그래서인지 요즘들어서는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더군요. 그것도 엄청.
그런데, 왠지 브랜든을 볼때마다 마음 한쪽이 막혀오는 것 같아요. 저도 그때에는 이유를 잘 몰랐어요. 그냥 왠지 그 아이를 볼때면 서글픈 감정이 들곤 했으니까. 그래도 왠지 브랜든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죠.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서 연습이 끝날때까지 브랜든을 지켜보았어요. 왠지 잔잔했던 마음에 서서히 파도가 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어쩐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죠.
브랜든의 연습이 끝나기 전에 떠나려고 했는데, 브랜든이 절 발견했나봐요. 왠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브랜든이 밝게 웃으면서 달려오더군요.
"으와. 연습보러 와준 거야?"
"응? 어.. 응."
"근데 약간 힘이 없어 보이네? 피곤해?"
"아... 아니.. 괜찮아. 테니스를 조금 많이 쳐서 그런가?"
"천천히 쉬어가면서 쳐. 어차피 우리학교에서 너보다 잘치는 녀석은 없을테니까."
그러면서 브랜든은 씨익 웃어보였어요. 왠지 오랫만에 브랜든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 같네요. 그동안 브랜든의 표정은 왠지 어두웠거든요. 저는 지금이 바로 마음에 걸렸던걸 물어볼만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응? 뭐가?"
"요즘들어서 어딘지 굉장히 우울해 보였잖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니가 요즘 도통 말을 안하니까..."
"아냐, 별 일 없었어.."
"정말로? 우리 둘 사이에 비밀 같은 건 없는 거지?"
"응... 단지..."
브랜든이 말끝을 흐리더군요. 저는 브랜든이 말을 끝까지 다 하길 기다렸어요.
"단지, 우리 엄마 건강이 갑자기 악화 되었어. 오래전부터 있던 지병인데, 요즘 갑자기 나빠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병원에 계속 들락날락 거려야 했거든. 조만간 수술도 하게 될 것 같아."
"어쩌다가.. 많이 안좋으신거야?"
"아니.. 수술만 하면 괜찮을 거래. 별로 심각한건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왠지 좀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말을 안할 수가 있어?"
"미안 미안. 그래도 쓸데없이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어. 엄마 남자친구도 와서 계속 돌봐주고 있고.. 별로 걱정할만한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그래도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단 나았을 것 아냐. 미안해. 나는 그런 것도 전혀 모르고.."
저는 갑자기 엄청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브랜든이 혼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제 스스로의 일때문에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니. 아버지도 잃은 브랜든이 어머니가 아프실 때에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을 하니 마음이 아프더군요. 동생도 둘이나 있는데. 아마도 많이 무서웠을 거에요.
"아니야. 다음부터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바로 이야기 할게."
왠지 환하게 웃는 브랜든의 얼굴이 서글퍼 보였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브랜든의 제 손을 브랜든의 볼에 가져갔어요. 왠지 위로가 되었으면 했거든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죠. 저는 잠시 후에야 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급하게 손을 내렸어요. 브랜든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저는 당황해서 일어서며 허겁지겁 말했죠.
"아, 미안.. 저기.. 나 먼저 가볼께."
"어? 그게.."
브랜든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그냥 뒤돌아보지 않고 기숙사 쪽을 향해서 걸었어요.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죠. 어딘지 굉장히 답답하고, 짜증이 났어요. 그 당시에는 저는 그게 뭔지 모르고 있었어요. 아니, 뭔지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지만 인정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을 꺼에요.
고요하지만, 확실하게 커지는 마음속의 파문.
그 날 이후로 저는 일부러 브랜든을 피해다녔어요. 사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복잡하고 심난한 마음상태 때문에 도저히 브랜든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물론 같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그를 피해다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요. 가끔씩 복도에서 얼굴이 마주칠 때도 저는 가볍게 인사만 하고 바로 지나갔어요. 왠지 그에게 상처주는 것 같았지만,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빈센트도 저와 브랜든의 어색해진 관계를 눈치 챈 것 같았어요. 일부러 브랜든이 우리 테이블로 밥을 먹으러 오면 저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은근슬쩍 일어나서 나가버렸었거든요. 제 눈에 띄는 태도의 변화에 빈센트는 의아해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알려고 들지는 않았어요.
"너랑 브랜든이랑 아무리 관계가 소원해도 내일은 잊으면 안된다."
"관계가 소원하긴 누가."
"그렇게 모른척 하면 내가 '아, 예. 그렇습니까?' 하고 납득할 줄 알았냐? 뭔진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화해좀 해. 둘이 찬바람이 부는 턱에 내가 다 민망하더라."
"... 그나저나 내일은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저는 왠지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주제를 바꾸었어요. 빈센트는 다행히도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죠. 대신 투덜대기 시작했어요. 애같이.
"또 이렇지. 또 까먹지. 내가 몇번이나 말을 해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리지. 너무 무심한 거 아냐?"
"뭔데 그래?"
"스타워즈 에피소드 3 가 개봉하는 날이라고! 다같이 보러가기로 했잖아. 기억 안나?"
그러고보니 몇달전부터 빈센트가 스타워즈를 보자며 노래를 부르기는 했네요. 정말 못말리는 스타워즈 광이었어요. 글쎄요, 예전 같았으면 즐겁게 보러갔을 테지만. 브랜든과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게 왠지 걸리더라고요. 아마도 이번에는 마주하고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은데. 브랜든이 아마도 저에게 화가 많이 났을 꺼에요.
"알겠지? 가는 거다? 브랜든한테도 말해둘테니까, 내일 좀 화해좀 해. 알겠지? 니가 남자답게 브랜든이 잘못한 게 있으면 좀 봐주고, 그래."
"글쎄 싸운것도 아니고 브랜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화해할 일은 더더욱 없다니까 그러네."
"알겠어, 알겠어. 어쨌거나 내일 가는 거다?"
"응..."
지금 깨달았던 거지만 사실 관계에 있어서 덮어두고 혼자 고민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게 이해할 수 없는 비 이성적인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런식으로 도망만 가선 해결되는 게 전혀 없어요. 힘들더라도 마주해야하는 거에요. 물론 저는 어렸고, 타인의 기분을 세세하게 배려할 정도의 섬세함은 없었어요.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죠.
22.
"으와. 스타워즈가 벌써 마지막 편이라니. 뭔가 홀가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우울해. 이제 더는 새로운 스타워즈를 못본다는 거 아냐?"
"스타워즈 에피소드 7,8,9도 나오는 거 아니었어?"
"아냐 아냐. 감독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어. 도저히 살아있는 동안에 그것들을 다 찍을 자신이 없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다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왠지 이대로 끝나면 뭔가 만들다 만 것 같잖아?"
아마도 짐작하셨겠지만, 세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어요. 빈센트 혼자서 스타워즈를 본다는 생각에 신나게 떠들뿐 저와 브랜든은 별 말이 없었어요. 사실 그도 그럴게 두 사람이 제대로 대화를 나눴던 때가... 언제인지도 잘 기억이 안날 정도였으니까요. 굉장히 유치했던 건 아는데, 그래도 브랜든을 보고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하겠더군요.
가슴 한구석이 뭉쳐서 계속해서 짜증이 나는것 같은 기분을, 우울해질 것 같은 기분을 브랜든을 보면서 느껴야 했거든요. 그냥 어렵고 복잡한 감정은 피하고 싶었죠. 어쨌거나 그런 냉랭한 분위기는 표를 끊고 영화관에서 들어가고나서 까지 계속되었어요. 빈센트가 좋은 자리를 맡으려면 일찍 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영화가 시작하기 한참전에 극장에 들어가서 앉아 있었죠.
"나, 가서 팝콘좀 사올께. 영화 엄청나게 길 것 같으니까."
왠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던 저는 그렇게 말하곤 잠깐 빠져나왔어요. 극장에서 나오니까 조금 편하게 느껴지더군요. 팝콘을 사려고 줄을 서는데 뒤에서 누가 갑자기 저를 잡아 끌었어요.
"잠깐 나랑 얘기좀 해."
.. 브랜든이었어요. 저를 따라서 나왔나 봐요. 브랜든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붙잡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브랜든의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말했어요. 왠지 따라가고 싶지 않았죠.
"왜 그러는 거야? 곧 있으면 영화 시작해."
"왜 날 피하는 거야?"
브랜든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더군요. 사실 그 질문에는 저도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어요. 당황하기도 했지만, 저 스스로에게도 제가 왜 브랜든을 피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타당한 대답을 줄수가 없었거든요.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래?"
"나한테 화가 난 거야? 혹시 내가 너한테 집에 관한 거 말 안해줬다고, 그래서 화난 거야? 아니면 내가 뭐 따로 잘못하기라도 한거야? 이해가 안돼. 왜 갑자기 나를 피하는 건지."
"아냐. 너한테 화난 것도 아니고 네가 잘못한 것도 없어.."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도대체 몇일동안 내 눈도 제대로 안봤잖아. 나 엄청 고민했다고. 내가 뭔가 알게 모르게 너한테 상처주는 짓을 한 건가. 그래도, 계속 말을 안하는건 너무하잖아."
정말 오랫만에 브랜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어요.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파란빛의 눈. 그렇지만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은, 어딘가 제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엉키게 만들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어딘지 다가서기 어려운 그런 차가운 빛깔.
"미안해. 그렇지만 너한테 화나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럼 왜 나한테 말을 안하려고 하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내가 잘못한 거면 사과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휴우. 나도 모르겠다 정말. 그냥 이야기 하기가 힘들어."
"뭐?"
"널 보면.. 어딘가 헝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래."
브랜든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절 바라보았어요. 젠장. 아마 브랜든에게 상처주고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어요.
"날 납득시켜봐. 나 니가 하는 말 도대체 무슨 이야긴지 이해를 못하겠으니까."
"그냥, 당분간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거냐고! 내가 싫어진 거야? 나랑 친구하기가 싫어졌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거면 애초에 그렇게 말을 하라고!"
"나도 모르겠어. 왜 그러는지 모르겠으니까, 그만좀 하자. 짜증나."
왠지 화가 나서 브랜든을 뒤로 한채 극장으로 들어와서 영화를 봤어요. 물론 빈센트의 말에 의하면 그 영화가 역사에 길이남을 역작인 것 같긴 했지만, 저는 도대체 무슨 영화를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더라고요. 브랜든은 그날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그날 둘이 한참 안들어 오길래 화해하고 있구나 라면서 흐뭇해 했는데 이건 아예 브랜든이 말도 안걸어 오잖아. 유치하게들 지금 뭐하는 거야. 쌓인 게 있으면 말로 풀으라고."
그 날 이후로 브랜든은 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어요. 특별한 노력도 하지 않았죠. 계속해서 짜증만 났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브랜든을 절대로 상처주려던건 아니었는데. 브랜든을 보지 못하게 되자 제 짜증은 더 늘어만 갔어요. 마치 사춘기를 다 다시 겪는 것 같은 경험이었어요. 아무 이유 없는 분노가 제 안에 치밀기 시작했죠.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르겠어."
빈센트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더군요.
"뭐가?"
"너랑 브랜든 말이야. 이제 둘이서 이야기도 안하고, 눈도 잘 안마주치잖아."
"... 그게 잘된 일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우리 셋의 관계는 이상했잖아. 아니, 브랜든 본인은 그렇게 생각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랑 나랑 사귀는 데 거기에 브랜든이 끼어든 거였잖아. 솔직히 미묘했다고. 브랜든을 계속해서 따돌리는 것 같았고.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었다고."
"휴우. 그래도 이렇게 말을 안하게 된 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애초에 싸운 이유가 뭐야? 도대체 이해가 안가. 무슨 일이 있었을 꺼 아냐."
빈센트도 궁금했나봐요. 그래도 그 질문에 대답해줄 말이 없는 게 정말로 아무일이 없었거든요. 빈센트에게 '단순히 브랜든을 보면 짜증나서 일부러 피해다녔어'라고 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아무일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그래, 그래. 또 우리 사이의 비밀은 늘어만 간다는 거지? 나는 언제나 찬밥신세지. 항상. 뭐 내가 그렇지."
빈센트의 시니컬한 태도에 왠지 웃음이 나더라고요. 놀려먹고 싶었죠.
"너는 맨날 내가 너한테 비밀을 숨긴다고 하는데, 너야말로 맨날 밤마다 뭘하는지 솔직히 밝히시지. 왜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컴퓨터에 항상 앉아있는 거야?"
"어? 뭐야.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혼자서 포르노를 보고 있었던 게지?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보자고. 치사하게 남자친구 내버려두고.."
"아니거든!"
.. 원래 놀려주기 위해 그랬던 건데 빈센트의 당황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그러니 왠지 더 궁금해 지기 시작했죠.
"그럼 뭔데...? 뭐하는 건데?"
"비밀이야."
그 이후로도 정말 집요하게 물어보았는 데 절대로 대답할 생각을 안하더군요. 원래는 이쯤에서 빈센트는 포기하고 말하는 데 말이에요. 한번 잠에서 몰래 깨어서 현장을 덮쳐야 겠어요.
그 무렵이었을 꺼에요. 브랜든이 어떤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건.
23.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경험해보셨을 테지만 가장 친하던 친구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꺼에요. 왠지 친구를 잃어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에요.
이기적이라는 거, 물론 알고 있어요. 브랜든을 애초에 밀어낸 건 저였으니까.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기 시작한 건 저였으니까. 브랜든이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되더라도, 불평할 자격은 없는 거겠죠. 그런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나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어요.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죠.
유치하다, 라고 느꼈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중간고사는 다가오고 있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공부하느라 다른 일을 모두 잊을 수 있었을텐데, 이번에는 왠지 그렇지도 못했어요. 너무나도 심한 감정의 기복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죠.
"으아. 졸려. 엄청 자고 싶다."
빈센트와 방에서 공부를 일단은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죠. 빈센트는 피곤한지 눈이 풀려 있더군요. 두 사람다 다음주에 있을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잠깐 쉴래? 우리 나가서 뭐라도 먹자. 아무래도 오늘 밤 새야 할 것 같은데.. 다음주 월요일이 시험 시작인데 아직도 할게 산더미야."
어차피 공부도 거의 되지 않고 있던 터였고, 마침 빈센트의 제안이 반갑더군요. 빈센트와 저는 하던 걸 그만두고 밤 늦게까지 하는 피자집에 가기로 했어요. 봄이었지만 날씨가 아직은 조금은 쌀쌀했어요. 그렇지만, 답답하던 차에 찬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더군요. 무언가 굉장히 시원했어요.
"춥지?"
빈센트가 제 한쪽손을 잡으며 말했어요. 굉장히 따듯했지만, 어딘지 무미건조한 손.
"응. 그래도 기분이 좋네. 조금 답답했었거든."
"휴우. 벌써 3쿼터도 끝나가네. 시간 정말 빠르다, 그치? 크리스마스가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그러게. 너무 시간이 빨리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빈센트가 제 말이 미소지어보였어요. 벌써 빈센트와 사귄지도 꽤 되었군요. 그에게 답변을 줄때도 된 것도 같은데. 그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제 손을 계속 잡아주고만 있었어요. 그런 빈센트가 엄청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더군요.
"너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거야?"
갑작스런 저의 질문에 빈센트가 의아하게 쳐다보더군요.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더라구요.
"무슨 질문이 그래?"
"사실 그렇잖아. 나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힘들거라고 생각했거든. 특별히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격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빈센트는 제 손을 놓더니 제 머리로 손을 가져가 쓰다듬기 시작했어요. 왠지 부드럽고 조심스런 그 손길이 싫지가 않아서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어요. 그의 목에서 살짝 느껴지는 비누냄새가 좋더군요.
"글쎄.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게 더 쉽겠는데."
빈센트의 나지막한 목소리.
"좋아하는 이유를 결국 찾을 수가 없는 거로군?"
"하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너무 유치하고 조잡한 것으로 변하는 것 같아서 싫어. 인간의 언어란건 사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별로 진화되지 못한 것 같거든. 너는 아마 상상도 못할꺼야.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태어나서 내 스스로가 이 정도로 풍부한 감정을 가졌나, 라고 느껴본적은 처음인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는 건 너무 가혹한 거라고."
저는 잠깐 멈춰서 빈센트의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언제나 그렇듯 부드럽지만 확고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죠.
"고마워."
진심이었어요. 여태껏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렇게 확신에 찬 말을 들려준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기대고 싶게 만들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죠. 빈센트는 별말없이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었어요. 그 한결같은 모습에 왠지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었어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때야 깨달았죠.
그때의 빈센트를 생각하면,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그 따스한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브랜든과 함께 다니던 여자아이는, 저도 아는 사람이었어요. 제시카라고,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였죠. 항상 언제나 웃는 얼굴에 상냥하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지금은 졸업반으로 브랜든이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였죠. 덕분에 브랜든이 그녀와 다니기 시작한 게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제시카를 알고 있었던 건, 그녀가 제 프리펙트-반장- 이었었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처음에 학교에 들어왔을 때 이것저것 도와주는 역할을 했었어요. 제가 어떤 질문을 해도, 영어를 더듬거려도 정말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던 친구였기 때문에 항상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브랜든은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난 걸까? 나하고도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않더라고."
빈센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하더군요.
"미안해.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동안 브랜든의 친구였을 텐데. 나 때문에."
"뭐, 할 수 없지. 네 잘못은 아니야. 뭔가 예전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고, 우리 셋."
빈센트의 말에 뭐라 대답해줄말이 없더군요. 덕분에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죠. 저는 왠지 불편해져서 책가방을 싸들고 방을 나섰어요.
"어쨌거나, 나는 클래스 가기 전에 도서관에 가봐야 겠다. 나중에 보자."
"응. 그래. 이따가 보자."
날씨는 조금 어둡더군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먹구름이 잔뜩 낀게 별로 좋은 날씨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저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해요. 괜히 비가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곤
했죠. 그 시원한 느낌이 좋았어요. 메마른 세상을 조금씩 적셔 주는 듯한, 그 기분좋은 감촉.
라운지에서 커피를 하나 빼들고 도서관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어요. 잠을 제대로 못자서 조금은 몽롱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 쪽으로 걸어 오고 있는게 보였어요. 조금은 먼거리였지만, 누군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죠. 브랜든이었어요. 왠지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요. 여러가지 일로 바빠서 한동안 그를 보지 못했었어요. 여전히 밝은 금발에, 아직까지 소년의 순수함을 담은 얼굴.
그가 다가오는 데 저는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거든요. 왠지 처음만나는 것 같은, 그런 어색한 느낌. 저를 보더니 잠시 그가 멈칫하더군요. 그렇지만 이내 그는 눈길을 거두고 그냥 저를 무시한 채로 지나가 버렸어요. 마치 모르는 사람인것 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그 찬란하게 아름답던 그의 파란눈이, 왠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워 보이더군요.
왠지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죠. 강하게 거부당한 것 같은, 그런 느낌. 제가 어떠한 상처를 주어도, 어떠한 모진 행동을 해도 항상 저에게 미소지어주고 위로해줄 거라 생각했던 브랜든이었기에 더더욱 뼈아팠어요. 브랜든이 그 동안 제가 그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을 때 받았을 상처가 이런 거라고 생각하니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요.
왜 그런 순간 있지 않은가요? 굉장히 마음이 아파져서 울고 싶은 데, 울 수 없어서 괴로운 순간 말이에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어요.
비가 조금씩,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일부러 비를 맞으려고 밖으로 나갔어요. 차갑게 비가 몸을 적시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저는 울음을 터뜨렸죠. 아무도 알 수 없게, 그냥 혼자서 지내는 열병인 것처럼. 그렇게 울고나면 훨씬 기분이 나아질 수 있겠죠.
내리붓는 비를 맞으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가까스로 깨달을 수 있었죠. 그리고 바보같이도, 그때서야 브랜든에 대한 저에 감정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24.
예. 그날 클래스에는 아예 가지 않았어요. 비를 맞으면서 학교에서 나와서 그냥 미친듯이 걸었죠. 제 핸드폰으로 전화가 엄청나게 걸려왔는데 그냥 무시하고 받지 않았어요. 이런 감정 정말 오랫만인 것 같군요. 마치 사춘기를 다 다시 겪는 듯한, 그런 열병같은 답답하고 짜증나는 느낌.
솔직히 그때의 제 감정의 정체는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아니,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선 눈치 채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사실 그런 감정의 정체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건 실패한 사랑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죠. 그렇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선 그런 감정을 거부하려고 했었나봐요. 애써 숨기고, 감추려 했었죠. 그러면 그럴 수록 더 힘들어지는 건데,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이성보단 감성으로 행동하게 되죠.
갈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다운타운을 하릴 없이 걸었어요. 비는 어느샌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죠. 왠지 제 모습이 굉장히 초라해보이더군요. 비에 완전히 젖은 교복을 입은 채로,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창가에 있는 자리에 앉았어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죠. 젖은 교복 때문에 온몸이 부들 부들 떨리더군요.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마치 두뇌가 복잡한 사고를 거부하는 듯, 그냥 사람들이 움직이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저도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와서 저를 구해주기를 바랬나봐요.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제 스스로가 싫었어요.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어쩔줄 몰라하고, 의지하려고만 하고. 네. 사랑을 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안되어 있었어요.
사랑이라는 건,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으면 성립되지 않아요. 조건 없는 사랑? 네, 가능할지도 몰라요. 한 한달쯤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원하는 걸 받지 못하면, 그 어떠한 사랑이라도 희미해질 수 밖에 없어요. 사랑이라는 건, 생각보다 달콤한 것은 아니더군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필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게 사랑이고 연애였어요. 빈센트에게 별 감정이 없는 채로 계속 맴도는 이유는, 이기적인 이유였었던 것 같아요. 네, 단순히 기댈 누군가가 필요했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작은 카페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저를 찾아내어서 끌어 안아주는 이가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어요. 기대하고 있지 않았었기에 더욱더 놀랄 수 밖에 없었죠. 언제나 익숙한 그 비누
냄새.. 저를 뒤에서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 왔네.."
"바보야! 왔네? 가 뭐야! 너 아침에 사라진 이후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클래스는 왜 안간 건데? 그리고 비 다 맞으면서 여기서 뭐하는거야?"
빈센트가 뭐라뭐라고 말했지만 익숙한 체온과 향기가 느껴지자 긴장과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 왔나봐요. 그냥 빈센트의 팔에 안겨서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놔버렸어요. 그냥 이대로 모두 맡겨 버리고 싶은 느낌.
일어나니까 몸이 굉장히 아프고 정신이 몽롱했어요.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굉장히 편안하더군요. 익숙한 베개와 이불의 포근한 느낌. 제 방이었어요. 간신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보니 빈센트가 제 침대 옆에 앉아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제가 깨어나자 빈센트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저리 치우더니 제 옆으로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더군요.
"일어났네? 조금 괜찮아?"
"아.. 응. 어떻게 된 거야?"
"너 기절했었어. 내가 너를 끌고 기숙사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흐음. 생각해 보니 별로 고생은 안했네. 택시타고 왔거든. 어쨌거나, 쓸데 없이 걱정이나 시키고."
"미안해."
제 사과에 빈센트가 씨익 웃더니 더이상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대신 제 이마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갖다 대었죠. 그의 손이 주는 감촉이 굉장히 좋았어요. 일부러 저는 그의 손을 저의 볼에 가져다 대었죠. 아프니까 왠지 누군가에게 마구 응석이 부리고 싶어지더군요. 빈센트는 그런 저를 살짝 쓰다듬더니 이내 말했어요.
"아직도 열이 조금 있네...? 일단 내가 수프 끓여줄 테니까 그거 먹고 약먹자. 하루 종일 뭘 먹고는 다닌거야?"
그렇게 말하고 빈센트는 수프를 끓이러 일어섰죠. 저는 가만히 빈센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어딘지 서글퍼 지더군요. 너무 어지러워서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잠시 그대로 있었어요. 또 머리가 아파오려고 해요. 정말이지, 너무나 싫은 그 느낌.
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빈센트를 뒤에서 끌어 안았어요. 심한 두통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서 그냥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느낌 뿐이었죠.
"왜 그래.....?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거야? 괜찮아?"
빈센트가 제 손을 풀고 저에게로 돌아보면서 물었어요. 저는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죠. 원래 같았으면 짧게 입맞춤만 했겠지만, 왠지 빈센트를 더 느끼고 싶었어요. 평소보다 과감한 저의 키스에 빈센트가 잠시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거부감 없이 저를 받아들이더군요.
숨이 차오를 정도로 긴 키스를 하는 동안 저는 그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어요.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웃옷을 벗겼죠. 말랐지만, 적당한 근육이 잡혀 있는 그의 상체가 드러났어요. 빈센트가 자신의 이마를 제 이마에 가져다 대더군요.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어요.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제 몸에서 나는 열 때문에 굉장히 덥고, 정신이 몽롱하더군요. 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말했어요.
"하고 싶어."
"괜찮... 겠어?"
빈센트의 질문에 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몸에 힘을 뺐어요. 아니, 사실 열때문에 몽롱한 정신때문에 몸에 힘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지도 몰라요. 빈센트는 저를 안고는 침대로 데려 갔어요. 그리고는 조심스레 제 몸에 걸쳐져 있던 옷을 하나 둘씩 벗기기 시작했죠. 그의 손길은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웠어요.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것 처럼.. 그의 입술이 제 몸 이곳저곳을 헤집으면, 그의 머리칼이 제 몸을 간지럽혔죠.
그리고는, 그의 몸과 저의 몸이 만나면서 느껴지는 쾌락에 모든 걸 맡겼어요. 그의 강인하지만 부드러운 몸짓이, 모든 걸 잊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죠.
그런데.. 아무리 그와 가까워져도, 이 메울 수 없는 외로움의 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의 몸과 저의 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와 저 사이의 거리가 뼈저리게 느껴지더군요.
그렇지 말았어야 했어요.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제 스스로만 돌보았을 뿐, 남의 감정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못했죠. 저는 빈센트의 상처의 폭을 넓히고만 있었어요. 빈센트가 너무 강하고 그에게 항상 의지할 수 있어서 그가 상처를 받는다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나봐요.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었다면....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과 후회가 들더군요.
25.
빈센트의 품에 안긴 채로, 그렇게 잠이 들었나봐요. 깨어나보니 아직까지는 새벽인 것 같았어요. 제 옆에는 저를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빈센트가 있었어요. 저는 왠지 그를 깨우기가 싫어서 조심스레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평온해 보이더군요.
빈센트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어요. 몸서리처질 만큼의 외로움도, 안타까움도,짜증도, 슬픔도 놀라우리만치 모두 그대로였어요. 오히려 가슴속에는 도저히 메꿔질 수 없을 것 같은 공허함만이 남았어요. 그동안 스스로를 기만하려 했던 감정들이 모두 흩어져 버린 느낌이었어요.
네,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저는 빈센트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 아이의 저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의 보답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왠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안타까웠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빈센트를 꼭 끌어안았어요. 그냥 어딘가 굉장히 측은하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어요.
"뭐야.. 벌써 일어난거야? .. 왜 그래? 울어?"
빈센트가 잠에서 깨서 자신의 품에 안긴채로 우는 저를 바라보고는 조금 어리둥절 했나봐요. 그래도 그는 그냥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어요. 언제나처럼. 변하지 않는 그 손길, 그 체온 그대로.
저는 끝을 예감하고 있었어요.
당장은 복잡한 현실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듯이 공부를 했죠. 시험이 얼마 안남은 데다가 요 근래들어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할 거리는 산더미 같았어요. 저에게는 차라리 좋은 일이었죠.
그 때쯔음 느낀 거지만, 공부란 사실 별로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아요.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답을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건 현실에서 풀리지 않는 수많은 문제점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간단명료하고 명확하죠. 현실의 문제나 자신의 감정들이 마치 수학공식을 대입한 것처럼 깔끔하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빈센트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날 이후로 빈센트의 태도는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명랑했고, 유쾌했으며, 항상 저를 챙겨주었죠. 가끔씩 보면 누가 나이가 더 많은 건지 모르겠어요.
시험기간은 정말 정신없이 갔어요. 저는 시험기간이 좋더군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하루에 두세시간 정도만 시험을 보면 그 다음부터는 자유로웠으니까요. 늦잠을 자도 되고, 밤 늦게까지 깨어 있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요. 어쨌거나 시험기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어요. 일부러 공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적은 의외로 좋은 것 같더군요.
시험이 끝나도, 뭔가 개운하지가 않더군요. 그동안 시험기간을 핑계로 애써 피해왔던 일들을 마침내 마주쳐야 한다라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시험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는 거였죠.
시험 기간 도중에 브랜든과도 가끔 마주쳤지만, 서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최대한 무덤덤 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저지른 일이니까, 제가 해결을 해야 겠죠.
"드디어 해방이네. 으아. 이번 시험은 특히나 더 어려웠던 것 같애. 특히 물리는.. 한 반타작했나? 커브 해주겠지? 해주겠지? 해주겠지?"
"너네 물리 선생 우리 클래스에서도 커브 안하겠다고 못 박았잖아. 그냥 스코어 나온 대로 그대로 성적에 반영 한다고 하던데?"
"으아. 그럼 난 끝장인데."
마지막 시험을 치고 나오니 빈센트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빈센트는 항상 엄살을 피우는데 그런 것 치곤 항상 성적이 좋더군요. 얄미운 녀석. 빈센트는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뭘할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오늘 밤에는 뭐할까? 당연히 파티에 가야겠지?"
"누가 파티한테?"
"응. 앤디가 자기네 집에서 풀파티 한데. 엄청나게 많이 초대하고 다니던데."
앤디는, 학교의 말썽꾸러기였어요. 항상 엉뚱하고 이일 저질 저지르고 다니는데, 워낙 성격이 구김살이 없고 밝아서 많은 아이들로부터 인기가 있었죠. 집도 굉장히 잘 사는 편이어서, 항상 베푸는 걸 좋아했고요. 파티도 자주 열어요. 물론, 고등학교 학생들이 파티에 가는 이유는 순전히 술을 마시기 위해 가는 거였긴 했지만요.
"갈거지? 갈거지?"
"그래..."
파티 같은 걸 갈 기분은 사실 아니었지만, 빈센트에게 최대한 잘하고 싶었어요. 가능만 하다면,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어요. 저의 결점을 모두 알면서도 저를 계속 사랑해 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죠.
저희 학교는 학비가 굉장히 비싼편이기 때문에 사실 미국에서도 일반인들은 거의 다니지 못해요. 덕분에 이 학교를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은 부자들을 보았지만, 앤디는 그 중에서도 상당한 부자축에 속했어요. 집은 정말 으리으리하더군요. 들어가기도 전부터 압도되어 버리는 것 같았어요. 빈센트야 본인의 집도 만만치 않게 커서 이런 집에 익숙하니까 그렇다쳐도 서울에서의 작은 아파트에만 살았던 저로서야 여러모로 충격이었죠.
"으와. 파티에 오는 거 진짜 오랫만인 거 같애. 근데 사람 진짜 많이 왔다."
그의 집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어요. 거의 학교의 절반쯤은 데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커다란 수영장 근처에서 제각기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놀고 있었어요. 빈센트와 저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 안에도 사람은 붐비더군요. 엄청 시끄럽더라고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귀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으니까요.
"뭣 좀 마시지 않을래? 목 마르다. 내가 마실 거 가지고 갈테니까, 발코니에 나가 있어. 여기 엄청 덥고 시끄럽다."
"응, 알겠어."
저는 방향을 돌려서 발코니 쪽으로 가기 시작했어요.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것 같더군요.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는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어요. 제시카와 브랜든이었어요. 두 사람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내려오더군요. 제시카는 브랜든에게 팔짱을 낀채로 귓속말로 무언가 속삭이기도 하고 즐겁게 웃기도 하면서 내려오더라고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왠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무언가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오더군요 브랜든도 저를 보았나봐요. 별안한 대화를 멈추고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어요.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제시카 였죠.
"으와, 이게 누구야. 정말 오랫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요즘들어서 거의 이야기를 못했네."
"어, 응. 잘 지냈지, 나야.... 이번년도에 내 스케쥴이 너랑 좀 많이 달라서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 같네. 너는 잘 지냈어?"
"응. 이 파티 온거야? 사람 정말 많이 온 거 같아. 그동안 못만났던 사람들 거의 다 만나는 거 같네. 아! 미안. 아직 소개를 안했구나. 이쪽은 브랜든이야. 그리고 이쪽은.."
"아, 제시카.. 고마운데, 우리 아는 사이야."
브랜든이 마침내 입을 열었어요. 제시카의 명랑한 말투와 비교해서 브랜든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 앉아 있었죠. 그러고보니 많이 야윈 것도 같네요.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파란 눈. 그를 보니 제 가슴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궁금해했던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확실히 알것도 같아요. 브랜든이 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잘... 지냈어?"
"응... 너는?"
브랜든에게서 정말로 오랫만에 들은, 옛날의 그 따뜻하던 말투.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참아내고 있었어요.
"나야 뭐... 그냥 똑같지."
"다행이네. 시험은 잘 봤고?"
"응. 그냥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는 본것 같아."
브랜든이 희미하게 미소지었어요. 어딘지 피곤해보이는 그 미소. 어딘지 안쓰럽네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랜든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피곤해보였어요. 어딘지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죠.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과는 달리 그의 모든 일들을 알지 못하니까,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겠더라구요.
"헤..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신기하네. 둘이 많이 친했나봐? 아, 근데, 너 혹시 브랜든네 집에 가봤어?"
둘의 느릿느릿한 대화에 제시카가 끼어들었어요.
"또 그 얘기야?"
브랜든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하더군요.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봐요, 그 질문이. 저는 어리둥절해 했지만, 제시카는 그런 브랜든을 본체 만체 했어요.
"어? 응...."
"역시. 나만 안데려 가는 거였구나? 저번에 내가 브랜든네 집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안된다는 거야. 치사하게. 너는 나를 여자친구라고 생각은 하는 거야? 저번에도 그래..."
여자... 친구? 제시카가 불평하는 소리가 멍해지는 정신속에서 들리지 않았어요. 브랜든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 는 생각은 거의 안해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떨리는 것 같았어요. 왠지 가슴이 콱 막혀오는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워 지더군요.
"그래, 그래. 알겠어. 다음에 꼭 데려가 줄게."
브랜든의 체념한 듯한 대꾸. 두 사람은 다정해 보였어요. 기대 이상으로.
"또 나중이야? 맨날 다음에면 도대체 그 날은 언제 오는 거야. 나 니 동생들 한번 보고 싶다구."
"우리 집에 가봐야 전혀 볼 것 없다고 해도 그러네."
"그래도, 사귀는 사람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어? 근데 우리 콘서트 예매한 거 시간 거의 다 되지 않았어? 가봐야 겠다. 어쨌거나, 만나서 반가웠어. 즐겁게 놀다가 가고 나중에 학교에서 다시 만나자. 언제한번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지."
"아, 응.. 잘가."
"응. 다음에 보자."
제시카가 브랜든을 잡아 끌고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어요. 브랜든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죠.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제시카와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서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제 등을 툭 치더군요.
"뭐야? 왜 그렇고 있어. 발코니에 가 있으라니까. 이거 마셔."
뒤에서 빈센트가 맥주병을 한개 내밀며 말했어요. 저는 고개를 들어서 빈센트를 바라보았어요. 저도 모르게, 제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어요. 그게 빈센트를 놀라게 했나봐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왜 우는 건데?"
빈센트가 자신의 손을 들어 제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손을 조용히 잡아서 내렸어요. 더 이상 이 아이가 베푸는 친절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네, 이제는 인정해야할 시간인 것
같이 느껴졌죠.
"우리... 헤어지자..."
"뭐?"
"나.. 더 이상은 못하겠어. 너 좋아하려고 노력해봤는데, 그게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브랜든을.. 브랜든이.. 좋아. 그 애 말고는, 도저히 아무도 생각할 수가 없어.."
첫댓글 사랑은 항상 다른데로 가는 것같아요. 큐피트의 화살은 항상 그런가?
아~~어케 불쌍한 빈센트~~!!그래도 흘러가는 마음 잡을 수도 없구~~!!빈센트 힘내길!!
이런...
빈센트가 불쌍하다는...
가슴이 메어져 와요...
가슴이 아파와요...빈센트도 불쌍하고~~~
드디어 걱정하던 결과가 나왔군요..빈센트가 느낄 슬픔이 느껴지네요..
빈센트...... 불쌍해요.....
빈센트가 강한 아이이길 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