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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는 1961년 5·16쿠데타로부터 1979년 10·26총격사태에 이르는 18년 동안 처음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역임하고 나중에는 ‘체육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박정희 집권기에 한국은 근대로 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수많은 고통과 희생을 치러야 했다. 빛과 그늘, 기적과 위험을 모두 포함하여 산업화와 민주화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하고자 할 때 한번쯤 돌아보는 기본명제다.
박정희 집권기(朴正熙執權期)는 ‘반독재민주화투쟁(反獨裁民主化鬪爭)’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와 ‘동아시아의 기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 시각적 편차가 클 수밖에 없어 그 시기에 대한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 따라서 박정희 집권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두 시각 사이의 토론과 대질이 필요하다. 예컨대 박정희 집권기의 개발과 독재, 경제적 성취와 정치적 억압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한국 모더니티의 역사에서 개발독재와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자리잡아야 하는지 등은 좀 더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성찰해야 한다.
‘박정희 바로 보기’를 애써 외면하는 ‘근본주의(根本主義)적 비판’도 문제지만, ‘무반성적(無反省的) 성공주의(成功主義)’나 미성숙했던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찬물을 끼얹는 ‘박정희 우상화(偶像化) 담론(談論)’이야말로 탈냉전(脫冷戰) 민주주의(民主主義) 시대에 ‘박정희 바로 보기’의 최대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냉전우파만이 아니라 냉전좌파의 ‘극단적 시대인식’을 함께 넘어설 때 비로소 한국 현대사 속의 박정희 집권기도 그 시대가 갖는 역사적 무게와 이념적·정치적 논란의 뜨고움을 넘어 냉정한 눈으로 객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빈(朴成彬)은 좌절한 양반출신의 ‘건달’이었고, 농사일이나 집안살림, 자녀교육은 모두 어머니 백남의(白南義)의 몫이었다. 박정희는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와 바로 위의 누나인 박재희(朴在姬)와 특히 가까웠다. 박상희는 구미에서《동아일보(東亞日報)》지국장을 지냈고, 네 살 위의 박재희는 박정희의 출생과 사망 때 박정희와 함께 있었다.
피식민지의 빈농출신으로 태어난 박정희는 1926년 그의 나이 9세 되던 해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32년에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지냈고 전과목에서 성적은 항상 최우수였다. 작고 깡마른 체격에 까무잡잡하고 병약한 체질의 박정희는 공부에서 수재형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야무지고 단단한 성질이 있어 별명이 ‘대추방망이’ 또는 ‘악바리’로 불렸다.
박정희의 정신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은 나폴레옹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권력과 정복, 영웅적 남성상을 자신의 뇌리와 심장에 깊이 각인시킨 듯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청년기에는 민족현실에 대한 고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 영역, 즉 교육과 군사영역에 투신했다. 먼저 1932년 박정희는 조선의 3대 명문 사범학교의 하나인 관립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입학했다. 구미보통학교 개교 이래 첫번째 합격이었다. 이 시기에 교사는 식민지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대 최선의 지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는 ‘어둠의 자식’처럼 불만스럽고 우울한 학교생활을 보냈다. 학교성적은 거의 꼴지였다. 박정희가 보기에 사범학교에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꿈은 ‘긴 칼을 차는 군인’이었다. 나폴레옹처럼 ‘정복전쟁의 영웅’을 꿈꾸던 박정희에게 대구사범학교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서 해방되기 위해 박정희는 검도와 기계체조 등에 취미를 붙였고, 나팔불기와 서예 등에 몰두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7년 갓 스물의 나이로 문경보통공립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로부터 20대 초반의 3년을 보통학교 교사로 보냈다. 그러나 박정희는 교사생활에 그다지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기거했던 어떤 사람은 “그와의 기억은 술 마신 것이 전부”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 시절 박정희는 새벽 4시~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팔을 불었다. 일본 군가로 “튀어나오는 적군은 모두 모두 죽여라”라는 노랫말이 있었다.
나폴레옹에 심취했던 박정희는 보통학교 교사시절에 하숙방에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박정희는 그 초상화를 언제나 가지고 다녔던 것 같다. 숙직실로 거처를 옮겼을 때도 걸어놓았다. 그림에서 나폴레옹은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군마를 타고 있었다. 그의 장래목표는 육군 기병대장이었다. 교사 박정희는 어린 제자들에게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우고 적들을 가장 많이 죽이는 대장이 될란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의 소년시절’이란 글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썼다.
“군인을 무척 동경했다. 일본군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군인이 되었으면 했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의 역사에 나오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같은 일본전국시대(日本戰國時代)의 용맹한 무장(武將)들을 좋아했고,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며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교사체질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1940년 문경보통학교 교사 직책을 사직하고 군인의 길로 들어갔다. 어느 전기작가가 박정희에게 왜 만주국군관학교(滿洲國軍官學校)에 들어갔느냐고 묻자, 박정희는 “긴 칼을 차고, 군복을 입고 싶어서 갔지”라고 단순명쾌하게 대답했다.
박정희와의 헤어짐이 섭섭해서 우는 제자들에게 박정희는 “너희들은 몰라서 우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가 긴 칼 차고 대장(大將) 계급장을 달고 돌아오면 군수보다 너희들 선생님이 더 높다”라면서 달랬다.
박정희는 만주국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베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라는 글귀로 혈서를 쓰고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해 부쳤다.《만주신문》은 일제(日帝)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박정희의 혈서를 특별 보도했고, 만주에 가 있던 사범학교 시절의 교련주임 아라카와[有川主一] 대좌(大佐)도 적극 나서 박정희를 도왔다. 박정희는 연령제한에도 불구하고 1939년 가을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봄 마침내 만주국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동급생들이 민족과 이념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영웅’에 심취해서 만주국군관학교에 간 박정희는 모든 학과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주의 드넓은 황야를 말 타고 모래먼지 휘날리며 당당히 달리는 옛날 박 선생의 용자(勇姿)를 정말 너희들에게 보이고 싶구나”라고 썼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450여명의 졸업생 생도대표로 만주국 황제 공종(恭宗) 부의(溥儀)에게 황금시계를 받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답사를 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櫻]처럼 장렬하게 죽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선서도 했다. 한국 민족주의자의 시각으로 볼 때 박정희는 민족운동이나 항일투쟁의 대의(大義)에 헌신하기는커녕, 일제 식민지 정책의 영속화를 위해 젊은 날을 바친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는 군인으로서 대성공의 길로 들어섰다. 군관학교 수석졸업은 일본 제국의 최우수 군인임을 보증하는 신분증명서이자 엘리트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었음을 공증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란 이름도 이때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바꾸었다. 1942년 10월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특전을 받아 육사교육을 이수했다. 이때 다시 완전한 일본식 이름으로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개명한다. 일본 육사에서도 박정희는 3등을 차지했다. 대구사범학교 때의 성적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정희의 만주국군 복무 시절에 대해 일본인 동료는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는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라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제8여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關東軍)의 주요 임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를 토벌하는 작전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장교로서의 전력(前歷)은 분명 한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로서는 대단한 아킬레스건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그의 지지자들은 당시의 항일유격대 토벌작전을 공비(共匪)를 소탕하는 작전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은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집단을 공비라고 몰아붙였다는 사실에서 그런 은폐노력은 벽에 부딪친다.
1945년 만주 주둔 관동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 이후에도 박정희는 조선인 장교들과 함께 내몽고 지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8월 17일에 일제가 항복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일제가 패망해 박정희로서는 하늘을 날던 새가 날개를 잃은 꼴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면서 출세를 도모하던 박정희로서는 그야말로 밑바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진공감에 빠졌으리라.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중국군에 투항한 뒤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북경에 있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지휘부를 찾아가 제3지대에 입대하고 중대장 지위까지 부여받았다. 광복군으로의 합류는 무사귀국을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免罪符)를 노린 기회주의적 변신과정이었다.
위기에 몰렸을 때 극적 변신을 연출하는 박정희의 모습은 해방 이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한번 나타났다. 1946년 9월 24일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으며, 얼마 후 국방경비대 장교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6년에 걸친 만주와 북중국지역에서의 생활을 청산한 뒤 그의 생애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 시절의 망령을 힘겹게 떨군 것이다.
박정희가 그때까지 살아온 경로라든가 삶의 경향을 볼 때 해방 후 그가 좌익에 합류했다는 것은 뜻밖이다. 다만 박정희에게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을 것 같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정세는 매우 불확실했다. 구한말 이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새롭고 강력한 이념으로 지식인에게 호소력이 강했다. 게다가 정치정세도 불확실한 터에 경제적 빈곤과 불평등 상태는 공산주의에 끌리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남한에서 새로운 강자는 미국이었으나 정치사회적 동향은 대체로 좌파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념이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이 어려운 시대였다.
고향에 돌아온 박정희는 1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서의 경력은 장애가 되었다. 가족조차 그를 냉대했다. 박정희의 형들은 그에게 그냥 교사 자리를 지켰으면 좋았을 텐데 고집대로 했다가 이렇게 거지꼴이 되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박정희를 누구보다 아껴주던 박상희도 박정희에게 냉랭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1946년 9월 박정희는 결국 군대에 투신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박정희의 진술에 따르면 존경하던 형 박상희가 1946년 10월 대구폭동으로 죽자 바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때 남한은 부패하고 혼란하여 민족통일을 이룰 수 없고 북한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가지만 해도 남북이 분단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는 어느 쪽의 헤게모니에 의해 통합될 것인가 여부였다. 박상희의 죽음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박정희가 좌익을 선택한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군대에도 이미 다수의 좌익이 포진한 상태였다.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최남근(崔南根)은 그때 군대 내 좌익의 핵심인물이었다. 당시 군대 내 좌파는 30%에 달했다. 사관학교 3기생의 80%가 좌파였고, 전군의 10%가 숙군(肅軍) 과정에서 좌익경력으로 축출될 정도였다.
박정희는 곧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최고지위에 올랐다.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李在福)은 박상희와 친분이 있었고, 박정희는 그 다음 책임자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 박정희는 1947년 춘천의 제8연대에 근무하면서 연대장 원용덕(元容德)과 경비중대장 김점곤(金點坤)을 이재복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1947년 9월 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옮겨갔을때 네 명의 중대장 모두 남로당원이었다. 훗날 박정희가 체포된 뒤 그가 제공한 군내 남로당원 명단은 특히 사관학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여순반란사변(麗順叛亂事變) 뒤 시작된 숙군과정에서 체포된 뒤 즉시 전향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고, 대부분의 혐의자는 처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다. 만주국군 인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만주국군 선배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지휘관 출신이며 숙군관계수사의 총책임자였던 백선엽(白善燁)과 수사실무자였던 김점곤이 박정희를 보호했다.
수사관들은 박정희가 제시한 남로당 조직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질적 수사책임자였던 김창룡(金昌龍)조차 박정희의 구명을 소청했다. 박정희의 ‘밀고’로 검거된 남로당 관련자들은 2백여명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 대부분은 처형되었다. 자유당 정권 아래 정보국장을 지냈고 박정희의 만주국군 2기 후배인 강문봉(姜文奉)은 박정희가 “3천여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었다”라고 증언했다. 특히 박정희의 사관학교 중대장 시절의 동료들과 생도들이 집중적으로 희생되었고, 만주국군 2기 동기생 네 명도 처형되었다.
김창룡이 제시한 박정희의 구명조건은 실상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수사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갈 때 열 번만 박정희 소령을 앞세우고 동행한다. 만약 박 소령이 남로당 세포가 아니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열 번을 배신하게 만들면 그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전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김창룡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을 목전에서 지목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한때의 동지거나 친구였던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이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다. 이는 한 인간을 ‘거세(去勢)된 환관(宦官)’처럼 만드는 것이었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박정희가 친구나 부하들을 배신하여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후 박정희의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이념과 친구 또는 부하들을 함께 포기한 데는 남다른 대의(大義)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 몰리면 최악의 생존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 그것이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는 숙련된 기술자와 같았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생명을 구했지만 군에서 파면당하고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과장 백선엽은 박정희를 군내의 비공식적 자리에 근무하게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무원도 아니고 정식 고용문관도 아니었다. 한국 사회가 비공식적으로 허용했던 가장 작은 가능성에 박정희는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를 의탁했다.
충격을 받은 박정희의 어머니는 1949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도 그를 외면했다. 박정희는 이때 남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직위·친구·월급·여자·가족·영예 등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전력은 박정희의 미래까지 차압했다. 박정희의 육사 2기 동기이자 방첩부대 본부장이었던 한웅진(韓雄震)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들어 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다. 나한테 하소연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6·25동란은 민족적으로는 비극이었지만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서울이 점령되자 그는 한강을 건너 남하했고 곧 복직되었다. 전쟁 중에 결혼도 했다. 사상적 경력 때문에 견제받고 주변부에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그의 군대생활은 순조로웠다. 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던 만주국군 인맥의 선두주자이던 장도영(張都暎)·송요찬(宋堯讚)·백선엽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육사 2기생 중 가장 먼저 소장(少將)으로 진급했다. 1959년 7월 그는 서울지역을 관할하는 제6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
1950년대에 박정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과 현실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이 그 계기였다. 이승만(李承晩)은 당시 재선을 위해 대통령직선제를 원했고, 미국 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싶었다. 휴전회담에 반대하는 등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적 목표와 빗나가는 주장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부산에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하고자 했다. 한국군 지휘권을 장악한 미국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군 수뇌부에 반(反)이승만 쿠데타의 필요성을 암시했다. 군은 이승만의 지시를 거부하고 미국의 입장을 따랐으나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표명했다. 쿠데타 계획은 불발로 끝났지만,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의 이론적 준거와 실제상황에 대한 경험을 많이 했다. 또한 군대의 정치적 의미, 미국이 한국 정치에 행사하는 정치적 영향력과 수단, 방법 등 많은 것을 인식했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포기했고, 이승만 정권은 승리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이 사소한 충격에도 붕괴할 만큼 허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회만 생기면 군대가 언제든지 쿠데타를 일으킬 실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문민지배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발상의 전환 계기로 작용했다. 박정희가 보기에 정치권력은 이미 군대 가까이 와 있었다. 누가 그 권력을 낚아채느냐가 문제였다.
6·25동란이 종결된 이후 박정희의 생애는 순조로운 편이었지만 그의 한계도 분명해졌다. 사상적 편력 때문에 그는 군부의 최고 수뇌부에 진입할 수 없었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줄 정치적 배경도 없었다. 고위직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정부와의 관계도 없었다. 결국 만주국군 인맥 뿐이었는데, 중심부로의 진입에는 한계가 있어 언제나 주변부만 맴돌았다.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면 군사경력은 조만간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여세에 불과했다.
1960년 1월 20일 박정희는 부산 군수부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그날 자신을 사령관에 추천한 육군 군수참모부장 김웅수(金雄洙) 소장(少將)에게 “이거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나라 돌아가는 형편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해 초 박정희는 이미 김동하 해병대 제1사단장과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거사 예정일은 5월 8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이보다 앞서 위기 때마다 자신을 구해 주었던 장도영 제2군사령관에게 거사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으나, 장도영은 시기와 방법에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4·19민중혁명으로 기회를 놓친 박정희는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군 수뇌부의 부패상 등을 놓고 다시 한번 기회를 노렸다. 4·19민중혁명이란 태풍이 휘몰아친 뒤 박정희는 군대 내 영관급 장교의 리더로 부상하면서 군대 내 정군운동(整軍運動)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그는 자신의 오랜 정치적 후원자였던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미국 정부와 군 수뇌부는 박정희를 제거하고자 했다.
쿠데타는 이제 시간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쿠데타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든 음모와 계획이 정보기관에 포착되었고, 장면(張勉) 국무총리와 군 수뇌부에도 정보가 제공되었다. 미국은 군사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면은 미국의 후원을 오판했으며, 장도영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발판으로 군사 쿠데타를 이용하고자 했다.
박정희는 그때 장도영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었고, 박정희 역시 장도영을 쿠데타의 리더로 추대하겠다는 의사를 계속해서 밝혔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장도영은 장면 국무총리의 판단을 교란하고, 결정적 순간에 쿠데타 진압병력의 동원을 억제했다. 장면과 대립관계에 있던 윤보선(尹潽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면의 실각과 동시에 자신의 집권을 꾀하던 그는 쿠데타가 발발하자 재빨리 이를 추인하는 입장을 공개했다. 한편 국민들은 오랜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난 뒤 자유의 진공상태와 장면 정권의 무능, 정치적 혼란에 지쳐 있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는 정치적으로 완벽한 시기를 포착한 것이었다. 수많은 행운이 쿠데타의 성공을 도왔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60만 대군이 국방을 책임지는 나라에서 3천여명 정도의 부대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서울을 완전히 장악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선 지 불과 8개월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30여년의 군부통치시대가 열렸다.
20세기 후반의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 성취한 가장 중요한 것을 손꼽는다면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 분단된 형태로나마 국민국가를 건설한 것, 그리고 선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화의 이중과제를 달성한 것이었다. 한국이 산업화와 국민경제 수립에 성공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동시대의 비용과 고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정치적 억압과 반동, 냉전·분단체제의 극단적 상황에서 꽃을 피웠고, 과거창산 과제의 실종과 ‘더러운 전쟁(베트남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룩되었다. 또한 경제개발은 독재정권과 재벌의 공생관계 속에서 고도로 집중되고 불균형한, 독점적이고 파행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 집권기 18년을 뭉뚱그려 ‘개발독재시대’라고 하지만, 단일한 성격으로 일관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집권기는 대체로 ① 국가재건 시기(1961년~1963년) ② 조국 근대화 시기(1964년~1971년) ③ 국민총화(1972년~1979년)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국가재건 시기는 과도기적 군정(軍政) 시기로 헤게모니 체제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박정희 집권기는 민정이양 후의 조국 근대화와 국민총화 시기를 통해 유사성과 차별성이 있는 두 가지 유형의 개발독재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 집권기의 역사적 전개를 보는 관점이다. 박정희 집권기를 관통하는 기본축은 5·16 군사 쿠데타의 지향과 4·19민중혁명의 지향의 격돌이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냉전체제·반공주의→남북대결주의·국가주의 개발독재 지향과 탈냉전사상·반공주의→남북화해의 평화주의·민주화 민족적 지향의 대척인 것이다. 바로 그 갈등구조 속에서 경제성장의 과실이 생겼고, 이는 곧 쿠데타 정권의 수구적이며 반동적인 퇴행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에 내재된 반공국가주의·군국주의적 경향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강화되고, 마침내 전면화되는 길을 걸었다. 1960년대에는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고 베트남 전쟁에 가담하면서 그것이 표출되었으며, 이어서 1970년대에는 남북대결주의를 고조시키고 냉전·분단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어떤 체제든 그것이 역사적 현상인 한, 어떤 과정과 조건에서 출현했으며 어떻게 발전과 해체의 길을 걸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박정희의 경우 개발독재의 정신적 요람은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군 청년장교들의 파시스트적 쿠데타, 그리고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 등이었다. 박정희는 일본 천황제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를 내면화했고, 메이지유신의 일본이나 만주국을 한국 근대국가의 모델로 생각했다.
다음으로 개발독재의 사회적 정당성을 살펴보자. 식민지 정책과 전쟁과 가난을 뼈저리게 겪은 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의 가치 못지않게 가난으로부터의 해방과 민족주의적 요구가 절실했다. ‘조국 근대화’는 국민들의 이와 같은 열망을 담은 국정(國政) 지표였다. 4·19민중혁명 이후 민주화의 막간에 있었던 장면 정권은 4·19민중혁명의 당면과제들, 즉 경제건설 국가·사회관계의 안정·남북평화체제 수립 등에 무능력했으며, 대내외적으로 자율성의 결핍을 보인 허약한 체질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는 이와 같은 약체정부의 무능력과 무기력 속에서 출현했다.
6·25동란 이후 냉전체제·반공주의가 개발독재정치의 이념적 토양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정희 정권의 냉전·반공주의는 분명 6·25동란과 1950년대의 역사적 조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더욱 주목할 것은 5·16쿠데타 이후의 한·일 국교재개와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 남북대결주의의 고취를 통한 냉전·반공주의의 재구출과정, 그리고 지난날 전쟁의 공포의 기억과 레드 콤플렉스를 환기시키고 재활성화하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작용한 개발독재의 ‘기억의 잔치’와 권력을 위한 전략이다.
박정희의 사상구조는 일본 천황제 파시즘에 뿌리를 두지만 쿠데타 정권 초기에는 4·19민중혁명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적 요구 때문에 크게 제약되었으며, 그러한 압력 속에서 쿠데타의 정당성 확보에 급급했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좌익전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박정희는 6개 항의 ‘혁명공약’ 중 제1항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내세웠다. 실상 어떤 사상을 벗어던질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종래 자신이 가졌던 사상을 강하게 부정하기 마련이다. 자기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미국 정부는 박정희가 반공에 사활적 의미부여를 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분단현실에서 박정희의 철저한 반공은 필연적으로 ‘친미(親美)’와 유착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미국으로부터 쉽게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첫번째 요인은 이와 같은 철저한 반공주의였다. 미국 정보기관은 박정희 내면의 풍경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배신하고 전향한 그의 전력 때문에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한다면 그를 희생물 1호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공약 제2항은 UN헌장과 국제협약을 준수하고 미국 및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함, 제3항은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함, 제4항은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고 자주경제를 재건함, 제5항은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함, 제6항은 혁명공약의 성취 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함 등을 내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지막에 제시된 민정이양과 원대복귀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민정참가 계획→민정불참 선언→군정 4년 연장→군정연장 보류 등으로 갈팡질팡하면서, 1963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해서 제5대 대통령선거에 박정희를 대통령후보로 냄으로써 결국 군대로의 복귀는 접어버렸다. 박정희는 대통령선거 결과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15만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민정이양’을 했다.
박정희는 민정이양 과정에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면서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워커힐·파친코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구악을 일소하겠다던 군정의 도덕성은 이로써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주목할 점은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다. ‘한국적 민족주의’와 함께 박정희의 국가이념이 담긴 민족적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 후 1962년 3월에 발간한『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행정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에 의한 정치’를 유ㅜ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박정희는 이 개념을 이용해 군정을 민주주의의 일종으로 포장하려 했다.
박정희는 1963년 9월《국가와 혁명과 나》를 펴내 자신의 새로운 정치이념을 담아내려 했다. 얼핏 보기에 레닌의《국가와 혁명》, 히틀러의《나의 투쟁》을 연상시키는 이 책에서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를 동격으로 놓고 박정희 자신이 혁명을 통해서 나라를 개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한 그때까지의 전근대적 봉건사조와 사대적 의존성에서 벗어나 교도(敎導) 민주주의건 규범(規範) 민주주의건 한국적 체질과 애국이념에 맞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인식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 1963년의 대전유세 때부터였다.
박정희는 야당의 민주주의를 ‘허수아비 민주주의’, ‘껍데기 민주주의’, ‘사대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민족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민족적 자주적 주체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정리하면 박정희는 당시의 선거를 ‘박정희=군사반란세력=민족적 민주주의’, ‘구정치인=야당=서구민주주의=사대주의세력’이란 구도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민정(民政) 성립 이후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을 통해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라는 개발독재의 모델을 내놓는다.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1964년의 6·3항쟁에 박정희는 미국과 합동작전으로 비상계엄을 발동하여 이를 탄압했다. 하편, 당시의 역사적 과제이자 군사정권이 약속한 가난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할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5·16쿠데타 정권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 지행은 탈각(脫殼)과 퇴색을 가져왔다.
그러면 1960년대 중엽 개발독재 모델의 출현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 대통령선거에서의 승리 후 박정희는 여전히 취약한 정당성의 안정적 확보와 정권유지를 위해 국정의 최우선 목표를 “잘 살아보세”로 요약되는 ‘조국근대화’로 조정하면서 이를 위해 대내외 정책 전반을 수정·보완했다.
박정희는 이 시기를 통해 종전의 미국과의 거리 두기 정책에서 벗어나 미국의 동북아지역 반공통합전략에 부응하여 이를 활용하면서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방향성 속에서 한일국교 재개를 타결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 경제 도약의 대외적 조건인 두 개의 트라이앵글, 즉 한·미·일과 한·미·월 관련기제를 작동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냉전·반공주의가 공세적으로 재편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관계 또한 ‘강력한 국가 대 약한 사회’로 재편되었다. 여기에 ‘지도 받는 자본주의’ 노선의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과 수정, 전후 일본 경제정책의 수용, 미국 정책권고의 선별적 수용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수입대체 정책과 수출지향-대체정책이 병행·발전하면서 결합되는 한국 특유의 ‘복선형 산업정책’이 발전했다. 그런 과정에서 국가-재벌-은행의 발전 파트너십과 노동의 억압적 배제를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형의 집단적 또는 공동체주의적 자본주의제도와 소유형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1960년대의 개발모델은 1970년대와는 매우 달랐다. 산업정책은 비교적 유연했고, 금융과 외환분야에서 시장유도는 덜 경직적이었으며, 노동정책도 1950년대의 연장선에서 파업권을 보장하는 단결권 법인(法認)정책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는 공기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이라는 위기상황을 넘기면서 박정희는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재선 후 독재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스스로 파탄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신민당은 김대중(金大中)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여 분격적 선거전에 들어갔고, 이 무렵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의 당선 저지운동을 벌였다. 야당후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이 종신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면서 1970년의 선거가 공개적 대통령선거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공세를 취했다. 결국 박정희는 고전한 끝에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지속적인 국제수지 악화, 경기침체 등으로 수세에 몰렸다.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이던 전태일(全泰壹)이 분신하고, 이듬해인 1971년 경기도 광주단지(현재의 성남시)의 주민폭동을 비롯해서 도시빈민들의 생존을 건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정권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선거 결과 김대중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43.6%의 득표율을 보인 데다가, 그 해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의 의석이 종전의 44석에서 89석으로 두 배 이상 뛰어오름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앞날을 어둡게 했다.
국내정세는 이제 ‘4선 개헌’을 통한 정권연장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미·소 화해와 미·중 화해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종래와 같은 냉전논리를 기반으로 한 안보 이데올로기로는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또한 적십자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박정희 정권 성립 이후 계속 주장된 ‘선건설 후통일론’은 고수하기가 힘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정권유지의 수단인 국가보안법이나 정보기관 등의 존속이유가 점점 더 희박해져 박정희 정권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 적십자예비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1971년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2월 27일에는 야당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변칙통과시켰다. 옥외집회 및 시위규제권, 촐판규제권, 단체교섭규제권, 예산변경권 등 광범위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맡기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소급해서 합법화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박정희의 독재와 파행적 특권경제에 대한 저항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이제 개발실적에 의해 권위주의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담론은 한계에 봉착하고 더는 국민통합의 담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이 위협적 경쟁자로 등장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미국과 중국 간에 수교가 이루어졌다. 반공을 국정의 이념으로 활용한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일대 충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실현하는 대신, 남북대화를 냉전·반공체제의 구축에 활용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 구축의 기회로 활용하는 정략적 길을 선택했다.
탈냉전의 화해와 평화의 신질서를 향해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박정희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국민총화’와 ‘총력안보’를 강제하는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제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개인의 인권과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강권적 독재의 기제(機制)로 타락했다.
국민총화시기의 개발독재는 한마디로 냉전·분단체제를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격화하는 분단 활용형 독재로 치달았다. 남북대결주의는 이 시기에 이르러 전면화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적 뿌리였던 국가민족주의·군국주의적 경향이 쇄도하면서 남북대결적 냉전·반공주의가 이와 결합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된 경제개발 모델은 1960년대 모델의 복선형 산업정책과 집단적·협력자본주의적 제도형태의 강점을 계승하는 측면도 있지만, 특수한 안보적 동기에 유도됨으로써 그와 단절되거나 문제점을 증폭시키는 매우 파행적인 성격을 띠었다. 1970년대 경제개발정책과 체제는 독재정권과 독점재벌의 지배블록 구축, 이들에 대한 돌진적 동원주의와 속도주의, 계층간·지역간·산업간, 나아가 국민경제 전반에 걸쳐 고도로 불균형적이고 집중·집권적이며 불안정한 파행구조를 배태한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독재권력의 주도 아래 ‘경제개발=산업화’를 최우선으로 삼고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통제하는 국가주의적 산업화의 수동혁명체제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체제는 국가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의 패권국 따라잡기 모델이라는 점에서 비스마르크의 독일, 메이지시대의 일본을 전형으로 하는 후발 개발독재 유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모든 대학을 휴교시키고 신문과 통신에 사전검열제를 실시했다. 뒤이어 유신헌법을 만들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단독 출마한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헌법은 노동3권에 대한 제약을 제도화하고 긴급조치권을 두었다. 또한 구속적부심제를 폐지하고 자백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등 기본권을 크게 제약했다. 입법부는 국정감사권을 없애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출했다. 사법부와 관련하여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소유하게 했으며, 대법원의 위헌판결권을 헌법위원회에 귀속시켜 그 독립성을 박탈했다.
대통령의 권한은 일방적으로 비대해져 대통령이 3권을 거의 장악한 데다가, 선출 자체도 국민의 직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을 통해서 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장하고, 중임제 조항이 없어짐으로써 실질적으로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독재와 영구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친일적 정권이 친일파를 숙청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정치·사회·문화적 민주주의도 진전시킬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건설에 주력한다고 했지만, 민주적 경제체제가 아닌 재벌중심의 경제체제였다. 또한 7·4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는 듯했으나, 기실 정권안보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음에 지나지 않았다.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남북회담은 별 진전이 없다가 1973년 8월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사건을 계기로 북한이 일방적으로 회담중단을 발표해 버렸다. 그 후 유신체제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장준하(張俊河)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헌법 개정 100만명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부정·비방·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여 장준하 등을 구속했다. 그러나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더욱 거세게 타올라 독재정치는 마지막 고빗길에 접어들었다.
유신헌법에 의해 임기 6년을 끝낸 박정희는 1978년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종신집권체제를 굳히는 듯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1979년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났다. 이어서 신민당 당수 김영삼(金泳三) 총재의 국회의원직 박탈파동에 이어 부산·마산 지방에서 민중항쟁이 잇따라 발생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金載圭)가 청와대 근처의 한 ‘안전가옥’에서 박정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10·26총격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의 18년에 걸친 군사독재정권도 이로써 무너져 내려앉았다.
개발독재는 한국의 근대화시대를 집약하는 핵심어이며 박정희 집권기 18년을 꿰뚫는 키워드다. 한국의 개발독재 모델은 기적과 위험, 근대화와 반(反)근대화, 심지어 역(逆)근대화의 모순적 혼합물이다. 여기서 박정희 모델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것은 냉전·분단상황을 국민동원과 독재정권 유지에 적극 활용한 준(準)전시 개발독재 모델이다.
유신 개발독재체제는 남북화해와 평화체제 수립의 기회를 저버리고 같은 민족인 북한을 적으로 삼고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른바 적에 의존하면서 적을 닮아가는 대결체제이자 역사적 기회를 영구집권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정치적 반동체제였다. 한·일국교회복과 베트남 전쟁의 참전 또한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과 기억에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낳고, 한국 모더니티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야만의 문자를 새겨 넣은 부끄러운 사건이다.
박정희 통치체제는 고도의 집권·집중형의 불균형 개발체제다. 국가·재벌·은행의 한국형 밀착체제는 산업화의 성공을 낳은 협력적 제도형태로도 기능했다. 그러나 지배 엘리트 사이의 보수적 공생과 유착을 낳고, 국민들을 내부자와 외부자 등 ‘두 국민’으로 갈라놓는 특권과 집중의 경제, 선성장 후분배 경제로서 정치·경제·제도적 후유증을 낳았다. 1987년 이후 민주화시대를 파행으로 몰아간 서울공화국과 동서분단의 지역주의 병폐 또한 특권·집중형 개발체제의 중요 구성인자다.
박정희 통치체제는 선성장 후안정의 위험축적 난개발 모델이다. 이 체제의 기본덕목은 결과적 실적주의, 외형팽창의 방만한 거대주의, ‘빨리 빨리’의 속도효율주의였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 내실보다 외형, 안전이 아니라 속도를 중시했다. 안전불감증의 돌진적 성장제일주의와 난개발의 이면에서 부실과 위험은 쌓여갔다. 양적 성장의 비용은 질적 발전의 저하로, 생활세계와 생태계의 고위험으로 전가되고 미래로 이전되어, 1997년 외환사변(外換事變)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된다.
박정희를 평가할 때면 흔히 경제적으로는 후한 점수를 주는 전문가나 국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저지른 정치적 과오는 경제적 성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컸다. 박정희 정권은 사상 유례가 없는 권위주의 군사독재 정권으로서 한국 사회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현대성을 일관되게 냉소하고 능멸하는 정치적 패륜을 저질렀으며, 30년 군사정치의 원죄(原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박정희는 위험수위에 달한 민중적 저항을 물리력을 동원하여 돌파하였다. 그 과정에서 3회에 걸쳐 계엄을 선포했으며, 그 기간이 31개월에 달한다. 또 집권기간 동안 3회나 위수령을 발동하였으며, 그 기간이 5개월이다. 그 밖에도 각종 비상조치를 발동한 것이 9건으로 69개월에 이른다. 이들 비정상적 기간을 합치면 105개월로 220개월에 걸친 박정희 집권기간의 절반을 차지한다. 박정희 정권 그 자체가 5·16 군사 쿠데타에 따른 비상계엄에서 시작하여 1979년 위수령으로 마감된 것만 봐도 박정희의 삶이 얼마나 굴절 많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 모든 비정상이 부메랑이 되어 평범한 국민들에게로 되돌아온 것에 박정희의 과(過)의 총화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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