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중앙교우회 회지에 기고했습니다.)
6.10만세운동 82주년에 즈음하여
오늘이 6.10만세운동 82주년이 되는 날이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7년 후인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돌아가시고 인산일인 6월 10일에 일어났던 만세운동으로 이 운동은 각기 다른 3갈레로 추진되고 거사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으로 고려공산 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천도교 구파가 손을 잡고 추진하였던 운동으로 기미년 만세운동과 같이 전국적 규모로 추진하던 운동이었으나 준비과정에서 수사 선에 노출 되어 권오설이 6월 7일 체포당하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권오설은 5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계속 일제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항거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출옥날짜를 100여일 앞두고 순국했다.
고문으로 사망한 시신을 보게 되면 일제의 잔혹상이 세상에 들어나서 여론이 나빠질까 겁이 난 일제는 아무도 시신을 못 보게 철판으로 관을 만들었고, 일본 경찰이 장례일에 문상객의 길을 막고 고향인 안동의 공동묘지에 봉분도 없이 평장으로 묻었다.
이분이 바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우리 중앙 선배이다.
둘째는 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이 일으켰던 사직동계 운동이다.
인산 당일 중앙고보 학생들이 도열해 있던 종로3가 단성사 맞은편에서 일본군인, 기마경찰, 사복형사 등 2중3중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태극기를 휘두르고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중앙고보 학생들이 제일 먼저 불렀다.
이 만세의 함성은 섶에 불을 댕긴 듯 온 장안으로 번져갔다. 현장에서 중앙고보생 6~70명이 체포당했다.
관수교에서는 연전생들이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했고 을지로 도립사범학교 앞에서도, 그리고 훈련원에서도, 동대문 부인병원 앞에서도 만세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단체가 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이었는데 이를 두고 사직동계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의 주모자는 6명인데 그 중에 중앙고보생인 만세 선창자 이선호와 류면희, 연희전문 이병립, 박하균, 경성제대 이천진, 기독학관생 박두종이다.
셋째는 통동계 운동으로 그 당시 민족주의의식이 강했던 중앙고보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 김재문, 곽대형, 황재문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만세운동이다.
통동계는 동대문 밖 동묘 앞과 신설동에서 만세시위를 했다.
당초 계획에는 이 운동의 주모자인 중앙고보 박용규와 이동환은 동묘 앞으로 가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임금이 탄 상여가 종로3가에는 아침 8시30분에 지나가기로 되어 있고 동묘 앞에는 오후 2시경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5시간의 시간여유가 있어서 종로3가 중앙고보생인 학우들이 도열한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광경을 지켜보고 동묘로 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박용규와 이동환은 종로3가로 갔다.
8시 40분 대여가 지나가자 이선호의 조선독립만세선창이 있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생들이 모두 양손을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의 불길이 솟았다.
박용규와 이동환은 동묘로 가야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같이 만세를 부르다가 종로3가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6.10독립만세운동은 세 갈레로 일어났는데 그 중심인물은 모두 중앙 선배님들이였다는 것이 우리 학교의 자랑이다.
그 때 사직동계 운동의 한 축이었던 연세대학교도 통동계 운동의 한 축이었던 중동고등학교도 6.10만세운동에 대한 기념행사를 하지 않는데 반해 오직 중앙학교에서만 광복 이래 오늘날까지 기념행사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
일제 35년 동안 중앙고보는 3.1운동, 6.10만세운동, 서울학생운동, 식민교육반대투쟁, 중앙고보 반제동맹, 독서회 사건, 학병반대투쟁 등 학교가 개교한 이래 광복이 되는 그 날까지 민족운동, 사회운동, 독립운동 등에 남긴 공적이 역사에 빛나는 학교였다.
뿐만 아니라 인촌선생은 동경유학생 2.8독립선언을 후원했고, 조철호 선생의 조선소년군창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 국어수호운동의 중심인물 이희승, 안재홍 등 중앙교우들이 국내외에서 펼쳤던 광범위하고 다양한 항일운동은 청사에 빛난다.
금년이 중앙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앙고등학교와 중앙교우회서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과 식민교육반대투쟁 등에 가담했던 260여명의 선배 중에 투옥 중 또는 석방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신 분, 옥고를 치룬 뒤 일본 총독부의 방해로 복학이 금지되어 부득이 타교로 전학가신 분, 혹은 학업을 포기하고 국내외에서 펼쳐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졸업을 못하신 137명의 선배님께 명예졸업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교우님 여러분! 자랑스러운 선배님들에게는 명복을,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으시는 후손에게는 우리 같이 축하를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