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ner Link |
오리지널과 리메이크의 차이 - 아우라 |
|
알랭 들롱 태양은 가득히 죽은 시인의 사회 제라르 드파르뒤에 테오도어 드라이저 아돌프 히틀러 찰스 다윈 |
얼마 전 우연히 두 편의 영화를 비슷한 시간차를 두고 보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 안주인 마님이 대여 비디오를 반납하러 비디오 숍에 갔다가 빌려온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1999)였고, 다른 하나는 TV에서 방영해준 <가타카>였다. 잘 알려진 대로 <리플리>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원작의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1960)를 리메이크한 필름이다. 나는 워낙 <태양은 가득히>를 좋아하는 축이라 <리플리>를 통해 망가지는 <태양은 가득히>가 싫어서 안주인에게 화까지 냈는데(저만 안 보면 그만이지 왜 화를 냈을까) 결론은 역시 화날 만 했다. 만약 우리 안주인님이 알랭 들롱이 주인공을 맡았던 <태양은 가득히>를 보고, 이 영화 <리플리>를 보았다면 나처럼 화가 나지 않았을까. 할리우드는 이렇게 외국 영화들을 자기들 식으로 리메이크하는 데 익숙하다. 일설에는 자막 나오는 영화를 보기 싫어하는 미국 관객의 취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는데, 가령 안느 빠릴로 주연의 <니키타 Nikita>(1990), 제라르 드파르뒤에 주연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The Return of Martin Guerre>(1982) 같은 영화들이 브리짓 폰다의 <니나 Point of No Return>(1993), 리차드 기어의 <서머스비 Sommersby>(1993)로 탈바꿈한다. 그냥 외피만 달라졌다면 원작의 아우라(Aura)를 어느 정도 변질시키는 정도(성공한다면 새로운 아우라를 창조해냈겠지만)에서 그쳤겠지만 원작 소설이 있거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결말까지 바꾸어 놓는 거의 훼손 상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
|
미래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DNA 염기 배열이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회사 <가타카>를 출입하기 위해 본인 확인을 하려면 매일 약간양의 혈액을 엄지 손가락으로부터 뽑아내야 한다. 빈센트 프리먼은 오늘날 우리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신의 아이들'이었다. 빈센트의 부모는 어째서 사회적 부와 지위가 있음에도 무책임하게 빈센트에게 아무런 유전자 조작도 없이 태어나게 만들었을까? 나는 <가타카>를 보면서 이렌느와 빈센트의 사랑이나 이해보다는 이렌느가 빗에서 발견한 프리만의 머리카락 한 올을 들고 가서 DNA검사를 받을 때, 호들갑스럽게 달려와 조금 전에 키스한 자신의 입술에 남은 체액을 통해 상대 남자의 사회적 신분을 확인하려 한 여자의 모습이 다가온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사랑조차 신분질서를 초월할 수 없다. 제롬 유진 머로우(Jerome Eugene Morrow)역의 주드 로(Jude Law) - 최근 나의 눈에 띈 젊은 배우 중에서 게리 올드만 만큼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배우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를 배경으로 독·소간의 저격수들의 대결을 그린 <에너미 앳 더 게이트>가 처음이었지만 <리플리>, <A.I>, <로드 투 퍼디션>을 거치면서 '주드 로'라는 배우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타카>에서는 <리플리>와 다소 겹치는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그의 연기는 이단 호크의 모호한 연기를 압도하고 있다. 빈센트 프리만(Vincent Freeman)역을 연기한 이단 호크(Ethan Hawke) - 피터 위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감수성 예민한 어린 소년을 연기한 이단 호크는 이후 <비포 선라이즈>에서 줄리 델피와 하룻밤의 아름다운 연애담을 연기했다. 섬세하고 병약한 듯한 인상 뒤에 숨겨진 불온함이 드러나야 하는 프리만역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이렌느 카시니(Irene Cassini) 역을 연기한 우마 서먼(Uma Thurman) - 솔직히 우마 서먼에 매료당한 적이 없는 지라 <가타카>에 그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타카>에 이르면 우마 서먼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배역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그것이 어디 우마 서먼의 탓이겠는가. <가타카>에서 이렌느 역은 성공을 위한 가도에 등장해 주인공이 잠시 쉬었다 가는 벤치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 보였다. 이루지 못할 꿈은 차라리 악몽이다. 빈센트에게 꿈과 너무나도 가까운 현실 역시 그런 악몽이었다. 결국 빈센트는 비밀리에 유전자 브로커를 만나(브로커까지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이런 비밀 거래가 종종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유전자를 지닌 사내를 소개받게 된다. 그가 바로 전직 수영선수 제롬(Jerome Morrow)였다. 현실에 좌절하고 있던 두 인간이 만난다. 한 인간은 완벽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사고를 당해 미처 그 꿈을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시들어 가고 있었고, 다른 한 젊은이에게는 그 꿈을 펼쳐보일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
신의 아이들을 차별하는 사회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는 사태에 대한 경고는 하늘에 닿고 싶다는 욕망을 경고한 바벨탑 붕괴 신화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가깝게는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멀게는 골렘에 이르기 까지 생명 창조에 대한 호기심은 그 경고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되었고, 시도되었다. 유태인의 전설에 등장하는 골렘이 한 줌의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육신에 신의 숨결이 닿으면서 이루어졌다는 창세기의 구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듯이 프랑켄슈타인은 17세기의 기계론적 유물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인류는 다가오는 산업혁명의 토대가 될 각종 자연과학 상의 발견들(토리첼리와 보일은 공기압력의 존재를 증명, 뉴턴은 만유인력 및 운동 법칙, 라이프니츠는 미적분학 등)과 기술력을 축적해 가고 있었고, 그 자신감은 오늘날 우리들이 문명개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확신 못지 않게 도를 넘쳐 때로 라 메뜨리 같은 철학자는 "인간도 또한 한 대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체의 여러 부위를 잘라냈다가도 다시 접합하면 인간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백과전서파의 홀바하 같은 이들은 "자연에는 불가사의한 것, 신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며 우리가 신의 기적이라고 믿는 것들은 단지 우리들의 무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런 말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 세기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돌이켜 볼 때 인간은 좀더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대. 여자들은 더 이상 자연적인 출산의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선택된 유전자를 이용해 안전하고 확실한 방식인 시험관 아기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영화 <가타카>는 그런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 시점이 매우 가까운 미래라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설정이고, SF영화임에도 그 흔한 특수 효과 한 번 사용하지 않았다는 부분도 감독의 의지를 높이 살 만한 부분이다(무릇 SF영화란 특수효과를 처바르는 블록버스터일 것이다라는 선입견만 제거한다면 이 얼마나 훌륭한 자세인가). 주인공 빈센트 프리먼(이단 호크)은 부모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대가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신의 아이들'보다는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의 아이들'을 우대하는 사회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으로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열성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태어나게 만드는 바보같은 짓이며 그런 아이를 태어나게 만드는 부모는 자식의 미래에 대해 도통 고민해본 적이 없는 우둔한 부모다. 게다가 이 사회가 신의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아이들과 경쟁하도록 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격자(valid)와 부적격자(invalid)로 신분이 고정된 틀 속에서 살아가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심을 품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인류가 고정된 신분사회로 살아왔던 시기가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며, 지난 20세기만 하더라도 실제로 우생학, 인종학적 근거에서 신분적 차별 심지어는 절멸시키려는 시도까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정된 미래 - 유전자 조작 SF를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의 관점은 SF가 내적 완결성을 지닌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SF가 다루고 있는 가상의 세계가 비록 현실 속의 세계는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는 그런 가상의 설정들이 나름대로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 된다. 고도의 내적 완결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판타지는 SF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빈센트가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우주 항법사의 길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회사인 가타카(GATTCA)라는 이름은 DNA의 염기 배열 인 구아닌(G), 아데노신(A), T( 티민), C(시토신)을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인간 배아 복제 및 유전자 조작 기술이 확립되어 자연 출산의 고통 없이 부모는 태아의 성별, 기본적 성향, 유전 결함까지 완전히 통제된다. 이제 사회에서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신분과 대우는 모두 개인의 유전적 우열에 의해 결정된다. 명확히 구분되는 유전적 질서에 의해 한 개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른 전 과정이 통제된다. 완벽한 신분 사회였던 중세 봉건제 사회 아래에서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계급 상승의 전설(가령, 공주를 구한 이름없는 기사나 왕자의 눈에 들어 엄격한 신분적 통제와 금기를 넘어선 사랑)들이 증명하듯이 신분사회의 억압과 통제가 강하면 강할수록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기어 오르려는 야심찬 시도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빈센트는 부모의 낭만적인 판단착오로 말미암아 선천적인 심장 질환과 근시, 다소 폭력적인 성향 등으로 인해 31세쯤에는 사망할 것이라는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 사실을 깨우치게 된 어린 빈센트가 부모에게 감사할 이유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미래가 단지 유전적 정보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전에 게시판에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아버지는 매독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환자입니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출산했던 아이들은 현재까지 네 명인데 그 중 맏이는 장님으로 태어났고, 둘째는 사산했고, 셋째는 귀먹어리, 넷째는 결핵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다섯번 째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의사는 이들 부부에게 아이를 출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를 낳아선 안되는 것일까요?" 여러 종류의 대답이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다들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명 피아니스트는 유전적인 조작에 의해 손가락이 열둘이었지만(물론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위한 방편으로 선택된 것이지만) 역사상 불후의 명피아니스트로 불린 사람들의 손가락은 대개 열개였다. 빌린 사다리 - 야곱의 사다리로부터 유전자의 사다리까지 다시 영화의 줄거리로 돌아가서 그렇게 유전자의 우열로 구분되는 신분사회에서 꿈꿀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있는 빈센트에게 허락된 일은 가타카의 초현대식 건물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거의 매일같이 발사되는 로켓을 바라보며 분루를 삼킨다. 유전적으로 뛰어난 엘리트들만 선발하는 가타카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이 로켓을 탈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빈센트에겐 이미 모든 가능성의 출구가 막혀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봉건제 사회에서도 우연한 기회에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탄 인물이 있듯이(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신분상승의 이야기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권리를 속임수로 얻게 되고 그 결과 장자의 권리를 빼앗긴 에서가 야곱의 목숨을 노리자 야곱은 사막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하늘까지 연결된 사다리를 보게 된다. 이 사다리를 통해 야훼를 만나게 된 야곱은 야훼에게 축복의 말을 듣는데 이것은 장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로부터 '사다리'가 신분상승의 한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 영화에서도 '빌린 사다리'라는 이름으로 유전자 감식을 피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지칭된다.) 빈센트 프리만(Freeman 이란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역시 빌린 것이긴 하지만 '야곱의 사다리'를 오른다. 이루지 못할 꿈은 차라리 악몽이다. 빈센트에게 꿈과 너무나도 가까운 현실 역시 그런 악몽이었다. 결국 빈센트는 비밀리에 유전자 브로커를 만나(브로커까지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이런 비밀 거래가 종종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유전자를 지닌 사내를 소개받게 된다. 그가 바로 전직 수영선수 제롬(Jerome Morrow)였다. 현실에 좌절하고 있던 두 인간이 만난다. 한 인간은 완벽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사고를 당해 미처 그 꿈을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시들어 가고 있었고, 다른 한 젊은이에게는 그 꿈을 펼쳐보일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어느 것이 더 괴로울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호사가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벌써 이 부분만 놓고 보더라도 이 사회가 얼마나 어리숙한가를 알 수 있다. 이 사회는 장애인에게도 역시 냉담하다.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온 제롬에게도 역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의 길은 막혀 있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가 장애인들을 최종해결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 된다. 사실 이 영화가 논리적·영화적으로 꼬이는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긴 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꼬이는 부분은 여기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빈센트는 제롬의 타액, 혈액, 머리카락, 체액, 비듬 등을 빌려 가타카에 취직하려고 결심한다. 빈센트는 컬러 콘택트 렌즈, 다리 길이를 늘이기 위한 수술, 제롬의 혈액을 주사한 가짜 손가락 피부(가타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혈액을 채취해 백혈구 핵 속의 DNA를 분석해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롬으로 신분을 위장해 가타카의 타이탄행 우주 비행사 후보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동료 아이린(Irene Cassini)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제롬의 행동에 의심을 느끼고 있었고, 그의 빗에 묻어 있던 머리카락을 몰래 가져가 DNA 테스트를 해보기도 한다(물론 이 머리카락은 제롬이 일부러 남긴 것이었다). 어쨌든 영화는 평소 제롬을 의심하던 가타카의 연구원이자 중역이 무참하게 타살당하고, 이러저런 우여곡절 끝에 빈센트 아니 제롬이 그 살해범으로 지목받다가 누명을 벗고 타이탄행 로켓을 타고 지구를 출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반신 마비로 지구에 남겨진 제롬은 우주로 떠나가는 빈센트를 바라보면서 가스 난로 안으로 들어가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스스로 타오르는 길을 택한다. 실수로 흘린 속눈썹 한 개 때문에 살인 용의자 리스트에 오르고 실제로는 자신의 친동생인 형사에게 추궁받는 빈센트를 바라보면서 관객들은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아마도 대개의 관객들은 빈센트와 제롬에게 동시에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지금 당장의 현실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실제 현실에선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가타카의 현실은 유전자 조작이란 부문만 빼놓고 보면 정확하게 우리 현실과 부합된다. 제롬과 빈센트 - 한 사람은 우성 유전자를 주입받아 태어났지만 후천적인 사고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은 열성 유전자를 타고난 탓에 도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탓할 뿐 이것이 사회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정말 너무나 착한 젊은이들이 아닌가 말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
가타카 ( Gattaca, 1997, 미국 )
감독/ 앤드류 니콜 Andrew Niccol
출연/ 이단 호크 Ethan Hawke(Vincent Freeman), 우마 서먼 Uma Thurman(Irene
Cassini), 주드 로 Jude Law(Jerome Eugene Morrow), 고어 비달 Gore
Vidal(Director Josef), 알란 아킨 Alan Arkin(Detective Hugo) 등
가타카의 현실은 과연 먼 미래의 일인가? |
|||
분명 빈센트는 그에게 허용될 수도 있었지만 금지된 사회의 터부에 도전했다. 그가 타인의 유전자를 빌린 것은 단지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 뿐이지 우주선을 타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빈센트의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집 자식이 밤새워 노력한 끝에 일류대학에 수석 입학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빈센트 역시 밤 9시 뉴스에 인간승리의 산 증거로 등장할 일이고, 이 사회가 좀더 간교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같은 어려움 속에서 그런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의 게으름을 탓하는 설교조가 될 것이다. "자, 봐라!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본인이 노력하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당신에게도 상류 계급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어두고 있다"고 말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앞으로 유전자 과학이 좀더 발전하게 되면 영화 <가타카>가 예상하고 있듯이 유전자 조작에 의해 유전적 질병의 요인이나 그외 여러 가지 요소들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발달된 의료 과학의 혜택을 골고루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서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그런 혜택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과학은 결코 중립적이지도 않으며 비정치적이지도 않다. |
얼마전 모 스포츠전문지가 국내에서도 일부 불임부부가 명문대 여대생들의 난자를 비밀리에 구매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다. O형 혈액형이 특히 고가에 팔린다고 한다는데 나중에 이렇게 해서 아기를 낳은 부부가 이혼하게 된다면 이 아이는 누구의 아기가 되어야 할지와 같은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종족을 남기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동물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떠나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유전자 조작이란 문제를 떠나서 우리들은 어렷을 때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 나의 친부모는 어딘가 먼 곳에서 매우 부자로 살고 있는데 지금의 내 부모가 나를 납치했거나 우연히 주워서 자식삼아 데리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 말이다. 부모가 우리를 선택해서 나은 것이 아니듯, 우리 역시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가족이란 불가항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팔자소관 탓을 하면서도 그냥 견디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위와 같이 어렸을 때의 상상이 TV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비련의 주인공들처럼 정말 신분이 뒤바뀐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신분상승의 이야기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권리를 속임수로 얻게 되고 그 결과 장자의 권리를 빼앗긴 에서가 야곱의 목숨을 노리자 야곱은 사막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하늘까지 연결된 사다리를 보게 된다. 이 사다리를 통해 야훼를 만나게 된 야곱은 야훼에게 축복의 말을 듣는데 이것은 장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로부터 '사다리'가 신분상승의 한 상징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 영화에서도 '빌린 사다리'라는 이름으로 유전자 감식을 피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지칭된다. 예전 <유리병편지>에서 "세계가 만일 100명의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란 글을 보낸 적이 있다. 우리는 그 글을 통해서 '동시대성'이란 것을 고민해보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난 것,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태어난 것, 아프리카와 같이 기아와 가난에 시달릴 확률이 큰 대륙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태어난 것이 운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어느 부모를 만났는가 하는 문제로 미래의 운명이 결정된다. 나는 그런 점에서 <가타카>의 세계가 유전자의 우열이란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보다 오히려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교육환경의 불균형이나 교육기회의 균등 문제를 한 번 따져보자. 매년 대학입시가 끝나면 방송사마다 대학 입시에서 최고 성적을 낸 수험생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다, 공부법을 물어본다 난리 부르스를 친다. 어쩌다 그 학생의 부모가 매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자식 하나 잘 키웠다고 한다면 대개의 부모들은 제 자식들에게 '저 봐라, 쟤도 저렇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공부해서 전국 수석을 먹지 않았니'라고 말한다. 자식된 입장에서 따질 수도 없고, 억울한 고충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삼류 대학의 인기없는 학과를 졸업해도 나중에 잘될 수 있지 않느냐와 같은 항변은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 부모들은 그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살아보니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삼류 대학의 인기없는 학과 나와도, 일자 무식의 무학자라 할지라도 잘될 수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학력이 전무한 사람도 위인이 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자식이 위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다만 사회에 나가 밥 굶지 않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평생동안 커다란 우여곡절 없이 안정된 직장에서 밥 잘먹고, 애 잘 낳고 그렇게 살아주길 바란다.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상류층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고, 그런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교육을 바라본다. 그런데 우리들도 당신들의 그런 꿈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강남 애들하고 도저히 경쟁이 안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지지리 가난한 집 자식이 일류대 수석입학하는 게 그리 흔한 일이라면 어째서 저녁 시간에 온국민이 바라보는 뉴스에 톱으로 등장하겠는가? 그것이 뉴스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라는 증거다. 영화 <가타카>의 치명적인 약점 <가타카>가 지닌 최고의 약점은 바로 그 부분을 좀더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빈센트의 부모가 내린 판단은 일회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빈센트에게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나도록 시술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 빈센트의 동생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우성 유전자를 지닌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해보자면 자식이 공부하는 데 혹은 출세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교육환경과 여건을 필요로 하는 데 부모가 순전히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교육관을 지닌 탓에 큰 아들에게는 참고서나 과외 공부, 학원 보내기를 일체 하지 않고, 학교 교육과 집에서 혼자 독학을 하라고 강요했으면서 동생에게는 온갖 과외와 학원 교육을 병행하고 게다가 강남의 교육 일번지로 이사간 것과 맞먹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빈센트나 제롬의 경우엔 분명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우연과 사건에 의해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잃긴 했지만 제롬의 경우엔 우연한 사고에 의해 빈센트는 부모가 베풀어줄 수 있었음에도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자신의 미래를 그르친 경우이니 만큼 사회를 탓할 이유는 별로 없다고 할 것이다. <가타카>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해 빈센트나 제롬이 터뜨리는 분노가 공허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만약 빈센트의 부모가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자식에게 우성 유전자를 심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독 앤드류 니콜은 이 부분에서 슬쩍 한쪽 발을 빼낸다. 자칫하면 진지한 사회드라마가 될 뻔한 이야기를 변죽만 울린 채 앞서 이야기했듯이 성서에 등장하는 에서와 야곱 형제의 장자권 쟁탈전으로 탈바꿈시킨다. 성서에서는 동생 야곱이 형의 권리를 빼앗았지만 <가타카>에서는 형 빈센트가 부적격자로 구분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약받긴 하지만 제롬의 도움을 통해 야곱에게 내려진 사다리를 자신도 빌린다. 회사 '가타카'에서 쏘아올려지는 로켓은 신에게 이르는 야곱의 사다리이며 동시에 잃어 버린 장자의 권리를 되찾는 행위로 뒤바뀌고 만다. 현재의 현실 세계에서 한 인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단순히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냐, 그의 부모가 지닌 재력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 가출을 하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영화 <가타카>에서 우성 유전자를 타고나 적격자로 분류되는 제롬이 우연한 사고로 적격자로서의 자격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우연히 발생하는 사고일 뿐이다. <가타카>에서 다른 대다수 부적격자들이 사회의 하층계급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처럼 적격자들은 사회의 상층부를 점유한 채 살고 있다. <가타카>는 어떻게 그들이 사회에서 그런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지지 않는다. 분명 빈센트는 그에게 허용될 수도 있었지만 금지된 사회의 터부에 도전했다. 그가 타인의 유전자를 빌린 것은 단지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 뿐이지 우주선을 타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빈센트의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집 자식이 밤새워 노력한 끝에 일류대학에 수석 입학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빈센트 역시 밤 9시 뉴스에 인간승리의 산 증거로 등장할 일이고, 이 사회가 좀더 간교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같은 어려움 속에서 그런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의 게으름을 탓하는 설교조가 될 것이다. "자, 봐라!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본인이 노력하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당신에게도 상류 계급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어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이상 과열 현상은 결국 경제력의 유무에 의해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유전자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가타카>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반으로 갈린 한반도의 남쪽 귀퉁이에서도 서울이냐, 지방이냐. 서울에서도 강남이냐 강북이냐 같은 강남 지역에서도 부모의 교육에 대한 열의가 어느 정도냐, 지원은 어느 정도냐에 따라 한 아이의 미래는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다. 형사 휴고는 빈센트와 친형제였음이 드러난다. 유전자 배열은 좀 다르지만 어쨌든 하나의 자궁에서 나왔으면 형제다. 간교한 작동에 의한 사회 메커니즘, 자본주의 20세기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는 건 때로 매우 잔인한 경험이다. 중세를 지배했던 무지한 광신적 열정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념이라는 인간의 신념 역시 종교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마찬가지로 20세기와 21세기엔 그런 종교와 이념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란 이름 아래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는 살상 병기가 개발되었고, 얼토당토 않은 우생학과 인종학이라는 사이비 학문을 통해 다른 인종과 민족을 절멸시키는데 이용당했다고 해서 과학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면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이 비정치적이며 모두에게 중립적인 학문이란 환상에 대해서도 나는 이와 똑같이 반대한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사촌인 프란시스 골턴(1822-1911)은 지능검사(I.Q. Test)를 창안한 과학자이며 범죄추적에 유용하게 쓰이는 지문검사를 만들어 낸 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악명높은 우생학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부모가 남겨준 유산을 이용해 세계를 여행했다. 그가 특히 감명을 받은 곳은 아프리카였는데 그의 눈에 아프리카 흑인들은 지능지수가 매우 낮은 저능한 인종으로 보였다. 그는 지능이란 신체적인 특질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되며 이렇게 결정된 유전인자는 후천적인 요인인 영양보다 인간의 성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종의 사회진화론인“코카서스인들은 유색인들보다 우월하고, 부자가 빈민보다 유전적으로 월등하다”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이들에게 위험한 방식으로 수용되었고, 바다 건너 미국으로 넘어간 뒤에는 그보다는 좀 덜 위험한 방식으로 수용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받고 있는 I.Q.테스트이다. 이를 받아들인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루이스 터먼 교수 같은 이는 I.Q.테스트를 미국식으로 고쳐 실시했는데 그가 만든 지능검사 테스트에서 늘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점수를 보이자 여성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항목을 죄다 삭제해 버렸다. 그는 여성이 결코 남성보다 우수할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성적 편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종적 편견도 매우 강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1910-1989)는 백인의 지능이 흑인의 지능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한때 IQ가 높은 미국 여성에게 노벨상 수상자의 정자를 분양하자는 사업이 미국에서 전개됐을 때, 제일 먼저 정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쇼클리였다. |
||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무비웹 가타카 페이지 - 인터넷무비데이타베이스(IMDB)는 영화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들을 입수하는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이미지 자료들은 좀 빈약한 편이다. 영화 자체의 스틸 컷들보다는 배우들의 공식행사장 사진이 더 많기 때문인데 무비웹은 그런 면에서 IMDB보다 좋은 사진 자료들을 많이 공급해주는 사이트이다.(영문) 『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1998년 - 문화에 과연 우열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제국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명간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 질문한다면 쉽게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문명간의 불평등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있다. 좋은 책이다. 『파우스트의 선택』/ 박병상 지음/ 녹색평론사/ 2000년 - 오랫동안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지적해온 재야 소장 학자인 박병상 박사의 저서이다. 생명공학이란 결국 돌연변이의 유포 기술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21세기 최첨단의 굴뚝 없는 산업 - 생명공학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소 비장미가 넘치기는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이것도 약과인지 모르겠다. 필독해보시길. |
맬더스가 "가난한 이들이 사는 거리의 상하수도 시설을 엉망으로 하고, 골목의 폭을 좁혀 거주 환경을 나쁘게 하여 그들 사이에 전염병이 유행할 수 있도록 조장해야 한다"는 초기 자본주의자들의 의식이나 주장은 가난을 한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것에 비하자면 그만큼 잔인하기는 하지만 소박한 의식이다. 19세기 유럽의 하층 계급들 사이에는 아이들이 결코 신이 내려준 축복이 아니었다. 가난은 '신의 아이들'들에게 당밀과 아편을 반죽해 만든 '신의 축복'이란 환약을 부모의 손으로 먹이도록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마른 젖 대신에 물에 타서 먹인 아편 섞인 환약을 먹고 안락사 당했다. 자본주의가 풍요로운 부를 약속하는 현대에 이르러 우리들은 여러 분야에서 평등을 이루고 있다. 부유한 계급이나 가난한 계급이나 같은 뉴스를 보고, 드라마를 보며 함께 눈물짓는다. 코카콜라를 마시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먹는다. 우리는 같은 하늘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총, 균, 쇠』에서 8억의 제3세계 인구가 처음부터 굶주렸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동안 자급자족해 오던 그들의 생활 터전을 제국주의자들이 파괴하고, 부존자원을 강탈 해간 이후부터 굶주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생명공학은 제2의 녹색혁명을 꿈꾼다. 유전자 조작에 의한 식량 공급은 미래 세계의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과거 제국주의를 통해 그들을 착취했던 이들은 이제 유전자공학을 통해 종자를 장악하고 있다. 과연 인류는 제2의 녹색혁명을 필요로 하는가? 지금 인류는 결핍 때문에 굶주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배 때문에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아이들과 후진국의 아이들이 같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같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것처럼 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미래 역시 공급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에 덜미가 잡혀 있다. |
첫댓글 이영화 역시 freewill vs determinism을 "과학"적인 context에서 살피죠 ^^
오옷 듀니스님의 영어는 한눈에 못 알아본다는.........두번 보니 이해가 가는군요.(아 그래도 이게 온전한 이해일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