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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31. 송년 예배. 필그림교회
해 아래 새 것
[본문] 전도서 1:1-11
오늘로써 2010년 금년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금년 한 해를 돌아보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나라 전체를 보면 지난 3월에 천안함 폭침 사건이 있었습니다. 장병 46명이 전사했습니다. 지난 11월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어서 군인 두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두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전체에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한 해였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G20 정상회의 개최는 일반 국민에게는 별 관계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적으로 보면 지난 여름에 중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최저 경비로 외국 경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전부가 아니다, 한국어가 전부가 아니다”는 것을 체험한 기회였습니다.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직접 느껴보았습니다. 어쨌든 이럭저럭 한 해가 지나갑니다. 한 해를 보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별 게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렇게 해서 또 한 해가 넘어갑니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확실한 변화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말합니다. 땅은 영원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땅도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땅도 불에 타고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땅은 영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다음 세대가 이어서 살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죽고 나면 또 그 다음 세대가 이어서 살 것입니다. 마치 이어달리기 경주처럼 계속 이어 살 것입니다. 그러나 땅은 그대로 있습니다. 계속해서 해는 떴다가 지고 떴다가 집니다.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수억 년,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람은 이리 불었다 저리 불었다 계속합니다. 또 강물은 흐르고 흘러서 결국 바다로 들어갑니다. 태평양, 대서양, 지중해 등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변치 않는 사실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중력에 의해 중력이 낮은 곳에서 중력이 높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 원칙은 변함없습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변함없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종말이 오면 그 때는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9절에 보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새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전에도 있었고 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말합니다(10절). 오래 전 세대에 이미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뒷간을 사용했습니다. 마당을 지나 외진 곳에 뒷간이 있었습니다. 차면 퍼서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원 재활용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맨땅에다 볼일을 봅니다. 그리고는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저절로 썩어서 부패됩니다. 자연발효식 화장실이라 할 수 있지요. 오늘날에는 집 안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옛날에 로마 시대에 이미 있었습니다. 2천 년도 더 되는 오래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집 안에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집 안에도 물이 흐르게 해서 씻어가도록 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이미 2천여 년 전에 있었다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옛날 중동에서는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제일 문제 되는 것이 물입니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고, 물이 있는 만큼 살 수 있습니다. 산 위에 도시를 지으면 물을 어떻게 구했을까요?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빗물을 받아 저장했습니다. 그러니 대개 도시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상수도 시설을 했습니다. 저 멀리 높은 산중턱에서 수원지를 발견한 다음, 거기서부터 언덕 위의 도시까지 수로를 건설했습니다. 돌로 높은 교각(다리 기둥)을 세우고 수로를 만듭니다. 수 km, 심지어 수십 km 밖에서 물을 끌어옵니다. 그러면 도시의 높은 곳에 물 저장소를 만들고, 그 다음엔 도시 곳곳으로 수도관으로 물을 공급합니다. 낙차를 이용해서 가정마다 물이 공급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에서 물을 받아서 먹고 씻고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오늘날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미 2천 년 전에 있었다니 대단합니다. 그것도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었습니다.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의 서쪽 해안 지역은 에게해 해안입니다. 옛날에 이곳에 헬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후에는 로마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헬라-로마 문명 유적이 무수히 많습니다. 땅만 파면 고대 도시 유적들이 나옵니다. 아직 발굴 안 되고 있는 것들도 많고 지금 발굴하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헬라 문명은 에게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다 있었습니다. 건축술은 오히려 옛날이 더 뛰어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것, 영원한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죽고 폐허만 남습니다. 남는 것은 옛터와 돌들과 건축물들뿐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해 아래 인생이 수고해서 결국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수고가 결국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헛될까요? 그것은 죽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들도 죽고 안 유명했던 사람들도 죽고, 예뻤던 사람들도 죽고 안 예뻤던 사람들도 죽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죽고 미워했던 사람들도 죽고 다 죽었습니다.
사데(Sardis)에 가면 옛날 부유했던 리디아(Lydia) 왕국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리디아 왕국 이전에 주전 8세기에 미다스(Midas)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금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길러 주었던 실레노스가 길을 잃자 잘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소원을 말하라. 한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 그러자 미다스는 “만지는 것마다 다 금이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나중에 후회할 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미다스는 “그래도 좋으니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게 해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그럼 좋다”면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미다스 왕이 만지는 것마다 다 금이 되었습니다. 의자를 만지니 금이 되고, 책상을 만지니 금이 되고 온통 누런 금으로 변하였습니다. 미다스 왕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고 빵을 만지는 순간, 빵이 금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과도 금으로 변하고, 귤도 금으로 변하고,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자기 딸이 들어오자 반갑게 딸을 안으니 딸이 금으로 변했습니다.
왕은 너무 슬퍼서 후회하고 디오니소스에게 가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디오니소스는 “파크톨로스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했더니 모든 것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미다스가 몸을 씻었다고 하는 파크톨로스 강은 사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 강은 사금이 흘러서 누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왕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무덤에는 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으로 된 장신구가 전혀 발견되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금에 데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때 부유했던 왕들, 금을 좋아했던 사람들도 다 죽고 지금은 유적지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새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해 아래 살아가는 인생에게 새 것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 있습니다. 성경에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으니 이 말을 잘 생각해 보면, 해 위에는 새 것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해 위는 곧 하늘입니다. 천국입니다. 이 땅에는 새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지만, 해 위 곧 천국에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 진짜 새 것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나라에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곧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 영원한 것, 진짜 새 것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사야 65:17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될 새 세상을 의미합니다. 18절에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고 합니다. 진짜 새 것이 왔기 때문에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새 것이 없는 이 세상에 해 위에서 진짜 새 것이 왔는데 이것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고,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하고 목회했던 에베소는 옛날에 인구 25만 명이 살았던 대도시입니다. 그런데 현재 셀축 근처 언덕에서 에베소 옛 도시가 발굴되었습니다. 대리석으로 화려한 집들과 가게들을 지었으며 또 대리석을 깐 곧은길이 있습니다. 장서 5만권의 도서관(켈수스 도서관)이 있고,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공중목욕탕이 있으며, 3만 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둥 하나만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고 발전된 도시인 에베소, 헬라-로마 신화에 젖어 있고 온갖 우상들을 섬기는 에베소에 바울이 와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전파했습니다. 손으로 지은 것은 참 신이 아니고 우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고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조그만 바울이 와서 그 거대한 로마 문명을 향하여 “우상을 버리고 저 유대의 예수를 믿으라!”고 전파한 것은 엄청난 도전이요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저 유대인이 무슨 말을 하는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온 도시를 다니며 손으로 지은 것은 우상이라고 전파하니, 아데미 여신의 우상모형(은감실)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매출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 되니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온 에베소 사람들이 원형극장으로 달려들어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했다고 합니다.
저 조그만 나라 유대 땅, 문화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유대 나라에서 시작된 예수의 복음이 화려한 헬라-로마 문명과 헬라-로마 신화에 푹 빠진 거대한 로마 제국을 향하여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을 통해 아나톨리아(현재 터키)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나중엔 에게해를 건너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조그만 복음의 불길이 로마 제국 전역에 번졌습니다. 핍박하면 핍박할수록 더욱 불길이 번져서 마침내 주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함으로 핍박이 중단되고 빼앗은 재산을 다 돌려주었습니다. 복음 전파의 자유를 주고 오히려 장려하였습니다. 마침내 78년 후인 주후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상 신에게 제물 바치는 행위 금지하였습니다. 이제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으면 불법이 되었습니다. 결국 복음이 로마 제국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유럽으로 복음이 퍼지고, 북미와 아시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온 세게에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사도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화려한 대리석 집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부유하게 살던 에베소 사람들이 볼 때는 얼마나 촌스럽고 이상하고, 심하게 말하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로마 제국 곳곳 주요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로나 경제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몇 십 명만 모이면 회당을 짓고 안식일마다 모여서 율법을 읽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친구를 따라 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헬라 로마 신화, 우상들에 싫증 난 사람들입니다. “신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 신들이 뭐 이래? 우리하고 똑같잖아? 이에 반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거룩한 분이시다는 유대인들의 말이 맞아. 모세가 기록했다는 율법의 가르침이 참으로 고상하고 옳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안식일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 나와서 꼽사리 끼어서 예배드리던 이방인들,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대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는다는 설교를 듣고는 기뻐서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중심으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새 것이 없는 이 세상에 진정으로 새 것, 영원한 것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새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새 것, 진짜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새 것, 진짜 새 것 곧 영원한 것, 의미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해 위에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헛된 세상에서 더 이상 헛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와도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6:22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와도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 걸고 로마 제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0년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새 것은 바로 해 위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동방에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에게도 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헛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참된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다가오는 새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힘차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지만 오직 해 위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 것이 있음을 생각하며, 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예수님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0년 12월 31일 필그림교회 송년 예배 설교. 변종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