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새해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총선 때 신문이나 뉴스 보지 않고 투표하지 않기’와 ‘남북관계 개선된다고 그럴 때는 국내 정치판 변화에 조금 신경쓰기’라고 말했는데 예상대로 사건이 일어났다. 아, 신통하고 놀라운 나의 예지력이여. 차제에 전업이나 할까. “남북 정상회담 예언한 386 역술인”이라고 여성지 한군데서 때려주기만 하면 병풍치고 한복입고 앉아만 있어도 예약하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룰 텐데…. 아, 무신 개소리다냐.
이글이 지면에 실릴 때 즈음이면 남북 정상회담의 깜짝 발표를 둘러싼 시끌벅적한 이야기도 일단락되어 있을 듯하다. 격세지감이다. 예전에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뒤에야 ‘아, 그랬구나’라고 무릎을 쳤건만, 요즘은 발생 직후부터 ‘정권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으니 말이다. 7·4 남북 공동성명이 유신 독재를 앞둔 ‘쇼’였다는 사실은 그때는 어려서 미처 몰랐다고 치자. 하지만 선거 때면 어김없이 터지는 ‘간첩단 검거’, ‘휴전선 총격’ 사건들은 나의 ‘감’을 잡아주었다. 그래서인지 실향민인 아버지도 이번 일에 큰 기대를 품지 않는다. 휴짓조각이 된 동화은행 주식은 고이 보관하고 있어도.
그래도 ‘정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지만, 50년 세월을 넘어 남북관계에 진전이 생기는 일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미전향 장기수를 포함한 실향민들이 혈육과 상봉하는 일을 무심히 본다면 팍팍한 세상살이에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이미 북한 땅 어딘가에 기술자들이 파견되어 있고, 일반인들도 유람선 타고 금강산도 왔다갔다하는 시대니 안 되라는 법도 없다. 야당 정치인들의 볼맨 주장도 내가 못하는 걸 남이 하니까 배 아파서 그러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남북간 왕래가 자유로워지고 통일이 가까워 올 때 예상되는 일들이 반가운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실무협의차 남북을 왕래할 각계 원로 인사들의 근엄하신 얼굴이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일을 추진할 분들은 아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어쩌구 하면서 대량살육될 소떼가 건너가는 일이 재연된다면 최근 동물보호론자가 된 나의 정치적 성향과 어긋난다. 매스 미디어의 생리상 이산 가족 상봉 장면을 신파조로 엮어갈 일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부탁! 사적 감정은 사적으로 남겨두길).
어디 그뿐이랴. 북한 전체의 토지를 거대한 투기장으로 만드는 일은 선글라스와 빨간 장갑을 낀 큰손들이 아니라 보통 남한인의 JQ(‘잔머리 지수’)면 뒤집어쓴다. 중국 조선족과 교류하면서 드러난 동포들 사기치는 솜씨도 어디 가겠나. 동네 공터조차 남겨두지 않는 건설업체들이니 중장비를 이끌고 북한 전역을 들쑤실 것도 뻔할 뻔자다. 인공제설기도 필요없는 곳이니 스키장과 콘도 짓는다고 이산 저산 헤집으면서 흉물스럽게 깎아댈 것이다. 위락시설 있는 곳에 ‘부대시설’이 없을 수 없으니, 순진한 북한 처녀들을 룸살롱으로 꼬드길 조직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것이다. 좀 ‘오버’했나? 아무튼 남북간 왕래의 시기와 수순과 상관없이 ‘돈 있고 빽 있는 사람 먼저’라는 원칙은 요지부동일 것이다.
지나간 일을 들추는 건 좀 비겁하지만,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시절 ‘남한사회는 발전 없는 식민지’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보다는 순진했던 때라서 ‘한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후진국과는 좀 다르다’는 어렴풋한 느낌 때문에 고민했었다. 현실은 무언가 이루어지더라도 짜증나는 식으로 이루어지든가, 아예 이루어지지 못해서 절망감을 안겨주든가 둘 중 하나였고, 그래서 판단이 좀 헷갈렸다. 요즈음은 아무래도 전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경제 성장도, 정치 민주화도, 올림픽 개최도, 심지어 최근의 정보화도 다 마찬가지다. 이 정도도 못 이루고 있는 거개의 후진국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남한인들의 의식구조에 자리잡고 있고, 나도 그런 속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할 똥배짱 없다. 아, 무시무시한 성장제일주의여.
한데 느닷없이 예전의 고민이 되살아난다. 1994년처럼 변고가 생겨서 ‘말짱 도루묵’되는 건 아닐까라는 재수 옴 붙은 생각 말이다. 그땐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흠, 내 주제에 이런 걸 왜 걱정하지? 하긴 그러고보니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쨌든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아주 가끔은 실천하면서) 살아온 듯하다. 그래 좋다. 나(혹은 ‘우리’) 까지만 그러자. 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