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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전과 인물1
양승률(대전시향토사료관 학예연구사)
1. 머리말
대전지역은 조선후기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중심 지역이다. 대전지역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대전의 유교문화가 꽃핀 시기로 볼 수 있다.
대전지역에는 조선초부터 충절에 빛나는 박팽년의 자취가 있었고,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인 충암 김정을 비롯하여 정광필, 박순 등의 유적이 있어 유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사계 김장생을 사사한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어 호서사림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도 호서산림의 맥을 이은 연재 송병선ㆍ송병순 형제, 난곡 송병화 등이 자취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들 유학자를 이는 많은 유학자들의 유학연구가 있었고, 단재 신채호, 김태원 등의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있었다.
이중 주요한 몇 인물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대전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2. 조선시대 대전지방의 유학
대전지방의 유교문화와 관련해서는 세거성씨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가문별로는 조선 초의 회덕황씨․충주박씨․밀양손씨 등이 고려말이래 대전지방에 세거해 오다가 이들과 연혼관계를 맺은 회덕의 은진송씨, 신탄진의 진주강씨(晉州姜氏), 탄방동과 무수동의 안동권씨(安東權氏) 등이 조선시대 대전지방의 주요 성씨로서 자리잡게 된다.
조선중․후기에는 이들 성씨를 중심으로 대전지방의 학맥도 형성되었다. 대전지역에는 일찍부터 충절에 빛나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자취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충암 김정(沖庵 金淨)을 비롯하여 문익공 정광필(文翼公 鄭光弼), 사암 박순(思庵 朴純)․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형제, 추파 송기수(秋坡 宋麒壽)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박사진(朴士振), 병자호란에서 순절한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 야은 송시영(野隱 宋時榮) 등의 자취가 있었고 후진 양성에 힘쓴 봉소재 남분붕(鳳巢齋 南奮鵬) 등이 있어 일찍부터 유교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기호학파(畿湖學派)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학통을 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이 연산지방에 있게 됨에 따라 그를 사사한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있고, 잠야 박지계(潛冶 朴知誡)를 사사한 탄옹 권시(炭翁 權諰) 등을 비롯한 인물들이 이른바 호서사림(湖西士林)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호서사림의 당시 학문적 위상이나 정치적 영향력은 조선후기 사회를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들의 뒤를 이어 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배출되었는데,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늑천 송명흠(櫟泉 宋明欽)ㆍ한정당 송문흠(閒靜堂 宋文欽) 형제 등이 뒤를 잇게 된다. 이러한 사림학자들의 학문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서원(書院)도 건립되는데, 충암 김정․죽창 이시직․야은 송시영을 배향한 숭현서원(崇賢書院)을 비롯하여 도산서원(道山書院), 미호서원(渼湖書院), 집성사(集成祠), 용호사(龍湖祠), 돈파사(遯坡祠) 등이 있었다.
서원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관학(官學)인 성균관(成均館)과 서울에는 사학(四學),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었고, 사학(私學)인 서당(書堂), 서원(書院)이 있었다. 이들 교육기관의 주요한 기능은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와 교육이었다.
대전지역에도 관학인 회덕향교(懷德鄕校)와 진잠향교(鎭岑鄕校)가 있고, 사학으로는 서당의 성격을 갖고 있던 비래암(飛來庵)이나 옥류각(玉溜閣), 남간정사(南澗精舍) 등이 있었으며, 숭현서원, 도산서원 등이 있었다. 특히 숭현서원은 대전지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서원이고, 호서사림의 학문적 구심체 역할을 하던 서원이다.
이밖에도 유교 유적으로 많은 강학처와 누정(樓亭)이 남아 있고, 충효열(忠孝烈)에 빛나는 많은 정려(旌閭)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바 대전지방이 호서지역의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대전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경부선이 통과하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신가지가 형성됨으로써 구시가지의 문화적, 지역적, 경제적 토대를 무시하고 전통문화를 단절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만들어진 지도로 보아도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대전에는 아직도 유교문화가 건재하고 있었고 유림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한말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을 비롯하여 난곡 송병화(蘭谷 宋炳華) 등이 호서산림을 대표하면서 성리학의 맥을 잇고 있었고, 신응조(申應朝), 송근수(宋近洙), 송도순(宋道淳) 등은 한말 의병장이던 문석봉(文錫鳳)을 도와 유성에서 구한말 최초로 거의했던 것은 대전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또한 일제에 항거해 음독 순절한 송병선․송병순을 비롯하여 역사가이면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되었다. 난곡 문하의 고제(高弟)였던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은 구완동에 칩거하면서 제자들과 학문에 힘쓴 경우와 현산(玄山) 이현규(李玄圭)처럼 기성에서 후학을 양성한 경우도 있었다.
3. 조선시대 대전지방의 인물
1) 박팽년(朴彭年, 1417~1456)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38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대 그는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 등과 같이 집현전의 학자가 되었다. 박팽년은 이들 가운데 경술(經術)과 문장ㆍ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란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뒤에 이들과 체포되어 심한 국문을 받고 죽었다.
이같은 단종복위운동에서 생육신(生六臣)중의 한사람인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이 많은 화를 당한 인물중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등의 여섯 사람의 행적을 소개한 것이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인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노력해오다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791년(정조 15)에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박팽년은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필법에서는 남북조시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대전지역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 유허지(蓮亭 등)와 장절정(壯節亭),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유허비(遺墟碑:平陽朴先生遺墟碑), 그를 배향한 정절사(靖節祠), 증조인 박원상(朴元象)의 묘소와 비가 있다. 이밖에도 그는 송유(宋愉, 1389~1446)의 별업(別業)인 쌍청당(雙淸堂)의 기문(記文)을 지었다.
참고로 조선 초기의 정치상황은 세종대의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구현했으나 다음 왕인 문종(1450~1452)이 단명해 재위 3년만에 돌아가고, 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의 재위 시기(1452~1455)는 왕권이 약화되었던 시기였다. 권력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같은 대신의 손에 장악되면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니 세종의 유능한 왕자들은 조카 임금의 이같은 상황을 왕실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야심을 품게 된다. 이 때 문인(文人)의 지지를 받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무인(武人)을 많이 포섭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경쟁에서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가고 그가 세조(1455~1468)가 된다. 세조는 집권과정에서 태종과 비슷한 점은 있으나 합법적인 왕을 폐위ㆍ살해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받지 못했고, 도덕적 명분을 중요시하는 유신(儒臣)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자, 이들을 강압적으로 처단하였다. 그는 이미 계유정난(1453)으로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한 집현전 출신 학자들을 제거하면서 강력한 왕권의 구축을 시도했다. 조정의 권신과 지방 세력을 견제하여 중앙집권정책과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했다.
2) 김정(金淨, 1486~1520)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 고봉(孤峯)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에 이어 홍문관수찬ㆍ병조좌랑ㆍ홍문관부교리ㆍ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는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 주장하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는데 뒤에 다시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었다. 이후 좌승지ㆍ이조참판ㆍ도승지ㆍ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지고 사사되었다.
그는 관료생활 가운데에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그림에도 능하여 새ㆍ짐승 등을 잘 그렸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하고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다. 보은, 청주, 금산, 제주, 회덕 등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충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대전지역에 김정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소요처인 창구(滄邱:동구 내탑리), 묘소, 사당, 별묘, 신도비 등이 있고, 배향한 숭현서원(崇賢書院)이 있다.
3)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영천군수(永川郡守)이던 이창(爾昌)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길에 들어서서 후에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 진사(進士)가 된 뒤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ㆍ 내시교관(內侍敎官)ㆍ동몽교관(童蒙敎官)ㆍ시직(侍直)ㆍ대군사부(大君師傅)ㆍ예안현감(禮安縣監)ㆍ형조좌랑(刑曹佐郞)ㆍ지평(持平)ㆍ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愼獨齋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ㆍ진선(進善)ㆍ장령(掌令) 등의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정치적 혼란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가 효종(孝宗)대에 다시 대사헌(大司憲)ㆍ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거쳐 1659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ㆍ우참찬(右叅贊)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면서 효종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하였다.
그 후 효종이 죽고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난 후 여러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계속 사퇴하였다. 죽은 후 다시 정치적 혼란으로 한 때 관작을 삭탈되기도 하였으나 얼마안있어 다시 복구되었다.
그는 우리 고장이 낳은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한 분으로 회덕(懷德) 송촌(宋村: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세거하였다. 그는 율곡 이이(栗谷李珥)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의 종장(宗匠)이던 사계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학에 밝았고, 글씨에도 능하여 많은 비문(碑文)을 남겼다.
1681년 회덕(懷德)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1756년(英祖 32)에는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이밖에도 충현서원(忠賢書院)ㆍ봉암서원(鳳巖書院)ㆍ돈암서원(遯巖書院)ㆍ용강서원(龍岡書院)ㆍ창주서원(滄洲書院)ㆍ흥암서원(興巖書院)ㆍ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同春堂集』이 있으며, 글씨로는 우리 고장의 많은 비석과 부산의 충렬사비(忠烈祠碑), 남양의 윤계순절비(尹啓殉節碑) 등이 남아 전한다.
대전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동춘당과 고택, 비래암(飛來菴)과 옥류각(玉溜閣), 초연물외(超然物外), 법천석총(法泉石潨) 암각, 묘소 등이 있다.
4)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이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충북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주어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682년, 김석주(金錫
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 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子大全》과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제자로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다.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菴集》이라 하였고,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虁)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속습유 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그후 1907년 화양동에 있던 송자대전판목은 불에 타고 1926년 대전의 남간정사에서 다시 판각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하였고, 1981년부터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대전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남간정사(南澗精舍), 소제(蘇堤) 기국정(杞菊亭), 고택, 송자대전목판(宋子大全木板) 등이 있고, 숭현서원에 배향되었다.
5)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조선 말기의 문인·순국지사.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 회덕(懷德) 석남촌 출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달수가 죽은 뒤 가학(家學)이 기울어갈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여가에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송시열 등 거유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 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 近思續錄》이라 하였다.
1878년(고종 15)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그때에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으며, 이듬해 옥주(沃州)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陞品)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洪氏)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그해 음력 12월 30일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1914년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이는 1970년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불린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 武溪謾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전 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구거지(舊居址:동구 성남동), 정려(旌閭), 문충사(文忠祠) 등이 있다.
6)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한말·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출생하였고, 충북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하였고,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晚)·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무렵에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여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정간되자, 그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에 초빙, 그뒤 주필이 되어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대한협회월보 大韓協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 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 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이무렵 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그는 28세 무렵,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 논설을 통하여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 그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그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 大東共報》에도 관여한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그 이듬해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奉天城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晚)의 노선에 반대,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대립적인 《신대한 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뒤에도 신채호 등에 의하여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후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이 있다.
대전 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 생가지가 있고 복원되었다.
4. 맺음말
대전지지방은 조선 후기에 유교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로 볼 수 있다. 대전지역은 조선후기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중심 지역이었다. 대전지역에는 조선초부터 충절에 빛나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자취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충암 김정(沖庵 金淨)을 비롯하여 문익공 정광필(文翼公 鄭光弼), 사암 박순(思庵 朴純)․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형제, 추파 송기수(秋坡 宋麒壽)같은 인물들이 있어 일찍부터 유교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기호학파(畿湖學派)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학통을 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사사한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있고, 잠야 박지계(潛冶 朴知誡)를 사사한 탄옹 권시(炭翁 權諰) 등을 비롯한 인물들이 이른바 호서사림(湖西士林)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호서사림의 당시 학문적 위상이나 정치적 영향력은 조선후기 사회를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있어서도 대전지방에는 유림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한말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을 비롯하여 난곡 송병화(蘭谷 宋炳華) 등이 호서산림을 대표하면서 성리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또한 일제에 항거해 음독 순절한 송병선․송병순을 비롯하여 역사가이면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되었다.
이같은 인물들과 연계한 역사에 대한 탐색은 대전지방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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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첫 출발 해주신 김영환 선생님 역시.......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