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헨리 나우웬의 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참 많은 위안과 도움을
제시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깊은 인간의 내면의 고통에 대한 통찰은 내면의 고통으로 혼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나우웬의 글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
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막연하게 그려지는 것들이 있고, 뼈대는 인식이 되지만 다양한 살들은 잘 이해되
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쨌든 나에게 많은 위안과 도움을 주는 저자이다.
나우웬은 4장의 글을 현시대의 사역이 통과해야 할 네 가지 문으로 이해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1장은
세상의 상태, 2장은 시대의 상태, 3장은 개인의 상태, 4장은 사역자의 상태 모두는 각각 고통받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사역자는 이 네 가지의 문을 모두 통과해야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상태는 한 마디로 단절된 핵인간의 상태이다. 과학기술의 문명이 인간의 손에서 나왔지만 인간
을 파멸시킬 실제적인 위협으로 등장하고 불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을 살게 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시
대 속에서 단절을 경험하게 되는 데, 첫 번째 단절의 경험은 역사적인 단절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역사의식 속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역사와 단절된 개인만을 생각하는 세대가 되었
다. 미래가 불확실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단지 ‘지금 여기에’라는 것만을 중시하게된다. 두 번째는 사람들
사이에 보편적인 사상에 대한 신념이 사라지고 단편화된 지식만이 파편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상호관계
가 설정되지 않고 단편적인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입니
다. 과거에 사람들이 가졌던 불멸의식이 사라져가고 현대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 생각이 되어버리
고 있다. 자손을 통한 업적의 전수나 또는 종교적이 내세관념이 더 이상 중요한 관념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으므로 생의 창조적인 사역이 불가능하게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
력은 우선 신비주의적인 내적 초월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방법은 제3의 선택으로 사회적인 혁명과 내적인 회심을 동시적으로 추
구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번째의 문은 고통받는 시대의 문이다. 이 시대는 내향적인 세대,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 강박적인 세
대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성향을 보이고 있
다. 외부 세계에 대한 절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도록 만
들고 있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흐를 위험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권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나 제도, 전통의 권위를 거부하고 또래집단에서 더 많은 영
향력은 받는 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에서 오는 죄의식보다는 또래집단의
불순응에서 오는 수치심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강박적인 경향
을 나타내는 데, 내적인 불만이 외적으로, 충동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태도가 이러한 충동적인 경향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우웬은 이에 대하여 사역자가 가져야할 태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잘 묘사하여 듣는 이들에게 공감과 소망과 위로
를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사역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전
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향한 애정과 용서의 마음
이 있어야 한다.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에 실패할 수 있다. 셋째는 묵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줄
알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표면적인 것에 반응하기 전에 그 배후에 있는 실재를 볼 수 있는 비평적
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어야한다. 강박적인 세대의 충동적인 행동의 배후의 실재를 다루고 비평해 줄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한다.
세 번째 문은 개인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인간적인 단절을 경험하고 좌절한 한 개인의
상태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해리슨씨라는 사람은 위험한 수술을 앞두고 있는 환자이다. 수술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스러운 상황이며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상처 속에서 개인적인 극도의 외로움
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그에게 처절한 좌절을 느끼도록 하고 있다. 이때 존이라는 경험적인 사제가 다가
와서 대화하는 상황으로 설정이 이루어진다. 해리슨씨가 처한 상황은 우선 병원이라는 비인격적인 상황
이다.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낯설고 기계적인 대접을 받는 상황
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어서 내세에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불안해 하고
있다. 내세에 대한 보장을 전혀 확신할 수 없고 죄의식만을 가지고 자신이 처하게 될 두려운 위치에 불안
을 느끼는 것이다. 또, 그는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회복 후에 그가 돌아가야
할 상황은 고된 노동과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일터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런 소망과 위안의 근거가 없는 상황에 해리슨씨가 놓여 있는 것이다. 나우웬은 해리슨
씨를 현대인에 대한 극명한 예로 제시한 것 같다. 비인격적인 상황에서 살고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내
세에 대한 소망이 없고 현재의 삶에서도 아무런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많은 현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 사실 현대인 전체를 지칭한다고 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고 소망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나우웬은 해리슨씨를 인도하는 방법으로 인격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과 삶에서와 또 죽음을 넘어서
는 기다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비인격적인 상황에서 그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여 주고 그에게 관
심을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주는 태도가 대단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소망을 주는 태도
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살아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의 유일한 존재로서 단 한 사람으로서
있어 주겠다는 표시 더 나아가서는 죽음을 넘어서서 기다려주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불어놓어주어야 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강한 결속의 메시지를 주
어서 그로 하여금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합니다. 해리슨씨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거
절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 죽음을 넘어서서 기다리겠다는 강한 결속의 의지를 표명하여 주는 것은 해리
슨씨에게 강한 용기와 소망을 주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나우웬은 고통받고 있는 누군가를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의 고통에 인격적으로 동참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
고 있다.
기독교 리더쉽의 원칙 세가지는 우선은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상대의 삶
에 참여하고 그와 함께 희노애락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 필요하며 이과정에서 오는 상처와 파멸까지라
고 각오는 위험수반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 참여하며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그를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겨 줄 수 있는 태도가 기독교 리더쉽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과
관계하고 있을 때 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사람의 소외와 혼란을 이
해하고, 느끼고, 명료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온 사람은 분명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대답할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기쁨의 근원은 모든 사람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 지도자는 실제로, 가장 개인적인 관심사를 담대하게 표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예술가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절망과 죽음에 직면해서도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간직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존재
하는 세계와 삶에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발견하게끔 하는 사람이
다. 삶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새로움과 의미와 아름다움
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누리며 그것을 제시하여주는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이다.
세 번째는 기독교 지도자는 소망의 사람이어야한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에 기초한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한 초월적인 소망을 지녀야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
들고 가나안으로 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는 소망을 가지고 현실과 상황을 뛰어넘는 죽음
까지도 초월하는 소망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들이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은 소망으
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소망으로 사는 사람은 소망의 본질이 기본적으로 현실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현
실의 결과물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소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안전한 장소를 떠나 알려지지 않고 두려운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의 문은 고통받는 사역자의 문이다. 사역자는 인간의 실존에서 오는 개인적인 외로움에다가 직
업적인 상황에서 오는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갖는 개인적인 외로움은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지는 많은 유혹들에 넘어가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외로움은 인간의 현실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이를 쉽사리 없애려는 노력은 오히려 세상에거 상처와 고통을 수반하게 하는 어려움을
낳게 한다.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사역자가 외부로 밀려나는 듯한 상황을 자주 직면하게 된다. 이를 극복
하는 치유하는 사역자는 먼저 환대를 통한 사역을 해야한다. 다른 사람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배
려해주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대에게 집중해야 한다. 상대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세계
로 깊이 들어가서 자신을 정리하여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정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순수히
깊이 다루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게 될 때,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인한
결속이 형성되게 된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고통이나 갈등 등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릇된 가정에
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그릇된 가정은 바로 완전성에 대한 가정이다.
고통이나 혼란 갈등, 문제가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간은
갈등과 혼란, 고통, 상처없이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이 직시해야할 인간의 실존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망의 표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구원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와 세계의 현
실을 넘어서는 구원이 있기에 ‘저 너머의’ 세계가 있기에 오늘의 상처와 고통은 그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
완전함을 기대하게 하기에 소망의 표시가 된다. 구원은 바로 고통의 자리에서 시작되고 오늘 이루어지
는 것이다. 구원은 손에 주어지는 실제로 현실 속에서 경험되기 보다는 약속으로 소망으로 주어지는 것
이고 그러할 때 실제로도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