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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승리의 조건' 국민경선, '묻지마'로 하면 '패배의 조건'
[기고] 과거 사례로 본 민주당의 바람직한 국민경선 방법
양민호 전 청와대 비서관(프레시안 4월 29일 퍼옴)
문성근 민주통합당 대표 권한대행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5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국민경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근 대선 참여 의사를 밝힌 새누리당의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100% 국민경선을 주장하고 나서 박근혜 측과 경선규칙을 둘러싸고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민참여경선 비율이나 그 참여자의 수가 아니라, 그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의 의사를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국민경선 방식이 문제이다.국민참여경선은 2001년 새천년민주당의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이 공천권을 당원이나 당 총재로부터 국민들에게 되돌려주는 민주적인 공천 방식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그 결과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부터 부분적으로 국민경선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하여 이것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이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각 정당이 일정 부분 국민경선 제도를 도입하거나 이에 대한 대체수단으로 여론조사를 병행 실시하고 있다.그러나 동원 경선의 폐해를 전혀 고려치 않은 '묻지마'식 국민참여경선은 국민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 결국 선거에서 패배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7년 대통합신당의 대선 경선(후보 정동영)과 2012년 민주통합당의 19대 총선 경선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따라서 국민경선 결과가 국민 여론과 배치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여론조사를 일정 부문 반영하던가, 혹은 지역별 연령별로 인구수에 따라 선거인단을 조정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제도이다.원래 국민경선 제도는 미국에서 오래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오픈 프라이머리'라는 예비경선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오픈 프라이머리'라는 제도는 법적으로 각 국민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공적기관에 등록하여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공직선거 후보자를 직접 선출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동원 경선의 폐해도 없고, 해당 정당의 지지자들이 자연스럽게 민주적으로 후보자를 선출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법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동원 경선의 폐단 우려가 높고 심지어 반대당의 지지자들이 역선택을 할 수 있는 개연성도 매우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2000년 이후 여야 각 당의 대선이나 총선 결과를 보면 각 정당이 국민경선을 얼마나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했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1. 최초의 국민경선 성공 모델 : 노무현 모델(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우리나라 정당사상 국민경선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2002년에 실시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다. 비록 100%가 아닌 50% 국민참여경선이었지만 당시로써는 국민들에게 매우 참신하고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회창 대세론에 안주해 있던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특히 돋보였다. 그리고 경선 결과 당초 국회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이인제 후보가 낙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노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당시 민주당이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게 된 계기는 2001년 하반기 민주당이 처한 위기에서 출발했다. 그 당시 김대중 정부의 실정 등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민주당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당에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이하 쇄신특위)가 구성되어 조세형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다.쇄신특위는 1개월 남짓 활동기간 동안 250명에 이르는 당내 주요 인사와의 개별 면담과 당내 워크숍 토론, 두 차레의 대외 청문회와 국민대토론회, 그리고 21차례의 전체 회의와 170여 시간에 이르는 토론을 통하여 민주적 방식으로 쇄신안을 작성하였고 12월 19일 당무회의를 통과하여 쇄신안이 확정되었다.쇄신안 중 대선 후보 경선 룰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그 주요 내용은 쇄신파의 요구를 반영하여 일반 국민 50%의 참여가 보장되었고 대의원이나 선거인단 구성을 지역별 인구 비례로 하여 전국정당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7명의 후보자가 나온 점을 고려해 고심 끝에 호주 총선에서 도입하고 있는 '선호투표제'를 도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결선투표제 효과를 보도록 했다. 선거 레이스 도중 7명의 후보 중 5명이 중도 포기하여 선호투표제 도입이 결선투표 효과를 본 것은 아니지만, 선호투표제라는 외국의 좋은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대선 경선 레이스는 울산을 시작으로 16개 시도별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초반부터 득표율이 낮은 후보가 하나씩 사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가 광주 경선에서 일반인의 예상을 뒤엎고 1등을 차지함으로써 경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에 당황한 이인제 후보 측은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맞대응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대세가 기울자 중간에 사퇴하고 말았다. 2002년 4월 30일 치러진 마지막 서울 경선대회까지 참가한 사람은 노무현 후보와 정동영 후보 두 사람뿐이었다.경선 결과 이회창 대세론이 흔들리며 노무현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 후보가 결국 16대 대선에서 최후 승자가 된 것이다.
2. 최악의 '묻지마' 식 동원 경선 모델 : 정동영 모델(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은 신청자 모두 투표에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되었는데 여론조사에서 앞서던 손학규 후보 측은 여론조사를 50% 반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었다. 결국 정동영 후보 측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여론조사를 10% 반영기로 했다. 5년 전처럼 시도별FH(Fay-Herriot, FH 모형 : 지역효과를 랜덤효과로 사용하여 지역에 따른 효과를 반영하고자 한 모형) 순차적으로 투표가 진행되었지만 경선 룰을 둘러싼 이의제기 등으로 경선 과정에서 파행을 거듭했으며, 특히 호남 이외의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게다가 2002년도처럼 선호투표제를 도입하지 않아 레이스 도중 한명숙 후보와 유시민 후보는 이해찬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2007년 9월 15일 시작된 대통합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에는 16개 시·도 오프라인 선거인단 168만840명 중 27만2123명이 투표에 참여, 16.2%의 투표율을 보였다. 정당 사상 처음 도입된 휴대전화 투표에는 24만여 명이 선거인단에 등록한 가운데 17만7800여 명이 투표에 참여해 약 74%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 불법선거 공방과 유권자의 낮은 관심으로 위기를 겪던 신당 경선의 흥행을 높이는 데 다소 기여했다
또한 표에서 보듯이 시도별 선거인단 수를 살펴보면 실제 인구수와 선거참여인 수가 크게 불일치한다. 경선에서 승리한 정동영 후보의 득표수는 그가 현장투표에서 얻은 득표수의 28.6%를 그의 출신 지역인 전북 지역에서 얻었다. 결국 전국적으로 보아 정동영 후보가 지역 투표에서 얻은 표의 절반 이상이 전북지역 출신 유권자들로부터 왔다고 추론해도 틀리지 않는다.충북 지역의 경우 손학규 후보와 정동영 후보 간의 격차가 3400표였었는데. 3200표가 한 개 의원 선거구에서 벌어졌다. 94%가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한 개 의원 선거 지역구는 충주와 청주 인구의 5분의 1도 안 되는데, 그 충북 전체 투표자 중에 40%를 차지해 버렸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정상적인 결과이고 이와 같은 동원 선거가, 경선이 민심과 괴리되고 왜곡시켜 버리는 이러한 단편적인 얘기이다. 그 밖에도 선거인단 부분들이 누락이 된다든가, 또 선거관리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대의원과 당원 투표 합계 50%에다가 국민경선 30%, 여론조사 20%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일반 국민들의 의사를 50% 반영한 것이다.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이명박 후보의 낙승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432표 차로 승리했고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2884표를 승리하여 2452표(1.5%)라는 근소한 표차로 승리했다. 결국 여론조사가 승패를 가른 셈이 되었다.한나라당의 경우는 국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명박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한 반면 대통합신당의 경우는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손학규 후보 대신 정동영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도 여론조사 조작 시비 등 많은 문제점이 노정되었으나 '묻지마' 식 동원 국민경선을 도입한 대통합신당 경선에 비해서는 나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선 결과 대통합신당은 참패했다.
3. 최초의 정당과 시민후보 간 성공적 국민경선 모델 : 박원순 모델(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2011년 10월 3일 시민후보 박원순과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의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경선이 이루어졌다. 양측의 합의에 따라 여론조사 30%, TV토론 후 배심원 평가 선거인단 30%, 국민경선 40%로 경선이 치러졌다. 국민경선은 당원이나 비당원을 불문하고 신청자 중 연령 보정(40세 미만과 이상으로 구분하여 인구비례에 의거하여 선거인단 추첨) 후 현장 투표를 실시했으며 약 6만 명의 신청자 중 3만 명이 선거인단 선정되었다. 선거인단 선정은 50대에서는 평균 3~4대 1이었으나 20대는 신청자 1대 1이 조금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현장 투표의 경우 조직표에서 우세한 것으로 평가받는 민주당은 오전에 중·장년층 당원 중심의 유권자들이 대거 몰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오후에 접어들면서부터 20·30대 및 유모차를 끈 가족 단위 유권자가 늘어나면서 젊은 층에서 비교우위인 것으로 알려진 박원순 후보 측이 대거 현장투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박원순 후보는 현장투표의 열세를 크게 만회할 수 있었다.경선 결과, 박원순 후보가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누르고 야권 단일 후보로 확정됐다. 박원순 후보는 경선 결과, 최종 득표율 52.15%를 기록, 45.57%를 얻은 박영선 후보를 크게 앞섰다. 이에 앞서 9월 30일 공개된 배심원단 평가에서도 박원순 후보는 54.4%의 지지로 박영선 후보(44.1%)에 10.3% 포인트 앞선 바 있다. 최종 집계 결과 박원순 후보는 여론조사(57.65%)에서 박영선 후보(39.70%)를 17.95% 포인트 차이로 크게 앞서면서 현장투표로 실시된 국민참여경선의 열세(46.31% 대 51.08%)를 만회하면서 1위를 차지했다.
4. 전면적인 모바일 투표 국민경선 성공 모델 : 한명숙 모델(2012년 민주당 대표 경선)2012년 1월 실시된 민주당 지도부 선출은 대의원 30%, 국민참여경선 70%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국민참여경선은 신청자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되 모바일 투표는 연령 보정(40세 전후 구분), 현장 투표는 지역 보정을 실시했다. 우리나라 정당 선거사상 최초로 전면적인 모바일 투표 실시한 점이 특징이다.모바일 투표 도입 등으로 8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참여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은 거두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당의 대의원 투표 결과가 경선 결과를 좌우했다. 대의원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한 이인영 후보가 최종 집계에서는 5위로 밀리고 대신 박지원 후보가 4위로 올라선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반면, 국민참여경선에서 6위를 차지한 이학영 후보는 대의원 투표에서 7위를 차지하여 최종 집계에서도 김부겸 후보에게 6위 자리를 내주고 최고위원 선거에서 낙선했다.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당이나 후보 측에서 엄청나게 많은 비용을 지출했으나 지도부 경선 결과에는 아무런 플러스 효과를 미치지 못하는 한계 노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5.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2012년 민주당 총선 경선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는 기회 있을 때마다 19대 국회의원 공천권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며 국민경선 방식의 공천을 원칙으로 천명했다.그러나 당 공천심사위원회가 사전 심사를 통해 경선 없는 단수 공천지역을 서둘러 발표하거나, 무리하게 경선 참여자를 제한함으로써 여기에서 탈락한 많은 예비후보자들의 반발을 샀다.결국, 민주통합당은 단수 공천 지역구를 제외하고 지역구별로 후보자를 2~4인 선별하여 100% 국민참여경선으로 공천 후보자를 선출했다. 다만, 국민경선 참여자가 인구수에 비해 일정 비율 이하일 경우에는 여론조사를 병행 실시했다.경선 결과를 총평하면,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크게 앞선 후보가 지지도가 훨씬 낮은 지역위원장에게 패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지역위원장이 국민참여경선에서 떨어진 사례는 전국적으로 열 군데가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후보들 간의 동원 경쟁으로 많은 지역에서 부작용이 속출했고 급기야 광주 동구에서는 동원 경선에 참여한 전직 공무원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국민들로부터 더욱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결국 민주당의 19대 국민참여경선을 통한 공천은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묻지마' 동원 경선으로 전락하여 총선 참패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반면에 여당인 새누리당은 거의 대부분의 지역구 공천자를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선정하고 후보자간 경선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공천 심사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대체적인 평가는 민주통합당보다 새누리당에 더 우호적이었다.6.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방식 검토사항민주통합당 당헌을 보면 대선 후보는 국민경선 혹은 국민참여경선을 원칙으로 하며 구체적인 방안은 당규로 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국민경선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이다.하지만 국민경선 방식을 어떻게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대선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별로 선거인단 수를 조정하는 등 국민경선을 성공리에 치른 2002년 대선 경선 방식과 '묻지마' 식 동원 경선으로 대실패로 끝난 2007년 대선 경선 방식을 비교하여 이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우선 박원순 모델에 따라 여론조사 30%, 배심원단 투표 30%, 국민경선 40% 방식을 적극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보자 간 합의에 따라 그 비율은 조정할 수 있다.여기에다가 수정 보완할 부분은 노무현 방식대로 시도별로 순차투표를 실시하여 경선 분위기를 띄울 필요가 있고 국민참여경선의 경우, 참여자의 거주지를 확인하여 지역별, 연령별로 선거인단 수를 정하고 추첨 선정하여 모바일 투표와 현장투표 병행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선투표 효과를 가져오는 선호투표제 도입은 기술적인 문제 해결 후 도입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