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와 골부리 도리원 앞 봉황천은 자갈로 깔려 깨끗한 강물이 흘러 물이 맑아 일급수의 물이 흐르던 곳이다. 6.25 전쟁 직후까지 자연보존이 잘 되었을 때는 사계절 내내 아침 저녘으로 낚시나 사발무지로 밥반찬 정도는 해결이 되었으며, 특히 비내리는 날에는 부녀자들이 줄지어 골부리를 건져 골부리국을 끓여 이웃간에 나누어 먹었다. 지금은 추억 속에서만 남아 있고 오염된 상태에서 그저 바라만 보는 안타까움이 있다. 물고기와 골부리는 한때 도리원의 큰 자랑거리였다. 고기를 잡아 사발로 파는 사람도 있었는데 부엉이덤 아래서 달빛을 휘감으며 배를 젓고 투망을 던져 생업을 보태던 아련한 선조들의 모습이 그립다. 그들을 ‘고기자아네’ 라고 하였다. 고기의 배를 따서 내장을 내고 비늘을 없애면 갖은 양념으로 끓이는데 매운탕이라 하지않고 그냥 고기를 지진다라고만 말한다.
◎ 부자집 정미소와 595차 일제 강점기부터 도리원에 큰 정미소가 있었다. 협신정미소로서 지금은 도로 신설과 함께 없어 졌다. 정미소는 이계수님이 설립하여 농민들이 줄을 지어 기다려 초만원을 이루었고 특히 정미소에는 595라는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트럭이 있어서 우리 면내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 정미소를 칭할 때면 부자집 정미소라 칭한다.
◎ 난가개 6.25 전쟁 이후 우리들의 생활은 의식주가 제일로 큰 문제였다. 5일마다 열리는 도리원 장날은 장이 파하고 어두워 질 때까지 북적거렸다. 촌에서는 갈비나 장작 등을 지게로 지고와서 팔았다. 요기를 떼우기 위한 장소로는 난가게가 있었다. 시장 중앙에 길게 띠집을 만들고 가마니로 바람막이를 한 채 긴 판자로 식탁과 의자를 놓았다. 장꾼들이 줄줄이 앉아 국수나 막걸리로 요기를 떼운다. 시끌벅적하다. 난가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시골 서민들이었다.
◎ 도가 도리원에서 마응백의 술도가와 김옥동의 어물도가가 유명했다. 상업 중심지로서 한때는 유통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술도가는 주인이 바뀌고 양조장으로 존속되고 있으나 어물도가는 없어지고 도가집이라는 말만 남아 전한다.
◎ 일본신사 설치와 근로봉사 도리원에는 일본인의 통치 흔적은 다소 전하나 신사는 다행히도 없었다. 그러나 강점말기에 쌍계천 앞 봉기덤 중허리에 신사를 설치를 하려고 계획하여 봉양초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곡괭이와 삽으로 중노동을 시켰다. 그러다가 해방이 눈앞에 다가올 즈음 공사는 중단되고 그 흔적만이 지금껏 남아 있으나 우리들은 일본천황을 신격숭배하는 일은 없었다.
♠ 말뚝무덤 어느 때부터인가 도리원의 잘룩한 뱃머리 부분에 배를 묶어두는 말뚝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었다. 또한 도리원 인근 마을인 아주신씨 집성촌인 구미에서는 잘룩한 뱃머리 부분이 허하게 보여 이를 보완한다하여 조산(造山)을 했다는 기록이 구미동지(洞誌)인 구장지(龜庄誌)에 있다. 이를 토대로 경북대 박물관 팀은 90년 10월 이 말뚝무덤을 발굴했다. 봉분을 걷어내니 진흙 판축이 나왔다. 지경이 11m에서 9.5m, 높이가 2.2m나 되는 타원형의 대형 진흙판축이구축되어 있었다. 이 판축을 절개하여 들어가 보니 불규칙한 돌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 암반을 파고 심어놓은 구멍의 지름이 30㎝ 깊이가 30㎝의 돌절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발굴 사상 이런 무덤은 처음있는 희귀한 발굴이었다. 이는 고총이라고는 볼 수 없고 구전대로 풍수지리적으로 재조명할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배를 산에다 묶아두기 위해 계주를 꽂아 놓을 수 있도록 절구형의 계주꽂이 한대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구장지(龜庄誌)에 기록되어 있는 조산(造山)도 행주형국의 도리원이 낙동강으로 떠내려가면 우백호가 허해짐으로 이를 묶어두기 위해 뱃머리 부분에 이같은 조산을 구축했을 것으로 전하고 있다.
♠ 우리면의 일정시대 교육---조양학원(朝陽學院) 1918년 도리원의 조양학원, 분명마을의 사성학원, 분토의 개사학원 그리고 안실의 사립학원이 있어 신학문을 배워 왔고, 일제의 사학 탄압에 의하여 1922년을 전후하여 폐교되었으므로 1929년 9월에 구미마을에 봉양공립보통학교 4년제가 개교되고 1941년 4월에 송산마을에 대산간이학교가 설립되었고 봉양공립보통학교는 1940년에 6년제로 바뀌면서 광복때까지 아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그 시설이 부족하여 취학아동의 절반도 수용하지 못하였다. 1918년 화전리 144번지 도리원 현 농협 후편에 조양학원이 설립되었다. 1921년 일제의 교육령에 의하여 폐교되고 조양학원은 군농회에 이관하여 면화공판장으로 활용하다가 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여 봉양중하교 설립 때까지 학교로 사용하였다. 교장으로는 신락도였고, 선생으로는 강대운 김태일 등이다. 이 부지 300여 평은 화전리 1리에 거주한 김동진,최경진, 도리원의 마응백이 기증한 것이었다.
○ 노거수 1920년 9월에 봉양면 행정기관이 새로운 터 도리원으로 옮기자 일제는 주재소, 금융조합, 우편국을 지으면서 주재소에는 느티나무, 금융조합에는 침엽수, 우편국에는 플라타나스를 서로가 상의나 한듯이 식수하였다. 안타깝게도 우편국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플라타나스는 제거되고 침엽수와 느티나무는 함께 지나온 세월을 간직한 채 지금도 마주 보고 있다.
♠ 시장 이설 김춘식 면장 기념비 봉양 면사무소 청사 밖 소재 도리원 시장은 1920년 9월 현재의 시장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도원리(구장터)에 있었다.그 당시 제방시설이 되지 않아 홍수 때마다 큰 물의 범람으로 시장을 이루지 못하여 당시 김춘식 면장의 노력으로 지금의 장소로 시장을 옮겨 저절로 제반 행정시설도 이곳으로 집중되었고 오늘의 상가를 이루는 동기가 되었다. 기념비는 처음엔 도리원 양조장 건너 시장터에 세워 두었는데 그후 봉양중학교 부근 도로변으로 일차 옮겼다가 다시 봉양지서 앞으로, 또다시 봉기마을 앞산 입구로, 지금은 면사무소 청사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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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원 장시(場市) (1993년 11월 10일 의성신문)
1.시장의 의미 전통사회의 시장은 흩어져 잇는 개개의 촌락들이 공간적으로는 2,30리의 거리, 시간적으로는 매5일마다 장날이 지정되어 판매자와 구매자를 한자리에 모은다. 이같은 원리를 통하여 전체 전통사회를 이어주고 묶어주며 의식주 생활 속에서 어떤 물건을 사용하는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장에 가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 또는 혼담이 오가며, 젊은 남녀들이 눈을 맞추어보려는 사교의 장, 아이들이 엿,사탕 또는 떡을 사달라고 부모를 조르며, 부모들은 종일의 시장함을 푸나물에 막걸리, 장터국수, 국말이 국밥에 허한 배를 채우며 입맛을 새롭게 돋구어 본다. 장날은 농민들이 지루한 농사일에 해방된 기분으로 생동감을 찾고 활기를 띈다. 그래서 ‘남이 장에가면 썩거름지고 장에 간다.’‘ 사돈 장에왔니껴’ 라는 속담도 생겨 났다. 우리의 과거 전통시장, 사라져가는 도리원 시장을 편리하지만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이 현대사회에서 되돌아 보고자 한다.
2. 시장의 역사 우리나라는 신라 소지왕 12년(490)에 처음 시장이 열려 물화를 유통시켰다. 고려시대에는 향(鄕)시장으로는 성읍(城邑)시장이 있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지역주민들이 이용했고, 교통의 요충지에는 주시장이 열렸다. 또한 역로제도가 실시되면서 전국적으로 역(驛)이 설치되고 주변에는 원(院)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원래 관리가 지방을 여행할 때 묵어가는 숙소였지만 보부상들이 이용함으로서 시장의 시초가 되는 동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향시로는 6,7일 간격으로 시장을 이루었으나, 점차 걸어서 하루거리인 3,40리 간격의 교통 요충지에 5일 간격으로 시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방시장인 향시가 삼남지방에서 발생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전국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지방 향시에서도 17세기 후반부터 개인적인 거래행위가 인정되어 장시를 출입하는 상인들로부터 일종의 장세(場稅)가 징수되었다. 동국문헌비고나 만기요람이란 책에서 보면 18세기 말에 전국의 향시는1천여 개소로 집계되고 있다. 일제강점시대인 1914년 시장규칙을 발표하여 일제의 편의대로 운영하였고, 1926년 일제가 조사한 ‘조선의 시장경제’에 따르면 1356개소의 시장을 집계하였고, 1937년에는 종전의 음력으로 헤아리던 장날을 양력으로 변경시켰다.
3. 도리원시장의 변천사 가.도리원(都里院)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의성현 역원조에 원의 하나인 도리원은 고려시대로부터 원이 설치되어 비안의 쌍계역과 금뢰면의 분토역(청로역 이전 설치)주위의 도리원은 현 화전리의 원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도리원의 원지(院址)에는 관리 및 보부상의 숙박소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고, 주위 3,40리의 요충지로서 시장형성의 지리적 요건이 형성되어, 하천면 소재지인 도원(구장터)에 시장이 개설되었다.
나. 하천시장(下川시장) 지금의 봉양면은 1920년 이전은 하천면(지금 봉양면의 남쪽 부분)이었다. 그 당시의 하천시장은 오늘날은 구장터로 불리어진다. 관련된 문헌을 살펴보면 →임원경제지 예규지 권4 8성시장조에서 하천면 4,9일장으로 나타나 있고, →증보문헌비고 서적고 향시에는 의성현의 하천장시 3,8일로 표시되어 왔으며 만기요람,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장시에서도 하천장시가 보인다.
다. 도리원(桃李院)시장 1920년까지 도원마을인 구장터에 있던 하천장시는 홍수 때마다 큰물의 범람으로 성시가 되지 못해 김춘식 당시의 면장에 의해 갈대가 무성했던 지금의 화전 2리인 도리원(桃李院)으로 시장을 이설함으로서 현재까지 80여 년간 봉양의 지명과 함께 도리원 시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라. 도리원 시장의 특수성 도리원은 대구안동간 구안선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안평 비안 탑리 군위 등 주변지역의 농산물이 집결되기 쉬운 장소로서 우시장과 어물전은 주변지역을 주관하였고, 거간 상인 들은 도리원을 중심으로 주위 5일장을 돌면서 구매품을 집결시켰으며, 일제강점기엔 독립만세를 부른 이름난 곳이며, 자유당 시절엔 선거의 유세장으로 인근 주민들이 운집한 정치의 장으로서도 이름난 곳이었다.
라. 맺음말 농경사회에서는 장날만이 물품을 구매할 수 있어 지역사람들은 5일장을 기다렸고,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일들은 장날을 맞추어 해소하고, 활기와 윤기를 찾으면서 들썩했던 그 장날이, 산업화 현대화사회에서는 대도시화로 인한 수퍼마켓 편의점 등이 생겨나서 과거 전통시장은 점차 사라지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시장은 사회사의 보고이며 민속의 창고라는 것은 옛말로 사라져 애환으로만 남고, TV나 6시 내고향 장터, 8도 큰시장 등으로 과거를 향한 애정으로만 남을 것인가. 민속의 대부분을 형성하였던 전통시장의 맥을 이을려면 지역민들 모두가 사랑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우리 것에 대한 사랑과 애착으로 우리지역의 특산물을 개발 가공하여 전문화된 도리원 시장이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 너도나도 과거처럼 도리원 시장을 보러 오게 될 것이다.
♠♠ 도리원 장터 항일 독립만세 (경북일보) 1919년 3·1운동은 서울 평양 대구에서 시작되어 학생 박상동이 독립선언서를 비안면 쌍계리에 가지고 들어옴에 이 지역 독립운동은 한층 더 열기를 띄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는 곧바로 안평면 대사리교회로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당시 대사리 젊은 청년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로 이나라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감에 단군성조 이래 이땅이 3천여 회 외침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음을 통탄하던 중, 이들은 조국의 독립에는 민족단결이 절실함을 느끼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들은 신앙심을 높여 정신단결과 심정개조를 통하여 독립에 기여할 목적으로 전도에 힘쓰던 중 3.1 만세운동이 봉기하자 대사교회의 이양준, 이종출 등 많은 동지가 합세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도리원 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도리원 장터는 도원리(구장터)에 있었고, 장날은 3일과 8일장 (현재는 4일과 9일) 이었다. 3월 18일 군중은 도리원 장으로 향해가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쳤다. 이때 만세에 참가한 군중의 행렬이 8㎞에 뻗쳐 그 선두는 봉양면 사부리 앞 흰재 목지에 이르고, 후미는 안평면 소재지에 이어져 군중행렬의 길먼지가 산야와 하늘을 뒤덮었다고 하니 그 수가 수 천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행진행렬이 흰재마루에서 집결할 무렵 총칼로 무장한 도리원 주재소순사들이 출동하였으나 이양준의사가 가슴을 풀어 헤치고 ‘쏠테면 쏴라, 찌를테면 찔러 봐라!’고 외치자 순사들은 군중의 수와 기세에 혼비백산 달아났다. 이렇게 만세군중들이 도리원시장으로 돌진하여 도리원 장꾼들과 합세하니 도리원 장터 독립만세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 러나 의성주재 일본순사와 군위에서 급파된 일본군 수비대와 대구 주둔 보병80연대 병력이 동원되어 무차별 총격을 가하니 정면충돌이 벌어져 군중들은 돌과 몽둥이로 구장터에 있는 주재소를 박살내었다. 선봉에 섰던 이양준 의사를 비롯 권해운 이용학 김인식 이호출 등 11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51명이 구속되었으며, 이양준 의사 등 10여명이 대구로 후송 중 권해운은 도중에 순국하고 나머지 의사 몇몇은 옥고를 치른 후 지병으로 젊은 청춘을 꽃피우지 못하고 20대에 요절하였다. 이양준 의사의 순국비문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액(書額)이 새겨져 있다. 피로 물든 도리원 장터 독립만세!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여 줄 사람은 지금은 거의 다 저 세상으로 떠났고 도리원 안평산천은 아무 말 않고 그저 묵묵하다. 그날의 함성은 우리들 가슴속에 쟁쟁히 들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민족통일을 주도해야하는 시점에서 그 3.1 정신을 우리생활에 적용하면서 그날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되새겨 본다.
♠♠ 4.19 와 봉양중학교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데모를 시작으로 3.15마산, 4.18고려대 학생데모, 4.19로 이어져 4.26 이대통령 하여, 4.28 이기붕일가 자살, 다음날인 4.29일에는 경북 산촌지역이었던 의성군 봉양면 봉양중학교 전교생 300여 명이 총궐기하여 시내를 행진할 때 도리원 장날임으로 많은 사람이 합세하여 도리원 장터를 꽉 메울 정도로 운집하여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정치를 규탄하는 선언문과 성명서를 학생대표가 낭독한 후 만세삼창으로 질서 정연하게 해산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1919년 3.19일 도리원 장터 독립만세 시위운동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우리 지역사람들의 불의의 항거정신일 것이다. 궐기대회 후 지역민들은 4.19로 희생되고 부상한 자의 위문을 돕기 위하여 주민들이 자진 모금한19,470환을 대구 매일신문사에 전달하였다. 학민사에서 발행한 ‘4월혁명 자료집’을 살펴보면, 봉양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 사대부고에 재학 중이던 최용호(현 경대교수)는 2월 28일의 정치적 이유로 일요등교를 명령한 자를 엄벌하라면서 학생데모를 주도하였고, 2월 15일 10시20분 민족의 유일한 평화적 정권 교체의 희망이던 유석 조병욱 박사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유행가였던 유정천리를 신유정천리라 하여 조가(弔歌)내용으로 노랫말을 바꾸어 한때 온나라에 유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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