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불꽃은 사그러 들었지만 대신에 그을은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한 번 쪼개져서 다시 붙은 비자나무가 흠 하나만을 남긴 채 절대로 쪼개지지 않듯이 더하지
도 강하지도 못할 흔적. H의 모습이었다. 네가 얼마나 사무치게 사랑했었던가, 그래서 얼마
나 증오하는가를 어렴풋 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흘린 눈물은 무를 향한 내디
딤같아 보였다.
이제 우리는 좀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 져야겠다.
그리고 또한 자신을 사랑해야겠다.
진정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찾을 때까지 내면의 방황과 고통을 감수하여야만 한다. 자아
를 만날 때까지, 아니 설령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바다가 안개 속에 침몰 당한 날
우리의 만남은 다만 느낌이었다.
하루만의 위안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절대성을 강요하지도
영원을 요구하지도 않는 것
친구!
네가 불러 준 새 이름이 정겹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되뇌이며 이만 안녕.
1988.9.20. 벗으로 부터
< 자정 >
- 10기 배종근
1989년 1월 3일 밤 11시 57분
책상 머리에 앉아 얼핏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맥빠진 아나운서의 기계적인 목소리만 새어 나오고 창밖엔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두움은 모든 것을 포용한 채 조용히 호흡하고 있다.
"정확한 오리엔트 시계가 곧 자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뚜---."
순간, 1989년 1월 4일의 새벽이 시작되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불과 1초의 차이. 그 차이가 하루의 시간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자정!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자정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어제이지 못한 시간과 오늘이지 못한 공간>
이 묘한 흐름속에 난 어디에 속하며 어디에 존재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분명 시간상으로는 3일이 지나갔고 4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내가 3일에의 있었던 일을 표현할 때는 <오늘>이라
고 한다. 나의 의식은 아직도 3일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식과 육체의 분리 상황. -지금 난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차원과 차원 사이를 넘나 드
는 듯한 기분이다.
의식은 분명 3일의 시간속에 달리고 있는데 육체는 지금 4일의 시간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
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 내 의식의 불안정, 불완전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불신감.
생각해 보면 나의 생활도 이 자정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의식의 분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텅한 생활.
의식과 육체가 함께 하지 못하고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제각기 움직이는 생활.
특히 의식의 영역에 있어서의 불완전한 나의 사고란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다.
나의 의식 세계의 거부감을 피할 수가 없다.
이 불안전한 두 개의 세계에서 대립되는 갈등에 나의 존재는 어디서 파악 될 것인가?
아! 난 그만 지쳐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의 사고는 나를 더욱 혼란케 시킬 뿐이다.
자정과 시간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연구와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기 위한 힘겨운 작업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 같다.
새벽 2시 30분.
사방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다.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것은---
그것은 피안의 골짜기로 향하는 자정의 새의 어렴풋한 날개 짓 소리이다.
반쪽의 힘겨운 퍼덕임이 시작된 것이다.
< 구슬 >
- 10기 김현석
오늘의 가장 큰 사건은 '구슬'이를 만났다는 것이다. 횟수로 따져 3살이 제대로 따지면 1년
이 조금 넘은 아이 밖에 되지 않는다.
'구슬'은 눈이 참 예쁘다. 눈이 클뿐더러 까만 눈동자가 거의 모든 눈 부위를 차지하고 있어
그야말로 예쁜 구슬 같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현관에 아이 신발이 하나 놓여 있다.
왠일일까 하고 들어가 보니 엄마가 아기를 업고 있고 또 한 아이가 새끼 소파에 않아 있다.
걔가 바로 구슬이다. 누구냐고 물어 보니 앞집에 있는 아이들인데 잠시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번 구슬이를 윽박지르니 더 이상 말을 않는다며 누나가 내게 짜증을 낸다.
"아니, 이 녀석 원래 '어버'아냐? 이 자식아 말을 해 봐."
조르고, 겁주고, 얼러도 구슬이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난 그만 지쳐 밥이나 먹으려 주방으로
가는데 무어라 예기하는 아기 목소리가 들렸다. 난 얼른 달려가 나도 말을 걸어 보았다.
"이름이 뭐니?"
"김 구슬"
그것이 그녀의 첫말 -내가 들은-이었다. '어쩜 그렇게 예쁘니!" 사람들이 다들 아이들이 좋
다며 안아 줄 때는 잘 모르겠더니만 요즘 와서 나도 정말 아이들이 귀엽다. 아이들을 좋아
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들은 너무 제멋대로 이기 때문이다. 버릇없고 이기적이고... 그래서 난
여태껏 그렇지 않은 두 명의 꼬마(승필이와 승주)와 친했을 뿐 여느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
았다. 아이들이 좋아하게 되니 그런 점도 다른 관점에서 보아진다.
우리들이 철들자 배우는 첫 번째 것은 높임말이다. 그것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셈치자는 것
이다. 어떤 어른이 다른 초면의 비슷한 어른에게 "야! 반가와." 하고 얘기 한다면 그것은 결
례이며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두 명이 다시 안만나거나 사이가
곧 멀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이 친하게 지내는 경우 결국 말을 터게 될 것이다. 다시
그 어른이 다른 어른에게 "야! 반가와."하고 얘기하면 그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할 것이
다.
높임말은 첫째 평어보다 길다. 둘째로 뻔지르르하다. 셋째 어렵다. 비싼 양복을 입고서 어른
들은 높임말로써 그들의 마음, 인격의 옷도 상하지 않게 하려 한다. 아이들은 좋은 소매를
걸친 손이나 코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일론 소매를 입은 손이나 서로 맞잡고 "야! 반가와."하
는 것이다. 혹 토라지거나 헤어지더라도 말을(마음을) 텃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아이들
은 키가 반만해서 반말이 통용되는가 보다.
"다음에 또 놀러 올께." 하며 구슬이는 엄마를 따라 졸졸 가 버렸다. 건너편에서 나를 보며
'오빠, 오빠!'부르던 목소리가 떠 오른다. (승필이, 승주는 항상'친구'라며 불렀다.)
얼른 친해졌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