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카르타고인들의 주력은 역시, 용병입니다. 재력이 항상 풍부한 나라였던 것 만큼, 용병을 사용하는 것도 사실 나쁜 선택은 아니죠. 정규 징집병이나 시민병을 쓰는 것도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용병도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무역을 위주로 살아가며 이해에 밝은 족속들인 만큼 카르타고인들이 벌이는 전쟁은 전통적으로 오래 끄는 법이 없었습니다. 소소한 규모의 무역분쟁 정도를 해결하기 위한 전투가 고작이었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제외하고는 지중해의 지축을 흔드는 국가들간의 대충돌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대규모의 시민군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카르타고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징집병이나 정규병들도 존재했습니다.
리비아는 전통적으로 북아프리카 중부를 부르던 이름 중 하나입니다. "리비아 창병대"라고 하면 왠지 뭔가 대단히 고유한 병과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냥 "북아프리카 보병들"과 똑같은 명칭입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병사들이라면 "리비아 보병"이라고 부르든, "아프리카 보병"이라고 하든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들이 "팔랑크스를 썼느냐?"라는 점이 궁금하시다면, 결론적으로는 "모르겄다 -_-;"가 답입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기록이 대단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봤을 때 당시 지중해 세계 군대의 가장 흔한 기본진형이 예외없이 팔랑크스인 이상, 리비아의 창병들도 물론, 그런 훈련을 받았을 겁니다. 다만, 병력의 질에 있어서 고급의 보병들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졌겠죠. 아마, 그런 차이를 묘사하고자 게임에서는 일부에는 팔랑크스 진형을 주는 반면, 리비아 창병에게서는 그냥 쑤욱 ~ 빼두었을겁니다. 이들은 당시 지중해 세계의 공통복장인 튜닉 위에 비교적 가볍게 엮인 사슬갑옷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둥글고 커다란 그리스식 "호플론"을 방어구로 사용했고, 표준적인 창을 사용하고 있었고요.
"페니키아 보병"들도 사실,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냥 간단히, "리비아 보병" 혹은 "아프리카 보병"이라고 불렀을겁니다. 그들에게는 병과 이름을 귀찮게 규정짓는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같은 "리비아 보병" 혹은 "아프리카 보병"들 이라고는 해도, 우리가 게임 상에서 "페니키아 보병(포에니 보병)"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카르타고 지배 아래의 지방에서 징집하거나 성급하게 모병하기 보다는, 제국의 수도지역인 카르타고, 우티카, 탑수스 등의 대도시에서 훈련한 정규시민병이었습니다. 이들은 중류, 혹은 중상류층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주로 본토수비에 동원된 인력입니다. 이들의 군장형태 또한 대부분 그리스인들과 비슷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리스의 군장은 오늘날 미군복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나라들이 모방할만한 그런 표준이라고 할 수 있죠). 당연히, 사용하는 전술도 그리스인들과 동일했겠죠.
그러나, 카르타고의 진정한 주력들은 역시 "성전사대(세이크리드 밴드)" 입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기록들은 주로, 그들의 적들이 남긴 것들이죠. 대략, 1개 부대가 2500명 정도의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카르타고의 시민들입니다. 성전사대가 되기 위한 자격은 시민권, 용맹함, 명성, 그리고 상당한 재산규모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군장 중에서도 상당히 비싼 흉갑과 그리스식 투구, 대형 방패 등을 장비해야 했던 만큼 재산은 필수적인 조건이었겠죠. 이들이야말로 카르타고의 상류 시민들로 구성된 정예들이고, 카르타고 본국 외부에서 군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로마인 이야기> 등에서 언급된 "한니발의 정예"들 중, 용병이 아닌 병사들은 바로 이들 성전사대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기원전 310년을 고비로 크게 줄어든다고 하니, 이로 인해 카르타고의 군제에 대한 몇가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카르타고가 제압한 지방은 북아프리카 일단과 시칠리아 서부, 전략적 가치를 지닌 섬들, 그리고 에스파냐 남부입니다. 정규병력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소한 식민지에서는 통치를 맡은 총독들이 소규모의 "리비아 창병대"(즉, 북아프리카 지방의 하급 정규병들) 외에 현지 용병들을 고용한 병력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 본국은 대도시의 시민병인 페니키아 보병들이 수비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와 에스파냐 처럼 무지하게 중요한 1급 식민지들에는 본토에서 편성한 정예 성전사대가 파병된 것입니다. 왠만한 소규모 분쟁이라면 보통의 보병들과 용병들로 때우지만, 타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거나 식민지를 확장하는 대규모 원정등이 일어난다면, 그렇게 중요한 전쟁터에는 반드시 성전사대가 파견됩니다. 즉, "리비아 창병"들은 말하자면 예비군 적인 성격이고, "페니키아 보병"들이 수도방위군 정도가 되겠고, "성전사대"는 가장 공격적 임무를 담당하는 해병대 정도가 되는 것이죠. 그 외에 나머지 일반 병사들은 모조리 용병들입니다.
기원전 4세기를 고비로 카르타고의 영토확장이 정체되면서, 아마 성전사대가 해외로 파병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겠죠.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의 주요 도시를 수비하는 소규모 성전사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로 편성된 적이 없었을 겁니다. 기원전 3세기에 들어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성전사대가 대규모로 편성되기 시작했고(대규모라고는 해도 수만명 단위는 아니었겠지만..), 한니발의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부터는 이들이 다시 중요한 전력으로 부상했던 것입니다.
한니발이 원정에 참가시킨 성전사들은, 하밀카르를 따라 에스파냐로 옮겨간 부유한 카르타고인들, 혹은, 그 훨씬 전부터 에스파냐로 거점을 옮긴 진취적인 카르타고 상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시민병입니다. 아마 그들 중 대부분은 본국에는 가본적도 없었을겁니다. 그들은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시민으로 태어나, 그 땅을 다스리는 하밀카르, 하스드루발, 한니발의 통치를 받으며 자랐으니, 당연히 그들의 충성심은 바르카스 가문을 향한 것이지 카르타고 본국과는 별 상관이 없었겠죠. 아마 훈련과정 부터도 카르타고 본토의 성전사들 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실전적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끝까지 한니발을 따라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또, 바르카스 가문의 장군들의 진정한 거점이었던 에스파냐가 그토록 쉽게 함락된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니발의 핵심적인 병력은 광활한 북아프리카가 아니라 에스파냐에서 나왔습니다. 한니발은 처음부터 사생결단의 자세로 에스파냐에서 전력의 핵심을 이룰만한 성전사대와 시민병을 모조리 차출하여 데리고 갔을겁니다. 뒤에 남겨진 자들은 당연히 자식들을 전장으로 내보낸 부모들이었겠죠. 즉, 군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나이의 카르타고 시민들만 뒤에 남았던 것입니다. 또, 그 지방에서 쓸만한 용병들 또한 한니발이 모조리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군사적으로는 큰 가치가 없는 시민들만 남아있던 것입니다. 한니발은 그야말로 "너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내가 멸망할 것이다"라는 엄청난 도박을 한 셈이죠. 아마, 이탈리아 본토에서의 성과를 본국이 알게된다면, 시칠리아에서부터 그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해역까지는 카르타고가 제해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믿었을겁니다. 로마군이 에스파냐 공략을 하기 전에, 이탈리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적어도 5~6년 안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일군의 용병들과 믿음직스럽지 못한 카르타고 본국 출신의 병사들만이 지키고 있는 곳에 스키피오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당연히 한방에 박살날 수 밖에요..)
첫댓글먼저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본문에서도 세 병과에 관한 구체적인 무기 정보가 없는데. 그렇다면 북아프리카(리비아, 페니키아) 중보병들이 6m 짜리 사리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는건가요? 칸네이 회전에서 로마군을 포위했던 아프리카 중보병들이 팔랑크스를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한데. 로마측 자료에서도 이들이
사리사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리사 자체가 마케도니아의 신무기였으니까요. 마케도니아군은, 말하자면, 마치 중세말에 들어 보병들이 기병들을 상대로 과감히 갑옷을 벗어던지고 보다 긴 창과 폴암으로 무장하여 더 꽉찬 밀집대열을 형성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혁신을 한거죠.
무거운 대형방패를 버리고, 그 대신 적이 아예 근접조차 하지 못하도록 엄청 긴 창을 구비한 것이고, 원거리 사격에 의한 취약점은 아군 기병들의 대응으로 상쇄하는 기민한 전법이었던 셈이죠. 카르타고는, 어디까지나 그리스식 전술을 답습한 만큼, 딱히 사리사로 무장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왕망님. "소설이나 다름없는 글"이라니요. 너무 무례하시군요. 자신이 아는 상식과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런 식의 말을 하시면 안되죠. 서로 얼굴을 모른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는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시네요"이렇게 말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시면 안되죠
첫댓글 먼저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본문에서도 세 병과에 관한 구체적인 무기 정보가 없는데. 그렇다면 북아프리카(리비아, 페니키아) 중보병들이 6m 짜리 사리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는건가요? 칸네이 회전에서 로마군을 포위했던 아프리카 중보병들이 팔랑크스를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한데. 로마측 자료에서도 이들이
사리사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은건지 궁금합니다.
사리사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리사 자체가 마케도니아의 신무기였으니까요. 마케도니아군은, 말하자면, 마치 중세말에 들어 보병들이 기병들을 상대로 과감히 갑옷을 벗어던지고 보다 긴 창과 폴암으로 무장하여 더 꽉찬 밀집대열을 형성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혁신을 한거죠.
무거운 대형방패를 버리고, 그 대신 적이 아예 근접조차 하지 못하도록 엄청 긴 창을 구비한 것이고, 원거리 사격에 의한 취약점은 아군 기병들의 대응으로 상쇄하는 기민한 전법이었던 셈이죠. 카르타고는, 어디까지나 그리스식 전술을 답습한 만큼, 딱히 사리사로 무장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역시 가이사님은 대단하십니다.^^ (가이사 라고 발음하는 거 맞죠?) 에스파니아가 스키피오에게 간단히 박살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시오노 나나미 아줌마는 카르타고는 오로지 용병에만 의지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실은 카르타고군 역시 주력은 시민군이었군요.
으윽.. 어떤 의미에서는 용병이 주력인 것은 사실이죠.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병들이 필요한 몸빵을 하고,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정규병이 사용되니까요. 즉, 전투 내에서 정규병과 용병의 역할의 중요성은 50:50 정도였을겁니다.
이거완전 kwessa 님께서 쓰신 소설이나 다름없는 글이네요 대충 글은 균형있게 쓰셧지만 그 내용상 신빙성이있는지 의문이갑니다만.
아일단 소설이란 단어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요 신빙성에 관해서 생각해본겁니다 과연 저 분이쓰신글이 신빙성이있느냐 없느냐에 관해서
왕망님. "소설이나 다름없는 글"이라니요. 너무 무례하시군요. 자신이 아는 상식과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런 식의 말을 하시면 안되죠. 서로 얼굴을 모른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는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시네요"이렇게 말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시면 안되죠
뭐, 소설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대안이나 더 합당한 다른 가설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면 내세우시지 않는 한 납득하기는 힘들군요