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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http://cafe.daum.net/kmninefive/QRY2/28 김갑구 님이 정비석의 연재소설을 새로 각생하여 올린 것을 연재한 것입니다.
21. 이별의 대동강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르는 과한 방사(房事) 탓이었을까? 삼월이 몸살이 나서 기방으로 돌아갔다. 김삿갓은 허전한 발길로 연광정에 올랐다. 다른 누각도 마찬가지지만 이미 여러 번 둘러본 정자였다. 덕암이라는 수백 척 낭떠러지 위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얹혀 있는 연광정은 올 때마다 다른 숨결, 다른 정취로 김삿갓을 반겼다. 연광정은 성종 때 평안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정자로 평양의 여러 누각 가운데 규모도 가장 크고 건축미도 가장 뛰어났다. 연광정은 임진왜란 때 적진으로 잠입하여 왜장을 죽이고 순국한 평양기생 계월향이 생전에 즐겨 들리던 곳이기도 했다. 절벽 아래로는 넘실대는 대동강을 건너 능라도와 백은탄(白銀灘)이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고, 좌우에서는 대동루와 읍호루가 춘색(春色)에 겨워 손짓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솟아오르는 시심을 붓으로 담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여인네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간드러진 목청이 여염의 아낙네들 같지는 않았다. 김삿갓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가락을 따라갔다. 언덕을 넘어서자 저만치 너른 풀밭 위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 더러는 노래를 부르고 더러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가춘지절(佳春之節), 여인네들이 화전놀이를 나온 모양이었다. 복색(服色)으로 보아 퇴기들인 듯했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파흥(破興)이 안 된다면 술 한 잔 얻어먹을 수 없겠소?”
당시 기생들은 열 살 전후에 기방에 나가 남정네와 요철(凹凸)을 맞추기 시작하여 스물이 넘으면 노기요 서른이 넘으면 퇴기라 했으니, 조선의 남정네들은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계를 즐겼던 모양이다. 하긴 남자나 여자나이 열 살을 넘기면 이미 혼기에 접어든 것으로 치던 시대 아니던가.
“그러잖아도 남정네가 없어 흥이 시들하던 참인데 마침 잘 오셨소. 어서 오시구려.”
좌장인 듯한 기녀가 반색을 하며 김삿갓을 맞아들였다. 노래와 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녀들이 돌아가며 술을 권했다.
주흥이 도도해질 무렵이었다. 한쪽에서 두 기녀가 김삿갓을 흘낏거리며 소곤대더니 한 기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혹 김삿갓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허허,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놓고 물으니 아니랄 수도 없구려. 맞소, 내가 바로 김삿갓이요.”
가락이 멎으며 여기저기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무와 시화에 능한 평양기생 치고 김삿갓의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었다. 술잔이 더욱 분주해졌다. 좌장이 한쪽에 쌓여 있던 종이뭉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희들이 심심파적으로 시를 지었사온데, 선생님께서 한번 보시고 격려의 말씀을 좀 해주시면 일생의 영광으로 삼겠나이다.”
언사가 극진했다. 김삿갓은 선지를 한 장씩 넘기며 시를 읽었다. 시문을 배웠다고는 하되 모두가 운도 잘 안 맞고 맥락도 애매했다. 그 중에 단 한 수가 김삿갓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강촌모경(江村暮景)이었다.
千絲萬縷柳垂門 실버들 수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綠音如雲不見村 구름처럼 눈을 가려 마음을 볼 수 없네.
忽有牧童吹笛過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하게 들려오고
一江烟雨白黃昏 보슬비 내리는 강에는 황혼이 찾아오네.
“여기 강촌모경은 누가 지었소?”
한참 뜸을 들인 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한 기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가 지었사옵니다.”
곁에서 좌장이 거들었다.
“저 아이는 죽향이라고 하는 기생이온데 시문이 뛰어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글이 참 훌륭합니다. 죽향이는 어디서 이런 훌륭한 글재주를 배웠는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글을 깨우친 뒤 교방에 다닐 때 시문을 배웠나이다.”
죽향은 미모도 뛰어났다.
“참 훌륭한 솜씨로구나. 앞으로도 계속 갈고닦도록 하게.”
청에 의해 시도 몇 수 짓고 평양을 거쳐 간 선비들의 일화도 들려주면서 술을 몇 잔 더 마신 김삿갓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은 자리 흥을 깨지나 않았는지,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잘 얻어먹고 갑니다. 참, 여러분 중에 혹 예곤옥이라는 아명을 가진 기녀를 아시는 분 없소? 기명은 모르겠소만.”
서로를 쳐다보며 의논이 분분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몸살을 다스리기 위해 기방으로 돌아간 삼월이 며칠째 소식이 없자 걱정과 궁금증이 얽혀 뒤숭숭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체온과 타고난 방중술이 그리워 자주 아랫도리로 손이 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병문안을 갈 수도 없는 처지, 답답하고 그리운 대로 제 쪽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일찍 조반을 들고 임진사의 별채를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평양의 절경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투어 김삿갓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삿갓어른.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문지기의 뒤를 따라온 손님은 죽향이었다. 며칠 전 연광정 아래서 화전놀이를 하다가 김삿갓과 처음 만났던 기녀 죽향은 여염집 아낙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죽향을 반갑게 맞아 안으로 들였다.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제가 바로 예곤옥입니다. 제 본명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김삿갓은 크게 놀랐다. 여럿이 있는 데서는 차마 나서지 못한 모양인데, 생면부지의 사람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여러 달 전에 자네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명을 일러주며 평양에 가거든 꼭 좀 찾아서 안부를 전해 달라 부탁하시더구나. 이렇게 만나게 되나니 천운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고희가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하시더라.”
“흐흐흑!”
죽향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소식에 격정을 못 이겨 오열을 터뜨렸다. 김삿갓도 측은한 눈길로 죽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소리 내어 울던 죽향은 이윽고 울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요?”
“예서 50리 상거한 중화고을의 어느 산중에서 홀로 객점을 하고 계시더구나.”
“옛? 평양에서 50리요?”
놀랄 만도 했다. 지척에 살면서 오매불망 그리기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죽향은 다시 한 번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눈물을 거둔 죽향이 고개를 숙인 채 지나온 얘기를 시작했다.
“일곱 살 때 한 노기의 양녀로 팔려온 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아버지 얘기는 입에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혹 아버지에게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양모가 엄히 닦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게 너무 어릴 때라 성함도 잊었고 살던 동네도 몰라 혼자 숨어서 수없이 울었답니다.”
죽향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선생님께 간곡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무슨 청이든 들어주지.”
“저는 평양에 끌려온 이후 한 번도 성 밖엘 나가보지 못해 혼자서는 아버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양모가 죽어 이제는 맘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으니, 제발 저를 아버지 계시는 곳에 좀 데려가주십시오.”
“그럼, 데려다주고말고. 20여년 만에 부녀가 상봉하는 일인데 내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죽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죽향은 임 진사 댁으로 왔다. 대문 밖에는 부담마(負擔馬. 사람도 타고 짐도 싣는 말) 두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임 진사에게 백배 사례하고 난생처음 말에 올랐다. 임 진사는 김삿갓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안장에 엽전꾸러미를 두둑이 걸어주었다. 절세미인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자니 신행이라도 가는 듯하여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두 사람은 한나절 만에 객점에 도달했지만 사립문이 닫힌 채 인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이 사립문을 열고 주인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열자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벽에는 누가 쓴 것인지 ‘縣辟學生府君神位’라는 지방이 붙어 있었다. ‘辟’이란 후사가 없는 자의 지방에 붙이는 글자다.
뒤따라 들어온 죽향은 지방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김삿갓은 죽향을 반듯하게 눕히고 옷고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얼마 만에 깨어난 죽향은 까무러쳐 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울었다. 김삿갓도 부녀의 기구한 사별이 애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밤을 새워 두주를 불사하던 강건한 사람이 몇 달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노인들의 저녁약속은 믿을 게 못 된다던 옛말이 실감이 났다.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김삿갓은 죽향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꺼냈다.
“이보게 죽향이. 자네의 슬픔은 가늠하겠네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마을을 찾아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어디에 모셨는지 알아내서 제를 올려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삿갓선생님. 나가시지요.”
두 사람은 풍헌을 찾아갔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 건 열흘 전이었다오. 자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장성한 딸이 있었구려.”
‘열흘만 일찍 찾아왔더라면 뵐 수 있었는데…’
죽향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통곡했다. 풍헌은 앞장서 무덤으로 향했다. 무덤은 객점 뒤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었다. 예를 올리고 내려온 죽향은 그 길로 김삿갓과 함께 장을 다녀와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죽향은 온 마을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무덤 앞에서 성대하게 제를 올리고는 음식을 골고루 대접했다.
“어르신들. 제 아버님을 이렇게 거두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속죄하는 뜻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시묘하며 날 맞추어 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불쌍한 소녀를 많이 좀 도와주십시오.”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방에 드니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더욱 스산했다.
“열흘 뒤 선생님을 평양에 모셔다드리고 몇 가지 준비를 하여 내려와야겠습니다.”
“자네의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이.”
“임종도 못한 불효자식인걸요.”
김삿갓은 죽향을 도와 열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린 뒤 나란히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의 춘색은 여전히 김삿갓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임 진사 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빌린 말을 내주고 김삿갓은 하직의 말을 꺼냈다.
“평양은 어지간히 구경했으니 그만 떠날까 하네. 자네를 만나 뜻 깊은 우정을 나누었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 집에서 며칠이라도 쉬시다 가셔야지요. 그리고 제가 중화로 돌아간 뒤에도 계집애가 집을 지키고 있을테니 계속 머무시면서 평양구경을 더 하다 가세요.”
김삿갓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사흘 간 죽향의 집에서 유숙했다. 대동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죽향의 집은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사흘 뒤였다. 죽향이 중화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려 하자 김삿갓도 따라 나섰다.
“더 머물다 가세요.”
“자네 없는 평양에 무슨 낙으로 남아 있겠는가.”
죽향은 주르륵 눈물을 흘렀다. 살 한 번 섞은 적은 없지만 그새 정이 흠뻑 든 것이다.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연광정 아래 화전놀이 자리에서 그녀가 지은 시에 마음을 뺏긴 이래 지금껏 그녀를 은근히 사모해오고 있었다. 중화고을에서 제를 올리느라 열흘 동안 한방에서 잘 때도 상중이라 차마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곁에서 함께 잤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을 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삿갓은 죽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나루터까지 나가 그녀를 전송했다. 죽향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김삿갓은 배가 떠난 뒤 북으로 발길을 돌리고 나서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22. 눈 마저 침침하니 발길 더욱 스산하고
북으로 갈수록 산은 더욱 험준하고 길은 더욱 고달팠다. 김삿갓은 대동강 변에서 헤어진 죽향을 마음에서 지우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산길을 가다보면 인가를 못 만나 진종일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순천을 지나 안주로 접어들었다. 날이 저물어 개천가에 있는 한 객점을 찾아들었다. 지나온 고을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그 객점에도 다른 손님은 없었다. 주모가 반색을 하며 김삿갓을 맞았다.
“하룻밤 쉬었다 갈까 하네. 저녁상에 술도 한 병 내오게.”
40 전후로 보이는 주모는 평안도사람 특유의 강인한 인상이었다.
밥상에는 날계란이 두 개 올라 있었다. 더러 서비스로 날계란을 하나 얹어주는 객점은 본 적이 있었지만 두 개를 올려놓은 집은 처음이었다. 김삿갓이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자 주모는 강인한 인상과는 달리 배시시 웃는 얼굴로 추파를 던졌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시우? 날계란이 양기에 좋다지 않수.”
“예끼 이 사람아. 홀로 떠다니는 나그네가 양기가 무슨 소용인가?”
주모는 김삿갓의 말에 흙이라도 묻을까 하여 땅에 떨어지기 전에 냉큼 되받았다.
“댁도 혼자지만 나도 혼자라우. 혹 양기가 소용 있을지 누가 아우?”
말을 마치자 너무 심했나 싶었던지 주모는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저녁상을 물리자 김삿갓은 이내 곯아떨어졌다가 살기척에 잠이 깼다. 어느 새 아랫도리가 허전한 채 누군가 자신의 양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서로 좋자고 하는 짓이니 아무 말씀 마세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주모는 김삿갓을 올라타더니 양물에 요철(凹凸)을 맞추었다.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술기운도 가시지 않았지만 평양 임 진사 댁에서 기생 삼월을 끼고 자본 이후 음심을 달래준 적이 없던 터라 김삿갓도 주모를 내칠 형편은 못 되었다. 주모는 살추렴에 이골이 난듯 방사가 능란했다. 삼월을 보듬을 때처럼 영육(靈肉)이 합일되는 듯한 극치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런 대로 몸풀이는 충분했다.
“어때요? 날계란 효험이 쓸 만하지요?”
교접에 관한 한 주모는 수어지심(羞於之心)이 없는 듯했다. 방사를 입으로 논하기는 쑥스러워 김삿갓은 말문을 돌렸다.
“자네는 가족이 없는가?”
“이 얼굴이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데 가족이 왜 없겠수?”
“그럼 가족은 어디 사는가?”
“어디 살기는요, 이 형편에 두집살림이 가당키나 하겠수? 서방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계시는 시아버님 병문안을 갔답니다. 며칠 지나야 올거구만요.”
김삿갓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까는 혼자라 해놓고 이제 와서 서방이 있다니, 서방이 불쑥 나타나 간통죄로 고변이라도 하면 어찌할텐가?”
“아니 한밤중에 단 둘이 한 일을 고향 간 서방이 어찌 안대요?”
말을 하면서도 주모는 음탕한 눈길로 김삿갓을 쳐다보며 손으로는 여전히 양물을 희롱하고 있었다. 서방이 있다는 말에 기겁을 한 건 김삿갓의 머리였을 뿐 머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양물은 주인이야 놀랐건 말았건 양껏 장대해져 그예 열려 있는 주모의 요(凹)를 찾아들었다.
김삿갓은 술값을 남겨두고 새벽참에 객점을 나섰다. 팔자에 없는 날계란 두 개에 몸보시까지 받았지만 음란한 주모를 신용할 수 없어서였다. 서방이 돌아왔을 때 행여 객쩍은 소리라도 한다면 괄괄한 서도기질에 봉변당하기 십상이었다.
뒤통수가 간질거려 서두른 덕분에 며칠 지나지 않아 청천강에 이르렀다. 묘향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은 이름대로 맑고 깊었다. 이윽고 나룻배가 와 닿았다.
“어디로 가실겁니까?”
“나를 백상루까지 태워다줄 수 있겠소?”
“가까운 곳이니 이내 모셔다 드립지요.”
백상루(百祥樓)는 안주의 소문난 누각으로 거기서 10리쯤 하류에 있었다. 강에서 봐도 자태가 웅장하던 백상루는 누각에 올라보니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정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누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암절벽 아래로는 청천강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고, 강 건너 널따란 안주평야 뒤로는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서 있었다. 강위에서는 어부들의 그물질이 한창이었고 그 위를 나르는 백로와 왜가리도 새끼에게 먹일 물고기를 잡아 나르느라 날갯짓이 분주했다. 언제 어디서나 같은 느낌이지만 김삿갓은 지금 서 있는 백상루가 조선 제일의 명승지라 확신하고 있었다. 시선을 거두어 누각 안을 살피니 삼국시대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듯 현판시가 무수히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당나라 장수들의 방자(放恣)한 현판시도 여럿 눈에 띄어 심기가 불쾌했다. 김삿갓은 당나라 장수들의 오만방자한 필치와 함께 지금껏 이를 방치해온 지방 수령들의 사대주의를 꾸짖는 준열한 현판시를 써서 내걸고 백상루를 내려왔다.
김삿갓은 사흘 동안 칠불사를 비롯하여 안주팔경을 두루 감상한 뒤 선천으로 가기 위해 정주 땅에 들어섰다. 선천은 일찍이 조부 김익순이 방어사로 있다가 홍경래 무리의 야습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했던 통한의 땅이었다. 부친 안근도 조부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조부가 참수되자 충격으로 죽었으니, 김삿갓에게 선천은 악연이 겹친 땅이었다. 김삿갓은 20여 년 전 집을 나설 때부터 언젠가 그 선천 땅을 반드시 들리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저물었으나 객점이 없어 산골의 외진 민가를 찾아들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는 오두막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은 팔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노파가 저녁을 지으러 나간 사이 김삿갓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장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으셨소?”
“에효, 자식이 있긴 있었지요. 건장한 아들을 셋이나 두었으나 그 놈의 홍경랜가 뭔가 하는 역적 때문에 다 죽었다오.”
“아니, 역도에 가담했더란 말이오?”
“예끼 여보시오! 우리도 한때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는데 설마하니 역적무리들에게야 가담했겠소. 선천방어사란 작자가 저 한 목숨 살자고 역도들에게 항복했다는 소문이 나자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백성들이 맨손으로 궐기했는데, 내 자식 놈들도 쇠스랑이나 도끼를 들고 역도들에 맞섰다가 하나는 칼에 맞아 죽고 두 녀석은 조총에 맞아 죽었다오. 그때 선천뿐만 아니라 우리 정주고을 장정들도 거의 씨가 말랐지요.”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의 질긴 멍에를 실감했다. 이튿날 조반까지 얻어먹은 김삿갓은 남은 노자를 다 털어 억지로 노인네 손에 쥐어주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서도 가운데도 선천의 인심이 유독 스산한 것은 홍경래의 난 때 역도와 군관민연합군으로 편이 갈렸기 때문이라 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건만 서로를 죽인 원한만은 후손으로서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차마 선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어 묘향산으로 직행하는 김삿갓의 발길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김삿갓은 묘향산을 향해 부지런히 길을 줄였다. 그러나 영변에 이르자 약산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 진달래가 가장 유명한 약산은 관서팔경의 하나로 약초가 흔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약산동대는 무주고을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은 별칭이다. 관서팔경은 약산 외에 평양의 연광정, 성천의 강선루, 안주의 백상루, 의주의 통군정, 만포의 세검정, 성천의 동림폭포, 강계의 인풍루 등이다. 약산을 따라 축조해놓은 약산성은 험준한 멧부리로 둘러싸여 있어 철옹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문 위에 우뚝 솟아오른 운주루(雲籌樓)에 오르니 산 밑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룡강과 대령강이 선두를 다투고 있고, 약산의 제일봉과 동대와 학벼루가 절경을 겨루고 있었다. 성 안에는 영변읍이 아늑하게 엎드려 있고, 밖으로는 저 멀리 박천평야가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 경관에 사로잡혀 김삿갓은 날이 저문 뒤에야 운주루를 내려왔다.
묘향산은 백두산 금강산 구월산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4대 명산으로 영변에서 130리 떨어져 있는데, 가는 길이 모두 다 첩첩산중이라 행장이 여간 고달픈 게 아니었다. 산중에서 토굴을 찾아 하룻밤을 자고 아침도 굶은 채 산길을 걷자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 힘든 심경을 김삿갓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平生所願者何求 내 평생소원이 무엇이던가 하면,
每擬妙香山一遊 묘향산 한번 구경하는 일이었네.
山疊疊千峰萬仞 산은 첩첩 모든 멧부리가 높고도 높아
路層層十步九休 길은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어야 하네.
향나무가 많다 하여 이름 붙은 묘향산에는 가장 큰 보현사를 비롯하여 모두 360개의 절이 있었다. 산이 험하다 보니 어느 산보다 절경도 많았다. 김삿갓은 묘향산으로 들어서자 보현사로 직행했다. 웅장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보현사는 대웅전만 해도 600칸이 넘는 조선 제일의 거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강토가 쑥대밭이 되자 보현사에서 수도하고 있던 서산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모란봉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 낭보가 전해지자 전국의 젊은 승려들이 일제히 승병에 가담하여 그 수가 5천을 넘어섰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던 사명대사도 이때 승병을 이끌고 유격전에 뛰어들어 곳곳에서 왜군을 무찌름으로써 조선이 임진 정유 두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삿갓은 서산대사가 85세에 임종했던 원적암도 둘러보았다. 벽에는 서산대사의 유시(遺詩)가 걸려 있었다.
山自無心碧 산은 스스로 무심히 푸르고
雲自無心白 구름은 스스로 무심히 희구나.
其中一上人 그 가운데 앉아 있는 한 사람
亦是無心客 그도 또한 무심한 나그네로다.
그는 이미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그 즈음에는 김삿갓 또한 얼마간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고 있었다.
서도에 겨울이 왔다. 솜옷을 찾을 형편이 못 되는 김삿갓은 옷에 난 구멍을 기우려고 바늘에 실을 꿰다가 바늘귀가 보이지 않아 장탄식했다. 상투를 고치려고 거울을 보다가 백발이 된 두발을 보며 속절없는 세월을 한탄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때의 심경을 김삿갓은 「백발한(白髮恨)」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嗟乎天地間男兒 넓고 넓은 천지간에 대장부 사나이여
知我平生者有誰 내 평생 지낸 일을 뉘라서 알 것인가.
萍水三千里浪跡 삼천리 방방곡곡 부평초로 떠돌아서
琴書四十年虛詞 40년 긴긴 세월 글과 노래 마캉 도루묵이었네.
靑雲難力致非願 청운의 꿈을 이룰 힘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白髮惟公道不悲 백발도 으레 오는 것 슬퍼하지 않노라.
驚罷還鄕神起坐 귀향 꿈을 꾸다가 놀라 일어나니
三更越鳥聲南枝 깊은 밤 소쩍새도 고향 그려 우는구나.
강계로 가는 산길 역시 험난했다. 날이 저물어 고개 아래 있는 외진 오두막에 드니 늙수레한 주인 부부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감자로 저녁을 때우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주인이 인기척을 하며 방안으로 들었다.
“주무시는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제 형님의 명이 시방 경각에 달했는데 좀 도와주실 수 없겠는지요?”
행색은 초라하지만 저녁상을 물린 후 잠시 책을 읽던 모습에서 주인은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고심 끝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방랑 중에도 수단껏 읽고 싶은 책을 구하여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온 친구가 형님과 장기를 두다가 말다툼 끝에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서당 훈장이 소장(訴狀)을 교묘하게 써주어 꼼짝없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장황한 소장은 다음과 같은 끝구절로 현감의 판단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었다.
毒酒在房 不飮不醉 독한 술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을 것이요,
腐繩繼牛 不引不絶 썩은 끈으로 소를 매도 당기지 않으면 끊기지 않으리.
김삿갓은 당시의 정황을 들은 대로 자세히 적고 다음과 같은 끝구절로 진정서를 마무리했다.
油盡燈盞 無風自滅 등불은 기름이 마르면 바람이 안 불어도 절로 꺼지고
晩秋黃栗 不霜自圻 늦가을 밤송이는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절로 터지네.
김삿갓은 주인과 함께 그의 형님인 김득춘 댁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사흘 뒤, 김득춘은 무죄 방면되어 귀가했다.
“아이구 삿갓선생. 선생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온 마을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김삿갓의 진정서에 대한 칭찬으로 잔치는 흥겨웠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겨울을 나고 가라는 김득춘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가 내주는 솜옷만 챙겨 입은 채 부득부득 길을 나섰다.
“생명의 은인을 이리 보낼 수는 없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노자에 보태 쓰십시오.”
김득춘이 내미는 500냥을 김삿갓은 백배 사례하고 받아두었다. 강계로 가기 위해 고개 아래 오두막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오두막 주인은 자신의 형님을 살려준 김삿갓이 고마워 그때까지 형님 댁에 머물다가 함께 돌아왔다. 김삿갓은 바랑에서 엽전꾸러미를 꺼내 50냥을 빼고는 모두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삿갓선생. 어인 까닭으로 이 돈을 내게 주시오?”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주인장이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형님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소. 그러니 형님이 주신 돈이라 생각하고 요긴하게 쓰시구려.”
말을 마치자 김삿갓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원래 사례금을 받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저는 부유하게 살면서 동생 집안을 돌보
지 않는 인심이 고까워 두말없이 500냥을 받아왔던 것이다.
23. 강계 하늘에 秋月이 滿乾坤하니
적유령고개가 나타났다. 강계의 관문이었다. 고개가 어찌나 높은지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천신만고 끝에 만데이에 오르니 저 멀리 북쪽으로 험산준령에 둘러싸인 광활한 고원지대가 나타났다. 묘향산맥 낭림삼맥 강남산맥에 둘러싸인 고원은 서도 제일의 웅자(雄姿)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히 산중왕국이었다. 강계고원은 넓이가 제주도의 3배나 된다. 조선 3대 색향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강계는 남남북녀라는 용어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명포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강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강계포수’ 하면 호랑이도 놀라 물고 가던 황소를 놓고 달아난다 했다.
고개를 넘어 강계읍내를 향해 길을 가자니 독로강이 나타났다. 신라가 삼국통일이라는 미명하에 고구려를 무너뜨리자 강계 땅은 한때 무주공산이 되어 여진몽골 말갈족의 각축장이 되었다. 와중에 수많은 여인들이 오랑캐의 노리개로 끌려갔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이었다. 몽골인들은 납치해오는 외국여자들을 뚜루개[禿魯花]라 했는데, 독로강은 뚜루개에서 유래한 한 많은 이름이었다. 보다 못한 강계인들은 스스로 무예를 연마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내고 여인들을 지켰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처럼 상무정신이 강한 서도사람들을 경계하여 벼슬길에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정편의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으니, 홍경래의 난도 이러한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삿갓은 강산을 두루 살피다가 해질녘에야 나룻배를 타고 독로강을 건넜다. 언젠가 시골 장터에서 심심파적으로 관상을 보았을 때 관상쟁이가 ‘강계에 가면 귀인을 만나 즐거움을 누릴 것’ 이라던 말이 생각나 은근히 기대에 부풀었다. 한서당에 들려 하룻밤 신세를 진 김삿갓은 이튿날 조반을 들자마자 관서팔경의 하나인 인풍루(仁風樓)로 향했다. 김삿갓은 관서팔경 가운데 이미 절반 이상을 보았지만, 인풍루는 그 어느 곳보다 웅장하고 수려한 누각이었다. 천애절벽 아래로는 독로강과 북천이 합수하여 도도히 흐르고, 강 건너 들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독산은 인풍루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세워놓은 듯 적절하게 포치(布置)되어 있었다. 인풍루에는 유독 국경을 수비하던 무장들이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지은 현판시가 많이 걸려 있었다.
그날따라 겨울인데도 날씨가 따스하여 많은 유람객들이 인풍루를 찾았다. 그 중에는 여인네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대부분 ‘강계미인’이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미색이 뛰어났다. 널따란 누각에서는 여기저기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노인네들도 많았다. 점심도 굶어가며 산천 구경에 빠져 있는데, 어느듯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와 눈길을 돌리니, 언제 왔는지 기생차림의 한 여인이 동기(童妓)와 대거리로 번갈아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다. 여인의 차례가 되자 낭랑한 목소리로 한시를 읊기 시작했다.
靑山影裡碧溪水
容易東流爾莫誇
一到滄海難再見
且留明月暎娑婆
바로 송도 명기 황진이가 당대 제일의 풍류객이자 왕실 종친인 벽계수를 꼬신 유명한 연시(戀詩)였다. 당초 황진이는 우리말 시조로 노래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누군가 이 시조를 한시로 번역하여 「해동소악부」에 실어놓았는데, 기녀는 거기까지 학문이 닿아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강계에는 추월(秋月)이라는 기생이 있어 빼어난 자태와 함께 시문이 깊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저 기녀가 바로 추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기녀가 몸을 돌려 누각을 내려가려 하자 김삿갓은 조급해졌다.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이대로 보내면 전생부터 이어져온 인연 하나를 영영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얘, 산월아. 잠깐 나 좀 보자꾸나.”
김삿갓은 기녀가 부르던 동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녀는 등을 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고 산월이란 동기가 다가왔다.
“내 편지를 써줄테니 네 주인에게 좀 전해주거라.”
김삿갓은 바랑에서 지필묵을 꺼내 ‘榴 金笠’이라 써서 건네주었다. 동기는 편지를 가지고 말없이 상전에게 다가갔고, 동기가 이르자 기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누각을 내려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옛날 황진이가 상종가를 치고 있을 때, 거유(巨儒) 소세양이 만월대에 유람 왔다가 황진이의 자태에 뿅 가서는 ‘榴’ 자를 써서 하인을 시켜 보냈다. ‘석류나무 유’라는 풀잇말을 한자로 슬쩍 바꿔 ‘碩儒那無榴’, 즉 ‘큰 선비인 내가 예 왔는데 한번 안 줄래?’ 하는 수작이었다. 이에 황진이가 즉각 그 유혹을 받아들여 ‘漁’ 자를 답신으로 보내왔다. 한문께나 안다는 사람들이 흔히 써먹는 시대적 수작으로 ‘고기 잡을 어 → 高姑自不語’, 즉 ‘고급기생은 함부로 주는 게 아니오.’ 라는 대답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여인네 치고 처음부터 쉽게 준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던가? 그 길로 두 사람은 세기의 로맨스를 불살랐던 것이다.
그 고사를 한번 써먹어본 것인데, 한참 만에 보내온 답장은 예상을 뛰어넘어 매우 준열했다.
‘榴字書翰則 巨儒 蘇世讓之書翰也. 勿爲剽窃. 秋月’
‘榴’ 자 편지는 거유 소세양이 이미 써먹었던 수법이니 함부로 표절하지 말라는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강계에 가면 좋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던 관상쟁이의 점괘도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서두른다고 아니 될 일이 될 턱은 없을 터, 김삿갓은 느긋하게 절 구경을 다니며 때를 기다렸다. 그 기녀가 추월이었음을 확인한 게 유일한 소득이었다.
김삿갓이 심원사에 들렸을 때였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노승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아니 삿갓선생께서 이 깊은 산중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
“예, 스님도 만강하시지요? 그런데 저를 어이 아시는지요?”
“소승은 금강산에서 공허 스님을 모시고 있던 범우화상입니다. 조선의 노승 가운데 삿갓선생을 모르면 간첩이지요. 그런데 강계에는 글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삿갓선생을 잘 알아보지 못할거요. 글이라면 추월이라는 기생이 제일이지요.”
학문이 깊은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가 싶어 더욱 관심이 깊어졌다.
“잠시 시문을 농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능한 줄은 몰랐습니다.”
“며칠 전 불공을 드리러 왔기에 삿갓선생께서 공허 스님과 시 짓기 내기를 했던 에피소드와 함께 삿갓선생이 조선 제일의 시선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매우 놀라더이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요?”
“조선 제일의 시선이란 말씀은 과찬이시고요, 추월이란 기생과는 그저 잠시 스쳤을 뿐입니다.”
김삿갓은 범우화상의 간곡한 권유로 심원사에 보름 동안 머물며 인근 명승지도 돌아보고 밤이면 범우화상과 시담도 나누었다.
산을 내려온 김삿갓은 허름한 객점에 여장을 풀고 독서에 열중했다. 살을 에는 강추위로 나들이가 편치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두툼한 솜두루마기를 걸친 한 여인이 김삿갓을 찾아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이십대의 여인은 초대면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김삿갓을 알아보고 인사를 올렸다.
“저는 강계기생 추월이라고 합니다. 전날 인풍루에서는 미처 몰라 뵙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하하하. 자네는 시가에도 뛰어나고 학문도 깊다던데, 이제 보니 예절도 제법이네그려. 날이 추우니 우선 안으로 좀 들어오게.”
방안에 들어선 추월은 김삿갓에게 큰절을 올리더니 다시 한 번 용서를 빌었다.
추월로서는 누군지 모르고 김삿갓을 매정하게 몰아세운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 같은 천하절색이 찾아준 것만도 삼생이 기쁠 일인데 용서라니, 지난 일일랑 다 잊게나.”
추월은 심원사에 불공드리러 갔다가 범우화상으로부터 김삿갓의 얘기를 듣고는,부끄럽고 죄송하여 그날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강계읍내의 객점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죄하는 뜻에서 오늘부터 선생님을 저희 집에서 모시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해주시옵소서.”
황진이의 ‘漁’ 자 화답보다 훨씬 진솔한 접근이었다. 몇 차례 실랑이 끝에 김삿갓은 못 이긴 척 추월을 따라 나섰다. 강경 제일의 기녀가 행색이 초라한 노인을 모셔가는 모습에 객점 주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추월의 집은 인풍루가 아득히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있었다. 집은 초가였지만 드넓은 마당에는 몇 백 년 된 적송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 추월의 기상을 엿보게 했다.
“소나무가 자네를 닮은건가, 자네가 소나무를 닮은건가?”
“이 소나무 때문에 시세보다 몇 갑절 더 주고 이 집을 샀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저 노송의 독야청청을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참으로 정신이 맑은 여인이었다. 바람벽에는 시 한 폭이 걸려 있었다.
富貴功名可且休 세상의 부귀영화 탐내지 않고
有山有水足遊遊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노닐어보세.
與君共臥一間屋 정든 임 모시고 호젓한 오두막에서
秋風明月成白頭 갈바람 밝은 달빛 아래 늙어나지고.
기생 조운이 남지정이라는 선비에게 보낸 연시였다. 추월이 떠다주는 물에 소세를 하고 나니 옷장에서 새 솜옷 한 벌을 꺼내 내밀었다.
“범우화상님으로부터 선생님 말씀을 듣고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 모시겠다는 일념에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인풍루에서 얼핏 뵌 모습을 떠올리며 치수를 가늠했는데, 잘 맞을지 걱정이옵니다.”
김삿갓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여인으로부터 이런 후대(厚待)를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이윽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옷을 입어보니 매일 보는 부인이 지은 옷보다 더 잘 맞았다. 옷이 날개라 했던가, 다른 사람처럼 준수하게 변한 김삿갓의 용모에 잠시 추월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왔다. 추월은 어느새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음식솜씨는 정갈하고 담백했다. 그 중에서도 강계 지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싸장찌개 맛은 천하일품이었다. 강계 특산주인 인삼주는 늙은 김삿갓의 마음을 말끔히 풀어주었다. 저녁상을 물리자 추월은 다시 조촐한 주안상을 들여왔다.
“이보게 추월이. 평생 운수객으로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대접은 처음일세. 오늘이 마침 섣달그믐이니, 자네 덕분에 오늘로써 지난 일 년 간의 시름을 모두 잊고자 하네. 진정 고맙네.”
“고맙다는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부끄럽사옵니다. 섣달그믐에는 잠을 자지 않는 법이니 오늘은 선생님과 함께 이 밤을 지새우고자 합니다.”
말을 마친 추월은 거문고를 내려 줄을 고르더니 자작시 한 수를 병창하기 시작했다.
歲暮寒窓客不眠 한해가 저무는 밤 나그네 잠 못 이루고
思兄憶弟意悽然 형님 생각 아우 생각 심사가 처연하구나.
孤燈欲滅愁歎歇 등잔불 가물가물 시름 참기 어려워
泣抱朱絃饌舊年 거문고 껴안고 가는 해를 보내노라.
“어허, 천만리 강계 땅에 자네 같은 범상한 시인이 있는 줄은 몰랐네. 허난설헌을 뛰어넘는 시재일세 그려. 그 위에 손수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까지 부르니, 아무리 재주를 갖춘 선녀라 한들 자네를 능가하지는 못하리로세그려.”
“그리 놀리시면 부끄럽사옵니다. 외람되오나 앞으로는 선생님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실테니 깨우침을 주실 시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에 김삿갓은 눈을 감고 지나온 발자취를 회고한 뒤 붓을 들어 장시를 써내려갔다. 초대면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할 정도로 자신을 극진히 존경하는 어여쁜 여인에게 사표가 될 훈시(訓詩)였다. 장장 여덟 연이나 되는 칠언절구 가운데 뜻이 가장 웅장한 첫 연만 소개한다.
造化主人籧盧場 천지는 조화주가 만든 객점
隙駒過看皆如許 말을 달리며 틈새로 엿보는 것이로다.
兩開闢後仍朝暮 낮과 밤이 두 세계로 서로 엇갈려
一瞬息間渾來去 눈 깜짝할 사이에 오가누나.
추월은 숨을 죽인 채 김삿갓의 웅혼한 인생철학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심원사 범우화상으로부터 김삿갓이 천지를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겪은 얘기는 들었지만, 그 모진 고난의 일대기가 이토록 정연한 사상으로 정리되어 펼쳐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삿갓이 마지막 연을 쓰고 붓을 놓자 추월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을 왈칵 쏟으며 김삿갓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추월은 비단 금침을 깔고 존경하는 스승이자 흠모하는 정인을 이불 속으로 인도했다.
김삿갓은 말년의 호강을 만끽했다.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추월의 안내를 받으며 강계 일대의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좁은 강계 땅에 두 남녀의 로맨스는 금방 큰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뭇 유람객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면서, 때로는 시문을 읊고 때로는 추월의 탄주를 들으며 신선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추월은 늘 불안했다. 하늘같은 임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였다. 그럴수록 추월은 온갖 정성을 다해 스승을 모셨고, 밤이면 기교를 총동원하여 임을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온갖 정성을 다해 운우지정을 나눈 뒤 추월이 간곡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선생님. 제 평생에 가장 간곡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소녀가 선생님을 평생 모셨으면 합니다. 부디 간절한 소망을 받아주십시오.”
김삿갓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추월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인이었다. 절대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 방랑벽이 도져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게 될지, 그건 자제력의 영역 밖이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나로서도 가슴이 아플 따름이구나.”
늙어서였을까? 김삿갓은 느닷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인의 눈물을 본 추월은 흐느끼며 김삿갓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평생 시선의 영혼을 지배해온 자유분방한 행적이 쉬 바뀌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직접 말을 듣고 보니 인생이 끝난 듯 막막하기만 했다. 김삿갓은 추월을 껴안고 진정을 담아 위로했다.
“설사 이별의 날이 온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말게. 학명재음(鶴鳴在陰)하면 기자화지(其子和之)라고, 어미 학이 그늘에서 울면 멀리 떨어져 있던 새끼 학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를 가슴 깊이 묻고 살면 곁에 있는 것과 무에 그리 다를 바가 있겠는가.”
“선생님 말씀 명심하고, 그리 생각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날 밤 추월은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다해 몇 번이고 정인을 받아들였다.
온 산천에 봄이 깊어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산천경개를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지만, 김삿갓의 붓끝에는 힘이 떨어졌고 추월의 노랫소리에는 윤기가 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새복이었다. 김삿갓이 각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추월도 놀라 따라 일어났다.
“여보게. 나 오늘 홍성엘 좀 가봐야겠네.”
“무슨 일이옵니까?”
“어머니가 외가에서 소복을 하고 나타나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부르셨네.”
추월은 까부러지려는 의식을 억지로 가누었다. 홍성이면 강계에서 천리가 넘는 먼 남쪽 땅, 기어이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소복을 하고 나타난 게 집안에 상사(喪事)가 있다는 현몽(現夢)인지 강계를 뜨고자하는 김삿갓의 잠재의식이 표출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어느 경우든 만류할 수 없는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추월은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 이른 조반을 준비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몇 번이나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독로강 나루에 이를 때까지 두 연인은 말이 없었다. 이것이 영영 이별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로써 그 운명을 바꿀 수도 없었다. 이윽고 나룻배가 도착했다. 김삿갓은 이윽히 추월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배에 올랐다. 추월도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억누르며 배에 오르는 정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에 오른 김삿갓은 몸을 돌려 일그러진 추월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배가 출발했다. 추월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정인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다가, 김삿갓을 바라보며 그예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배가 반대편 기슭에 닿을 때까지, 두 정인은 애절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24. 人生이란 원래 夢中夢이 아니든가
김삿갓은 밤잠을 줄이고 길을 재촉하여 보름 만에 홍성에 닿았다. 여정을 줄이기 위해 때를 거르기 일쑤였다. 두 끼를 굶은 채 홍성에 당도한 김삿갓은 어느 객점에 들러 이른 저녁을 시켰다. 70줄의 노인이 밥을 내왔다.
“주인장. 여기서 고암리를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김삿갓은 어릴 때 한 번 어머니와 함께 외가를 다녀간지라 길이 설었다.
“왼쪽으로 가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삼십 리 지경에 있소만, 뉘 댁을 찾아오셨소?”
“이길원이라는 분의 댁을 찾아가는 길입니다만…”
“저런! 어디서 오시는지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 분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오. 게다가 보름 전에는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그 댁에 와 계시던 매씨 되시는 분도 돌아가셨다던데…”
김삿갓은 하마터면 밥숟갈을 떨어뜨릴 뻔했다. 보름 전이라면 소복을 입고 꿈에 나타나 김삿갓을 부르던 바로 그날 아닌가! 그러나 애써 격정을 억눌렀다.
“손님은 그 댁과 가까운 친척이시오?”
“아, 아닙니다. 그저 먼 친척으로 인사차 한번 들릴까 했는데…”
“쯧쯧, 안됐구려.”
김삿갓은 그길로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는 30여 년 전 집을 나설 때가 인연의 끝인 모양이었다. 외숙모는 외삼촌보다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내처 외가에 머물며 외사촌들을 돌보다 거기서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새삼 찾아가 성묘를 하고 재를 지낸들 번거롭기만 할 뿐 모두가 부질없는 일 아니겠는가. 더욱이 외사촌들과 마음에도 없는 언사를 섞기가 영 내키지 않아 발길을 거둔 것이었다.
30여년을 유리걸식하며 한 번도 어머니를 모신 적이 없었지만, 어디엔가 살아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을 기댈 언덕이 되었었다. 김삿갓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낮과 밤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며, 얻어먹는 신세일망정 끼니도 제때 챙기지 않았다. 이윽고 부여에 당도했을 때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해골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김삿갓은 봄비를 맞으며 부소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를 잃은 처연한 심경에 백제 멸망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어우러져 더욱 스산했다. 김삿갓은 삼천궁녀가 뛰어들었다는 낙화암 위 백마정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잃은 한을 달랬다.
김삿갓은 부소산을 내려와 객점에 들었다. 몽중몽(夢中夢)이란 이름을 가진 객점은 규모는 작았으나 밖에는 복숭아나무 밭 복판에 작은 연못을 조성해놓아 제법 운치가 있었다. 술을 시키자 서글서글하게 생긴 40대 주모가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르며 농을 걸었다.
“못난 색시가 달밤에 갓을 쓰고 다닌다더니, 노인장께서는 늙수막에 왜 삿갓을 쓰고 다니시우?”
“이 사람아.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도 피하는 데는 삿갓만한 물건이 없다네. 특히나 술을 마시다 돈이 없을 때 도망가는 데는 가장 요긴한 물건이지. 삿갓만 벗으면 주모가 내 얼굴을 알아볼 턱이 없지 않은가.”
객쩍은 농담에 사람 좋은 주모가 허리를 꺾으며 웃는 바람에 김삿갓도 모처럼 온갖 시름을 잊고 파안대소했다.
“그런데 객점이름을 어째서 ‘몽중몽’이라 지었는가?”
“쇤네도 한잔 주셔야지 공으로 들으시려우?”
“이런, 미안허이. 내 술 인심이 야박하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자네 미색에 정신이 혼미해진 듯하이.”
“오호호호호. 이 나이에 미색이라니요, 농담이라도 술맛이 절로 나겠수.”
주모는 대참에 한 잔을 죽 비우더니 간략하게 ‘몽중몽’의 유래를 설명했다. 읍내 기생으로 한창 잘나갈 때 그녀를 짝사랑하는 70객이 있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기방으로 찾아와 그녀만 찾았다. 그녀가 다른 손님을 받을 때면 술좌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모셔도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노인의 청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노인과 방사를 치르는 꿈을 꿨다. 그녀는 다음날로 노인을 찾아가 자진해서 몸을 허락했다. 필시 하늘의 뜻이라 여겨서였다. 그날부터 술자리가 끝나면 매일 노인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후에는 노인의 양물이 서질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기녀를 그만두자 노인은 이 술집을 차려주고 계속 뒤를 돌봐주었다. ‘몽중몽’은 꿈속의 인연을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 어른은 아직 생존해계신가?”
“웬걸요.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자 술장사를 중단하고 본댁과 별도로 삼년상을 치러드린 뒤 지금까지 수절하고 지낸답니다.”
“어허, 열녀로고. 이 이악한 세상에 자네처럼 신의를 존중하는 사람은 처음이로세. 내 이 고장은 처음이지만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나 참으로 감격했네.”
김삿갓은 한 잔 그득 술을 따라 주모에게 권했다. 술이 떨어지자 주모는 술상을 내가더니 새로 한 상 차려 내왔다.
“오랜만에 다 늙은 퇴기를 알아보시는 선비님을 만났으니 지금부터는 쇤네가 대접하리다. 지금부터 쇤네를 연월이라 불러주시우. 제 기명이었답니다.”
연월은 주량도 만만찮았다.
“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숱한 기녀들과 술을 마셔봤지만, 자네처럼 주량이 센 여인은 처음일세그려.”
“주량이란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침 유장한 백마강을 배경으로 풀을 뜯던 송아지가 ‘음매~’하고 울었다. 김삿갓은 취기가 몽롱한 가운데 시심이 일어 혼잣말로 그 정경을 읊조렸다.
白馬江頭黃犢鳴 백마강 가에서 누른 송아지가 울고 있네.
연월이 제꺽 대구를 놓았다.
老人山下少年行 노인산 아래로 소년이 걸어가네.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연월이 대구를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김삿갓이 白과 黃을 대조적으로 배치한 데 대해, 연월은 老와 少로 화답하지 않는가! 김삿갓은 뒤를 이어 한 구절 더 읊었다.
澤裡芙蓉深不見 연못 속의 부용꽃은 물이 깊어 보이지 않네.
園中桃李笑無聲 뜰에 있는 복사꽃은 웃어도 소리가 나지 않네.(연월)
이번에는 부용꽃을 복사꽃으로, 不見을 無聲으로 받은 것이다. 아득히 강계기생 추월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김삿갓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자네 솜씨는 가히 진랑(眞嫏. =황진이)을 능가하이.”
“점잖은 선비들의 주석에서 들은풍월로 익힌 재주이오니 너무 놀리지 마세요.”
이윽고 주석을 파하고 자리에 눕자 살며시 문이 열리며 연월이 들어섰다. 그녀는 선 채 사그락거리며 옷을 벗더니 이불을 들추고 김삿갓 옆으로 파고들었다.
“쇤네 퇴기라 하나 밤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허물치 마시고 고단한 여독이나 푸셔요.”
연월은 비록 40줄이라 하나 조이는 맛은 10대를 방불케 했으며, 뭇 남정네들의 발길을 끌던 테크닉은 그예 동이 훤히 틀 때까지 한숨도 잠을 재우지 않았다. 퇴기 연월의 기막힌 기교와 환대에 끌려 몽중몽에서 닷새 동안 운우를 즐긴 김삿갓은 그녀가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술값을 셈하여 남겨두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구두레나루에 오니 마침 강경 가는 배가 있어 선장의 허락을 받고 배에 올랐다. 김삿갓은 사흘 만에 강경에 도착하여 선장에게 백배 사례하고 남행을 계속했다.
25. 고단한 남도 여정
익산을 거쳐 옥구에 이르렀을 때는 가을이 깊어 있었다. 그해에는 하필 전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밥을 얻어먹기가 억수로 힘들었다. 스무 집을 더터야 겨우 한술 얻어먹을까 말까 했다. 강계를 떠날 때 추월이 바랑에 몰래 넣어놓은 노자는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였고, 추월이 지어준 봄옷도 헤져 쌀쌀한 가을바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질녘에 어느 마을에 당도하여 집집마다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으나 하나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밥은 안 주셔도 되니 잠만 좀 잡시다.”
“아무리 흉년이라도 잠만 재우고 밥을 안 줄 수는 없는 법, 이 동네는 특히 흉년이 심해 어느 집을 가도 마찬가지일게요. 저쪽 고개를 넘어가면 큰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김 진사 댁이오. 가근방에서는 가장 택택한 집이니 거기 가서 한번 부탁해보시오.”
김삿갓은 고단한 다리를 움직여 고개를 넘었다. 노구에 몸살기운까지 겹쳐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김삿갓은 힘없는 손길로 김 진사 댁 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손님을 맞을 형편이 못되니 다른 집을 찾아보시오.”
김 진사인 듯한 주인은 김삿갓의 손에 엽전 두 냥을 쥐어주고는 돌아서 대문을 닫아걸었다. 김삿갓은 비감에 잠겨 손바닥에 놓인 엽전 두 닢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시를 한 수 써서 대문에 붙여놓고 발길을 돌렸다.
沃溝金進士 옥구에 사는 김 진사
與我二分錢 내게 엽전 두 푼을 주네.
一死都無事 죽으면 이런 괄시는 안 당할 터,
平生恨有身 살아 있는 게 한이로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이즈음엔 죽음이라는 명제가 김삿갓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구를 벗어나니 산 밑에 움막이 하나 있었다. 상여집이었다. 아무려면, 김삿갓은 안으로 들어가 상여 위에 몸을 눕혔다. 김삿갓은 몸살로 인한 신열에 금새 잠이 들었다.
“여보시오. 좀 일어나보시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김삿갓은 눈을 떴다. 문전박대를 하던 김 진사였다.
뒤에는 초롱불을 든 하인이 서 있었다. 동네 사정이 뻔하니 상여집 아니면 잘 곳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쉬 찾은 모양이었다.
“선생이 써 붙여놓은 시를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소이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김 진사라고 하오. 요즘 거지가 하도 많다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큰 결례를 했소.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모시겠소이다.”
김삿갓은 목이 멘 채 김 진사를 따라갔다.
늦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온 고을이 흉년인 가운데도 가세가 넉넉한 집인지라 가양주(家釀酒)도 별미였다.
“선생의 시를 보고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떠올라 종놈을 데리고 찾아 나섰소. 다름이 아니라 내 직접 아홉 살 먹은 손자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선생에게 좀 부탁할까 하오. 초대면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나 제발 청을 받아주기 바라오. 내 사례는 넉넉히 하리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체질이나 몇 달 동안이라도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봄이 되면 언제 떠날지 나 자신도 모르니 그 점은 양해하기 바라오.”
겨울 한 철, 김삿갓은 성심을 다해 아이를 가르쳤다. 김 진사도 이따금 김삿갓의
강의를 들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봄이 왔다. 아이를 가르치며 겨울을 나는 동안 몸살도 완치되고 근력도 붙었다. 김삿갓은 아침 일찍부터 관내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잠들어 있던 시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옥구는 삼한시대 때 막로국의 도읍으로 김삿갓의 발길을 붙잡는 오래된 고적지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삿갓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랑을 메고 김진사 집을 나오는 길로 영 발길을 돌렸다. 김 진사가 약속한 넉넉한 사례는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마음은 가벼운데 몸은 전 같지 않았다. 길을 걷노라니 옆구리도 결리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자연경관보다는 지나온 일에 생각이 집중되는 심리도 생경했다. 평생 남의 신세만 지며 살아왔지만 마음먹고 못할 짓을 한 적은 없어 마음은 가벼웠다. 의협심에 역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적도 노상 없지만은 않았다. 짐짓 조정에서 밀령을 띠고 내려온 어사 행세를 하며 권세만 믿고 민가에 패도를 행하고 재산을 갈취한 지방수령들을 혼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길은 어느새 전주에 이르렀다. 견훤이 일으킨 백제(후백제라는 용어는 후세 사가들이 온조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고, 견훤의 치세에는 그냥 백제로 불렀다.)의 수도 전주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성계의 본향이라 경기전이라는 이궁(離宮)을 축조해놓아 볼거리도 많았다. 김삿갓은 며칠에 걸쳐 고덕산 만경대, 모악산 귀신사와 보광사, 감영 동헌 후원의 진남루, 북촌에 있는 덕진호와 풍월정 등을 둘러보고 남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있어 전주에서 남원까지 가는 길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김삿갓은 노숙에 솔잎도 따 먹고 풀뿌리도 캐 먹으면서 고된 행보를 계속했다. 몸은 탈진을 거듭하여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아무데나 주저앉으면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잠이 들곤 했다. 예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은 남의 세계에 잠시 빌붙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남의 것인지 굳이 구분할 건 뭐란 말인가? 죽으면 모든 게 다 無로 돌아간다지만, 살아 있다고 有한 것은 또 무엇인가? 풍찬노숙하며 김삿갓이 남원에 이른 것은 전주를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김삿갓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광한루원으로 갔다.
광한루원은 호남팔경 중 으뜸이었다. 광한루에 올라 오작교를 굽어보며 춘향과 이몽룡의 로맨스를 상기하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행락객들의 흥타령이 분분했다. 김삿갓은 감흥에 겨워 고단한 신세도 잊은 채 시를 한 수 읊었다.
千里筑鞋孤客到 머나먼 천리길을 외로이 찾아드니
四時笳鼓衆仙遊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銀河一脈連蓬島 은하는 선경에 잇닿아 있으니
未必靈區入海求 굳이 바다 속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
김삿갓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한 팀에서 술잔을 권했다. 몸이 쇄약한 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일찌감치 취기가 올랐다. 김삿갓은 행락객들의 요청에 사양도 않고 잇따라 즉흥시를 읊조렸다. 더러 알아듣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소린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며칠 잇달아 광한루원엘 오다 보니 일부러 초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김삿갓은 광한루원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번은 노인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술을 얻어마시던 중 계화라는 노기(老妓)의 시를 듣고 그 애절함에 깜짝 놀랐다.
緻罷氷紗獨上樓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누각에 오르니
水晶簾外桂花秋 수정 발 저편에 계수나무 꽃 피었네.
牛郞一去無消息 정든 임 떠나신 후 소식조차 끊어지니
烏鵲橋邊夜愁愁 밤마다 오작교 주변을 거닐며 수심에 잠기네.
“아니, 연인이 언제 떠났기에 그리도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가?”
노기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떠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마치 어제인 듯하옵니다.”
“어허, 그 순정이 참으로 고운지고.”
문득 강계기생 추월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있는 주석에서도 내 가슴이 이리 애절할진데, 홀로 있는 추월은 얼마나 애가 탈까!
김삿갓이 광한루원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행보를 잡은 것은 가을로 접어들어서였다. 봄에서부터 한여름을 광한루에 나와 매일 이 술판 저 시회를 기웃거리며 행락객들과 어울려 소일했던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500쌍의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동방의 삼신산, 그 삼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나 지리산을 오르기에는 체력이 달려 김삿갓은 언저리를 돌아 진주를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26. 강경의 겨울나기
진주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가을이 깊어 낙엽이 거의 다 졌을 때였다. 김삿갓은 진주성으로 발길을 옮겨 촉석루에 올랐다.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에는 나무 한 그루 돌부리 하나에도 나라를 지키다 거룩하게 순국한 선조들의 넋이 깃들어 있었다. 김삿갓은 김시민 장군 김천일 장군 최경회 장군 황진 장군과 최경회 장군의 부인 논개 등을 회상하며 촉석루 난간에 앉아 유장하게 흘러가는 남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강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만 무수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촉석루를 둘러보니 충절의 유적지답게 선조의 넋을 기리는 수많은 현판시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진주성을 내려와 하룻밤 신세질 집을 찾았다. 젊은 시절에는
노숙도 마다 않았으나 이제는 찬 데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해소병으로 기침이 심하고 온 몸이 쑤시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거, 삿갓선생 아니시오? 진주 땅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소.”
10여 년 전 평양 연광정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이북천이었다. 나라걱정 백성걱정이 심해 김삿갓이 우국지사라는 별명을 지어준 선비였다.
“아니, 우국지사 아니시오? 여긴 어쩐 일이오?”
“나도 삿갓선생처럼 유리걸식하는 신세 아니오. 발길 따라 가는 것이지 작정하고 왔겠소?”
두 사람은 객점으로 갔다.
“평양에서 만났을 때 노형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정치가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암행어사로 내려온 것이오?”
“으하하하. 삿갓선생의 농은 여전하시구려. 애를 써봤지만 시운이 따르지 않더이다.”
우국지사는 상굿도 권력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우국지사께서는 어디로 갈 작정이오?”
“남해섬이 멀지 않으니 그리로 가볼까 하오. 삿갓선생은 어디로 가려 하오?”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났으면 하오만, 운수객의 팔자가 마음대로 되는 게 있어야 말이지요.”
“그렇다면 강진고을로 가시지요. 안 진사라고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내 서한을 써드릴테니 한번 가보시구려. 박대는 하지 않을 것이외다.”
“일면식도 없는데 그리 폐를 끼쳐도 될는지…”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안도 부유하지만 풍류를 아는 친구라 아마도 삿갓선생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을게요. 모르긴 해도 대접이 융숭할 것이외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그나저나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으니 매우 안타깝소이다.”
김삿갓은 섭섭한 마음을 시로 읊조렸다.
素志違其卷 우리 서로 뜻한 바는 달라도
同心己白頭 마음은 같은데 벌써 백발이 되었구나.
明朝南海去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江月五更秋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으리.
우국지사와 이틀 낮밤을 통음한 뒤 김삿갓은 아침 일찍 강진을 향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병이 깊은데다 주독이 심해 걸음이 무거웠다. 절이나 서당을 만나면 며칠씩 쉬기도 했지만 병은 점점 깊어갔다. 시름시름 강진고을 안 진사 댁에 당도한 것은 섣달 그믐께였다. 안 진사는 김삿갓이 내민 우국지사의 소개장을 읽어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젯밤 길몽을 꾸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했더니 귀한 손님이 찾아주셨소이다. 어서 드시지요.”
안 진사는 김삿갓을 정중하게 사랑방으로 맞아들였다.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북천이 소개장에서 몸이 편치 않으시다 했소만, 직접 뵈니 병색이 매우 우중한 것 같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시면서 조리
하시구려. 마침 강진은 겨울에도 큰 추위가 없으니 조리하기에는 그만입니다.”
“이거 초대면에 폐가 너무 많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 같은 천학(淺學)을 찾아주신 것만도 영광이지요. 그저 내 집이거니 하고 편하게 지내십시오.”
간단하게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든 뒤, 안 진사는 김삿갓을 별당으로 안내했다.
집 뒤로는 낮지만 나무가 울창한 산이요 사랑방 문을 열면 강진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휴양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에 따뜻한 잠자리를 얻어 금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안 진사의 보살핌은 마치 부친을 모시듯 극진했다. 사랑방에서 노독(路毒)을 다스리며 며칠을 쉰 뒤, 김삿갓은 집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낮지만 산세가 험해 정상까지는 무리여서 중턱까지만 올랐는데, 중턱 편편한 곳에는 마침 망해루(望海樓)라는 정자가 서 있었다.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올라서면 강진만이 끝까지 내려다보여 조망(眺望)이 시원했다. 숱한 시인묵객들이 거쳐 간 듯 누각에는 많은 현판시가 걸려 있었다. 때로는 안 진사와 함께 올라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했다. 안 진사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검소하며, 하인들에게도 인자하게 대하는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동네 글방의 훈장이 사정이 있어 출타할 때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농사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안 진사는 강진고을의 정신적 지주였다.
김삿갓이 거처하는 별당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주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를 정연하게 심어놓았고, 수초가 무성한 연못 안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겨울이 가고 봄이 되니 연못에서는 개구리들이 모여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창문을 열고 개구리의 화음을 들으며 한나절을 보내기 일쑤였다. 자연이 소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김삿갓은 붓을 들었다.
斑苔碧草亂鳴蛙 방초 푸른 늪에 개구리소리 요란하고
客斷門前村路斜 인적 없는 문밖에는 시골길이 한가롭네.
山雨驟來風動竹 소나기 오고 바람 부니 대나무가 흔들리고
澤魚跳濺水翻荷 물고기가 뛰어오르니 연꽃이 따라 춤추네.
“시에 힘이 넘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쾌차하신 모양이구려.”
시를 읽은 안 진사는 자기 일인 듯 반겼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오늘은 날씨도 따스하고 하니 금곡사엘 좀 다녀옵시다.”
김삿갓은 안 진사를 따라 나섰다. 금곡사는 보은산에 있는 고찰이었다. 금곡사 입구에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 둔덕에 집채보다 큰 바위가 마주 서 있었는데, 마치 싸움닭 두 마리가 으르릉거리며 서 있는 형상이라 예로부터 쟁계암(爭鷄岩)이라 불려오고 있었다.
“금곡사가 번창하지 못하는 것은 입구에서 닭 두 마리가 싸우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삿갓선생께서 저들의 싸움을 좀 말려주시지요.” 김삿갓은 바랑을 내려 지필묵을 꺼냈다.
雙岩並起疑紛爭 두 바위가 마주 서서 싸우는 것 같으나
一水中流解忿心 중간에 개울이 흘러 분한 마음 풀어주네.
“역시 시선이십니다. 그리 보면 될 것을 다들 싸우고 있는 것으로만 해석했으니…”
안 진사는 크게 깨우친 듯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금곡사가 자리 잡고 있는 보은산 자락은 남향이어서 어느새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를 보자 각중에 깊이 잠들어 있던 방랑벽이 깨어났다. 김삿갓은 말없이 시를 한 수 써서 안 진사에게 건넸다.
遠客悠悠任病身 먼데서 온 나그네가 오래도록 병을 빙자하여
君家蒙恩且逢春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게 되었소.
春來各自東西去 봄이 왔으니 동서로 뿔뿔이 헤어져야 하니
此地看花是別人 이곳 꽃구경은 다른 사람과 하시오.
“아니 이대로 떠나시려오? 아직 몸도 완쾌되지 않으셨는데…”
“그 동안 폐가 너무 컸소이다. 이만하면 쾌차했으니 떠날 때가 되었지요.”
“이거 섭섭해서 어찌합니까? 그래, 어디로 가시려오?”
“워낙 정처 없는 걸객이라 발길 닿는 대로 다니지만, 화순고을 적벽강의 봄경치가 좋다 하니 우선 거기를 먼저 들릴까 합니다.”
“그러시다면 마침 잘됐소이다. 화순군 동북면에 가시면 신석우라고, 내 막역한 동무가 있소이다. 소개장을 써드릴테니 화순에 당도하시거든 꼭 들리시오.”
전 재산이라곤 등에 짊어진 바랑 하나, 따로 행장을 차릴 것도 없었다. 김삿갓은
안진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휘적휘적 길을 떠났다.
27. 신선이 된 김삿갓(마지막 회)
강진에서 용천사를 거쳐 가지산 보림사까지, 200리 길을 오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몸에 이상이 있어 걸음이 더뎌졌기 때문이었다. 가지산은 예로부터 ‘천하의 기운에 땅에 떨어져 내를 이루고 공중에 쌓여서는 산을 이룬 곳’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났다. 보림사는 가지산의 정기를 온통 다 받은 명찰이었다. 보림사를 한 바퀴 둘러본 김삿갓은 풀밭에 누워 피로를 달래며 한탄의 시를 읊었다.
窮達在天豈易求 잘살고 못사는 것은 천명이라 맘대로 안 되는 법
從吾所好任悠悠 나는 내 뜻대로 유유자적 살아왔네.
家鄕北望雲千里 고향하늘 바라보니 천릿길 아득한데
身勢南遊海一漚 남녘을 헤매는 신세 물거품과 같도다.
掃去愁城盃作箒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마캉 쓸어버리고
釣來詩句月爲鉤 달을 낚시 삼아 시를 건져 올리면서
寶林看盡龍泉又 보림사 용천사를 두루 구경하고 나니
物外閑跡共比丘 내 마음 욕심 없어 승려와 다름없네.
그로부터 10여일 뒤, 김삿갓이 화순 동복면에 있는 신석우의 집을 찾아들었을 때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신석우는 뒤안 초당에 거처를 마련해준 뒤 후하게 대접했다. 다음날 신석우는 김삿갓의 요청에 따라 그를 적벽강으로 데리고 가 놀잇배를 하나 빌려주었다. 하늘은 맑고 강바람은 시원한데, 강 둘러싸고 있는 절경은 가히 호남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할만 했다. 적벽강이 오죽 아름다우면 화순군수 자리를 두고 서로 오려고 다투었겠는가. 일엽편주를 타고 사방을 둘러보니 예가 바로 선계(仙界)였다.
‘아하, 여기가 내 안식처로는 적격이로구나.’
김삿갓은 배 바닥에 드러누워 두둥실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과 구름은 30여 년 전 영월 땅을 떠날 때의 그 하늘이요 그 구름이언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죽음을 눈앞에 둔 노년이 되었단 말인가.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강계 제일의 명기 추월이었다. 김삿갓은 추월을 떠올리자 너무나 가슴이 아려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양양 땅 어느 산골 훈장의 딸 홍련과 보낸 하룻밤도 생생했다. 방랑길에 맺은 첫 인연이었다. 첫 경험인데도 홍련은 김삿갓에게 커다란 운우지락을 안겨주었다. 금강산 장안사의 불영암에서 공허스님을 만나 시 짓기 내기를 하던 추억도 새로웠다. 초대면인데도 백년지기처럼 뜻이 통하여 몇 달간 어울려 지낸 일은 이후 두고두고 새로운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함흥기녀 소연을 만나 행복하기 그지없는 6개월을 함께 보낸 추억도 잊을 수 없었다. 10년 만에 영월 어둔리에 있는 본가에 들러 처음 만난 둘째아들에게 익균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기억은 가슴을 에었다. 그리고는 이내 방랑길에 올랐으니 어린 아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개풍 진봉산에서 철쭉꽃을 꺾으려다 벼랑에서 떨어진 일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천석사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반년 동안 정성껏 간호를 해준 안산댁의 정성도 잊을 수 없었다. 곡산땅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 동무들과 겨울을 났던 일도 즐거운 추억으로 올랐다. 평양갑부 임진사 댁에서 동기 삼월과 뼈가 흐늘흐늘해질 정도로 즐긴 방사는 워낙 화끈하여 그 동안 가장 자주 떠오르곤 했었다.
객점을 하던 애비 일로 평양기생 죽향을 만나 함께한 시간도 흐뭇한 추억이었다. 상중이라 비록 살을 섞을 수는 없었지만 정은 누구보다 듬뿍 들었었다. 꿈에 어머니만 현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를 더 오래 머물렀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홍성까지 내려가 어머니의 부음을 확인한 일은 인생무상을 절실하게 해줬을 뿐 크게 슬프거나 허망하지는 않았다. 부여의 몽중몽이란 객점에서 퇴기 연월과 즐긴 닷새간의 추억은 마지막 일이라 가장 생생했다. 남정네 경험이 많았던 덕에 연월은 온갖 기교로 힘이 떨어진 김삿갓의 음심을 북돋워주었다. 진주에서 우연히 옛 길동무 우국지사를 만나 그의 소개로 강진 안 진사 댁에서 한겨울 신세를 진 일도 새삼스러웠다. 결국 덕분에 신석우라는 초대면의 선비를 만나 이렇게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회고를 마치고는 지난 일생을 조망하는 시를 읊었다.
鳥巢獸巢皆有居 새도 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顧我平生獨自傷 나는 한평생 홀로 슬프게 살아왔네.
芒鞋竹杖路千里 짚신에 지팡이 짚고 천리길을 떠돌며
水性雲心家中方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일세.
尤人不可怨天難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은 아니로되
歲暮悲懷餘寸腸 매년 해가 저물 때면 홀로 슬퍼했다네.
이후에도 시는 열네 연이나 계속되지만, 이미 우리가 따라온 발자취를 정리한 것이므로 생략한다. 시를 다 지었을 즈음에는 이미 의식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김삿갓은 마음이 환해지는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이승의 의식이 단절된 그의 귀에 어디선가 마지막으로 짧은 시 한 구절이 들려왔다.
乘彼白雲 저 흰 구름을 타고
羽化登仙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때는 강화도령 철종 14년(1863) 3월 29일, 향년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